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헌덕왕 두문자 : 헌 헌 문 도

by noksan2023 2023. 8. 12.
반응형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난

 

헌덕왕 : 헌 헌 문 도

 

헌 : 덕왕

헌 : 김창의 난(822 공주 장안 경운)

문 : 김범의 난(825)

도 : 의(가지산파) 입국

 

 

신라의 세조 : 헌덕왕릉
신라의 세조 : 헌덕왕릉

 

1. 덕왕

헌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09~826년이다. 할아버지인 원성왕 대부터 주요 관직을 거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형인 소성왕이 즉위 2년 만에 죽고 어린 조카 애장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하다가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했고, 불사를 금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했으며, 일가가 정치권력을 독점하자 반발한 구귀족들이 김헌창의 난을 일으켰다. 819년에 당의 요청으로 군사 3만을 보내 절도사의 반란진압을 도왔고, 826년에는 패강에 300리 장성을 쌓았다.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난

 

2. 김창의 난(822 공주 장안 경운)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으로 갑병(甲兵) 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도왔다. 이러한 국내외의 모순이 누적되는 가운데 822년에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녹진의 인사원칙에 대한 제언이고, 또 하나는 김헌창의 난의 발발이다. 당시 충공(忠恭)이 상대등이 되어 인사를 처리하는 데 갑자기 병이 들었다. 그러자 집사시랑(執事侍郎)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에 비유해 인사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충공은 물론 부군(副君)인 수종과 헌덕왕이 모두 기뻐하였다.

 

헌덕왕 14년(822년)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 · 김수종 · 김충공을 따르는 귀족들과 이에 반대하는 정치에서 소외된 귀족들 간의 대립에서 빚어진 갈등의 소산이다. 애장왕대부터 헌덕왕의 치세기간을 통하여 추진된 일련의 개혁은 국왕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한 의도에서 추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헌덕왕의 형제들이 육두품의 협력을 받아 전담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른 많은 귀족들은 견제되고, 소외되었다. 김헌창의 난은 이러한 갈등의 한 소산이었다. 이러한 김헌창의 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독립된 가계의 귀족들이 사병(私兵) 세력을 바탕으로 상호 연합해서 항쟁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연합의 범위가 중앙을 넘어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된다.

 

김헌창의 난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공주)의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다. 김헌창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했다.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에게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됐다. 배경에는 아버지 김주원이 무열왕계의 가장 유력한 왕족으로 선덕왕 사후 왕위에 추대되었지만 원성왕계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이후 무열계 귀족들은 왕위계승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김범문의 난
김범문의 난

 

3.  김범의 난(825)

김범문의 본관은 강릉(江陵).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원(周元), 아버지는 헌창(憲昌)이다. 김주원은 김경신(金敬信 : 원성왕)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밀려나 강릉으로 축출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김헌창은 자기가 도독(都督)으로 있던 웅천주(熊川州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에서 822년(헌덕왕 14) 마침 초적(草賊)이 봉기하는 사회적 혼란을 틈타 대규모의 조직적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자살하였다.

 

한편, 김범문은 825년 고달산(高達山 : 지금의 경기도 驪州)에서 초적의 괴수 수신(壽神) 등 100여인과 더불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평양(平壤 : 현재 서울 부근)에 정하려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였으나, 북한산주도독 총명(聰明)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고 그도 잡혀 죽었다.

 

 

가지산파 도의
가지산파 도의

 

4.  의(가지산파) 입국

도의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을 전하였다. 성은 왕씨(王氏).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이며 도의는 법명이다. 북한군(北漢郡) 출생. 어머니가 임신한 지 39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784년(선덕왕 5) 바다를 건너 당나라 오대산으로 가서 공중으로부터 종소리를 듣는 등 문수보살의 감응을 얻었다. 광부(廣府)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조계(曹溪)로 가서 혜능(慧能)을 모신 조사당(祖師堂)을 참배하였는데, 이 때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한다.

 

강서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지장(智藏)에게 법을 물어 의혹을 풀고 지장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백장산(百丈山)의 회해(懷海)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강의받았는데, 회해는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게 속하게 되었구나.” 하고 칭찬하였다.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무르다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선법(禪法)을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전승되는 구전에 따르면, 도의 자신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가 제자 염거에게 남종선을 전하는 등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죽었다. 염거의 제자 체징(體澄)은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세워 크게 선풍을 떨쳤다. 그런데 이 때 도의를 제1세, 염거를 제2세, 자신을 제3세라고 하여 도의를 가지산파의 개산조로 삼았다.

 

고려 말에 천책(天頙)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도의가 지원승통(智遠僧統)에게 한 법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법문에는 그가 법계설(法界說)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또한 심인법(心印法)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부도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억성사지(億聖寺址)에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