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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고려 정종 두문자 정리 : 정 서 광

by noksan2023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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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요 고려 3대 정종이 되다

 

고려 정종 : 정 서 광

 

정 : 

서 : 경천도 실패

광 : 군사

 

1. 

정종은 혜종의 뒤를 이어 945년에 즉위하여 서경의 진장(鎭將) 왕식렴(王式廉)의 도움으로 왕규(王規)·박술희(朴述熙) 등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러한 사실은 혜종 사후에 전개된 일련의 호족들의 발호를 제압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은 여전히 반발하여 왕권이 확고한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도참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서경 천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개경의 호족과 백성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던 것으로, 결국 이 계획은 좌절되고, 왕권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불교를 깊이 믿었다고 한다.

 

정종은 즉위한 이래로 붕어할 때까지 정적들의 힘을 억누르고,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제의 정착을 위한 개혁에 힘썼으나 어째서인지 그 결과는 대개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정종은 즉위 후 개국공신인 박술희를 살해한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 왕규 일파를 처단한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적들을 제거해나갔다. 정적 처리 과정에서 왕규가 세력을 모아 반란을 꾀했는데 이를 진압할 때 지나칠 정도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자만 무려 300명이었다고. 재위 1년 차인 946년, 사찰에 곡식을 시주하고 친히 개국사(開國寺)에 행차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이곳은 부왕 태조 왕건이 직접 세운 사찰 중 하나로 교종 계열이었다. 불사리 봉안은 아마 인명 살상에 대한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2. 경천도 실패

정종은 947년(재위 2년) 서경에 왕성을 쌓기 시작했다. 앞선 정적 숙청 과정에서 이미 민심이 악화되었기에 정종은 개경에서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려는 목적에서 서경(西京)으로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우게 된다. 천도를 계획한 시점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구실로 삼았다.

또한 서경이 풍수지리상상 길지로 꼽힌다는 점도 서경 천도 계획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왕건도《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 대에 전할 땅이니..."

 

라고 이야기할 만큼 서경이 풍수적으로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으로 이러한 이점을 근거 삼아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장정들을 계속 뽑아 부역에 쓰게 되었고, 이 탓에 서경 백성들조차 중앙 조정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경의 백성을 서경으로 강제 이주시켜 서경 시내를 채우니 개경 백성들은 더욱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커녕 그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 붕어 직전까지 서경 천도가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당시 호족들과 신하들조차 정종의 의지를 꺾을만한 힘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종 : 광군사 설치
정종 : 광군사 설치

 

3. 군사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은 유학을 갔다가 거란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최광윤의 재능을 높게 산 거란은 그에게 벼슬을 주어 생활하게 했는데, 최광윤은 거란에서 일하던 중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몰래 편지를 보내와 조정에 알렸다. 이에 정종은 재위 2년(947년)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300,000명의 광군을 편성하여 병력을 모았다. 광군사는 명칭이 광군도감(光軍都監)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군사로 돌아온다.

광군은 전쟁 수행만을 담당하는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호족들이 통솔하는 지방군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어쩌면 그저 단순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동 부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 광군의 질은 병농을 함께하는 부병의 수준도 못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중앙 정부에서 통제하는 중앙군과 지방 호족들이 통제하는 사병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정종은 광군 편성을 통해 호족들의 사병을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광군의 편성은 산만한 군대의 지휘권을 통합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으며, 이는 후대의 성종(제6대)이 경군(京軍)과 외군(外軍)을 정해 군권을 통합하고 현종(제8대)이 광군을 주현군으로 통합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광군은 현종, 문종(제11대) 대에도 사면 기광군(四面 奇光軍), 유음 기광군(有蔭 奇光軍)이란 이름으로 크게 축소된 채 남아 있었는데, 광군이 호족들의 사병 출신이었기에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잔존한 광군은 기광군(奇光軍)이란 명칭으로 바뀌어 동•서•남•북 사면에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사면 기광군으로 불리는 특수 부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기광군은 호족의 사병이었기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아 음전(蔭田)을 조금씩 가졌다. 그래서 유음기광군이라고도 불렸다.

 

4. 최승로의 정종에 대한 평가

혜종이 붕어한 뒤 그의 세력이었던 박술희와 왕규까지 연달아 제압하고 임금이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혜종과 똑같이 동생 때문에 환장하다가 허망하게 요절하는 비운을 맞고야 말았다. 보위에 오르자마자 동생인 왕소가 적잖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었다. 그를 제압하자니 기반이 만만치 않아 그조차 쉽지 않았던 것. 게다가 왕규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앉았으니. 결국 정종이 여러 반란을 때려잡고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박살내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으나, 허망하게 요절하면서 광종이 그 덕을 봤다. 정종의 후견인이던 왕식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으니 광종은 참 덕을 잘 본 듯하다.

그래서인지 광종에게 비판적이었던 최승로는 비슷하게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는 정종의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정종께서는 왕자였을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께서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께서 이를 먼저 알아차리시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왕식렴)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하셨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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