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 : 덕 정 발 전 문 상 공
덕 : 성덕왕
정 : 정전지급(722)
발 : 발해와
전 : 전쟁
문 : 김대문(화랑세기 고승전 한산기 악본)
상 : 상원사 동종(최고)
공 : 공자화상 도입(국학에 안치)
1. 성덕왕(702~737)
성덕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702~737년이며,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형 효소왕이 후사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즉위 후 축성과 민생안정 사업에 주력했다. 잦은 수해와 전염병 만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정전제를 실시하여 민생 안정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꾀했다. 발해와 당의 대립을 기회로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패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유권도 인정받았다. 유교적 예제를 정비하고 국가불교도 고취하여 신라 천년의 역사 중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덕왕은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는 704년(성덕왕 3)에 승부령(乘府令)이던 소판(蘇判) 김원태의 딸 성정왕후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 김순원의 딸 소덕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2. 정전지급(722)
성덕왕이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국인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음을 감안하면, 그는 자신이 무열왕과 신문왕의 정통임을 인식시켜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고 다방면에서 노력하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였으며, 특히 정전(丁田)제를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온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최대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고 칭송받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3. 발해와 전쟁
대외관계에서 무엇보다 주력한 것은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왕은 재위 36년간 46회의 견당사(遣唐使)를 보냈으며 유학생도 보내어 국학에서 유학을 배우도록 조치하였다. 그런 가운데 732년 9월 발해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 등주를 공격하게 되자 당과 혈맹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과 같이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여 김유신의 손자로서 왕의 총신이었던 김윤중과 적잖은 병사를 파견하였다. 비록 큰 눈이 내려 길은 막히고 얼어 죽은 병사가 절반이나 되어 도중에서 회군하고 말았지만, 이에 당으로부터 735년 패강 이남의 지경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정식으로 승인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어감에 따라 성덕왕은 일본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당시 일본 조정은 동아시아 국제 환경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 채 독선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735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신라는 어제의 신라가 아니며 이름도 왕성국(王城國)으로 고쳤다고 자부했다. 이는 신라조정의 높아진 자존의식을 표현한 것인데, 일본이 이에 대하여 거부감을 드러냈고 결국 성덕왕이 죽을 때인 737년 2월 일본조정에서는 신라 침공의 논의가 나오기까지 했다.
4. 김대문
김대문은 신라의 진골 귀족 출신 관료이다. 성덕왕 때 한산주를 다스리는 도독으로 임명되어 파견되었으며,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樂夲)』, 『한산기(漢山記)』, 『계림잡전』 등을 지었다. 불교 및 신라의 전통문화에 관한 지식이 깊었다. 관리로서의 경력은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는 사실만 전하는데, 이것을 김대문의 최후이자 최고 관직으로 본다면, 그는 문무왕대에 출생하여 신문왕대부터 관료가 되었고 성덕왕대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문은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계림잡전』 등을 지었다. 이 책들은 모두 인멸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일부 내용이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있다. 예를 들어, 김흠운(金歆運) 열전에 『화랑세기』를 인용하여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들이 화랑도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스런 병졸들이 이로 인하여 생겼다.”라고 하였다. 김대문은 화랑도의 역사와 화랑, 낭도의 활약상에 관한 자료를 모아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이러한 『계림잡전』은 신라의 전통적인 제도와 문화에 관한 책으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 설화가 이로부터 인용되어 있다. 나머지 책들은 인용된 부분조차 명기되어 있지 않아서 그 내용과 성격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름을 통해서 『고승전』은 불교 승려의 전기, 『악본』은 신라의 전통음악에 관한 서술, 『한산기』는 한산주 도독으로 재임할 시기에 수집한 한산주의 역사, 지리, 문화 등에 관한 사항을 중심으로 정리한 책이라고 짐작된다.
김대문의 유학자로서의 성격에 관해서도 논란이 있으나, 그의 저술을 놓고 보았을 때 불교 및 신라의 전통문화에 관한 지식이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승의 전기는 물론이고 화랑도 역시 미륵 사상과 같은 불교 이념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는 중고기 이래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이뤄지고 있었고, 중대에 들어서 강수, 설총 등이 활약하여 유교가 확산하고 있었으므로, 김대문 역시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를 중시할 정도로 유교 사상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5. 상원사 동종
상원사 동종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167㎝, 입지름 91㎝. 용뉴 좌우에 오목새김된 명문에 의해 이 종이 725년(성덕왕 24)에 주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어떠한 목적으로 주성되어 어느 절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루문(安東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 국명(國命)에 의하여 현 위치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종구(鐘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수리를 거친 뒤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사용하고, 이 종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종의 정상에는 용뉴(龍鈕)와 용통(甬筒)이 있다. 용은 머리 부분이 크고 몸체가 용통에 붙어 있으며 발은 정상에 버티고 있다. 용통의 표면은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는 연화문과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모두 아래위로 연주문대(連珠文帶)를 돌리고 유려한 당초문으로 장식되었으며, 드문드문 한 사람 내지 네 사람의 주악상(奏樂像)이 돋을새김된 반원권(半圓圈)을 돌렸다. 네 곳에 배치된 유곽(乳廓)은 당초문으로 장식되었고, 그 안에 연화로 돋을새김된 9개의 유두(乳頭)가 배치되어 있다. 종신에는 서로 마주보는 두 곳에 구름 위에 서서 무릎을 세우고 하늘을 날며, 공후(箜篌)와 생(笙)을 주악하는 비천상(飛天像)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또 그 사이의 서로 마주보는 두 곳에 자방(子房)을 중심으로 8판연화(八瓣蓮華)를 돌리고 바깥 원의 안팎에 연주문을 돌렸으며 그 안에 당초문을 새긴 당좌가 있다. 종신은 상·하단이 모두 배가 부르고 종의 표면에 많은 공간이 있어 상하의 당초문대와도 조화를 이루며, 용통이나 유곽 등은 한국 종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종이다.
6. 공자화상 도입(국학에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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