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통일과정 : 백 구 려 발 신 백
백 : 후백제 건국(900 견훤 완산주)
구 : 후고구려 건국(901 궁예 송악)
려 : 고려 건국(918 왕건 철원)
발 : 발해 멸망(926 거란족 침입)
신 : 신라 경순왕 고려에 귀부(935)
백 : 후백제 멸망(936)
1. 후백제 건국(900 견훤 완산주)
후백제는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세운 나라이다. 견훤이 892년에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다가 900년에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후삼국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나라이다. 견훤이 신라 왕경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였으며, 공산동수에서 고려 태조에게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고창전투와 운주성전투에서 패하면서 고려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쫓겨났다가 고려로 귀부하였고, 신검도 일리천전투에서 고려에 항복하였다. 후백제는 2대 45년간 존속하다가 936년에 멸망하였다.
후백제는 견훤이 건국하였는데, 견훤은 본래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인 아자개의 아들이었다는 설도 있고 광주(光州)의 북촌(北村)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일찍이 신라 왕경에 들어가 군인이 되어 서남해의 방수군(防戍軍)으로 활동하다가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전국에 기근이 들면서 반란이 속출하는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모아서 왕경의 서남쪽 주현(州縣)을 돌아다니며 공략하였다고 한다. 견훤은 이때 불과 한 달 사이에 자신에게 호응해 온 무리 5,000명을 모아서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하였는데,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 지절(持節) ·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 상주국(上柱國) ·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견훤은 그 뒤에 다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고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 당한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어주겠다”고 표방하면서, 마침내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자칭하고 관직(官職)을 마련하였다.
후백제는 이처럼 건국 과정이 복잡하였는데, 그만큼 논쟁이 되는 부분도 많다. 견훤이 처음에 세력을 떨쳤던 왕경의 서남쪽 주현에 대해서는 강주(康州: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 일대)와 승주(昇州: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 일대) 지역이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광주와 순천 지역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보이는 자료에서 대부분 892년(진성여왕 6)으로 보고 있지만,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조에서 "용기(龍紀) 원년 기유(己酉)", 곧 889년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연구자들도 대체로 후백제가 892년에 건국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930년(경순왕 4)을 "42년 경인(庚寅)"으로 기록한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조를 중심으로 역산하여 889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후백제’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연표와 신라본기 진성여왕 6년조에서 견훤이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하였던 892년으로 기록하였지만, 『삼국사기』 견훤 열전과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조에서는 완산주로 도읍을 옮겼던 900년(효공왕 4)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견훤이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을 칭하였으면서도 공공연하게 칭하지 못하였던 것은 그에게 신라의 왕이 ‘존왕(尊王)의 의(義)’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때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등과 같은 신라의 지방관을 자처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견훤이 ‘후백제’라는 나라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던 892년이 아니라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900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무진주에서도 스스로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라고 서명하였던 것은 그가 이때 이미 전주를 중심으로 공주에서 무진주까지 아우르는 백제 계승 의식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견훤이 무진주에 도읍하였다가 완산주로 옮긴 것은 후백제의 지배 세력이 교체된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견훤은 서남해 방수군(防戍軍)주1을 모체로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는데, 그 세력 기반의 핵심은 당시 다른 반란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적당(賊黨)주2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이 이들을 중심으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가자, 나주(羅州) 일대의 지방 세력들이 불만을 품고 이탈하였다. 그래서 무진주에 도읍하였던 후백제는 배후 지역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견훤은 자신의 초기 세력 기반이었던 무진주를 버리고 점차 내륙으로 북상하다가 새로운 세력의 중심지로 완산주를 선택한 것이다. 견훤은 이곳에서 백제의 부흥이라는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면서 백제계 후예들을 흡수하고 영토를 확대하였으며, 관서를 설치하고 직책을 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후백제의 새로운 정치 세력을 키운 것이다.
후백제는 완산주로 도읍을 옮긴 뒤부터 신라 및 후고구려와 더불어 후삼국을 형성하면서 본격적으로 패권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후백제는 신라를 상대로 907년(효공왕 11)에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 이남의 10여 성을 탈취하였고,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 일대)도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901년(효공왕 5)과 916년(신덕왕 5)에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하였다. 그리고 906년(효공왕 10)에는 상주(尙州) 사화진(沙火鎭)에서 궁예가 보낸 왕건의 군대에 맞서 싸웠으며, 903년(효공왕 7) 이래로 나주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궁예에게서 지배권을 되찾을 목적으로 909년(효공왕 13) 이후부터 나주 인근의 서남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후백제는 이때 전체적으로 후삼국 영역을 태반이나 차지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궁예의 견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후백제는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틈을 이용하여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후백제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지 2달만인 8월 11일 신해(辛亥)에 먼저 일간찬 민합(閔郃)을 보내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죽전(智異山竹箭)을 선물하였다. 이것은 후백제가 고려와 화친을 맺으려는 것이었지만 고려 내부의 정세를 파악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려 건국에 반발하였던 친궁예 세력의 저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후백제는 이때 실제로 태봉 말기부터 웅주(熊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일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이흔암이 왕건을 제거할 목적으로 철원에 들어간 틈을 이용해서 웅주뿐만 아니라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일대) 등 10여 주현(州縣)의 항복까지 받았다. 그리고 매곡(昧谷: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일대) 출신의 경종(景琮)이 918년 9월에 청주 출신 순군리(徇軍吏) 임춘길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누이의 남편이었던 매곡성주(昧谷城主) 공직을 후백제에 귀부시키기도 하였다.
후백제는 이처럼 태조 왕건의 정변에 반발하면서 이탈하는 호족 세력들을 끌어들임으로써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920년(경명왕 4)에는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한 번 공작선과 지리산 죽전을 바치면서 화친을 맺는 한편, 보기(步騎) 1만 명을 이끌고 대야성과 구사성(仇史城: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대)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일대)까지 쳐들어갔다. 그렇지만 고려 태조가 신라 경명왕의 요청을 받고 군대를 보내오자, 견훤은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고려가 동맹을 맺은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견훤이 태조 왕건과 겉으로는 화친을 맺었으나 속으로는 서로 대립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나 후백제는 924년(경명왕 8)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어 대야성과 문소성(聞韶城: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의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그것은 신라 경명왕과 동맹을 맺은 고려 태조에 대한 후백제의 반격이었다. 그렇지만 후백제는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였고, 고려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절영도(絶影島)의 총마(驄馬) 1필을 바쳐야 하였다.
견훤은 925년(경애왕 2) 10월에 직접 기병(騎兵) 3,000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다시 쳐들어갔는데, 이번에는 고려에서도 태조가 직접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왔다. 견훤과 태조는 여기에서도 승패를 보지 못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약속하고 화친(和親)을 맺었다. 그런데 고려에 볼모로 갔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926년(경애왕 3) 4월에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견훤도 고려에서 볼모로 왔던 태조의 사촌 동생 왕신을 살해하였다. 후백제는 이를 계기로 고려와의 화친을 파기하고 웅진 방면으로 군대를 진격하는 등 여러 차례 고려의 변경을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 한동안 대응하지 않았던 고려는 927년(경애왕 4) 정월에 갑자기 태조가 후백제의 용주(龍州: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일대)를 쳐서 항복시켰는데, 이때 신라 경애왕이 군사를 내어 고려를 도와주었다. 이것은 용주전투에 고려 태조와 신라 경애왕의 동맹관계가 작용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때 동맹관계는 고려가 신라를 군사적으로 보호하였던 동맹이 아니라, 신라가 고려의 후백제 공격을 돕는 동맹이었다. 고려 태조는 신라 경애왕과 이러한 동맹을 맺고 후백제의 용주를 빼앗은 뒤에 운주와 근품성(近品城: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근품리 일대), 강주, 대량성(大良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일대) 등을 파상적으로 공략하였다.
후백제는 이에 대응하여 927년 9월에 근품성을 공격하여 불사르고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남도 영천시 일대)를 습격한 뒤에 전격적으로 신라 왕경까지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애왕의 외종 사촌 동생인 김부(金傅)를 경순왕으로 옹립하였다. 견훤은 이처럼 신라에 친후백제 정권을 세운 뒤 왕의 동생인 효렴과 재신 영경 등을 포로로 삼고 돌아갔다. 이때 견훤은 공산동수(公山桐藪: 지금의 대구시 팔공산 일대)에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왔던 고려 태조가 자신을 대신해서 전사한 김낙(金樂)과 신숭겸 등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달아날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고, 대목군(大木郡: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일대)과 소목군(小木郡) 그리고 벽진군(碧珍郡: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일대) 등을 침탈하였다. 또한 928년(경순왕 2)에는 3월과 5월에 강주 지역을 다시 공략하고 7월에 청주(靑州)를 침범하였다. 8월에 대량성의 장군 관흔이 대목군의 곡식을 약탈하고 나서 죽령(竹嶺)에서 고려를 차단하였으며, 11월에 오어곡성(烏於谷城)을 함락시키면서 고려군 1,000명을 죽이고 조물성까지 탈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929년(경순왕 3) 7월에는 견훤이 직접 의성부(義城府)를 공격하여 성주 장군 홍술(洪述)을 전사시켰으며, 12월에는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까지 포위하였다.
후백제는 이처럼 신라 왕경을 습격하여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뒤에 고려를 압박하면서 일거에 전세를 뒤집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930년(경순왕 4) 정월에 있었던 고창전투(안동)에서 8,0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고려에 참패하였다. 또한 이를 계기로 영안(永安: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 하곡(河曲: 지금의 경상북도 울산시 일대), 직명(直明), 송생(松生: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 일대)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고, 2월에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일대)로부터 흥례부(興禮府: 지금의 경북 울산시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서 모두 110여 개의 성(城)이 잇달아 고려에 귀부하였다. 견훤이 직접 옹립하였던 경순왕도 고려 태조에게 만남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931년(경순왕 5) 2월에 결국 신라 왕경에 들어가서 왕실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 돌아갔다. 후백제는 고창전투의 패배로 그만큼 많은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후백제가 고창전투에서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는 견훤이 신라 왕경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견훤이 이때 경애왕을 대신해서 경순왕을 옹립하였던 것은 그가 신라의 왕을 여전히 ‘존왕의 의’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경애왕을 시해한 것은 ‘존왕의 의’를 강조하는 행위에 반하는 처신이었다. 따라서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한 행위는 태조 왕건의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 태조가 신라 왕경을 방문하였을 때, “전일 견씨가 왔을 때는 승냥이나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심에는 부모를 뵌 것과 다름이 없다”는 평가를 들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견훤을 비난하였던 사람 중에는 여전히 신라 왕실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지방관 출신의 호족 세력들도 있었는데, 고창전투에서 고려에 큰 공을 세우고 대광에 임명되었던 성주(城主) 김선평이나 대상에 임명된 권행과 장길(張吉)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들이 경애왕을 시해한 견훤에 불만을 품고 고려 태조에 협력함으로써 결국 후백제가 고창전투에서 참패하였던 것이다. 후백제는 고창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에 급격하게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래서 932년(경순왕 6) 6월에는 공직이 다시 고려에 투항하였다. 후백제에서는 이를 만회할 목적으로 같은 해 9월에 일길찬(一吉湌) 상귀가 수군을 이끌고 예성강까지 쳐들어가서 염주(鹽州) · 백주(白州) · 정주(貞州) 등에서 배 100여 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에서 말 300필을 약탈하였다. 10월에는 해군장군(海軍將軍) 상애가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해서 약탈하였다.
후백제는 고려를 상대로 이러한 기습 작전을 통해 세력을 만회하고자 하였다. 934년(경순왕 8) 정월에는 고려 태조가 운주(運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일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견훤이 직접 군대 5,000명을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후백제는 여기에서 다시 3,000명이 전사할 정도로 고려에 참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그 결과 후백제는 더 이상 고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여기에 견훤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내분까지 발생하였다. 견훤은 10여 명의 아들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찬 능환과 파진찬 신덕 등이 견훤의 다른 아들인 강주 도독(康州都督) 양검(良劒)과 무주 도독(武州都督) 용검 등과 모의하여 맏아들인 신검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935년(경순왕 9) 3월에 신검이 마침내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유폐) 금강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그 뒤에 약 3개월 동안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막내아들인 능예 등과 함께 금성(錦城)으로 달아나서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유금필과 만세(萬歲) 등에게 맞아오게 해서 견훤을 ‘상보〔尙父〕주8’라 칭하고 남궁(南宮)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는 등 크게 환대하였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신검이 새롭게 왕위에 올라 사면령을 내리면서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렇지만 견훤이 고려 태조의 힘을 빌려 복수를 꾀하였고, 사위 박영규까지 고려에 귀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군이 936년 9월에 일선군으로 진격해 왔을 때, 후백제는 신검이 직접 이에 맞서 일리천(一利川)에서 승부를 겨뤘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후백제군은 여기에서 황산으로 달아났다가 결국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후백제는 이로써 2대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이때 능환은 신하로서의 의리를 저버렸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였고, 양검과 용검도 유배되었다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신검은 오히려 고려 태조에 의해 작(爵)까지 받았다. 견훤은 고려 태조와 함께 전투에 참전해서 이러한 상황들을 지켜본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산의 절에서 등창을 앓다가 죽었다.
2. 후고구려 건국(901 궁예 송악)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이다. 신라 말 호족의 대두와 농민 봉기로 인한 혼란 속에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궁예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달사의 승려였다. 그는 혼란이 계속되자 891년(진성여왕 5) 절을 떠나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에 해당하는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를 거점으로 한 반신라적인 세력가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 이어 892년(진성여왕 6)에는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의 반신라적인 세력가 양길에게 투신하였다. 894년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에 입성하여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어 철원(鐵圓: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지역으로 진출하여 크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는 양길의 세력권을 흡수하였다. 그가 근거하였던 지역 중에는 옛 고구려 영역이 적지 않았다. 궁예는 901년(효공왕 5) 고구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고려를 건국하였다.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던 것은 한 해 전에 후백제가 건국하여 신라와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음도 고려해서였다. 이 고려를 삼국시대의 고구려[후기에는 고려라고 하였음],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여 후고구려라고 부른다.
3. 고려 건국(918 왕건 철원)
고려는 918년 개성 출신 왕건이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합한 뒤 1392년 멸망 때까지 34명의 왕씨 출신 국왕이 474년 동안 통치한 왕조이다. 고려 초에 광종의 과거제 시행, 성종의 체제 정비를 거쳐 문종 때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이자겸과 묘청 난, 무신정변, 하층민의 봉기, 대몽항쟁 등으로 기존 질서가 크게 변동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원 간섭기, 성리학 수용, 위화도 회군과 사전 개혁 등의 진통을 겪은 끝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고려는 한반도에서 약 500년간 존속한 왕조이다. 신라에 이어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한국사에서 고려왕조 건국이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첫째, 고려는 신라의 지배층을 전면적으로 교체하고 옛 삼국의 인적 · 문화적 자원을 통합하여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하였다. 신라의 경우 기존 지배층인 진골귀족이 통일 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조선 건국의 주역은 고려 후기 지배층인 무신 집단과 사대부 세력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통일신라와 같이 지배층의 교체가 없는 수평적 권력 교체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고려는 신라 말 지방에서 새롭게 대두한 촌주 성주 장군으로 불리는 호족세력이 진골 중심의 골품체제를 무너뜨린, 지배층의 전면 교체라는 혁명적인 변화 속에서 건국되었다. 고려는 후삼국 통합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지역과 계층의 통합을 이루어 진정한 통일국가를 수립하였다. 둘째, 옛 삼국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통합하고 포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데 불과하였다. 고려 태조(재위: 918~943)는 「 훈요십조」에서 불교가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간신과 승려가 결탁하여 사원을 빼앗거나 함부로 사원을 짓는 등 장차 불교가 낳을 수 있는 폐단을 경계하였다. 나아가 풍수지리와 제천행사를 강조하고, 유교 이념에 입각한 제도의 확립을 당부하였다. 실제로 고려시대에 국왕, 왕실 및 관청이 주관한 각종 의례와 행사에 불교는 물론 도교 · 유교 · 제천 의식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함께 시행되었다. 이같이 고려는 삼국의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흡수하여 서로 공존하는 통합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고려 건국의 또 다른 의미는 여기에 있다.
4. 발해멸망(926)
9세기 해동성국의 번영을 구가하던 발해가 거란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지배층 사이의 내분이 주요한 멸망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이 또한 석연치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해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마지막 사건이 거란의 침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거란은 당의 멸망 이후 중원의 분열 속에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 915년 10월에는 야율아보기가 직접 압록강에서 낚시를 하고, 신라는 거란에 방물을 바치고 태봉은 고려 보검을 바치는 등 발해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발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와의 결원(結援)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거란은 급속히 강해지고 있었고, 신라, 태봉 및 그 뒤를 이은 고려는 거란과의 교류를 행하고 있었던 까닭에, 발해 역시 918년 2월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920년 발해인 4명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등 서서히 발해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발해의 영향 아래 있던 여진이나 흑수, 달고 등이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신라나 고려, 중원과 접촉하는 등 발해의 주변 민족에 대한 통제력도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다.
거란이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발해는 924년 5월 요주(遼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장수실(張秀實)을 죽이고 그곳의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당시 거란은 서방 원정에 집중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924년 7월 거란은 발해를 공격했으며, 발해는 여진(女眞)과 회골(廻鶻), 황두실위(黃頭室韋) 등을 동원하여 거란을 공격하였다. 다시 9월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양국간의 공방은 발해가 926년 거란의 일격에 의해 멸망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925년 9월 서방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야율아보기는 12월에 ‘두 가지 일 중 하나(서방 원정)는 이미 완수하였고, 발해는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갚지 못했다.’는 조서를 내리며 서방 원정을 성공으로 이끈 자신감 속에 발해와의 전쟁에 나섰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야율아보기는 12월 자신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인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지냈고, 다시 오산(烏山)에서 청우(靑牛)와 백마(白馬)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산갈산(撒葛山)에서 귀전(鬼箭)을 쏘며 출정을 알렸으며, 상령(商嶺)을 거쳐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를 포위하여 부여성(扶餘城)을 빼앗았다. 발해의 노상(老相)이 이끄는 3만 명의 군사는 거란의 1만 기병과 맞닥뜨렸으나 패배하였다. 부여성이 함락되자 거란군은 바로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으로 진격하였고, 결국 대인선(大諲譔)은 항복하였다. 항복 후에 대인선은 흰 옷을 입고 300명의 신하들과 함께 항복 의식을 치뤘다. 야율아보기는 발해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야율아보기와 거란의 군사들은 9일 간 1,000리를 이동하여 부여부에 이르러 포위하고 3일 만에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6일 만에 발해의 수도 홀한성에서 대인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다. 너무 쉽게 무너진 현실을 믿기 어려웠던 것인지 대인선은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 신라 경순왕 고려에 귀부(935)
경순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935년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다투던 경명왕 때부터 경애왕 대에 이르러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 경순왕은 난폭한 견훤의 보호국보다는 왕건에게 투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935년 국가를 고려에 넘길 것을 결의하고 국서를 보냈다. 왕건은 신라를 경주로 고쳐 그의 식읍으로 주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78년에 승하했다.
경명왕이 즉위할 무렵 이미 지방에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정권이 형성되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918년(경명왕 2)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경명왕이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또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애왕이 더욱 친고려정책(親高麗政策)을 추진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은 아달라계(阿達羅系)의 후손으로 박씨 왕계였다.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신덕왕부터 경애왕까지 이어진 박씨 왕계가 다시 경순왕이 옹립됨으로써 김씨 왕계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했는데, 수십 일을 왕경에 머물면서도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조금도 범법(犯法)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이 장남 신검을 비롯한 형제들의 음모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일이 벌어졌다. 3개월 후 6월 견훤은 유폐되어 있던 절을 탈출하여 고려군이 점령하고 있는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로 일단 피신했다가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개경으로 망명하였다. 견훤은 태조로부터 상보(尙父)의 존칭을 받았고, 그 지위가 백관(百官)의 위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놀란 경순왕은 더 이상 보호국의 처지에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935년 경순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김봉휴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태자보다 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였다. 그런 다음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채용하였다. 또한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978년(경종 3) 4월에 승하하였다. 무덤은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다.
6. 후백제 멸망(936)
930년에 고창 전투에서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고창은 지금의 안동인데 흥미로운 점은 고창의 이름이 안동이 된 계기가 이 전투와 연관있다는 것. 이 때 견훤에게 불만을 품었던 일부 호족들이 고려로 투항하면서 영토 손실도 커졌다. 특히 932년에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매곡성이 있는 청원 일대를 상실했고, 934년에는 견훤이 지휘하였던 최후의 전투인 운주성 전투에서 고려 최고의 명장 유금필의 급습으로 패하며 치명타를 입은 것이 뼈아팠다.
이후 후계자 문제까지 불거졌다. 견훤은 장남이었던 신검 대신 금강 왕자를 후계자 감으로 내심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창업군주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해버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폐주가 된 견훤은 금산사에 3개월 정도 갇혀 있다가 탈출한 뒤에 아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평생의 적이었던 고려로 망명했고 견훤이 세운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게 항복했다. 신검은 나름대로 혼란한 후백제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펼치고 중국에도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1년 뒤 견훤은 고려 왕 왕건과 함께 선산 일리천(현 경북 구미시 선산읍) 전투에 참전하여 후백제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위에서 쫓겨났다고는 하나 후백제 그 자체나 다름 없었던 자신들의 건국 군주 견훤이 적진에 있는 것을 본 후백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싸움도 해보기 전에 투항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속출하면서 결국 후백제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며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936년에 후백제 왕 신검이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멸망했다. 결국 견훤이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키는 기구한 운명을 맞고 만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바로 그 해에 견훤도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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