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애국단_윤봉길, 이봉창

사진의 이봉창은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가슴에 선서물을 붙인 채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선서문에는
"나는 적성(赤誠_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라고 적혀 있다. 이봉창은 누구길래, 무엇 때문에 이런 사진을 남겼을까? 1931년 1월 중순의 어느 날 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2층에서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일본 말을 섞은 한국어를 하는 한 남자가 문을 두들기며 소란을 피웠다. 임시 정부 요인들은 일제의 밀정이라고 생각하고 쫓아내려 하였으나, 김구는 그를 주변 여관에 머무르게 하고 이따금 찾아가서 술잔을 나누었다. 몇 차례의 술자리를 가진 후, 술기운이 오른 이봉창은
"일본 천황을 찔러 죽이기는 아주 쉬운 일인데 당신네들 독립운동가는 왜 이 일을 못하시오?"
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봉창은 일본인을 양아버지로 둔 청년으로 일본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였다. 그는 본래 민족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집안이 몰락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온몸으로 체감하였다. 그는 창씨개명까지 하며 일본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차별은 피할 수는 없었다.
이봉창은 일본 생활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았다. 또한 일본인이 되어야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한국인으로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려면 먼저 조국이 독립되어야 했다. 마음을 정한 이봉창은 주저하지 않고 일본에서 중국 상하이를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갔다.
김구는 이봉창을 대략 1년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자 어렵게 구한 폭탄 두 개와 공작금을 건넸다. 이봉창은 김구가 결성한 한인 애국단의 1호 단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에 올랐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사쿠라다문 부근에서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본 천황이 탄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조준 실패와 폭탄 불량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거사가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 언론들이 이봉창을 주목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계속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특히 중국 신문들은 암살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서 이봉창은 나라를 위한 큰 뜻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지사志士로 불렸다.
이봉창은 의거를 막지 못한 일제는 내각을 교체하였다. 그리고 중국 신문의 태도를 트집 잡으며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공격하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상하이는 일제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1932년 4월 29일 한인 애국단 윤봉길은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승전 축하식장에 다시 폭탄을 던졌다.
이봉창_1901-1932, 대통령장(1962)
이봉창 선생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日王)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인(日人)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전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큰 충격과 가능성을 안겨줬다. 이 선생이 터뜨린 한 발의 수류탄은 당시 침체일로에 있던 상하이 임시정부에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 주었다.
1. 이 모든 수모 와 설움은 나라를 빼았겼기 때문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1. 8. 10 ~ 1932.10.10)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고, 남만(南滿)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선생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선생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은 피지배민족이 정복 민족의 수괴를 처단한 의거임을 깨닫게 됐다. 안 의사의 비장한 구국정신이 선생의 어린 가슴을 흥분하게 했다.
2. 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로 일본 생활을 익혀
이봉창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 생활을 익혔다.
1931년 1월의 중국 상하이 날씨는 유난히 추웠다. 대륙을 휩쓸고 있던 반제국주의와 시민혁명의 열기도 식어가는 듯 했다. 국제정세도 그러했다. 제국주의자들의 횡포 앞에 피압박민족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다. ‘거인(巨人)’ 중국이 그러할 때 이미 일제에 합병당한 조선은 말할 나위 없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 309호에 소재한 우리의 임시정부는 당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2가지 운동노선을 겨우 접목시켜 기틀을 잡았으나 뚜렷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침체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열 조짐까지 나타나 독립운동은 생기와 역동성을 잃고 있었다.
1월 2일 상하이 임시정부의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동료 국무원들과 함께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
“그 자는 하오리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오리는 일본식 남자 옷을 말한다. 백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검정색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창 밖의 바람이 잠시 가쁜 숨을 멈춘 사이, 백범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현재 그 젊은이를 조사하고 있으니 저에게 맡겨두시지요.”
임정 국무원 회의실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된 이 젊은이는 한국 태생의 일본인을 양부(養父)로 두고 일본인 행세를 하는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로 밝혀졌다. 일본에서 상하이로 건너올 때도 이 같은 일본식 이름을 썼다. 기노시타 쇼죠. 일인 철공소 점원, 나이 31세.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봉창 선생의 모습이었다.
3.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6년여의 ‘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하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해, 임시정부 청사와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같은 사실이 백범에게 전해진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 만남 같기도 하고, 역사적 우연처럼 비치기도 한다. 백범은 임정 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선생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봉창 선생이 단순히 ‘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 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백범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4. 안중근 의사 아우의 집에 가 수류탄 들고 맹세
거사 준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선생은 일인 철공소에서 일하며 술과 음식으로 일경과도 교제를 하면서 속수무책인 건달 행세를 했다. 일제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 13일 선생을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런 후 수류탄을 양 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하였다.
5. 도쿄에서 궁성 돌아가던 일본 왕에게 폭탄 던져
일본인을 가장하고 12월 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하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이었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선생의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본 왕의 행차에, 그것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폭탄을 던져 타격을 가하려 했던 일은 한국 독립 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다.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의 감정 대립도 깨끗이 씻겨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선생은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미혼이었으며 처자식이 없는 순국이었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6. 공훈록
서울 사람이다. 10살에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하였으며 4년후 졸업하여 일본인 경영의 제과점 종업원으로 있다가 19세때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정거장에 운전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1931년 1월 중순,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일본말 섞인 한국말을 하며 임시정부를 일제가 부르던 식으로가정부(假政府)라고 하는 그를 수상히 여겨 문밖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구(金九)는 일단 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에게 그가 묶을 여관을 잡아주라고 일렀다. 며칠후, 그는 직원들과 함께 술과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으면서 취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누게 되었다. "당신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일개 문무관(文武官)도 죽이지 쉽지 않은데, 일왕을 죽이기가 어디 쉽겠소?" "내가 작년 동경에서 일왕이 능행(陵幸)한다고 행인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의 이 말은 당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던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얼마 뒤 그는 김구를 만나 그의 진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김구 단장을 감복시킨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인생관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사람은 뜨거운 동지애로 의기투합하였고 그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김구와 약 일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자금과 폭탄은 김구가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자신은 준비기간 동안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한달에 한번씩 김구를 만나 거사를 계획·준비하였다. 1931년 12월 그와 김구가 약속한 지 일년이 거의 다 되어 미주 동포사회에서 거사에 필요한 폭탄도 준비되었다. 폭탄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김홍일(金弘壹)을 시켜 상해 병공창(兵工廠)에서, 또 한 개는 김 현(金鉉)을 하남성(河南省) 유 치(劉峙) 장군에게 보내어 구해온 것이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그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함으로써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 이튿날 그의 장거를 위한 송별회가 있었으며 기념촬영이 있었다. 이때 김구는 비장감에 젖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하여 김구를 위로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면서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는 일본이름으로 가장하여 동경으로 출발하였다. 영천환(永川丸) 선편으로 신호(神戶)를 거쳐 동경(東京)에 도착한 그는 미장옥(尾張屋)여관에 묵으면서 일왕의 일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던 중, 12월 말경 그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동경 교외에 있는 대대목(大大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여 그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상해의 김구 단장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어 거사날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그는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행렬이 나타나자 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몸을 일으켜 일왕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 만을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붙잡혔고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그가 일왕 유인을 폭살시키는데 실패는 하였지만, 그의 장거는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다. 또한 그의 의거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전선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보산(萬寶山) 사건이래 한·중민의 감정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장거가 있자 1932년 1월 9일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동경발 기사로 이 장거를 즉각 보도하면서, "일왕이 불행히 맞지않았다"라는 표현을 하며 그들도 일왕이 폭살되지 않았음을 매우 애석히 여기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장거가 갖는 보다 중요한 의미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 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세계에 과시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윤봉길 (尹奉吉)

윤봉길은 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에 태어나 1932년에 사망했다. 3.1운동 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 농민계몽·부흥 운동에 전력했다. 1930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듬해 상해로 옮긴 후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 김구의 주관 하에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 후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1.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 · 농촌부흥운동 ·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 · 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壹)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2.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 윤봉길의 유년시절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柿粱里)의 도중도(島中島)라는 마을에서 아버지 윤황(尹堭)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의 큰아들로 1908년 5월 19일 태어났다. 봉길(奉吉)은 중국망명길을 떠난 후 스스로 붙인 이름으로,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자는 용기(鏞起)이다. 윤봉길의 집안은 파평 윤씨(坡平 尹氏) 판도공파(版圖公派)로서 증조부 윤재(尹梓) 때부터 시량리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할아버지 윤진영(尹振榮)이 토지의 개간과 치수, 농사일에 크게 힘써 경제적으로 윤택해질 수 있었다. 윤봉길은 동학에 몸담았던 배성선의 딸인 배용순(裵用順)과 1922년 3월 22일 혼인하였다.
윤봉길은 6세에 큰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1살 되던 1918년 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그 여파가 이곳에도 미치게 되어, 3월 3일에 예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 3일 경에는 덕산과 그 인근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덕산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3·1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탄압 현장을 지켜본 윤봉길은 일본인이 되라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며 보통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인근에 있는 최은구가 설립한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수학하였다. 14세 때인 1921년부터 1925년까지는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설립한 오치서숙(烏峙書塾)이라는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매헌이라는 호는 윤봉길이 오치서숙에서 떠날 때 성주록이 자신의 호인 매곡(梅谷)의 매자와, 조선 세조(世祖)를 몰아내고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 했던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의 호, 매죽헌(梅竹軒)의 헌자를 따서 지어주었다고 한다.
윤봉길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도 신학문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아서 돈이 생길 때마다 예산으로 나가 신문물에 관한 책을 사다 보았다. 『동아일보』를 구독하였고, 특히 1920년대 초중반 식민지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계몽잡지인 『개벽』은 한 호도 빠지지 않고 구해 보면서 민족문제와 농촌문제에 대해서 이해하고 고민하였다.
4. 농촌계몽운동가로서의 길
윤봉길은 1926년부터 농촌계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는 한 청년이 인근 공동묘지의 묘표를 모조리 뽑아 와서 자신의 아버지 묘표를 찾아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은 어렵지 않게 묘표를 찾아주었지만, 이 청년은 정작 묘표를 뽑은 자리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아 자신의 아버지 무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덤 위치까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윤봉길은 이 사건을 겪고 큰 충격을 받고서 무지가 식민지배를 벗어나는 데 가장 큰 공적(公敵)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우선 그는 1926년 동료들과 함께 야학당을 개설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글과 역사, 지리, 산술, 과학, 일어,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다. 1927년에는 야학의 교재로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의 1권은 『조선글편』으로 한글 강의 교재용으로 저술되었고, 제2권은 『계몽편』으로서 조선청년이 가져야 할 마음과 자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제3권은 『농민의 앞길편』으로서 농민이 가져야 할 공동정신과 노동의 의미, 자주, 자유, 평등 사상을 강조하였다. 3권 중 제2권 『계몽편』과 제3권 『농민의 앞길편』은 현재 남아있고, 제1권 『조선글편』은 한국전쟁 시기에 유실되었다가 2011년 4월에 그 중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 책은 윤봉길의 유품과 함께 보물 568호로 지정되었다.
윤봉길은 야학뿐만 아니라 농민경제의 자립을 위한 농민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부흥운동을 펼쳤다. 우선 1927년 3월 동료들과 함께 두레정신을 바탕으로 한 공생공동체의 건설을 목표로 목계농민회(沐溪農民會)를 설립하여, 농산물의 증산운동, 공동구매조합 운동, 토산품애용 운동, 부업 장려 등을 펼쳤다. 1929년 2월에는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하였는데, 상부상조를 통한 미풍양속의 권장이 설립취지였지만 단순한 친목도모의 차원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을 진전시킬 세력기반을 확보하려는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1929년 4월 23일에는 월진회(月進會)가 설립되고 윤봉길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월진회 역시 ‘상애상조(相愛相助)’, ‘근검절약’, ‘양풍미속 함양’ 등을 목적으로 내세웠고, 활동내용에 있어서도 야학교 및 농민강습소의 운영, 강연회를 통한 국내외 정세 및 지식 보급, 공동판매 및 저축증대 사업 등이었다. 월진회는 창립 취지나 활동내용을 보면 단순한 계몽운동단체에 가깝지만, 여기에 참여하였던 정종갑, 정종호, 윤창의 등은 이후에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월진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는 길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와중인 1929년 3월 농민운동의 본부인 부흥원 건물이 완공되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28일에 학예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윤봉길이 이솝우화를 각색하여 「토끼와 여우」라는 연극을 상연하였는데,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그가 덕산주재소로 불려가게 되었다. 이 연극은 토끼와 거북이가 빵 조각을 나눠먹으려 하자 여우가 나타나 똑같이 반씩 나눠준다는 핑계로 빵을 다 먹어버린다는 내용이었는데, 일경은 여우를 일제에 비유했다는 구실을 대었다. 윤봉길은 단순한 아이들의 촌극이었다고 변명하여 경고와 훈계만 받고 풀려났지만, 이후 농촌계몽운동이 성공하려면 우선 민족의 독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의 한계에 번민하던 즈음인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이 일어나 12월에 서울과 전국에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또 1929년 11월에는 함흥에서 수리조합반대운동(水利組合反對運動)이 일어나, 조합 측의 일본인들이 한국농민 3명을 타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목도하면서 그는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된다. 우선 그는 야학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정신과 투쟁에 나설 것을 고취하는 연설을 했다가, 야학은 경찰에 의해 강제 폐쇄당하고 자신은 구속되어 3주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3월 6일에는 오랜 번민 끝에 결국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겨놓고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망명길은 녹록치 않았다. 그는 3월 8일 평안북도 선천에 다다랐을 즈음 기차 안에서 사복경찰의 검문에 걸려 선천경찰서로 끌려가 열흘 남짓 고초를 겪었다. 3월말 압록강을 넘어 단둥(丹東)을 지나, 4월초에 칭다오(靑島)에 도착했다. 하지만 집을 나왔을 때 월진회의 공금 60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비도 곧 바닥이 났다. 그래서 칭다오에서 한동안 길거리 유랑생활을 하다가 어느 한국인의 소개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의 점원으로 들어가게 되어 1년여 간 상해로 갈 여비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 5월 3일에야 다시 상해로 출발하게 되었고 5월 8일 도착했다. 5월 중순에 한국교민단 사무소에서 신고 수속을 하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김구(金九)와 이유필(李裕弼) 등을 만났다. 하지만 우선 생계 해결을 위하여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처음에는 인삼 장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중국어도 서툴고 수완이 부족했기에 곧 포기하고, 한국인 박진(朴震)과 중국인이 공동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등을 만드는 종품(騣品) 공장에 취직하였다. 이곳은 한국인 노동자 17명이 근무하던 곳이었는데, 윤봉길은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하고 노동자들끼리 상부상조와 신문 구독 활동을 벌이고 공장주 측에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하지만 1932년 들어 임금문제로 다툼이 생겨 윤봉길은 해고당하였고, 복직투쟁이 일어났지만 안창호와 이유필의 주선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공장주의 반대로 끝내 복직되지 못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에서 만보산(萬宝山)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로를 둘러싸고 충돌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때의 충돌은 조선인, 중국인 양측 모두 경미한 부상자가 나오는 데 그쳤는데, 일본 관동군이 국내 신문에 과장·왜곡 보도하도록 조작하여 문제가 확대되었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상황이 위급하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자 조선 내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일제 측의 선동과 은밀한 공작에 의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중국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 관내 지역에서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원 내지 협조가 끊어졌고, 심지어 한국인을 일본의 스파이로 보는 시선까지 생겨났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에서는 특무기관로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김구를 단장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준비하였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단원인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왕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시작으로 의열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윤봉길은 종품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매주 1회씩 김구가 공장을 찾아올 때마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시국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김구가 공장을 방문하지 않을 때에는 별도로 밖에서 만나 그와 면담하고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수차례의 만남 속에서 윤봉길과 김구는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윤봉길은 자신도 ‘동경사건’과 같은 일이 있으면 이를 담당할 것이니 자신을 지도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독립운동에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만주국 건설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을 돌리기 위하여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침공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군은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3월 1일 상하이는 결국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상하이사변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한인애국단에서도 일본군에 타격을 입힐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1차로 일본군사령부가 황포강의 훙커우(虹口) 부둣가에 정박 중인 일본군함 이즈모호(出雲號)에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잠수부의 미숙으로 실패하였다. 이어서 훙커우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과 부두의 무기창고를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윤봉길은 일본유학생 몇 명과 미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탄약창고의 일자리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중국 국민군 소속이자 상해병공창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폭탄 제조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김홍일(金弘壹)이 숨길 수 있는 도시락과 물병에 넣을 폭탄을 고안하던 중 3월 초에 이르러 중국군과 일본군이 임시휴전을 하여 폭파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김구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 기념행사를 상하이사변 전승 축하식과 더불어 거행한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하여 확인하고 이봉창의 의거와 같은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날의 행사는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부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막대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윤봉길은 이 작전에 자원하였다. 김구는 4월 2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에서 있을 천장절 기념행사의 거사계획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날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혈서로 입단 선서문을 썼다. 다음날인 4월 27일에 양복을 입고 상반신을 찍은 개인사진과 태극기를 배경으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든 사진,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까지 총 3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폭탄 제조는 역시 김홍일이 맡았는데, 이봉창의 도쿄 의거 때에 불발로 인하여 타격을 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작에 신중을 기하였다.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김구로부터 도시락폭탄과 물통 형 폭탄을 받아 들고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였다. 이날의 행사는 상하이 거주 일본인 10,000여 명이 동원되었고 일본군인과 각국 외교관, 무관 등이 초청되어 총 20,000여 명이 참관하였다. 행사는 2부로 나누었는데, 1부는 일본군의 관병식 행사로 9시 30분경부터 시작되어 11시 30분경 종료되었다. 2부 행사는 관민합동의 축하식이었다. 개회사와 축사가 진행된 후 일본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가 제창되었는데 모든 참석자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주변 경계가 흐트러지자 윤봉길은 이때가 최적의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기미가요 제창이 끝나갈 무렵인 11시 50분경 물통 형 폭탄을 단상 중앙을 향해 던졌고, 정확히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대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이 서 있는 단상 중간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이 때문에 시라카와 대장은 중상을 입었다가 한 달 뒤인 5월 26일 사망하였고 우에다 중장은 오른발 일부를 절단해야 했다.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해군 제3함대 사령관은 실명,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오른쪽 다리 절단의 중상을 입었고,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河端貞次)는 중상을 입었다가 다음날 사망하였다.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쓰(村井倉松)와 토모노 모리(友野盛) 상하이 일본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일본군 헌병대에 곧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군경은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상하이 한인 교민들을 무작위로 체포하였고, 안창호, 이유필 등도 검거하였다. 김구는 잠시 피신했다가 상하이로 돌아와 ‘훙커우공원 폭탄안의 진상’을 발표하였지만, 결국 그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윤봉길의 의거로 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후에 중국 국민당정권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윤봉길은 5월 4일부터 일본군 상하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예심 조사를 받기 시작하여, 5월 25일자로 ‘살인 및 살인미수, 폭발물단속벌칙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해 11월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이 철병함에 따라 윤봉길도 함께 일본으로 압송되어 오사카(大阪) 위수구금소(衛戍拘禁所)에서 구금되었다. 1개월 지나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위수구금소로 압송되고 그 이튿날인 12월 19일 7시 40분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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