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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선왕 대인수 두문자 : 선 건 해

by noksan2023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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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 대인수 : 5경 15부 62주

 

선왕 대인수 : 선 건 해

 

선 : 왕 대인수

건 : 흥(818~830)

해 : 동성국(최대 발해영토 요동~연해주)

 

 

선왕 대인수 : 해동성국
선왕 대인수 : 해동성국


1. 왕 대인수

이름은 대인수(大仁秀). 대조영(大祖榮), 즉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 발해국은 제6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이 809년에 죽은 뒤 그를 이은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부터 희왕(僖王) · 간왕(簡王)에 이르는 3대 왕의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아 정치적 불안을 나타내며 국세는 위축된 듯했는데, 818년 선왕 대에 이르러 침체된 국세가 회복되었다.

 

≪신당서≫에는 “선왕이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영토를 크게 넓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쑹화강(松花江) 하류에서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 걸쳐 살며 발해국과는 예로부터 대립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815년에 다시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다가, 선왕 대 이후 당나라와의 조공 관계가 단절되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증하고 있다. 선왕이 넓힌 영토의 구체적인 지역을 밝힐 만한 자료는 없으나, 발해 전국의 행정 구역을 가리켜 5경(京) 15부(府) 62주(州)라 하고, 또 그 번영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표현할 만큼 대내외적인 치적을 남겼다.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는 819∼820년의 2년간에 무려 16회나 조공사를 보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과도 매우 활발하게 사신을 교환해, 마치 종주국이나 된 듯이 들떠 있던 일본에서도 이들을 맞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 827년에 이르러서는 12년마다 한 번씩 사신을 받기로 제한할 정도였다. 이것은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을 이용, 관·사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에 따른 것이었다.

 

818년 즉위하자마자 말갈의 여러 부락들에 대한 정복 사업을 단행하여 2년만인 820년 마무리했다. 이때 정복한 말갈 부락은 우루, 월희, 흑수로 추정되는데 우루, 월희, 흑수의 대당 조공이 이 시기에 끝나기 때문이다. 우루, 월희는 완전히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했는데 이 세력들 역시 이탈 이후 재확보한 것이다. 이 지역은 무왕 대의 정복 사업 중에 이미 지나갔던 지역이었다. 이 세력은 완전히 발해에 흡수된 다른 부족들과도, 끝까지 버틴 흑수부와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흑수는 복속이나 통제 정도에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흑수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땅 전부를 말하기 때문에 전부 통합하고 다스린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어려웠다. 때문에 발해의 국력이 약해지면 이탈하는 동시에 일부 부족에서는 중국으로 조공 사신을 보냈다. 이는 당시의 국제 질서에서 발해와는 별개의 세력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당나라 또한 사신들을 모두 받아주어서 발해를 엿먹이는데 이용하였다. 결국 흑수부는 발해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흡수되지 못했다. 일부 사료에 의하면 발해가 흑수부 내의 강역까지도 점거하여 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료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정확한 실체 규명이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요사》에 의하면 서쪽으로 요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소고구려가 존재했다고 추정한다면 이 때 발해에 흡수되어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요사》에 발해가 이 시기에 요동에 군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 문왕 시기까지 이미 요동 지역은 발해의 영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혼란기 때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을 다시 확보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이미 정복한 지역에 대해서 다시 정벌하는 기록이 선왕 시기에 자주 보인다. 우루, 월희, 흑수 모두 무왕이나 문왕 시기에 정복한 전력이 있던 지역들이다. 그런데 요동을 정복한 것이 소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고구려가 선왕에 의해 멸망된 것이 거의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요사》 <지리지> -흥료현조-에서는 선왕 대인수가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남쪽 신라를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요사》 자체가 중국의 24사(二十四史) 중에서 가장 정확성이 떨어지고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오류가 많은 책이고, 신라 측 기록이 원전일 《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기록에는 발해가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없다. 고고학적으로도 신라 북변에 발해 남하의 흔적이 미약하기 때문에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요사》 <지리지>의 신라 평정 기록을 신뢰하더라도 이는 신라 북변의 대동강 이북까지 진출한 것이 와전되었거나 일부 이탈한 반란 세력들을 다시 귀부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은것으로 추정이 된다. 신라와 발해의 국경 역시 이르면 고왕 시기, 늦어도 무왕 대에는 확정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라가 헌덕왕 때에 대동강변에 300리에 걸친 패강장성(浿江長城)을 건설하고, 황해도와 평안도 땅에 군현을 대거 설치한 것으로 보아 전쟁이나 큰 분쟁은 아니라도 발해로부터 어떤 위협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북쪽 방면으로는 멸망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두막루가 이 때 선왕에 의해 발해에 병합된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막루가 발해에 병합되었다는 근거는 이러한 정황적 추측 외에는 딱히 없다. 오히려 물길 때문에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반면에 당나라 방면 외교는 꽤나 유화적인 기조를 띄었고 당헌종의 번진 토벌이 평로•치청에 이르렀을 때 평로•치청 번진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다. 제3대 문왕이 평로•치청에 위치한 등주에 솔빈부의 말을 보낼 정도로 교역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조치다. 이에 당나라는 820년에 금자광록대부, 겸 고사공직을 더하여 줌으로써 화답했고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2. 

선왕 대인수는 발해의 전성기를 일으킨 대표적인 명군이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다.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과 수능이나 공무원 수험서에 등장하는 발해 4명의 군주(고왕, 무왕, 문왕, 선왕) 중 한 명인지라 수험생들이나 조금 알 듯 싶다. 애초에 남은 기록 자체가 거의 없다. 삼국시대처럼 자체 기록이 있는 게 아니라 당이나 거란(요나라), 신라, 일본 같은 주변국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시호가 선왕이라 인터넷에 선왕으로 검색하면 선대 군주을 의미하는 선왕(先王)에 밀려 이 사람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꽤 힘든 편이다. 이름인 대인수로 검색하는 것이 더 좋을 정도. 그런데 대인수로 검색해도 나오는게 별로 없다. 선왕뿐 아니라 발해 왕들 대부분이 시호로 검색하면 휘로 검색하는 것에 비해 자료를 찾기 힘들다. 1대 고왕의 경우도 고왕보단 대조영으로 훨씬 널리 알려져 있고, 2대 무왕은 백제에도 있어서 혼동되고 3대 문왕은 중국의 주나라에도 있다. 그 외 군주들은 검색해도 나오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혼동하고 말고를 따지는 의미도 없다.

 

 

발해 영광탑 : 벽돌(전탑)양식의 석탑
발해 영광탑 : 벽돌(전탑)양식의 석탑

 

 

3. 동성국

건국 후, 발해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해는 북쪽으로 돌궐과 통하고 바다 건너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당은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 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에는 발해와 신라 사이에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신라 국경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까지 역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 어느 정도 교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 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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