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동상 철거되다_우상화 작업의 말로

사진 속 하늘 높이 치솟은 이승만 동상 주위에 사람들이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다. 이는 1960년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이승만 동상 철거 방침에 따라 철거를 위한 준비 작업 모습을 찍은 것이다.
이 동상이 세워질 당시 이승만은 대통령이었다. 보통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상은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다. 그렇다면 왜 살아있던 이승만의 동상을 세웠던 걸까?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3월 26일 오전 9시부터 중앙청 광장에서는 어떤 기념식이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만세 삼창하였고, 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생일 기념식 풍경이었다. 놀랍게도 6·25 전쟁 중에도 이 기념식은 계속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이승만의 생일이 되면 서울 운동장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고, 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밤에는 불꽃놀이가 장관을 이뤘다. 경무대(오늘날 청와대)에는 여학생들을 데려와 이승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특히 80세 생일이었던 1955년에는 특별한 행사가 많이 기획되었는데,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승만 기념 동상 제작이었다. 2억 656만 환의 경비를 들여 남산에 있던 일제가 세운 옛 조선 신궁 터에 약 24.5m(아파트 10층 정도의 높이)의 세계 굴지의 동상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기념 동상 건립은 80살 생일을 기준으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자는 재출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3일 개천절에 기념 동상 건립 기공식을 하고, 다음 해 광복절에 건립 준공식(제막식)을 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날짜를 이렇게 잡은 것은 이승만이 조선 신궁을 철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연 사람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이승만 동상은 한복 두루마기 고름을 날리며 오른손을 들고 무슨 말을 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은 예전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모습이었으며, 승리한 장군이 취하던 자세였다. 한편으로 국내에 세워진 동상 중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은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임을 의미한다. 왜 이런 모습으로 동상을 만든 것일까?
동상 건립 1년 전인 1954년은,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온 세상이 시끌벅적했던 해였다. 억지 개헌으로 대통령의 정통성은 의심받았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땅끝으로 추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은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이승만을 민족의 영웅이자 국가의 아버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우상화 작업은 이승만의 호인 우남이 들어가는 공원이나 기념관 건립, 화폐 제작 등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이데올로기, 4·19 때 끝나…우상화는 헌법정신 위배”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고 하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 빨리 냈습니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을 출간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당초 3권을 동시에 출간하려던 계획을 바꿔 1권을 먼저 낸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승만 이데올로기는 4·19 혁명으로 끝이 났다. 지금에 와서 동상을 세우고 다시 우상화하는 것은 헌법정신을 위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임 소장이 1945년 8·15 이후부터 오늘날 윤석열 정권에 이르기까지 80년에 걸쳐 일어났던 필화의 전모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결과물이다. 2016년 경향신문 70주년 창간기획으로 연재했던 ‘임헌영의 필화 70년’에서 범위를 확대하고 내용을 보충했다. 1권은 ‘미군정부터 이승만 집권기의 필화’를 다뤘고 내년 출간을 목표로 하는 2, 3권은 각각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를 다룬다.
임 소장은 이 책에서 문학 예술사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언론 등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중요 필화사건을 두루 섭렵한다. 그는 “‘필화’의 개념을 이 책을 쓰면서 완전히 바꿨다”며 “필화라고 하면 붓으로 쓴 문학작품만 생각하는데, 붓은 자기 의사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글을 비롯해 모든 형태의 발언, 행위와 활동 전반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제재받는 텍스트가 없더라도 개인과 집단의 의사표현 행위에 대한 국가폭력의 총칭이 곧 필화라는 의미다. 그런 맥락에서 현 정부가 나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고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려고 추진하는 것 또한 필화의 일종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필화의 기본은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라며 “8·15 이후 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미국 헤게모니하에서 형성된 이데올로기, 반소·반공·반중이었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을 반대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최능진을 여순항쟁과 관련시켜 제거한 사건 등을 기술하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조봉암 등의 죽음도 필화다”라고 주장했다.
언론에 대한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임 소장은 1959년 일어난 경향신문 폐간 조처를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이라고 꼽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신문 발행 허가 취소는 물론, 경향신문이라는 이름도 쓰지 못하고 사옥 정문도 열어놓지 못하게 할 정도로 신문사의 흔적을 없애려고 했다. 그는 “자유당 때의 경향신문은 반이승만 언론이었다. 이승만이 경향신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며 “집권세력의 시선에서 보자면 아예 이 신문은 없애버려야 이듬해의 선거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 것이기에 선거 준비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책은 ‘중도파 지식인 오기영의 좌절’ ‘박태준과 박치우 두 지식인의 비극’ ‘만담가 신불출의 설화’ ‘여순항쟁과 가수 남인수의 여수야화’ 등 혹독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필화를 겪은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망라하고 있다.
그는
“한국 현대사는 세계 지성사에서 필화가 가장 많았던 격랑의 연속이었다”
“그 격랑을 하나하나 통찰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담하게 희생당했고 고난의 생을 보냈던가를 상기하면 그 어떤 통곡으로도 원혼을 달랠 길이 없다”
고 강조했다.
동상의 정치학… 50년대 “이승만 우상화” 건립 열풍, 4·19 이후 대부분 철거돼

1956년 8월 15일 서울 남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사진) 제막식이 열렸다. 부지 9900㎡에, 좌대 890㎡, 동상의 높이만 약 24m에 달하는 거대한 조형물이었다. 동상 건립은 이 대통령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추진된 것으로 개천절에 기공해 이 대통령이 81세가 되는 해 광복절에 제막식을 연 것이다. 제막식은 이 대통령의 만세삼창으로 끝났고 이날 밤에는 서울 하늘에서 축하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년 뒤 철거라는 철퇴를 맞았다. 이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하야하자 60년 7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가 결정됐고, 다음달 곧바로 끌어내려졌다.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조은정(48)씨는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 2010년 봄호에서 각종 기념조형물 건립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우상화를 시도했던 제1 공화국의 씁쓸한 역사를 조명한다.
‘우상화에 동원된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조형물’이란 제목의 글에 따르면 남한 단독 임시정부 수립 후 이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 작업은 전방위로 전개됐다. 49년 3월 26일 지금의 정부청사인 중앙청 광장에서 직원들이 오전 9시부터 기념식을 갖고 만세삼창을 불렀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 대통령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54년 9월 18일에는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 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고, 56년 3월 31일에는 서울 탑골공원에도 동상이 설치되는 등 이 대통령의 동상이 곳곳에 세워졌다.
59년 10월에는 이 대통령의 측면 얼굴을 도안으로 하고 후면에는 대통령 문장을 넣은 100환짜리 동전이 나오는 등 대통령을 소재로 한 화폐도 8종이 발행됐다. 서울 뚝섬의 ‘우남송덕관’, 서울시민회관으로 사용된 ‘우민회관’, 서울 남산의 정자 ‘우남정’ 등 이 대통령의 호 ‘우남(雩南)’이 이름에 들어가는 건물들도 속속 지어졌다. 55년 부산 용두산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59년 신축된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도서관’으로 이름이 붙여지는 등 우상화는 전국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진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념조형물들은 4·19혁명과 뒤 이은 이 대통령이 실각으로 거의 대부분 철거되거나 명칭이 바뀌게 됐다.
조씨는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동상과 기념물을 세움으로써 절대적인 권력을 현실화하려 했다”며 “이렇게 해서 재임 중인 대통령의 동상과 각종 기념물이 들어섰지만 실각하자 기념물들은 그 장소로부터 유리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승만은 우상인가

극우기독교인만의 국부, 이승만은 우상인가
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동의 목표는 정해졌다. 현대사를 바로 잡겠다는 것이다. 좀 더 좁히면, 현대사의 대표적인 두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화하겠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영웅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미래의 인물이다. 그들이 멘토로서 빛이 되어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진정한 애국자를 영웅시하면 후세사람들도 애국자의 길을 가고자 할 것이지만, 독재자가 영웅이 되면 정치지도자들이 독재의 길을 손쉽게 가려할 것이다. 나라를 배반한 매국노를 영웅시하면, 나라가 또 외침을 받았을 때 언제든 누구라도 거리낌없이 나라 파는데 압장서게 될 것이다. 또한 성인을 영웅시하면 후세사람들도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성인의 길을 가려하겠지만, 악인을 영웅시하면 악을 저지르는데도 주저함이 없어질 것이다.
박정희야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이다. 그는 산업화를 일군 주역이기도 하지만, 쿠테라로 정권을 잡고 반인권 독재를 행했던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음양이 뚜렷한 인물이다.
박정희보다 더 어둠이 짙은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에 보이는 집착만큼이나 끈질지게 이승만을 우상화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주체는 한국 기독교 보수우익들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광복 70돌이던 지난 8월 15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이승만에게 ‘제1회 대한민국 건국 공로대상’을 수여했다. ‘해방 70년·광복절 67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다. 광복이 70년이 아니라 67주년, 즉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때라는 제목은 실수가 아니라 ‘우익 개신교인들’의 역사관이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헌법 전문이 말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나 ‘3·1운동이나 임시정부’, ‘4.19혁명’이 아니다. 이승만 장로 대통령이다. 이승만 이후에도 김영삼, 이명박과 같은 장로 대통령이 있긴 했지만, 해방당시 전체 종교인구의 1%가 정치권력에서 마치 개신교국가처럼 군림하게 개신교를 밀어준 인물은 전무후무했다. 패전국 일본은 제끼고 이땅에 확실한 기독교국가를 만들기 위해 특혜를 몰아준 미군정과 함께 이승만은 한국 개신교의 구세주였다.
강인철 한신대 교수의 <종속과 자율-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에 따르면, 해방직후 미군정은 일본인들의 신사와 천리교 등 종교 부동산과 재산을 대부분 개신교에 몰아줬다. 영락교회, 경동교회, 성남교회, 서소문교회 등 전국의 대형교회들이 상당수가 이 특혜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과 광주 와이엠시에이와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 장로회신학교(장신대와 총신대 전신), 고려신학교(고신대 전신), 중앙신학교(강남대 전신),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 등도 적산에 세워지거나 적산을 거쳐갔다. 미군정은 형목제도를 두어 형무소 내에서 개신교만이 선교 할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 뒤 군종장교 도입 기독교에 일방적 특혜(1954년 당시 개신교목사 87.9%, 천주교 신부 12.1%, 타종교 0)를 주어 지원했다. 외국인 선교자금에 환율 혜택을 주고, 국영방송을 통해 방송선교를 하게 했다.
일제 때 종교 규제를 활짝 풀었지만, 불교재산을 규제한 일제의 사찰령은 이승만정권이 끝날 때까지 풀지않았다. 향교의 재산을 공유 및 국유화한 향교재산관리규칙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했다. 항일 선봉장이던 대종교와 천도교는 정치적으로 배제하고, 불교와 유교는 날개를 꺾고, 내분을 조장했다.
그런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주기 위한 교과서 국정화를 위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발동을 걸고 있다. 개신교 우익이 축복으로 여긴 황교안 총리, 황우여 교육부총리가 이미 포진돼 있다.
보수 우익 기독교 지도자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다시 그 좋던 시절을 되살려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누군가.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친일목사를 두둔하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산해 친일파 청산의 길을 막았다. 그래서 일제 만주군 출신 김창룡이나 헌병 출신 노덕술 같은 반민족인사들이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아 도의와 정의가 사라진 나라를 만들었다. 그들의 호위로 한국전쟁중에 군경을 동원해 반대파 국회의원을 강제연행 구금하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고 집권 연장을 위해 발췌개헌안을, 2년 뒤엔 자신에 한해 대통령 3선금지를 면제해 주는 개헌안을 각각 통과시키고,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인 4·19혁명으로 하야했다.
민주주의를 파기한 것보다 더 심각한 과오는 따로 있다. 제주와 거창, 경주, 문경, 함평, 여수, 순천, 신천 등 양민학살이었다. 지난 2000년 미군이 3백명의 양민을 학살한 것을 파헤친 에이피통신 기자들이 풀리처상을 수상한 노근리 사건은 이승만에 의해 저질러진 전국적인 학살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한 검사 오재도, 만주군출신 영남지구계엄사령관 등개신교인과 영락교회에서 출범한 서북청년단등 개신교인들이 이승만의 손발이 되어 학살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지역에서도 이들의 반대자, 비협조자, 미운자는 모두 공산당으로 몰아 죽였다.
먹물을 먹은 엘리트들은 이들의 칼날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개들과 극우테러를 피해 북으로 도망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은 아무도 몰래 대전으로 가장 먼저 내빼고, 서울을 사수하고 있다고 거짓 방송을 해 자국민을 적군에게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다만 살아남기 위해 인공기가 나타나면 인공기를 흔들고, 태극기가 나타나면 태극기를 흔들수 밖에 없었던 무력한 시민들중 상당수를 공산당에 대한 부역혐의를 씌워 또 죽인 부도덕하기 그지없는 독재자였다. 그는 공산당과 싸웠던 이상으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자국민과 싸웠고, 자국민을 너무도 많이 죽였다.
이승만은 그 억울한 피의 제단 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신의 동상을 남산에 세웠다. 4.19 혁명으로 그 동상이 철거될 때 <동아일보>는 “독재와 부패와 아부에 둘러싸였던 그의 별신도 이제 마지막 운명을 재촉”이라고 썼다. 그런데 이승만이 설립한 인하대에선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우고, 심지어 일부 인사들은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이 나라를 난도질하고, 정치, 선거질서까지 송두리째 파괴해 국민으로부터 쫓겨난 독재자를 ‘국부’로 우상화하자는 것은 내 집단(기독교)만 챙겨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인은 의(義)에 밝지만, 소인은 이(利)에 밝다. 우익 기독교의 이승만 우상화야말로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가 자신을 회개하고 개신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다가가는 그런 회개의 종교라는 것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잘못된 역사를 정당화와 독재자 우상화에만 집착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이미지에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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