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 대화여 : 성 중 상
성 : 성왕 대화여
중 : 중흥
상 : 상경으로 수도 이전
1. 성왕 대화여
성왕 대화여는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5대(재위:794~795) 왕이다. 재위기간은 794∼794 겨울. 이름은 ‘대화여(大華璵)’. 할아버지는 문왕이며, 아버지는 대굉림(大宏臨)이다. 폐왕 대원의(大元義)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고 중흥(中興)이라는 연호를 세웠으나 곧 죽었다.
- 793년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여가 즉위하여 연호를 중흥으로 고치고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도읍을 다시 옮겼다.
- 794년 1월 왕족 대청윤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 794년 1월 이후 대화여가 죽었고 시호는 성왕이다. 이후 삼촌인 대숭린이 즉위하였다.
2. 중흥
폐왕 대원의가 쫓겨난 후 즉위했고 수도를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으며 이곳은 발해 멸망까지 수도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6개월도 채 안되어 생을 마감하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삼촌인 대숭란이 다음 왕에 올랐다. 삼촌인 대숭린이 대원의를 폐위시킨 후 일시적으로 조카인 성왕 대화여를 즉위시켰다가 어린 성왕이 요절하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측되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발해도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매우 적어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발해의 단종과 수양대군 같은 관계일 수도 있다.
대화여는 상당히 주관이 뚜렷하고 능력 있는 통치자였다. 대화여는 즉위 후에 연호를 ‘중흥’으로 바꾸어 국가를 중흥 시키겠다고 결의 하였다. 또한 통치 집단 내부에서 같은 편끼리 서로 죽이는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바로잡기로 결심하였으며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대화여는 794년 겨울에 사망하였고 시호를 ‘성왕’이라고 하였다.
3. 상경으로 수도 이전
상경용천부는 5경 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었다. 발해의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755년 무렵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785년 무렵 다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하더니 제5대 성왕 대화여(大華璵)에 이르러 다시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발해국이 망할 때까지의 수도였다.
≪요사 遼史≫에는 ‘홀한성(忽汗城)’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상경용천부가 홀한하(忽汗河), 즉 지금의 목단강(牧丹江)변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이다. 발해국을 멸한 거란은 발해국의 옛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이 상경용천부를 수도로 하고 천복성(天福城)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동단국의 수도를 요양(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뒤 폐허가 되어 성터와 왕궁터가 남아 있다. 이 유적은 1933∼1934년에 일본의 도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에 의하여 조사, 발굴되어 1,200여 년간 지하에 묻혔던 발해국의 문화가 밝혀짐으로써, 발해역사의 해석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중경현덕부의 위치 비정은 정약용(丁若鏞)의 후르하[虎里河] 서북인 액돈산(額敦山)을 비롯해, 나단포러[那丹佛勤], 화전현(華甸縣)의 소밀성(蘇密城)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이 중 1915년 일본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주장한 길림성(吉林省)돈화(敦化)로 비정하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33년에서 1934년에 걸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발굴해 발해의 도성 규모가 밝혀짐에 따라 중경현덕부의 돈화설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돈화분지의 여러 산성이나 소밀성은 규모가 너무 작아 발해왕국의 수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1934년부터 상경용천부와 같은 규모의 도성 유지(遺址)를 찾으면서 두만강 북안에서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 기슭의 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서고성자는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의 일본인들에 의해 1937년, 1943년, 1945년에 각각 발굴되었다. 도리야마 기이치 등은 발해의 중경현덕부임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였으며, 1942년 사이토 진베이[齋藤甚兵衛]가 조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0년대 말 화룡현 서고성자 부근에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와 완전한 석각 묘지(墓誌)가 출토되어 이 서고성자가 발해의 중경현덕부였다는 사실이 확실시되었다. 또한 이 성의 평면구조가 발해 도성이었던 상경성(上京城)이나 팔련성(八連城)과 거의 같다는 점과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로도 고고학적으로 이 성이 서경성(西京城)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서고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은 장방형이며 동서 길이가 600m, 남북 길이가 720m이다. 내성은 외성 중간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 길이는 310m, 동서는 190m이다. 내성에는 5개의 궁지(宮址)가 있고 3개의 궁지는 남북 중추선에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최근에는 사이토가 1942년 무렵 입수했던 항공사진이 확인됨으로써 서고성지 및 그 주변의 하남둔 고성(河南屯 古城)과 인근 고분군들의 당시 모습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경현덕부의 소속 주(州)로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주가 있었으며, 현주의 포(布), 노주의 도(稻), 그리고 철주의 속현(屬縣)인 위성의 철(鐵)은 발해의 기간산업으로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문왕이 발해의 건국지인 ‘구국(舊國)’에서 중경현덕부로 천도한 것은 이 지역의 철을 비롯한 자원 개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경현덕부는 무도평원과 연길의 조양천평원 모두 관개에 편리하여 농업발전에 적합한 지역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신라와의 외교교섭을 펼치는 데 있어서도 보완이 되는 곳이었다. 이러한 입지와 위상 때문에 중경현덕부는 상경용천부와 더불어 발해의 중심 수도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동경용원부는 발해 5경 중의 하나이다.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785년 무렵 이곳으로 천도한 이후 제5대 성왕 대화여(大華璵)가 다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하는 794년까지 약 10년간 발해의 수도였다. 일명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며, 속주(屬州)로는 경(慶)·염(塩)·목(穆)·하(賀)의 4주가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신당서≫에는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기점으로 되어 있고, 또 상경용천부에서 동남쪽의 바다에 가까운 것으로 그 방향을 밝히고 있어, 지금의 간도 혼춘(琿春)설, 간도의 국자가(局子街)설, 함경북도온성(穩城)·종성(鍾城)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설, 니콜리스크(Nikolisk)설 등이 있다. 이처럼 혼란을 보였던 동경용원부의 정확한 위치는 1942년에 이르러 혼춘현의 반라성(半拉城) 발굴 결과 그 유지의 규모가 상경용천부나 중경현덕부와 겨룰만하다는 것이 밝혀져 동경용원부를 혼춘에 비정하는 데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반라성의 출토품에서 중요한 것은 이불병좌상(二佛幷座像)으로 알려진 유물이 고구려계통의 영향을 가장 뚜렷이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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