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형평사(1923)_차별을 없애자

한자로 가득한 이 포스터는 어떤 행사를 알리는 것일까? 머리띠를 동여맨 청년이 깃발을 들고 무언가를 외치는 듯하다. 한자를 읽기 어렵다면 깃발에 가로로 풀어쓴 한글을 읽어 보자.
"ㅎ ㅕ ㅇ ㅍ ㅕ ㅇ"
"전 조선에 산재한 형평 계급아 단결하자"
"천차만별의 천시를 철폐하자"
라고 쓰여 있다. 평등과 의미가 비슷해 보이는 형평은 무슨 뜻일까? 형평은 평평한 저울처럼 평등한 상태를 말한다. 백정은 고기의 무게를 달기 위해 저울을 사용하였는데, 한쪽에 추를 올리고 반대쪽에 추의 무게만큼 고기를 올려 균형을 잡는 방법으로 무게를 측정하였다. 도축업과 가죽 제조업 등을 담당했던 백정은 노비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일정 지역에 모여 살아야 했다. 이들은 신분제의 최하층에서 천민 중의 천민으로 불리며 양반은 물론 농민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사라지고 법적으로 신분 평등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진 백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대우까지 쉽게 없어지지는 않았다. 갑오개혁 이후 백정들도 호적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직업란에는 백정을 의미하는 도한(屠漢_도축업에 종사하는 자)이라고 기재하여 구별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차별은 계속되었다. 백정의 자식이란 이유로 학교 입학이 거부되는 경우도 있었고, 만민 평등을 교리로 하는 교회의 예배조차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전국 단위의 노동자 농민 단체가 결성되어 다양한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백정들도 말로만의 신분 평등을 넘어선 기회의 균등, 사회에 만연한 차별의 철폐,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단체를 만들었다. 차별 철폐를 위해 백정들이 단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전국 40만 명의 백정을 대표하는 조선 형평사가 설립되었다. 조선 형평사 설립 취지문은 이들의 가슴에 쌓였던 설움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어떠한 압박을 받아 왔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하여도 피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여기에 지위와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유도 없이 일전의 압박에 대해 절규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 문제를 선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급무이다.
형평 운동은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언론과 사회단체의 지지를 받았다. 형평사는 백정이 아닌 사람의 회원 가입도 허용하며 차별 문제를 사회와 공유하였다.
형평사 (衡平社)
형평사는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이다. 개항 이후 자유평등사상의 유입과 일본에서 조직된 수평사(水平社)의 영향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지사 12개, 분사 64개가 조직되었다. 1924년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문제를 두고 대전을 중심으로 결성된 혁신동맹과 대립하였다. 1925년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여 통합하였다.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 문제와 조직 해소와 재결성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면서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1. 정의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
2. 개설
1923년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과 실질적인 사회적 처우 개선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1930년대까지 활동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기도 했다.
3. 설립목적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도록 하고자 하였다.
4. 연원 및 변천
개항 이후 자유평등사상이 유입되고, 부분적이나마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백정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정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신분 차별의 대상이었는데, 1922년 일본의 특수부락민인 에다[穢多: 屠者]가 신분해방단체인 수평사(水平社)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백정들은 자녀들의 입학거부문제를 계기로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사를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형평사취지서 · 사칙 · 세칙을 채택하고 위원을 선출하였다. 사칙(社則)에 따르면, 진주에 본사(本社)를, 각 도에 지사(支社)를, 군에 분사(分社)를 두며, 형평사의 창립을 주도한 진주 백정 이학찬(李學贊)과 신현수(申鉉壽) · 강상호(姜相鎬) · 천석구(千錫九) · 장지필(張志弼)이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여기에 호응해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었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지사 12개, 분사 64개가 조직되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전국의 지사 · 분사 대표 330여 명이 참가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본사의 서울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결론을 짓지 못하고 다음 총회로 넘겨졌다. 그런데 이전을 주장한 장지필 · 오성환(吳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4월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동맹을 결성하고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같은 날 진주에서도 진주 본사가 주최하는 전국형평사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분열되는 과정에서 본사 이전 문제를 두고 갈등이 표면화되었지만, 실제 원인은 운동방법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이었다. 혁신동맹측이 사회주의적 노선을 지향하려 한 반면, 진주 본사측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양파는 통합을 위한 교섭을 시작해 같은 해 8월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양파는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고 서울에 본부를 두기로 하였다. 이 무렵부터 지방에서 형평청년회 · 형평학우동맹 등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대회 후 진주 본사측은 대전대회의 불승인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양파간에 다시 교섭이 진행되어 다음 해인 1925년 4월 양파가 합동으로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여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뒤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당분간은 내부 결속에만 주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형평 청년들은 개인자격으로 또는 형평청년회 단위로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해 다른 사회운동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26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는 단체의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바꾸었다.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각지의 청년회를 해체하고 사내에 청년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일반 사회단체와 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한다는 등의 청년부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무렵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문제를 둘러싸고 제휴를 주장하는 임평산(林平山) · 심상욱(沈相昱) · 이종률(李鍾律)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전통적인 균등운동을 계속하자는 장지필 · 김종택(金鍾澤) · 길순오(吉淳吾)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는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표면화되었다. 1929년 말부터 1932년에 이르기까지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학생·노동자·농민들이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에 진출하면서 형평사 내에서도 기존의 조직을 해소하고 혁명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을 재결성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형평사는 1931년의 해소 논쟁과 1933년의 일명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겪으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이후 형평사는 경제적인 친목이익단체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5년 4월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영합하는 단체인 대동사(大同社)로 전락하였다.
5. 기능과 역할
1923년 창립대회 당시 19개조로 구성된 사칙(社則)에 따르면, 제3조에서 “본사는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제19조에서는 “형평중학을 설립하고 형평잡지의 발간을 도모한다”고 규정하였다. 6개조로 구성된 세칙(細則)은 다음과 같았다.
① 야학 또는 주학(晝學)강습소를 증설 신문·잡지의 구독을 권장하고 수시로 강연을 하여 상호 지식을 개발케 한다.
② 주색 및 도박을 금지한다.
③ 풍기를 문란케 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④ 근검절약을 주로 하고 상호부조의 미풍을 조장한다.
⑤ 본 사원 중 질병 또는 천재(天災)에 걸린 자로서 그 상황이 불쌍한 자에게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구호한다.
⑥ 본 사원 중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위로하고 일반회원에게 주지시켜 상호조위의 덕을 행하게 한다.
6. 의의와 평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사회 저변에서는 아직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가운데 하위 신분층의 실질적인 처우 개선과 사회적 평등 대우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형평운동

1. 개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조선시대에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이었다.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국 조직으로 발전하여 1935년 4월 24일 제 13차 정기총회에서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꿀 때까지 만 12년간 활동한 형평사는 일제침략기에 전국 규모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로 기록되고 있다.
2. 사회적 배경
백정들이 작업할 때 쓰는 저울의 상징적 의미를 활용하여,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 형평사는 활동 목표나 활동 주역의 측면에서 백정들의 사회 지위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에 속하였던 백정들은 대대로 가축을 잡는 일을 하거나, 가죽제품이나 버들고리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노비나 무당 등 다른 천민들보다도 더 낮은 대우받았던 탓으로 천민 중의 천민이라고 여겨졌다.
백정들이 겪는 차별은 그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갖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첫째, 거주지역의 제한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규정하듯이, 그들은 일반인들과 섞여 살지 못하고 일반인 마을 밖에서 모여 살았다. 둘째, 옷차림이나 집안치장 같은 외모에서 차별을 강요받았다. 백정들은 일반 사람들처럼 갓을 쓰거나 상투를 틀지 못하고,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었으며, 갓끈도 대나 구슬, 베조각을 쓰지 못하고 종이 꼰 것만 써야 했다. 그리고 모자는 일반인들이 부모상(喪)을 당하였을 때 쓰는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를 써야 했다. 가죽신을 만드는 것이 직업이면서도 비단옷이나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그 대신 짚신이나 헝겊신을 신어야 했다. 집안단장에서도 차별을 받아 가옥에 채색을 할 수 없었고, 기와도 올릴 수 없었다. 또한 다른 천민들처럼 성(姓)이 없었던 백정들은 이름을 지을 때에도 차별을 받았다. 인(仁)·의(義)·효(孝)·충(忠)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 수 없었고, 그 대신에 석(石)·피(皮)·돌(乭)과 같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했다. 셋째로, 백정들은 일반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교제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백정들은 아무리 나이 어린 일반인이라도 존댓말을 써야 했으나, 일반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백정들에게 반말로 대꾸했다. 백정들은 일반인들과 나란히 걷지도 못했고, 일반인 집에 갈 때는 무릎을 꿇고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또 백정들은 일반인들과의 결혼이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배우자를 선택하였으며, 결혼식에서도 백정 신랑과 신부는 일반인들처럼 안장 놓인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다. 백정 여자들은 성인의 표시인 비녀를 꽂지 못하고 둘레머리를 해야 했다. 백정들은 장례를 치르면서도 일반 사람들처럼 상여를 이용하지 못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여도 삿갓이나 베옷을 이용할 수 없었고, 묘지는 일반 사람들의 것과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조상에 대한 예를 엄격하게 강조하는 조선 사회에서 묘지의 위치에도 신분 차별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넷째, 백정들은 관청의 일처리과정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조선 후기까지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하였고, 공적인 직책을 갖거나 공적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호적도 없이 국가 구성원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한 탓에 납세나 국방의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북방에 적이 쳐들어오면, 백정들이 용맹스럽고 전투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징집되는 경우는 있었다.
차별 관습에 저항하거나 어겼을 때 백정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일반인들은 농청(農廳)과 같은 마을 내의 규율 유지 조직을 통하여 관습을 어긴 백정들을 불러다가 집단적으로 사형(私刑)을 가하였고, 심지어 지방 관청도 사회질서를 깨뜨렸다는 죄로 처벌하였다. 관청의 처벌방법도 달라 일반 죄수들은 곤장대 위에 올려놓고 때렸는데, 백정 죄수들은 곤장대도 없이 맨땅 위에서 때렸다. 이처럼 조선 사회에서 백정들은 마치 인도의 ‘불가촉민(不可觸民, the untouchables)’이나 일본의 부락민(部落民)처럼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차별을 받았던 최하층의 사회적 피차별 집단이었다.
3. 진주에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반인륜적이며 불평등한 신분제도가 없어지면서 백정이란 신분도 형식적으로나마 사라졌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차별 관습은 20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23년 형평사가 창립되자 전국의 백정 후손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참여한 것이나, 형평사 창립과 활동을 반대하는 일반인들의 반형평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것은 백정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진주의 역사적·사회적 조건이 작용하여 진주에서 형평사가 처음 시작된 것이다. 우선, 진주는 근대기의 변혁과정에 앞장선 선진지역이었다. 진주의 농민항쟁(1862년/철종 13년, 임술년)은 부정부패가 널리 퍼져 있던 19세기 중반에 농민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출발점이었다. 또 진주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삼남지방을 휩쓸 때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적인 격전지였다. 이것은 ‘인내천(人乃天)’으로 상징되는 동학사상이 진주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1925년에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 소재지로서 경상남도의 행정 중심지요 학문 및 문화 중심지였던 진주는 새로운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며 역사 변화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토양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19년 3·1민족해방운동 이후 진주에서 사회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에는 전국 최초로 억압받던 어린이들을 위한 소년운동 단체가 결성되었으며, 1922년에는 전국 최초의 소작인대회가 열려 1920년대 농민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한 고등학교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간섭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925년에 선구적인 여성 고등교육기관인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오늘날의 진주여고)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편, 진주의 백정들 역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있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면, 1900년에 진주 백정들은 진주관찰사에게 차별을 없애고 다른 이들과 똑같이 관(冠)을 쓰게 해달라고 탄원을 올리기도 하였고, 1909년에는 호주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기독교를 접하여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평등사상을 접하기도 하였다. 1910년에는 도축장에서 일하는 백정들 중심으로 조합 결성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백정들의 변화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억압도 여전히 강하였다. 1900년에 관찰사에게 올린 탄원서를 빌미로 일반 사람들이 백정 마을을 습격하기도 하였고, 1909년에 진주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백정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서 동석(同席) 예배를 거부하기도 하였고, 또 1910년의 조합 결성 시도는 일제의 방해와 다른 백정들의 무관심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겪으면서 백정들은 점차로 평등과 신분 해방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4. 형평운동의 탄생과 발전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역동적 과정을 겪어온 진주지역에서 백정 출신이 아닌 사회운동가들과 백정사회의 지도자들은 1923년 백정신분 해방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통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되어온 어린이·소작인·여성 등에 대한 관심이 많은 진주 사회의 분위기에서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형평사 창립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1923년 4월 2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발기대회를 열고 그 이튿날 창립대회를 가졌다.
형평사의 창립은 전국적으로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특히, 형평운동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백정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단적인 보기로서, 형평사 창립 20일 만인 5월 13일 진주에서 열린 창립축하식에는 전국에서 4백여 명의 백정들이 모였다. 역사상 최초로 일반인들에게 백정들의 해방을 알리는 대규모의 공식 행사가 열린 것이다.
백정 차별 철폐를 내건 형평운동은 형평사 지도부의 노력으로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처음에는 경남지방에서, 나중에는 호남과 영남, 중부지역에서 형평사 지부가 잇따라 조직되었다. 형평사는 진주에 본사를, 각 도에 지사, 각 군과 유명 마을에는 분사(分社)를 두는 전국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러한 전국 조직은 형평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중심 틀이 되었다. 형평운동의 발전은 연도별 형평사 지·분사 수를 보여주는 다음 표를 통하여도 알 수 있다. 출발 첫해부터 조직체 수는 80개에 이르렀으며,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1930년 전후에는 그 수가 160개를 넘었다.
전국 조직의 확대와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하위 조직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보기로 전위 단체인 정위단을 비롯하여, 형평청년회·형평학우동맹·형평여성회 등이 각 지역에서 만들어졌고, 형평청년동맹과 같이 각 지역의 하위 단체를 잇는 중간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처럼 백정들의 열렬한 성원과 진보적인 지식인, 사회운동가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에 힘입어 전국운동으로 발전한 형평운동은 농민·노동자·청년·여성 등 여러 사회운동과 더불어 당시 사회운동계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형평운동의 발전은 조직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가 수나 활동 내용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형평사측에서는 전국 백정 출신의 인구를 추정하여 통상 40만 회원들이라고 하였지만, 실제 회원 수는 이에 훨씬 못 미치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일제 경찰 기록도 1926년의 백정 수를 36,679명으로, 1928년의 형평사 사원 수를 9,688명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적극적인 활동가가 대단히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해마다 창립 기념일인 4월 24일 즈음에서 열린 정기대회에 참석한 대의원 수도 늘어나 1920년대 후반에는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형평사는 전국 조직을 통해 많은 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활동을 벌인 대표적인 단체였던 것이다.
형평운동이 전국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형평사 지도부의 중심 세력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창립 1년 뒤부터 시작된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의 파벌싸움이 벌어지면서 형평운동의 주도권은 중부지역 출신의 활동가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렇지만 진주는 형평운동의 발상지이자 초기 단계의 활동 중심지로서 세인들의 인식에 각인되어 형평운동은 곧 진주라는 등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형평운동은 1930년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6)을 일으키는 일제의 군국화 와중에서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이데올로기적인 갈등 속에서 회원 간의 분열이 일어나고, 일제의 간섭과 억압 아래 형평사의 조직이 와해되고 활동이 정지된 지부가 늘어나면서 형평운동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급기야 1935년에 형평사를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면서 인권운동의 본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5. 형평운동의 목적과 성격
형평사의 일차적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고 평등한 대우를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도 인간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곧, 형평운동은 백정 해방운동이자 인권운동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형평운동은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집합적인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공동체운동’이었다. 곧,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아울러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욕구를 함께 충족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창립 당시에 채택된 ‘형평사 주지’에 잘 나타나 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연(然)함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우리도 조선 민족 2천만의 1인이라. 애정으로 호상(互相) 부조하야 생활의 안정을 꾀하며 공동의 존영(存榮)을 기코자 자에 40여만이 단결하야 본사의 목적과 그 주지를 간명히 표방코자 한다."
이와 같이 “계급 철폐, 모욕적인 칭호 폐지, 교육 장려, 사원들의 상호 친목”이라고 형평사 사칙에 명기된 것처럼 형평사의 주요 활동내용은 전통적인 신분사회의 잔재인 백정 차별을 없애면서 아울러 급변하는 사회변동과정에서 백정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것이었다. 우선, 백정들에 대한 사회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형평사 창립 직후 본사 간부들은 경남경찰국을 방문하여 호적부에 기록된 백정 신분의 표적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여 경찰국장이 하급기관에 삭제 명령을 내리도록 관철시켰으며, 신분을 상징하던 전통사회의 머리 모양을 없애기 위해 형평사 차원에서 집단 단발(斷髮)을 실시하기도 하고, 반말이나 모욕적인 칭호에 대해 적극 대항하여 평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백정들의 공동체의식을 재건하고 결속력을 복원하여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활동으로서 교육을 장려하고, 사원끼리의 친목을 강조하며, 대대로 전래되어오던 산업의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활동을 벌였고, 사원들이 재해나 개인적인 질병을 겪거나 실업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서로 도울 것을 형평사 사칙에 명문화하였으며, 곤경을 겪는 사원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규학교 입학을 적극 권장하는 한편, 정규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던 사원이나 사원 자녀를 위해서 야학이나 사설강습소를 설치하였으며, 또 사원 교양을 위해 잡지를 출판하면서 신문·잡지 구독을 적극 권장하거나 상식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구성원의 교양을 높이는 데 힘썼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백정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운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보편적인 명분과 함께 참여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신분질서에 저항하여 백정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이며, 백정들의 직업과 단결력을 다시 일깨워 모든 사람이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공동체운동’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성격의 형평운동에 대한 사회 저항도 많았다. 대표적인 보기로서 형평운동을 반대하거나 백정 차별의 관습을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형평사원들 사이의 충돌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충돌사건은 형평운동의 발전과 함께 크게 늘어났다
특히, 1927년부터 충돌사건이 급증한 것은 일상적으로 당해온 차별이나 편견의 굴욕적인 관습에 대하여 형평사원들의 저항이 거세어진 것을 반영하고 있다. 형평사원들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반말이나 모욕, 무시 같은 개인적인 차별 관습이나 학교 입학 거부, 장지 공유 거부와 같은 사회적 차별 관행에 적극 저항하였던 것이다. 차별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각 급의 형평사 차원에서 적극 대응하여 이 문제를 사원들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형평사 중앙총본부에서 하급기관에 차별 사례를 보고할 것을 명령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웠으며, 더 나아가 차별과 굴욕에 저항하지 않은 사원을 자체 내에서 처벌하도록 규정한 것도 더 적극적인 대응을 낳았다. 이와 같이 형평운동이 발전하면서 형평사원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지게 되고, 따라서 차별에 적극 저항하게 되면서 형평사원들과 반형평운동 세력 사이의 충돌이 늘어났다. 이처럼 형평운동을 통하여 사회 전반에 차별 철폐와 인권의식이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6. 형평운동의 현대적 의미
1935년 형평사가 대동사로 이름을 바꾼 뒤 사실상 형평운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전쟁, 산업화 등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지역공동체가 크게 바뀌어 신분의 잔재로 급속도로 사라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 백정 집단도 없어졌다. 곧,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관념 속으로는 백정이 남아 있지만, 사회 실체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신분 흔적은 남아 있어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누구는
“양반이네”
“상놈이네”
떠들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형평운동의 주장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차별과 억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형평사가 창립된 진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 그러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존중하고 기리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형평운동의 학술적 성과를 논의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형평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을 건립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는 문화 활동과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진주에서는 인간 존엄성 실현과 인권 존중을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고 있다. 관념적이거나 형식적인 구호가 아니라 인간 존엄과 평등 대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제도화하려는 형평운동은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서로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류사회 전체에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형평사 100년, 차별과 인권을 되씹다
100년 전인 1923년 백정(白丁)에 대한 차별에 맞선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전면화하기 시작했다. 그해 4월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가 창립되었다. 조선형평사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근본 강령이며,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대”한다는 설립 목적을 내세웠다. 이어 5월20일 전북 김제에서 창립된 서광회(曙光會)는 “백정! 백정! 부합리의 대명사, 부자연의 대명사, 모욕의 별명, 학대의 별명인 백정이라는 명칭하에서 인권의 유린, 경제의 착취, 지식의 낙오, 도덕의 결함을 당하여 왔다”고 선언했다. 1926년의 형평사 선언에는 “인생은 천부불가침의 자유가 있다. 인격과 자유를 억압된 자에게 어찌 생의 의의가 있으랴!”는 외침과 함께 인권 해방을 근본적 사명으로 한다는 강령을 담았다.
조선에서 가장 차별받던 계층인 백정들이 스스로 사회운동을 시작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차별의 철폐와 인권의 증진을 도모했던 형평운동이 소환하는 기억은 뜨겁고도 강렬하다. 갑오개혁(1894~1896) 이후에도 여전히 호적에 따로 표시가 이루어졌을 만큼 이들에 대한 차별은 체계적이었다. 만인의 평등을 내세우는 기독교 교회에서조차 종종 함께 예배보기를 거부당했으며, 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백정 중에서도 도축업에 종사했던 백정들에 대한 차별은 깊었다.
이들의 저항인 형평사 100년을 기념하여 국사편찬위원회는 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형평사가 처음 결성된 진주에서는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 <공평과 애정의 연대, 형평운동>을 통해 형평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우리 시대가 형평운동을 기억하는 방식은 신분 차별이라는 봉건적 굴레를 철폐하고 근대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는 과정이었으며, 다양한 사회단체 및 일본의 평등운동인 수평운동과의 국제적 협력과 연대까지도 이룩했던 선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보다도 25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인권운동임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형평운동의 서사는 아름답고 교훈적이다. 평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낙후된 사회와 투쟁하여 근대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했고 이 운동에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 차별의식 때문일 뿐 양반 중에서도 선각자는 처음부터 이 운동에 함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야기 해서는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근본 강령”이라고 하지만, 무엇이 공평함이고 인간이 서로 애정에 기초한 연대를 통해 만들어내는 차별 없는 사회란 어떤 것인지는 결국 따져보면서 실현해가야 할 과제이지 그 이상만으로 힘이 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형평운동은 낡은 계급의 철폐를 내세웠지만, 이때의 계급은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이 말하던 무산·유산 계급의 계급과는 반드시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백정들은 사회의 가장 빈곤한 계층도 아니었다. 백정 중에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자산을 축적한 계층부터 일반 소작농들보다는 생계에 여유가 있는 계층, 빈곤한 계층이 혼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부 노동자들이 신분에 대한 차별의식 때문에 형평운동에 반감을 품은 것도 사실이고, 백정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아 충돌을 빚은 예도 있었다. 또한, 형평운동의 일부 세력은 도축업을 둘러싼 이권에 치중하거나, 연대와 투쟁보다는 계몽을 통한 협력적 노선을 추구하기도 했다. 신분이라는 이름의 계급을 철폐하는 운동과 새롭게 등장하는 무산 계급의 운동은 서로 연대를 모색했지만 쉽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형평사를 둘러싼 갈등이 형평운동의 한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형평운동 당시 차별을 둘러싸고 벌어진 현실 속의 역동에서 교훈을 찾기보다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권이라는 정답의 기원으로 투쟁의 역사를 박제화하는 습관이다. 형평운동 속의 다양한 흐름과 갈등, 하나의 차별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 현실세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른 운동과 빚게 되는 충돌은 형평운동의 역사를 살아 있는 현재로서 느끼게 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차별이 단지 신분적 차별만이 아니며, 인권의 실현이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종종 잊곤 하는 사실을 형평운동은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형평사 설립 취지문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근본 강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며,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본사(本社)의 취지이다.
지금까지 우리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어떠한 압박을 받아 왔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과 피눈물을 금할 수 없다. 여기에 지위와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유도 없이 일전의 압박에 대해 절규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 문제를 선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급무이다.
비천하고 가난하고 열악하고 약하여 굴종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아아 그것은 우리의 백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러한 비극에 대한 이 사회의 태도는 어떠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는 압박과 멸시만 하였다. 이 사회에서 우리 백정의 내력을 아는가? 결단코 천대받을 우리가 아니다. 직업의 구별이 있다고 하면 짐승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은 우리 백정밖에 없다. 본사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의 실정에 따라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이천만의 일원이다. 애정으로써 서로 도우며 생명의 안정을 도모하고 공존을 바라고자 이에 40여 만의 단결로써 본사의 목적과 취지를 밝힌다.
이 사료는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설립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이하 형평사)의 설립 목적을 밝힌 설립 취지문이다. 형평사는 설립 취지문을 통해서 그동안 백정들이 사회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백정(白丁)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을 해결하고 다른 일반 민중들과 서로 공존하기 위해 형평사를 설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시대 백정은 도살업을 하거나 가죽 제품이나 유기(柳器)제품 제조 등 이른바 ‘천역(賤役)’에 종사했던 계층을 일컫는다. 백정은 천역에 종사했던 대표적인 천민(賤民)이었기 때문에 일반 양인(良人)들과는 사회적 대우 및 지위가 엄격하게 구분됐다. 당시 백정들은 기와집에 거주하거나 명주옷, 가죽신 등을 착용할 수 없었고, 일반 양인들과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그들 앞에서 흡연과 음주도 할 수 없었다. 또 백정들은 법적으로 백성의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교육을 받거나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병역과 납세의 의무에서도 배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백정에 대한 차별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백정들에 대한 차별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습으로 이어진 백정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1920년 무렵까지도 여전했다.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백정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마주해야 했던 백정 출신들은 직접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 대우 개선을 얻어내기 위한 움직임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당시 일본에서 백정과 비슷하게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던 부락민(部落民)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 수평운동(水平運動)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접한 백정 출신 자산가들과 일부 지식인 계층은 백정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단체 결성이 시도됐고 그 결실로 탄생한 것이 형평사였다.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姜相鎬, 1887~1957), 신현수(申鉉壽, 1893~1961), 장지필(張志弼, 1898~미상) 등을 비롯한 80여 명의 사람이 참여한 가운데 형평사 창립대회가 개최됐다. 이날 창립대회에서 형평사는 형평사의 설립 취지문과 회칙을 채택하여 통과시켰고, 형평사를 이끌어 갈 임원으로 강상호, 신현수, 장지필, 천석구(千錫九, 생몰년 미상)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했다. 이처럼 창립대회를 통해서 중앙조직이 조직되자, 이에 발맞춰 다른 지역에서도 형평사 지·분사가 설립됐다. 1923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형평사 지·분사 불과 2년 뒤인 1925년에는 전국적으로 100여 개가 넘은 지·분사가 설립되며 대규모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1923년 설립 이후 형평사는 백정 출신에 대한 차별철폐와 인권신장, 안정적인 생활 보장, 교육과 계몽 활동에 주력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1924년 무렵 형평사 총본부를 서울에 둘 것인지, 아니면 대전에 둘 것인지를 두고 내부 대립이 펼쳐졌다. 전자를 주장한 그룹은 대체로 사회운동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백정 출신과 지식인들이었고, 후자를 주장한 그룹은 백정 출신 자산가들이 주를 이뤘다. 이러한 양자의 대립은 형평사의 활동 방향을 다른 사회운동과 적극적인 연계에 둘 것인지 아니면 백정들의 권익 옹호에 둘 것인지를 둘러싼 노선 갈등이었다. 양자의 치열한 노선 대립은 결국 1925년 다른 사회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주장한 그룹이 승리하면서 형평사 총본부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내부의 갈등을 봉합한 형평사는 이후 1925년 이후 다른 사회운동과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1930년대 초 사회운동 전반에 노선 변화를 요구하면서 신간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 내부에서 해소 논쟁이 촉발됐다. 형평사도 1931년부터 격렬한 해소 논쟁을 겪으며 조직의 역량이 크게 손상되기 시작했고, 2년 뒤인 1933년 이른바 ‘조선형평전위동맹’ 사건을 거치며 급격하게 퇴조하기 시작했다. 1933년 이후 사실상 사회운동 단체로서 존재감을 상실하게 된 형평사는 결국 1935년 4월 단체 명칭을 대동사(大同社)로 변경하고, 일제의 전시체제를 보조하는 활동하는 사실상 관변단체로 전락하게 됐다. 그러나 조선형평사를 중심으로 한 형평운동은 백정 출신들이 직접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인격체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전개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인권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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