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 : 경 국 태 석 불 녹 부 민 한
경 : 경덕왕(742~765)
국 : 국학을
태 : 태학으로
석 : 석굴암
불 : 불국사 완성
녹 : 녹읍
부 : 부활
민 : 민정문서(755)
한 : 중국식 지명 관직명 변경(제2의 한화정책)
1. 경덕왕(742~765)
경덕왕은 742~765년에 재위한 신라의 제35대 왕으로서, 이름은 김헌영이다. 재위 기간에 여러 관부와 관직을 신설했고, 패강(浿江)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관료 급여제도로서 월봉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했고, 관호와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개혁을 실시했다.
경덕왕(景德王)의 성은 김, 이름은 헌영(憲英), 시호는 경덕(景德)이다. 성덕왕의 아들이고 효성왕의 동생인데,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739년(효성왕 3)에 태자가 되었다가 742년에 효성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비인 삼모부인이 후사를 낳지 못하자 출궁시키고, 만월부인을 후비로 맞아 나중에 혜공왕이 되는 왕자 건운(乾運)을 낳았다.
경덕왕은 745년에 사정부(司正府), 소년감전(少年監典), 예궁전(穢宮典), 정찰(貞察), 동궁아관(東宮衙官) 등의 관부를 신설하였다. 이 가운데 사정부와 정찰은 신라 중대(中代)에 들어 급증한 관료군을 감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746년에는 궁내(宮內)의 관리를 감찰하기 위해 내사정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국학(國學)에 박사와 조교를 두고 창부(倉部)와 조부(調府)에 사(史)를 늘려 설치하였으며, 천문박사와 누각박사, 율령박사 등을 새로 두는 등 관부 조직을 확충하였다.
2. 국학을 태학으로 변경
국학은 신라시대의 교육 기관이다. 682년(신문왕 2)에 설치했는데 경덕왕 때 태학감이라 개칭하고 혜공왕 때 다시 국학으로 고쳐 불렀다. 신문왕 때 국학의 최고 책임자인 경이 설치되면서 예부에 속한 정식 교육기관으로 완비되었다. 경 이하 박사·조교·대사·사 등의 관리를 두었다. 고대국가의 정치체제 확립이 일단락되면서 그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유교 정치이념의 수립이 요구되었고, 유교 교육을 전담하는 기구로 국학을 설치하여 관리 양성 기능을 맡긴 것이다. 신라 후기에 들어서는 귀족들의 외면과 당나라 유학의 성행으로 그 중요성이 점차 감소했다.
3. 석굴암 불국사 창건
경주 석굴암 석굴은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 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국보 제24호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 시작되었지만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로서 경영되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인공석굴 구조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정교한 계산 속에 배치된 아름다운 불상들은 완벽한 불국토를 연출한다.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작품이자 전세계의 종교예술사에서도 빛나는 유산이다.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석굴암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신문왕대(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석굴암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보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는 석불사를 세워서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을 청하여 각각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개(龕蓋: 감실을 덮는 천장돌)를 만드는데 돌이 문득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에 분노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제 모습대로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일어나 남쪽 고개에 급히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供養)하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金字塔)이다. 그것은 비단 미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걸작을 이룩하게 된 신라인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신앙의 소산이며, 치정자와 백성이 혼연일치된 민족정신의 응결체이다. 석굴암은 단지 김대성의 개인적인 발원(發願)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기보다는 거족적인 민족의 발원이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석굴암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왜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잡게 되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토함산은 신라오악(新羅五岳)의 하나로서 신라인들에게는 영악(靈岳)으로 존숭받았던 산이다. 토함산은 동악(東岳)으로서, 그 이름과 방위로 보아 일찍부터 용(龍)의 신앙과 결부된 영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영악에 석굴암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토함산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을 이루고 있었다. 죽어서라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문무왕의 넋이 담긴 대왕암(大王巖)이 토함산 밑 동해변에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석탈해(昔脫解)가 동해에 상륙하여 토함산정에 오른다는 고사가 있다.
불국사는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 이 절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神琳)·표훈(表訓) 등 의상(義湘)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록에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대성의 중창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 절은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립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준공 당시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지장전 등을 중심으로 한 구역이다. 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32칸)·천불전(千佛殿, 25칸) 등이 있고, 이 두 개의 건물만큼 크지는 않아도 중요한 건물로는 시왕전(十王殿, 5칸)·십륙응진전(十六應眞殿, 5칸)·문수전(文殊殿, 5칸) 등이 있다. 또한 승방이라고 생각되는 동당(4칸)·서당(4칸)·동별실(5칸)·서별실(5칸)·청풍료(淸風寮)·명월료(明月寮)·객실·영빈료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누·각·문·고·욕실 등이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4. 녹읍 부활
경덕왕 재위 7년(748년)에 대동강 이남~예성강에 해당하는 패강(浿江) 지역에 대곡성(大谷城) 등의 군현을 설치하여, 성덕왕 때 영유하기 시작한 이곳의 통치를 본격화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관료에게 매달 주던 월봉(月俸)을 폐지하고 녹읍을 주는 것으로 급여제도를 바꾸었다. 689년(신문왕 9)에 녹읍을 폐지하고 '축년사조(逐年賜租)', 곧 해마다 곡물인 조(租)를 차등을 두어 내려주게 한 바 있다. 따라서 757년의 조치는 신문왕 9년에 폐지되었던 녹읍을 부활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때 부활된 녹읍은 하대에 국학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에게 거노현(巨老縣: 지금의 경남 거제시)을 녹읍으로 설정해 주었듯이, 진골과 더불어 6두품 이하 신분의 관리들에게도 지급되었다고 보인다.
5. 민정문서(755)
「신라촌락문서」는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 중창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시대의 촌락에 관한 문서이다. 1933년 『화엄경론질』의 파손 부분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경질 내부의 포심에 배첩되어 있던 이 문서는 사진 촬영 후에 다시 원상태로 질 속에 넣었기 때문에 현재는 사진만 남아 있다. 4개 촌의 사정이 해서체로 기재되어 있는데 일부는 잘려나갔고 종이가 부식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가 상당수 있다. 신라통일기 촌락의 구체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국가의 대민지배체제와 백성의 삶을 깊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1933년 10월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파손부분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경질(經帙) 내부의 포심(布心)에 배첩되어 있던 이 문서는 사진 촬영 후에 다시 원상태로 질(帙) 속에 넣었기 때문에 현재는 사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가로 58㎝, 세로 29. 6㎝ 정도의 저지(닥나무로 만든 종이) 2매에 서원경(서원경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에 근접한 군(郡)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현(縣)의 관할 아래 있던 사해점촌(沙害漸村: A촌) · 살하지촌(薩下知村: B촌) · 모촌(某村: C촌)과 서원경(西原京)의 직접 관할 아래 있던 모촌(某村: D촌)의 사정이 해서체(楷書體)로 기재되어 있다. B촌의 끝 부분과 C촌의 첫 부분 그리고 D촌의 끝 부분이 화엄경논질을 만들 때 잘려나갔으며, 곰팡이와 좀 등에 종이가 부식되어 보이지 않는 글자가 상당수 있다. 문서의 기록은 식년(式年)주1 기록과 추기(追記)로 나누어진다. 식년기록은 3년마다 이루어졌으며, 추기는 전식년과 당식년의 중간시점에 호구의 감소만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작성시기는 695년(효소왕 4) · 755년(경덕왕 14) · 815년(헌덕왕 7) · 875년(헌강왕 1) 등의 설이 있으며, 이 중에서 815년 설이 그간 정설로 여겨져 왔으나 근래 695년 설도 지지를 받고 있다.
6. 한화정책
경덕왕의 개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관호(官號)와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꾼 것이다. 757년에 녹읍 부활과 더불어 지방의 군현명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영속(領屬) 관계를 개편하였다. 747년(경덕왕 6)에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를 시중으로으로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759년(경덕왕 18)에 대부분의 관직과 일부의 관부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그 양상을 보면, 6전(典) 조직에 해당하는 관부를 제외한 나머지 관부의 이름을 세 글자로 통일하고, 한자 어휘를 사용하였다. 질서정연한 중국식 제도를 모범으로 하는 행정관료 중심의 정치체제를 추구하였다. 이 무렵 발해와 일본에서도 관제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거나 당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중앙관제를 정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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