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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혜종 두문자 : 혜 규

by noksan2023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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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의 결혼정책

 

고려 혜종 : 혜 규

 

혜 : 종(943~945)

규 : 왕의 난

 

 

1. (943~945)

혜종은 재위 943∼945. 이름은 왕무(王武). 자는 승건(承乾).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이다.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한편, 이복동생인 왕요(王堯: 뒤의 定宗) 서경(西京: 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 세력과 결탁해 은근히 왕위를 엿보았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백여 명을 죽였다. 이 무렵 박술희 갑곶(甲串: 江華)에 유배된 뒤 살해되었는데, 왕요 일파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혜종이 죽자 왕요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2. 왕의 난

943년에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다. 왕규(王規)는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요컨대, 혜종대의 정정(政情)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다. 왕규는 광주(廣州)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大匡)까지 되었다. 또한 두 딸을 태조의 제15·16비(妃)로 들였는데, 제16비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이처럼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는 막강한 실력자로 있었다. 그는 태조에게는 충성했으나, 혜종의 왕권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혜종을 죽이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세우고자 하였다.

 

왕규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하였다. 한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한 주먹에 때려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 한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혜종은 최지몽(崔知夢)이 무슨 변이 있을 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피한 것이다. 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세력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하였다.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요(堯 :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甲士)들을 수행시켰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혜종이 즉위 이래 병석에 눕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결국, 왕규의 모역(謀逆)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고려사』에는 요가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요의 왕위계승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는 945년에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甲串)에 귀양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 명도 죽였다. 한편,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살해하고,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켰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명(遺命)까지 받은 중신(重臣)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는 이처럼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세력을 일소한 뒤 왕위에 올랐다.

 

 

왕규의 난 : 재해석 논란
왕규의 난 : 재해석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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