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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강주룡과 김진숙_시대를 뛰어넘어 만난 두 체공녀

by noksan2023 2026.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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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룡과 김진숙_시대를 뛰어넘어 만난 두 체공녀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여성 한 명이 동그마니 앉아 있고 밑으로는 경찰로 추정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밑에는 을밀대 위에 앉은 평원 고무 여직공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이 여성은 왜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걸까?

 

사진 속의 여성은 평양에 있는 평원 고무 공장 노동자 강주룡이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고무신 공업은 수요가 급증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인이 세운 고무 공장이 일본인 공장보다 수도 많았고, 평균 규모도 컸다. 당시 고무신 공업의 3대 중심지는 경성(서울), 평양, 부산이었다.

 

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는 평양에 있는 고무 공장에도 닥쳐왔다. 대공황으로 타격을 입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 손실 부분을 보완하려 했다.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처우는 매우 열악하였다. 한국인 남성 노동자가 일본인 남성 노동자 임금의 절반 정도를 받았다면 한국인 여성 노동자는 한국인 남성 노동자의 반을 받았다. 그것을 또 깎겠다고 하니, 여성 노동자들은 당연히 반발하였다. 

 

1931년 5월 16일 회사의 일방적인 임금 인하에 맞서 강주룡을 비롯한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5월 28일 회사 측은 단식 투쟁하는 노동자 49명을 전원 해고하겠다고 협박하고, 경찰을 끌어들여 강제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공장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죽으려고 했으나, 죽더라도 평원 고무 공장의 횡포는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일종의 고공 농성을 한 것이다. 강주룡은 사람들을 향해 회사 측의 무리한 임금 인하 결정과 노동 생활의 참상을 호소하였다. 또한 자기의 임금 인하는 곧 평양의 2천 3백 명 고무 공장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할 것이라며, 임금 인하를 취소할 때까지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다. 6월 8일, 결국 회사 측은 임금 인하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강주룡은 평양 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강주룡은 감옥에서도 투쟁을 이어갔으나, 이 과정에서 얻은 병이 악화하여 1931년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1년 1월 부산의 한진 중공업(옛 대한 조선 공사) 노동자였던 김진숙은 

 

"정리 해고 전면 철회"

 

를 외치며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시작하였다. 회사 측이 경영 악화를 이유로 생산직 노동자 400명의 희망 퇴직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해고 노동자였던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시민들은 희망버스를 조직하여 부산 영도 조선소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시민들의 연대가 힘이 되어 같은 해 11월에 노사 합의가 이뤄졌고, 김진숙은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2022년 2월 해고 37년 만에 명예 복직되었다. 80년의 세월을 두고 나타난 두 여성 노동자의 고공 농성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강주룡 (姜周龍)

 

 

 

평원 고무 노동자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 투쟁 현장 사진

 

 

 

 

일제강점기 평양 소재 평원(平元)고무공장 여공으로 1931년 동맹파업을 벌인 항일노동운동가이다.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24세 때 채찬(蔡燦)의 지도 아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가족들과 귀국하여 평원고무공장의 여공으로 가장 역할을 했다. 1931년 평원고무공장 파업이 일어났고, 일경에 의해 주모자로 체포된 강주룡은 고공투쟁의 여장부로 신문지상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나, 극도의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등으로 보석을 받았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31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 생애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姜周龍)은 14세 때 가난에 쫓긴 가족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1921년 20세의 나이로 통화현의 5세 연하 남편 최전빈을 만나 혼인하였다. 24세 때 채찬(蔡燦)의 지도 아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남편 죽인 년’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가족들과 귀국하여 평원(平元)고무공장의 여공으로 가장 역할을 했다. 1931년 평원고무공장 파업이 일어났고, 일경에 의해 주모자로 체포된 강주룡은 고공투쟁의 여장부로 신문지상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나, 극도의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등으로 보석을 받았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출감 두 달 만인 1931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2. 활동 사항

 

당시 조선의 고무공업계는 1929년 세계공황기를 맞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1930년 5월 서울에서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를 열고 임금 인하를 결의하였다. 1930년 8월 초 평양고무공업조합이 종래 임금의 17% 삭감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자, 노동자들은 일제와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투쟁을 일으켰다.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의 단식 파업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들의 임금 삭감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 강주룡은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乙密台)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였다.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감아 올려 줄타기하듯 올라간 지상 12m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평양의 새벽을 가르고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위한 군국체제로 치달리면서 조선에 대한 탄압과 수탈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어갔다. 일반 사회의 무관심 속에 여공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사회에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여기에 한국 최초 노동자 고공투쟁이란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일반인들의 심장에 꽂히도록 외치던 8시간 만에 일경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내려진 그는 계속 단식하며 임금 삭감에 저항하였다. 고용주의 비 인도성을 거세게 비판하며 벌인 단식투쟁에 1주일의 구류처분을 받고, 옥중에서도 54시간 단식을 결행하였다.

강주룡을 비롯한 여공들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은 별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여성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항일민족운동으로 연결되는 의미를 갖게 해주었다.

 

3. 상훈과 추모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체공녀’ 강주룡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주인공은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의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주룡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 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을 벌인 ‘체공녀’로 불렀다.

식민지 시기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같은 시간 일을 하고도 조선인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2분의 1,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에 비해서는 4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노동조건은 더 형편없었다.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평양의 고무공업동업회에 속한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12일 동안 죽자사자 싸웠다. 회사는 새 직공을 모집하여 트럭에 싣고 뒷문으로 몰래 들여와 공장을 돌리려고 했다. 노동자들은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트럭 밑으로 들어가 진흙탕 속을 뒹굴면서 진입을 막아냈다. 회사는 임금을 깍지 말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며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에서는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노동자들은 흔들리지 않고 단식투쟁을 단행하였다. 조선인 사장이 한밤중에 일본인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강제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광목을 한 필 사 가지고 어둔 밤 비탈진 길을 올라 평양 근교에 있는 을밀대 가까이로 갔다. 목을 매달아 죽을 각오였다. 자칫 흩어질 수 있는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투쟁을 이어나가도록 격려하고,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작심했다. 을밀대로 가기 전에 아버지께 “불초여식은 소원이 성취되면 다시 뵙겠으나 그렇지 아니하면 훗날 땅속에서 뵙겠습니다.”라는 유언 같은 편지도 남겼다. 을밀대 아래서 자살할 작정으로 사가지고 간 광목을 쪼개서 이어 묶었다. 한쪽에 돌멩이를 매달고 지붕 한 귀퉁이로 집어 넘겼다. 밧줄처럼 타고 을밀대에 올랐다. 오싹오싹 떨리는 추위와 쏟아지는 잠을 견디며 새벽을 기다렸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과 평양의 활동가들도 찾아왔다.

 

주룡은 을밀대 꼭대기에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펑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하고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또한 자신들의 임금감하 저지 투쟁이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렸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 노동운동사에 던져 준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중한 ‘선언’이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임금을 깎으려는데 맞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는 평양의 2300명 다른 고무신발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될 판이었다. 자신을 위한 싸움이 자신만을 위한 싸움에서 그치지 않았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강주룡 혼자만 영웅적으로 싸운 것은 아니었다. ‘강주룡’ 이름 밑에는 함께 치열하게 싸웠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이름이 담겨져 있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과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기 때문에 요구했던 임금인하를 막아낼 수 있었다. 평양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와 연대의식을 고취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과 강주룡의 고공농성에서 보듯이 노동운동의 역사에는 자신을 위한 싸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이 노동운동을 지탱해 온 빛이라면 반대편에는 돈벌레가 되어 자신과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대다수의 생존과 삶을 짓밟는 그림자도 있었다.

 

강주룡은 평양혁명적노동조합에 참여했던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비타협적인 옥중투쟁 끝에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이 심해져 1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병이 다시 도졌다. 그도 동무들도 치료비와 입원비가 없었다. 두 달여 시름시름 앓다가 1932년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졌다.

강주룡은 길지 않은 서른 두 살 생애를 자본과 타협하지 않으며 원칙대로 꼿꼿하게 살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이해를 실현하려고 앞장섰다. 박서련 작가는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으로 강주룡을 다시 지금 이곳으로 불러냈고, 일본에서 번역도 되었다.

강주룡의 삶과 투쟁, 뜻과 정신은 지금도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역사적 지지자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거듭 되살아나곤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엇이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삶인지도 모르고,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보람과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거울이 되었다. 

 

 

김진숙 (노동조합인)

 

 

 

37년 사움을 오늘 마칩니다_김진숙 투쟁이 끝나던 날

 

 

 

 

김진숙(1960년 7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이다. 현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이다.

 

1. 활동

 

18살부터 보세공장 시다, 신문배달, 우유배달, 시내버스 안내양 등의 일을 했다. 1981년 10월 1일 대한조선공사 (현 한진중공업)에 대한민국 최초 여성 용접사로 입사해 일했다.

1986년 2월 18일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고, 당선 직후인 2월 20일 노조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했다는 이유로 3차례에 걸쳐 부산직할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연행돼 고문을 당했고 같은 해 7월 14일 징계해고됐다. 2009년 11월 2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 위원회'는 '한진중공업에서의 노조민주화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부당해고임'을 분명히 하면서 복직을 권고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2010년 12월 15일, 경영 악화를 이유로 한진중공업 측이 생산직 근로자 400명을 희망퇴직시키기로 결정한 것에 반발하여, 2011년 1월 6일부터는 한진중공업 내의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2011년 11월 10일, 노사 합의에 따라 309일간의 고공 농성을 마치고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2020년 연내 매각을 목표로 하는 한진중공업에서 인력 감축이 추진되자, 이 움직임에 맞서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의미로 6월부터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2. 저서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년

 

 

 

“저 복직해요” 김진숙 해고 37년만에 일터로 돌아간다

 

 

 

 

 

 

“수천번을 마음 속으로 외쳤던 말, ‘저 복직해요!’”

김진숙(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복직 결정 직후인 23일 오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대한조선공사 부산 영도조선소 선각공사부 선대조립과 용접1직 노동자 김진숙’이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된지 37년 만인 오는 25일 복직한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과 에이치제이(HJ)중공업이 김 지도위원의 명예복직과 퇴직에 전격 합의한 데 따른 조처다. 이 합의에 따라, 김 지도위원은 25일 복직하고 당일 퇴직하게 됐다. 퇴직과 관련한 나머지 사항은 노사협의를 통해 결정된다. 1989년 국영기업이었던 대한조선공사를 한진그룹이 인수해 한진중공업으로, 2021년 이를 다시 동부건설 컨소시움이 인수해 에이치제이(HJ)중공업으로 바뀌었다.

김 지도위원은 21살이었던 1981년 대한조선공사 영도조선소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1986년 2월 노조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선전물을 배포했다가 경찰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다섯달 뒤인 1986년 7월 회사는 김 지도위원을 해고했고 이후 조선소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 지도위원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같이 싸우다 먼저 돌아가신 동지들 생각이 제일 많이 나고, 미안하기도 하다”며 “그분들이 다들 이 순간을 기다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희망버스 때 함께 했던 분들 청와대까지 함께 걸어오셨던 분들, 2년 넘게 투쟁했던 한진중공업지회의 힘이 모여 복직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 같다”고 말했다.

‘해고노동자’ 김 지도위원은 늘 영도조선소 노동자와, 또 노동자들과 함께 해왔다. 2003년 노조의 파업에 대한 회사쪽의 손해배상·가압류 청구에 항의하며 김주익 한진중공업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도, 2011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됐을 때도 앞장서 싸웠다. 특히 2011년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오른 309일 고공농성은 전국적인 ‘희망버스’ 운동으로 확산돼 ‘새로운 노동운동’이라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영도조선소 뿐만 아니라, 김 지도위원은 쌍용자동차·케이티엑스 승무원·영남대병원 등 해고된 노동자들 곁에서 늘 함께 했다.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은 물론, 85호 크레인에서 시작한 트위터 메시지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정작 자신은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2003년 김주익·곽재규 조합원 투쟁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자 20명이 복직했지만 김 지도위원은 제외됐다. 2009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1986년 김 지도위원의 ‘노조민주화 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부당해고로 인정해 복직을 권고했지만, 한진중공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만 60살 정년을 앞둔 2020년, 본격적인 복직투쟁이 시작됐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회사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조합원들이 곡기를 끊었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2020년 9월 복직을 재권고 했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나 부산시의회에서도 한진중공업에 복직을 촉구했다. 정년을 하루 앞둔 2020년 12월30일부터는 시민사회단체, 다른 해고노동자들이 부산부터 청와대까지 함께 걸으며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두고 ‘배임’에 해당한다며 요구를 거부해왔다. 변화의 조짐이 있었던 것은 지난해 9월 동부건설컨소시움이 한진중공업을 인수하고, 지난해 12월 에이치제이중공업으로 ‘새출발’하면서부터다. 지난 20일께부터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둘러싼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합의에 이르게 됐다. 에이치제이중공업은 “법률적 자격 유무를 떠나 과거 같이 근무했던 동료이자 노동자가 시대적 아픔을 겪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명예로운 복직과 퇴직의 길을 열어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지도위원의 복직·퇴임식은 오는 25일 열린다. 구체적인 행사계획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김 지도위원이 평소 바라던 대로 직원식당에서 조합원들과 식사를 하고, 자신이 일했던 곳 그리고 먼저 세상을 뜬 ‘동지’ 박창수·김주익·곽재규·최강서씨가 일했던 곳을 둘러볼 예정이다.

김 지도위원은 

 

“저야 조합원들도 있고 공장도 있으니까 37년 만에라도 꿈을 이룰 수 있었지만, 70~80년대 독재정권시절에 힘들게 투쟁했던 청계피복노조, 동일방직, 와이에이치(YH) 노동자들은 돌아갈 공장도 없다. 부산에도 삼화고무를 비롯한 신발공장 노동자들이 여전히 해고자의 딱지가 붙은 채 남아있는데, 최소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복직 권고를 받은 노동자들 만이라도 특별법을 통해 명예복직이라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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