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역사서 : 제 발 동 강 해 조
제 : 이승휴의 제왕운기
발 : 유득공의 발해고
동 : 이종휘의 동사
강 :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해 : 한치윤의 해동역사
조 :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1. 이승휴의 제왕운기 : 남북국 용어 최초 사용
이승휴는 『제왕운기』의 저술 동기를 고려, 즉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조군왕세계연대」의 말미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생존기간은 무신의 난과 30여 년간에 걸친 몽고와의 항쟁으로 왕권이 약화되어가고 있었고, 정치기강마저 해이해지던 때였다. 그리고 몽고와의 강화로 인해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되면서 자주국으로서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태였고, 원나라의 세력에 편승한 부원세력가의 반사회적인 책동에 의하여 국내외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신진사인(新進士人)으로 등제해 직간과 파직으로 연속된 정치활동을 하였다. 『제왕운기』도 1280년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세력가들을 비판한 10여 건의 폐단을 상소했다가 미움을 사 파직되어 은둔한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역사시는 당시의 대내외적인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출발해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포원(布願)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가질서의 회복을 기원하고 있었으므로 실정한 군주, 왕권에 도전한 신하를 드러내어 폄론하고, 군신이 각각 갖추어야 할 유교적 정치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제왕운기』는 난세에 정치·사회 윤리의 재확립을 목표로 한 것이며, 그 가치기준을 역사에서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한편 그것은 원나라에 대한 저항의식의 소산이었다. 당시 현실의 모순은 궁극적으로는 원나라의 침략과 정치적 간섭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음을 그는 누구보다도 명확히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정치적·군사적 열세로 인해 원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그는 두 차례에 걸친 원사행(元使行)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대제국을 형성해가고 있던 원나라의 위력을 직접 목도하면서 우리의 문화마저도 그 속에 흡수되어버릴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자국의 강역과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각의식이 싹터 역사서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상권에는 서(序)에 이어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은(殷)·주(周)의 3대와 진(秦)·한(漢)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 칠언고시 264구로 읊어놓았다.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었다. 전자에는 서에 이어 지리기(地理紀),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찬탈, 삼한(三韓)을 계승한 신라·고구려·백제의 3국과 후고구려·후백제·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칠언고시 264구 1,460언으로 서영(敍詠)하고 있다. 후자는 고려 태조 세계설화(世系說話)에서 필자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 오언으로 읊고 있다. 체재상으로 볼 때 오언·칠언의 영사시(詠史詩)이다. 이러한 체는 고려 명종 때 오사문(吳士文)의 「역대가(歷代歌)」가 그 시초이며, 『제왕운기』는 규모가 크고 훨씬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특히, 장체(長體)의 영사시는 가사문학의 원초적 형태로서 고대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제왕운기』는 같은 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역대가」와 함께 장가체의 설화적 가사로 국문학 상의 가치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제왕운기』의 구성은 중국사·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했고, 강역도 요동(遼東)에 따로 천지세계가 있어 중국과 엄연히 구별되는 생활영역임을 밝혔다. 또, 우리 민족은 중국인과 다른 천(天)과 연결되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민간신앙이나 고기류 등을 통해 전승되어온 단군신화를 한국사체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해 고려 태조에 귀순해온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 속에 편입시켰다. 그것은 만주일대까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것이며, 영토회복의 의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국민 각자에게 자각하게 하여 몽고의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동명왕편」과 함께 고려 중기의 대민족서사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몽고의 강대한 외압 때문에 가지게 된 문화적 위기의식과 저항정신은 같은 시기에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던 동기와 같다. 그러므로 양자는 단군을 한국사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선구자적인 역사서술을 남기게 된 것이다. 『제왕운기』에서 시작된 단군기원의 역사의식은 고려 말 개혁파 신진사류에게 전승되어 그들이 조선을 개국하였을 때 단군을 국조로서 치제화(致祭化)했고, 『동국통감』을 비롯한 정사에서도 그가 국조임을 밝혀 우리 역사의 첫머리에 기록하게 되었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시작을 단군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몽고간섭 하에서 성장된 민족의식에 짝하여 삼국 이전의 상고사를 한국사에 편입시킨 『제왕운기』의 사학사상의 위치는 매우 크다.
2. 유득공의 발해고
유득공의 발해고는 조선후기 학자 유득공이 발해의 역사·문화에 대한 내용을 엮어 1784년에 저술한 역사서이다. 『발해고』는 서문(序文) 외에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등 9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고는 일종의 본기(本紀)에 해당되는 부문으로, 진국공(震國公)·고왕(高王)·무왕(武王)·문왕(文王)·폐왕(廢王)·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僖王)·간왕(簡王)·선왕(宣王)·이진(彛震)·건황(虔晃)·현석(玄錫)·인선(諲譔)·흥요왕(興遼王) 및 염부왕(琰府王)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진국공은 성이 대씨(大氏),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고구려에 신속(臣屬)한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라고 하였다. 진국공의 아들 고왕조영(祚榮)은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로서 고구려·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이해고(李楷固)의 군대를 무찌르고 동모산(東牟山)에서 건국했다고 한다. 염부왕에 대해서는 “비록 그 성명은 말하지 않았으나 태종의 조서에 나타나므로 그가 대씨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이 어느 때에 있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신고는 성명 미상자를 제외하고 대문예(大門藝)를 포함하여 83인의 발해국 문·무신과 학자·외교관 등에 대해 쓴 일종의 열전(列傳)이다. 지리고는 5경(五京)·15부(十五府)·62주(六十二州)와 군(郡)·하(河)·성(城) 등에 관한 내용이고, 직관고는 문·무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의장고는 품계에 따른 복식(服式) 및 동경(東京)의 의위(儀衛)에 대하여, 물산고에서는 몇몇 지방의 산물에 대해 다루고 있다. 국어고에서는 발해의 몇몇 칭호를 소개했는데, 왕을 가독부(可毒夫)·성왕(聖王)·기하(基下)라 했으며, 명(命)을 교(敎)라 했고, 왕의 아버지를 노왕(老王), 어머니를 태비(太妃), 처를 귀비(貴妃), 장자를 부정(副正), 제자(諸子)를 왕자, 관품을 질(秩)이라 했다고 한다. 국서고에는 주로 일본에 보낸 국서가 실려 있는데, 무왕과 문왕이 각각 성무(聖武)왕에게, 강왕이 환무(桓武)왕에게 보낸 것들이다. 무왕의 국서에서는 발해국을 두고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한 것으로 부여의 유속이 있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고 한 글귀가 소개되는데, 이는 발해의 고구려의식을 짐작하게 한다. 끝으로 속국고에서는 “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의 종(種)으로서 거란에게 파한 바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정안국왕 오현명(烏玄明)이 “신은 본래 고구려의 구양(舊壤), 발해의 유예(遺黎)로서 방우(方隅)를 보거(保據)하였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자 자신의 강렬한 비판 위에서 쓰여진 것이다. 고려가 발해사를 쓰려고 했다면 고려에 망명 온 발해 유민 십여만 인을 통해서 능히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당나라 사람 장건장(張建章)도 일찍이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썼는데, 어찌 고려 사람으로서 발해의 역사를 편수하지 못했겠는가하고 반문하고 있다. 저자는 발해가 멸망한 지 수백 년이 지나 문헌이 산망(散亡)하여 제대로 쓸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신당서(新唐書)』·『구당서』를 비롯한 17종의 중국 서적과 『삼국사기』·『고려사』·『동국통감』 등의 한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일본일사(日本逸史)』 등의 일본사서 등 총 22종을 참고하여 이 책을 썼다. 저자는 또 이 책을 세가(世家)·전(傳)·지(志)라 하지 않고 고(考)라 한 것은 사(史)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종래 발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동국통감』·『동사강목』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서술되어 오다가, 허목(許穆)의 『기언(記言)』 과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는 독립된 항으로 서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분량이 미미했을 뿐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도 이종휘를 제외하고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범주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득공에 이르러 서술 분량과 성격에 있어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한국사화(韓國史化)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며, 그 뒤 이러한 성격은 한치윤(韓致奫)·홍석주(洪奭周)·정약용(丁若鏞)·김정호(金正浩) 등에게 일정하게 전수된다고 하겠다.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수용해야 한다는 저자의 이론적 근거는 『발해고』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밝혀 우리 민족사의 범주로 끌어들였고, 신라와의 병립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려가 발해사를 찬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발해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여진·거란에 대해 영토적 권리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발해고』의 사학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3. 이종휘의 동사 : 기전체 최초 발해 우리나라 역사로 언급
이종휘의 동사는 조선후기 학자 이종휘가 기전체형식으로 서술한 역사서이다. 『동사』는 기전체형식에 따라 본기(本紀) · 세가(世家) · 열전(列傳) · 연표(年表) · 표(表) · 지(志)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조선과 삼한, 그리고 부여 · 고구려 계통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것이 특징이다. 지은이가 고대사에 주로 관심을 둔 것은 우리 고대의 문화와 영토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즉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자가 된 이후 중국에는 이미 중화(中華)의 전통이 끊어졌고 오직 우리나라만이 중화의 문화를 간직한 선진국가라는 인식하에, 이미 단군 · 기자 때부터 중국의 삼대(三代)와 같은 문화가 형성되어 고구려 · 발해로 이어져 온 것으로 재구성하였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부여 · 고구려 · 백제 · 예맥 · 옥저 · 비류 등을 모두 단군의 후예인 것으로 간주하고, 발해 또한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정함으로써 이들이 만주에 세웠던 나라들이 본래 우리의 강토였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하였다.
또한 고려 때 윤관이 개척한 9성도 그 최북단인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요수(遼水)를 우리나라의 8대 강 중에 포함시킴으로써 요하 동서지방도 우리 강역 안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만주를 잃은 고려 이후의 강토도 3,000리가 아니라 제주도까지 포함하면 지방(地方) 6,000리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강토 속에 우리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후와 풍토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리적 측면에서도 중화국가로 자부하는 데 손색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지은이가 구성한 한국사는 중국 주변의 조그만 제후국가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과 마찬가지로 천하를 포용하는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단군 기자 위만조선을 3조선이라 하여 3황(三皇)에 대비되는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며 이를 본기(本紀)에 넣고, 부여 · 옥저 · 비류 · 예맥 · 삼한 등도 고조선에 신속(臣屬)한 나라로 보아 고조선의 역사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특히 삼한을 단군 · 기자조선에 신속한 나라로서 생민(生民)의 초기부터 있었다고 한 것은, 삼한을 중국의 유망민 집단으로 해석하고 기준(箕準) 이후부터 마한이 성립하였다고 보는 통설과는 다른 것이다. 다만, 위만에게 쫓겨난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왕이 되었다는 것은 긍정했으며, 마한이 삼한의 맹주로서 54국을 거느리는 대국이었다는 점에서 삼한을 삼한본기로 서술하고 이를 후조선본기(위만조선) 앞에 배치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의 성립보다도 삼한의 성립이 앞선 것으로 본 까닭이다.
지은이의 역사인식은 유학자의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체(史體)인 강목법(綱目法)과 정통론(正統論)을 따르지 않았으며, 또 유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미신으로 간주되던 귀신 숭배의 전통을 신사지(神事志)라는 독립된 항목을 두어 정리한 것이 특이하다. 이 신사지에는 환웅, 즉 신시천왕(神市天王)이 이신설교(以神設敎)한 이후, 마니산의 참성단과 강화도의 삼랑성, 구월산의 삼성사, 고구려의 동맹, 신라의 성모사(聖母祠), 그리고 삼신산(三神山)에 대한 신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내력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유학자들이 대체로 황당무계한 것으로 배격하던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상당 부분 채용하여 단군을 환씨(桓氏)로 호칭하고, 백성들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를 가르치고 군신 · 남녀 · 음식 · 거처의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팽오(澎吳)에게 명하여 산천과 백성의 거처를 정했고, 아들 부루(夫婁)를 도산(塗山)에 보내 하(夏)나라 임금 우(禹)를 만나게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단군을 수출성인(首出聖人)으로 격상시킨 것도 이와 같이 단군시대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데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종휘의 역사의식은 『동사』에 집중적으로 반영되는데, 그가 드러내어 강조하고자 한 역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부여 · 예맥 · 비류 · 옥저 · 고구려 · 백제 등을 단군의 후예로 간주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뿌리에 있어서 단군이 차지하는 혈통 및 문화적 위치를 격상시켰다. ② 발해를 말갈계통으로 인식해온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이를 고구려 유민에 의해 성립된 국가로 설명함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입시켰다. ③ 우리나라의 고대문화는 기자로부터 중국의 이상시대인 3대의 문화가 유입되어 소중화로서의 높은 문명단계로 진입했고, 이어 삼한 · 고구려 · 발해로 이어짐으로써 우리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화국가라 자부할 수 있는 문화국가가 되었다. ④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된 이후의 우리나라 강토도 제주도까지 포함시켜 볼 때 폭원(幅員)은 1만 리에 이르고 지방(地方)은 6,000리에 이르므로 결코 소국이 아니며, 그 안에는 중국이 갖추고 있는 기후 · 풍토 · 산물의 다양성이 있어 하나의 독립된 천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 역사도 중국천자만이 칭하던 본기라는 서술방식을 따를 수 있다.⑤ 미래의 과제로는 단군 이래 우리의 영토였던 만주지방, 특히 요심(遼瀋)지방을 다시 수복함으로써 문화적인 면에서의 소중화로서 그칠 것이 아니라 영토면에서도 대국으로 부상해야 한다.
4.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 순조 발해의 수도 백두산 동쪽
아방강역고는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우리나라 강역에 관하여 1811년에 편찬한 지리서. 역사지리서이다. 정약용이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에서 우리나라의 강역을 문헌 중심으로 살피고 그 내용에 대하여 고증한 책이다. 고본(稿本)으로 10권이 전해오다가 1903년에 장지연(張志淵)이 증보하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로 책명을 바꾸어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서 활자본 9권으로 간행하였다. 그 뒤 1936년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된 154권 76책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6집 지리집에 『대동수경(大東水經)』과 같이 『강역고(疆域考)』를 포함시켰다. 『여유당전서』에 포함된 『강역고』는 원래의 10권을 4권으로 만들었다.
내용 구성은 제1권에 조선고(朝鮮考)·사군총고(四郡總考)·낙랑고(樂浪考)·현도고(玄菟考)·임둔고(臨屯考)·진번고(眞番考)·낙랑별고(樂浪別考)·대방고(帶方考)·삼한총고(三韓總考)·마한고(馬韓考)·진한고(辰韓考)·변진고(弁辰考) 등이 있고, 제2권에 변진별고(弁辰別考)·옥저고(沃沮考)·예맥고(濊貊考)·예맥별고(濊貊別考)·말갈고(靺鞨考)·발해고(渤海考) 등이 있다.
또한 제3권은 졸본고(卒本考)·국내고(國內考)·환도고(丸都考)·위례고(慰禮考)·한성고(漢城考)·팔도연혁총서상(八道沿革總敍上)·팔도연혁총서하(八道沿革總敍下)·패수변(浿水辯)·백산보(白山譜), 제4권은 발해속고(渤海續考)·북로연혁속(北路沿革續)·서북로연혁속(西北路沿革續) 등으로 되어 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발해에 이르는 우리 나라 강역의 역사를 중국 및 우리 나라의 문헌을 들어서 고증하고, 저자의 의견을 별도로 첨부하여 그 내력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에 관한 내용이 있기는 하나 대부분은 한사군(漢四郡)·발해·북로(함경도)·서북로(평안도) 등 북방에 대한 강계를 밝히는 데 힘쓰고 있다. 부족이나 국가 외에도 위치의 비정(比定)에 문제가 많은 국내·환도·위례·패수 등에 대하여 상세한 고증을 하고 있다. 또한, 강역의 고증에 그치지 않고 잘못 기록된 지리서의 정정에도 힘쓰고 있다. 즉, 『동국여지승람』에 기자의 정전(井田)이 평양부 남외성(南外城) 안에 있다고 기록한 것은 믿을 수 없으며, 기자가 정전제를 시행하였으면 어찌 평양 일부에만 한정되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이적(李勣)이 이곳에 유둔(留屯)할 때에 만든 둔전(屯田)의 유지(遺址)라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한백겸(韓白謙)의 『동국지리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와 같이 실학자가 저술한 우리 나라의 역사지리서로서, 사료를 비판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서술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지리서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신조선사에서 발간된 『여유당전서』는 1970년에 이우성(李佑成)의 해제와 더불어 6책으로 압축, 영인되었다.
5. 한치윤의 해동역사 : 신라사 발해사를 동등하게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사실을 기전체로 서술한 역사서. 한국통사이다. 한치윤이 지은 본편(本篇) 70권과 조카 진서(鎭書)가 보충한 속편(續篇) 15권을 합쳐 모두 85권이다. 책은 한치윤이 죽기 10여년 전부터 착수해 본편 70권만 이루고 죽었다. 이에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지리고(地理考) 15권을 진서가 속편으로 완성한 것이다. 청나라 마숙(馬驌)이 찬술한 ≪역사 繹史≫를 모범으로 하여 ‘해동역사’라 했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東史綱目≫이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을 본떠서 한국사의 강목을 꾸민 것과 유사하다. 책의 찬술 동기는 종래의 한국사가 엉성하고 조잡하게 편찬되어 이를 바로 잡고, 객관적인 한국사의 참모습을 찾기 위함이었다. 체재는 정사체(正史體)인 기전체를 따랐으나 표(表)는 생략했다. 그리고 객관적인 찬술을 위해 550여종의 인용서를 동원하였다. 즉, 중국의 사서 523종, 일본의 사서 22종과 한국의 기본서를 참고로 했다. 편찬 방법은 고대에서 고려까지의 왕조를 세기(世紀)로 삼고, 지(志)와 전기(傳紀)를 덧붙였다. 전기는 인물고(人物考)라 했다. 한진서도 속편을 지리고라 하여 본편의 지와 구별했다. 그러나 기전체인 점에서 ‘지리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위에 말한 방대한 인용서에서 한국 관계의 기사를 모조리 발췌한 뒤 이들을 세기·지·전기로 유취해 편찬하고, 그들 기사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안서(按書)’를 병기(倂記)해 바로잡거나 자기의 의견을 곁들이는 방법을 취했다. 따라서, 원문은 모두 외국의 사료를 취해 엮은 한국의 통사이고 여기에 편찬자의 의견과 교감(校勘)이 붙는 형식이었다. 특히, ‘지’부분은 한국의 문화사적인 발달 상황을 볼 수 있도록 객관적으로 편찬됐다는데 의미가 있으며, 속편의 지리고는 고증면에서 우수함을 보이고 있다. 저자가 이러한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앞서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에서 다양한 내용이 취급되었고, 한치윤이 연경(燕京)에 머무르면서 직접 목도한 청나라의 다양한 문물과 폭넓은 연구 경향에 자극받은 것이다. 따라서 개인에 의한 사찬물로서 최초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편찬 당시는 이른바 실학(實學)의 학풍이 선각된 학자와 사상가들에 의해 개진되고 있었고, 경사(經史)만이 아니라 폭넓은 학문 분야가 개척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면서 뜻있는 찬술물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유행되고 있던 유서(類書)의 범주로 볼 수도 있으나, 편찬 동기가 기전체에 의한 찬술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서로 성격짓는 것이 마땅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지나치리 만큼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측면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 결함도 적지 않다. 한 예로 사료 비판이 제대로 되지 못한 외국의 자료를 그대로 뽑는 과정에서 잘못된 서술 내용이 많고, 한국사의 기년(紀年)까지도 중국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일단 있는 자료를 그대로 유취시켜서 한국의 역사를 귀납적으로 객관화시켰다는 데 특색이 있고, 저자 나름의 역사 해석과 고증을 시도한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 뒤 국내에서 널리 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소개되었다. 즉 한국사를 연구하는 문헌 학자들에게 좋은 자료집 내지 입문서가 되었다. 책은 종류를 달리하는 세 가지 판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정교한 필사본(71권 26책)인 원편이 소장되어 있다.
6.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신채호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학술서이다.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이후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원래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제1편 총론에는 신채호의 역사이론이 전개되어 있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겔(Hegel)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그는 이러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취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는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도 제시되어 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해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 역사학을 한다는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였다.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인식체계와 단군·기자·삼한·삼국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3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대단군조선과 불·신·말의 3조선설에는 문제가 많지만, 그가 이러한 체계를 위해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장하고 삼한의 이동설을 제시한 것은 고대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둘째, 이러한 역사체계에 부수되는 것으로 상고시대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는데, 상고사의 역사 무대를 중국 동북쪽 지역과 랴오시(遼西) 지역에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 산둥(山東) 지역을 경영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나 그 뒤의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 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았기 때문에 그 무대도 한반도와 만주일부에 국한되었다.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강조했던 식민주의사관론자들도 한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켰다. 신채호는 이와 같은 종래의 주장들에 반대하고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가 삼국 이전이요, 활동 무대도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 랴오시·발해만 유역·직예성·산둥·산시·화이허(淮河)·양쯔강 유역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래의 한사군의 반도내존재설에 반대하고, 한사군이 실재하지 않았거나 요하(遼河)지역에 존치(存置)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셋째,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중시하나 신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역사를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단재사관에서 고구려는 우리민족을 외세로부터 보호하고 대외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상적 국가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채호는 고구려 900년설을 내세우면서 앞부분 200여 년이 삭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한무제와 대결한 세력이 고구려라고 주장하였다. 백제는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고 하였다. 즉, 근구수왕과 동성왕 때 중국의 랴오시·산둥 지방과 일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백제에 비해서 신라는 대외투쟁을 거의 경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경우 당(唐)세력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통설로서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에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김유신(金庾信)의 음모’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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