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발해 교통로 두문자 : 서 압 조 동 용 일 남 해 신

by noksan2023 2023. 8. 13.
반응형

 

발해 교통로
발해 교통로

 

발해 교통로 : 서 압 조 동 용 일 남 해 신

 

서 : 경 

압 : 록부

조 : 공도

동 : 경 

용 : 원부

일 : 본도

남 : 

해 : 남

신 : 라도

 

 

서경압록부 조공도
서경압록부 조공도

 

1. 록부 공도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국도(國都)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는 조공하는 길(朝貢道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교통로는 초기부터 빈번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당나라에서 안사(安史)의 난(亂)이 있은 뒤부터 종래 사용하던 영주도(營州道)가 거란에 막힘으로써, 발해 사신들은 장령부(長嶺府)를 거치는 육로를 버리고 압록부(鴨綠府)의 수로를 택하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경로는『신당서』지리지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중국학자 왕칭례(王承禮)가 고증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경에서 출발해 첫 도읍지였던 돈화(敦化)를 거치고 대포시하(大蒲柴河)를 따라 무송(撫松)을 지나서 서경(西京: 현재의 臨江鎭)에 일단 이르게 된다.

 

한편, 상경에서 왕청 가야하(汪淸 嘎呀河)를 따라 연길(延吉)용정(龍井)을 지나 중경(中京: 현재의 西古城子)에 이르거나, 동경(東京: 현재의 八連城)에서 두만강을 따라 남강산맥(南崗山脈)을 넘고 부르하통하(布爾哈通河)를 거친 다음 연길·용정을 지나 중경에 이르게 된다. 중경에서 안도(安圖)를 거쳐 대포시하에 이르면 첫번째와 같은 경로로 서경에 이르게 된다. 이상 세 가지 경로가 일단 서경, 즉 신주(神州)에서 만나게 되며, 다시 환주(桓州: 현재의 集安), 박작구(泊勺口: 현재의 大蒲石河口)를 지난 다음, 석인왕(石人汪: 현재의 遼寧省 石城島)·행화포(杏花浦)·도화포(桃花浦)·청니포(靑泥浦: 현재의 遼寧省 大連)·도리진(都里鎭: 현재의 遼寧省 旅順)을 지나, 오호해(烏湖海: 현재의 발해해협)를 건너고 묘도열도(廟島列島)의 여러 섬을 지난 뒤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당나라의 장안(長安)으로 향하게 된다.

 

결국 조공도는 압록강 하구에서 연안을 따라 항해를 해서 요동지방의 해안을 돌아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로 상륙하는 긴 해로라고 할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의『발해고(渤海考)』에도 압록조공도는 산동반도 등주까지 이어지는 해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 계절풍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당과 발해 사이에는 하나의 통로만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서계절풍이 부는 시기에는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서해안으로 도착하는 길을 따라 갔고, 남동계절풍이 부는 시기에는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가는 해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 교통로를 이용한 구체적인 사례는 당의 사신인 최흔(崔欣)이 발해대조영(大祚榮)을 책봉한 뒤 714년에 당으로 돌아가던 중, 현재의 여순(旅順) 황금산록(黃金山麓)에 있는 우물에 남긴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732년 발해의 장수 장문휴(張文休)가 등주를 공격했던 경로도 이 곳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5경 : 동경용원부(일본도)
발해의 5경 : 동경용원부(일본도)

 

2. 원부 본도

동경용원부 일본도는 발해시대의 일본으로 통하는 대외교통로이다. ≪신당서≫ 발해전은 국도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면서, 동남쪽이 바다에 접하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는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로는 발해와 일본만이 아니라 당나라와 일본을 연결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를 거치게 된다. 우선 육로의 경우, 발해의 도읍지에서 동경용원부가 있었던 현재의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반라청[半拉城]까지 이르는 경로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전기에는 도읍지가 지린 성 둔화현[敦化縣] 오동성(敖東城)이었으므로 이곳으로부터 허룽[和龍]·연길(延吉)을 거쳐 훈춘에 이르렀을 것이다. 후기에는 동경성(東京城)이 도읍지였으므로 이곳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 경로에 대해서, 첫째는 상경의 남쪽으로부터 합이파령(哈爾巴嶺)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꺾어 동경에 이른다는 설과, 둘째는 노송령(老松嶺)을 거쳐 남으로 알하하[嘎河]를 따라 내려오는 경로를 지적하는 설, 셋째는 둘째설과 비슷하게 상경에서 왕청(汪淸)·투먼[圖們]을 거치는 경로를 주장하는 의견 등이 있다.

해로의 경우는 우선 동경에서 동남행하여 장령자산구(長嶺子山口)를 지나 포세트 만(灣)의 크라스키노 성(城)에 자리잡았던 염주(鹽州)에 도착한다. 그 뒤, 단거리 코스로서 직접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 혼슈[本州]의 에치젠[越前]·노토[能登]·가가[加賀] 등지에 도착하는 방법과, 우회 코스로서 한반도 동남해안을 따라 남행하여 일본의 쓰쿠시[筑紫 : 지금의 北九州]에 도착하는 방법이 있었다.

 

3. 경남 라도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국도인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각 방면에 이르는 교통로를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는 이하(泥河 : 현재의 용흥강)를 경계로 인접하여 있었고, 또 『삼국사기』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의하면 책성부(柵城府 : 즉 동경용원부)와 신라의 천장군(泉井郡 : 현재의 德源) 사이는 39역(驛)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사이에 남경남해부가 있었다. 따라서, 신라도는 상경에서 동경을 거쳐 남경에 이른 다음 신라로 들어가는 경로를 지칭하였다.

 

신라도를 통하여 발해와 신라가 접촉하였던 구체적인 사실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두 번에 걸친 신라의 사신파견 기록,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보이는 발해가 신라와 결원(結援)하려 하였다는 기록, 일본기록에 보이는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갔다는 기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교통로는 발해와 신라만을 잇는 구실만 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경로로도 사용하였다. 즉,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의하면 777년 1월에 발해 사신이 남해부의 토호포(吐號蒲)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5경 15부 62주
5경 15부 62주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