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 : 혜 대 지 성
혜 : 혜공왕
대 : 대공 대렴의 난(96 각간 768)
지 : 김지정의 난(780)
성 : 성덕대왕 신종
1. 혜공왕(765~780)
혜공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며, 8세에 즉위하여 왕태후가 섭정했다. 태종 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의 마지막 왕이다. 전제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 귀족중심사회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였다.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사절단을 당에 보내 왕권회복을 위해 힘썼으나 오히려 777년 상대등 김양상의 신랄한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친혜공왕파가 김양상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난을 진압하는 와중에 왕비와 함께 살해되고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했다.
2. 대공 대렴의 난(96 각간 768)
혜공왕대에는 집사부 중시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해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갈찬 대공과 그의 동생 아찬 대렴이 768년(혜공왕 4)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 김은거를 비롯한 왕군(王軍)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 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거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인재들로써 전제왕권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혜공왕적 성격을 띠었다. 이로 인해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이 임명되었다.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대에 시중을 역임했으나, 76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를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혜공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사회에서 귀족 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 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권회복에 대한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 · 하정(賀正)주1 · 사은(謝恩)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이 중에서 8회는 혜공왕 9년(773)에서 12년(776)에 이르는 4년 동안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매년 2회씩 파견된 것으로서 774년에 있었던 김양상의 상대등 임명에 따른 신라내정에 있어서의 정권변동과 무관하지 않다. 즉, 보다 친당적(親唐的)인 혜공왕 일파가 정권회복을 위해 당나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공왕 일파의 이와 같은 외교적인 노력도 777년 상대등 김양상의 상소(上疏)에 의해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 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 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金志貞)주3의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김경신의 추대에 의해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3. 김지정의 난
김지정(金志貞)의 난(亂)은 780년(혜공왕 16) 2월에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이다. 궁궐을 포위하였다가 같은 해 4월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의 군대에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와중에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되었다. 진압을 주도한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중대가 끝나고 하대가 시작된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780년(혜공왕 16) 2월에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서 궁궐을 포위하여 범하였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왕이 어려서 즉위하였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 돌아다니며 노는 데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지니,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 인심이 등을 돌렸음을 들었다. 4월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이 군대를 일으켜 김지정 등을 죽였으나, 왕과 후비(后妃)는 난 중에 살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경덕왕 · 충담사 · 표훈대덕조」에는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나자 혜공왕이 선덕왕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살해된 것으로 나온다. 혜공왕 대는 768년(혜공왕 4) 7월 일갈찬 대공과 아찬 대렴 형제의 반란과 구십육각간의 난, 770년(혜공왕 6) 대아찬 김융(金融)의 반란, 775년(혜공왕 11) 6월 김은거의 반란 등 고위층들의 반란이 연이어 발생한 혼란기였다.
김지정의 난은 혜공왕 대 반란의 마지막 결정타로서, 혜공왕과 왕비의 살해로 귀결되었다. 이후 김지정의 난 진압을 주도하였던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면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시대 구분상 중대(中代)가 끝나고 하대(下代)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김지정의 가계(家系)나 구체적 인적 사항 및 반란 이외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4. 성덕대왕신종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상원사 동종(국보),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보물)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다.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설화로 인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운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연꽃봉우리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앞,뒷면 두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꽃모양으로 굴곡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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