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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선덕왕 두문자 : 선 하 시 내

by noksan2023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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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시대구분
신라의 시대구분

 

선덕왕 : 선 하 시 내

 

선 : 덕왕

하 :

시 :

내 : 물계 진골 

 

 

선덕왕 김양상
선덕왕 김양상

 

1. 덕왕(780~785)

선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7대(재위: 780~785) 왕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집사부 시중과 상대등을 역임하고, 780년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 와중에 혜공왕이 시해되자, 김경신과 김주원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에 발해의 침략과 패강지역의 안전한 치안 유지를 위해 대곡군(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패강진을 설치하였다.

 

김양상은 764년(경덕왕 23) 정월에 집사부 시중에 임명되었다. 768년(혜공왕 4) 10월에 김은거가 시중에 임명되었는데, 이때까지 김양상이 시중직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성덕대왕신종명」에 의하면, 771년(혜공왕 7) 12월에 김양상이 상재상(上宰相)으로 병부령과 전중령(殿中令: 내성사신) 등을 겸임한 김옹과 함께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하는 최고 책임자, 즉 검교사(檢校使)였다. 이때 그가 각간으로서 감찰업무를 관장하는 숙정대(肅正臺: 사정부), 왕경 주위의 성곽 수리를 관장하는 수성부(修城府: 경성주작전), 감은사의 관리와 수리를 맡아보는 감은사성전(感恩寺成典)의 장관을 겸임하였다고 한다. 771년 무렵 상재상(上宰相) 김옹이 집정자(執政者)였고, 김양상은 김옹을 보좌하는 제2인자의 위치였다. 김양상은 774년(혜공왕 10) 9월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김옹이 사망하거나 실각하고, 김양상이 상대등이자 상재상으로서 집정(執政)한 것으로 짐작된다. 773년(혜공왕 13) 3월과 4월에 연이어 지진이 일어나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에게 글을 올려 시국(時局) 정치의 잘잘못에 대해 논하였다.

 

780년(혜공왕 16)에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였다. 김양상이 김경신(金敬信: 원성왕)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반란군이 혜공왕을 시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김양상이 시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혜공왕은 반란군에 의해 시해된 것으로 이해한다. 혜공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김양상이 김경신과 김주원(金周元) 등의 추대로 780년 4월에 왕위에 올랐다. 선덕왕의 업적으로 패강진 설치를 들 수 있다. 선덕왕은 781년(선덕왕 2) 7월에 사자를 파견하여 패강(浿江: 대동강) 남쪽의 주와 군을 위로하게 하였다. 그 다음해에 패강진을 대곡군(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설치하고, 선덕왕이 직접 한산주를 두루 살펴본 다음, 한산주의 백성들을 차출하여 패강진으로 옮겼다. 선덕왕은 초대 패강진두상(浿江鎭頭上)으로 아찬 김체신을 임명하였다. 패강진은 대곡진(大谷鎭)이라고 부르는데, 평산군은 개성에서 평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선덕왕은 발해의 잠재적인 침략에 대비하여 패강지역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고, 새로 개척한 패강지역의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패강진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킨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은 국왕의 행차 업무를 담당하는 어룡성(御龍省)의 봉어(奉御)를 경(卿)으로 고쳤다가 다시 감(監)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어룡성의 위상을 한 등급 격하한 것이다. 이외에 선덕왕은 왕경의 시림(始林) 벌판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선덕왕은 784년(선덕왕 5) 4월에 왕위를 양보하려다가 신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785년 정월에 선덕왕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동해에 유골을 뿌렸다.

 

2. 신라  

김지정의 난은 혜공왕 대 반란의 마지막 결정타로서, 혜공왕과 왕비의 살해로 귀결되었다. 이후 김지정의 난 진압을 주도하였던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시대 구분상 중대(中代)가 끝나고 하대(下代)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김지정의 가계(家系)나 구체적 인적 사항 및 반란 이외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三國史記≫의 찬자는 新羅本紀에 대한 기술을 끝맺으면서 신라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上·中·下의 3代로 시대구분했다는 설을 싣고 있다. 이에 의하면 천년왕국인 신라의 전 역사 가운데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최초 700여 년간이 상대에 속하며, 이에 후속하는 260여 년간의 통일기는 다시 중대와 하대로 나뉜다. 그런데 중대와 하대는 惠恭王 말년(780)의 정변을 경계로 하고 있다. 이 정변에 의해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후손인 혜공왕은 거듭되는 내란 끝에 마침내 피살되어 새로운 왕통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대와 하대의 구분은 단순히 왕통의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 국가의 運祚에 치명적인 낙인을 찍은 큰 사건이었다. 뒤에서 보게 되듯이 하대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여세를 몰아 정력적으로 이룩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정치·사회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하고 이에 수반하여 중대 문화의 황금시대가 이윽고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그 자체 거대한 변혁을 의미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중대 654년 金春秋가 眞德女王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개막되었다. 그가 즉위할 무렵 신라는 치열해진 삼국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겨운 국가보위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善德女王 11년(642) 백제와 고구려에 의한 대공세가 있은 뒤로부터 신라는 줄곧 군사적인 위기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동왕 16년 정월에는 上大等 毗曇에 의한 내란이 일어나 관군과 반란군이 도성 안에서 서로 격돌하기까지 했었다. 무열왕은 이 같은 국가적인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수세에서 일약 공세로 전환했다. 바야흐로 지금까지의 국가보위전쟁은 삼국통일전쟁으로 대전환을 맞게 되었다. 신라는 무열왕과 그 아들 文武王 양대에 걸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끝에 가서는 연합군으로 끌어들인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다. 이 때가 바로 문무왕 16년(676)이었다. 이제 진정 三韓은 一家가 되었으며, 太平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小康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신라는 이 때부터 혜공왕 16년(780)의 파국이 도래할 때까지 1백여 년간 국제평화와 안녕, 그리고 일찍이 누려보지 못한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중대의 정치적 안정을 확고하게 보장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왕권이었다. 사실 이 시기에 들어와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다. 상대등 비담을 대표자로 하여 일어난 眞骨귀족세력의 반란을 실질적으로 진압한 김춘추·金庾信 일파는 자신들이 옹립한 진덕여왕 때에 야심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이 바로 진덕여왕 5년(651)의 관제개혁이었다. 이 때 종래 왕실의 家臣的 성격이 농후했던 稟主를 執事部로 개편하여 王政의 기밀사무를 맡게 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그 장관인 中侍(景德王 때 侍中으로 개칭함)는 병렬적으로 할거하고 있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서인 여러 部·府를 유기적으로 통제하게 됨으로써 국가권력은 집사부를 통하여 국왕에 一元的으로 귀속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시에게는 행정상의 失策뿐 아니라 국토를 기습적으로 강타한 천재지변의 발생에 대해서까지도 왕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왕권의 안전판과도 같은 구실을 맡게 하였다.

 

3. 물계 진골

골품제 골제(骨制) 두품제(頭品制)로 짜여 져 있었는데, 골제에 편입된 신분은 사로국(斯盧國)의 왕족인 박씨·석씨·김씨이다. 그들은 신라가 왕족중심의 귀족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병합된 성읍국가(城邑國家) 혹은 연맹왕국(聯盟王國)의 지배자들 중 일부 유력한 사람들이었다. 김유신계(金庾信系)로 이어지는 금관가야(金官加耶)의 왕족 역시 진골로 편입되었다. 내항(來降)해온 국가의 지배자들이 진골로 편입되는 기준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적어도 귀족을 거느리는 큰 국가의 왕족이어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법흥왕(法興王, 514∼540)대에 율령이 반포되어 국가체제가 정비되었는데, 그것은 골품제의 성립과 상관관계에 있으므로 진골신분이 실재하던 시기도 법흥왕대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 진골신분의 왕이 등장하는 시기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 사회에서 성골과 진골신분의 구분은 애매하다. 신라 중고(中古)시대의 어느 시기에 진골신분이 성립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골품제가 갖추어지면서 왕족들은 진골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고시대 말에 왕족 내 혈연집단의 분지화(分枝化)가 일어나자, 진평왕(眞平王, 579∼632)계가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銅輪)을 직계로 내세우면서 진지왕(眞智王, 576∼579)계와 같은 다른 왕족과 구별하기 위해 성골관념을 표방했다는 설이 있다.

 

반면 진골은 성골과 대조되는 신분이기 때문에 성골이 갖추어지는 것과 동시에 진골관념이 형성되었으며, 그것은 진흥왕 장자인 동륜계가 존재하는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둘 중 어느 학설을 따르더라도 진골과 성골은 진평왕대 이후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대에는 모두 존재한 것이 된다. 성골신분이 강등되어 진골이 되었다면 원인이 있을 터인데, 이 점 역시 확실하지 않다. 혈족집단 내부의 분화과정을 가지고 설명하는 견해에 의하면, 직계 혈연집단에서 멀어져간 방계 혈연집단이 어느 시기에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 친족의 범위를 7세대까지 동일집단으로 파악해 8세대부터는 신분이 강등되며, 마침 김춘추(金春秋)가 방계로서 강등된 인물이라 한다. 그렇다면 김춘추는 8세대를 방계로 내려온 셈인데,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신라 중대에 왜 진골신분의 왕이 등장했는지는 중요하면서도 잘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실제 진골신분이 어떤 정치·사회적 위치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하다.그들은 골품제에 의거해 장관직·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食邑) 또는 녹읍(祿邑)을 받으며, 통일전쟁의 군공에 따라 막대한 보상과 전리품을 분배받았다. 신라통일기 진골귀족들은 거대한 재력을 지녀 사병을 양성하였다. 그들의 호사한 생활을 반영하는 상징적 존재가 금입택(金入宅: 통일신라시대 금을 입혀서 만든 귀족들의 저택)이다. 사원 역시 그들의 원당(願堂)으로 변하고 있었다. 진골귀족은 사원을 경영해 합리적으로 재산을 도피시키고 있었다.

진골신분은 제5관등 대아찬(大阿飡) 이상의 최고관등으로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에 비해 기물이나 복색에 대한 제한도 적은 편이었다. 이러한 진골귀족이 비대화되어짐에 따라 중대 전제왕권의 개혁조치는 실패로 기울고 있었고 한층 미약해진 왕권은 이들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가 유명무실해지자,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위계승을 위한 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라 하대(下代)는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신라 하대로 오면서 수적으로 증가일로에 있던 진골귀족은 일부가 6두품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범청(範淸)은 진골이었는데, 아들 낭혜(朗慧: 속명 無染)는 강등되어 6두품이 되었다. 낭혜가 왜 진골에서 6두품으로 떨어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아직 분명한 정설이 없는 편이다.

 

역시 7세대 동일집단의 규모로 보아, 태종무열왕의 8대손인 낭혜가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낭혜 역시 태종무열왕으로부터 8대 동안 방계로만 내려왔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범청이 김헌창(金憲昌)의 난에 가담했으므로, 난이 진압된 후 낭혜가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진골귀족 내부에서 왕위를 둘러싼 권력쟁탈전이 치열했는데, 여기서 패한 자는 중앙에 있지 못하고 지방의 연고지로 퇴거했으며, 이때 그들의 신분이 강등될 소지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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