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정전 반대_학생들도 지지한다(?)

사진 가운데쯤 학생이 들고 있는 팻말에는
"진정한 휴전(정전)은 북진 통일에 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당시 시위에는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휴정(정전) 반대"
등의 팻말도 등장하였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정전 반대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어떻게 해서 수많은 생명이 다치고 죽는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하자는 시위를 벌일 수 있는 것일까? 또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할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이날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3년이 되어가는 날로, 정전 협정 체결을 코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3년 동안의 전쟁 중 2년은 정전 협정 협상 기간이었지만,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도 전쟁은 이어지고 있었다. 6·25 전쟁 전쟁 사망자 수의 4분의 3이 이 시기에 생겼다. 이처럼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정전 협정에 반대하였다.
이와 달리 6·25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전쟁이 멈추기를 바랐다. 1953년 1월 미국에서는 한국 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해 3월에 스탈린이 사망한 후 새로 꾸려진 소련 지도부 또한 전쟁을 계속하려고 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 중화 인민 공화국을 세운 직후 6·25 전쟁에 참여한 중국도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자국 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전쟁 당사국인 북한도 전쟁을 계속할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정전 협정에 반대한다는 강력한 의사를 유엔군에 전달하였다. 당시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은 유엔군이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정전 협정 반대 시위를 하게 한 것도,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의지를 유엔군을 이끄는 미국에 강하게 호소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1953년 3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 반대 성명을 내자, 정전 회담 반대 궐기 대회와 시위가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4월 20일부터 5월 12일까지 정전 반대 궐기 대회는 7,500회가량 열렸고, 이에 동원된 인원은 800여만 명에 이르렀다. 6월에도 시위와 궐기 대회는 계속되었다. 이 가운데 학생을 동원한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던지, 신문에 북진 통일 서울 투쟁 위원회 위원장이 계속하면 데모를 거행한다면 학업에 적지 않게 지장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당분간 데모를 중지하도록 권고하였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조선일보」1953년 6월 22일 자)
사진 속의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 앞에서 관제 데모를 하는 중에도, 전선에서는 소중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정전협정의 체결_전투 중지,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설전(舌戰)의 결과물

개요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전쟁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데 교전 양측이 합의한 것으로, “한국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의 정식명칭은 “유엔군총사령관을 일방(一方)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군사정전(韓國軍事停戰)에 관한 협정”이다. 정전협정문은 한국문, 영문, 중국문으로 작성하며, 각 협정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유엔군총사령관 미육군대장 클라크(Mark. W. Clark),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최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金日成)·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팽덕회(彭德懷, 펑떠화이)가 서명하였고, 유엔군대표단 수석대표 미육군대장 해리슨 2세(William K. Harrison, JR)와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대장 남일(南日)이 참석자로 서명하였다. 그로부터 12시간 후인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해 발효되었으며, 한반도 정전체제의 기본적 규범으로 남아있다.
정전회담 지휘체계와 대표단 구성

1951년 6월 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착화되자 유엔군·공산군 양측은 정전을 모색하였다. 1951년 5월 17일 NSC 48/5 보고서를 채택한 미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소련과 중국에 정전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시도하였다. 미국의 정전 의사를 확인한 북한과 중국, 소련 공산 3국 간에도 정전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국과 북한, 중국, 소련이 모두 정전 방침을 결정한 이 시점에 한국정부만이 정전을 적극 반대하였다. 미국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정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막후 협상을 거쳐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 수석대표 말리크(Yakov A. Malik)의 정전 제안을 미국이 공식 수락하면서 본격적인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다.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측은 신속하게 협상전략과 지휘체계를 수립하였고, 회담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군이 참전하고, 이후 중국이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미국과 중국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협상의 지휘계통을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고, 실무적인 차원에서 회담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유엔군 측에서 협상의 지휘계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유엔은 물론 한국까지도 배제하고 워싱턴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로 회담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에 따라 미국 주도의 협상 지휘체계와 회담 대표단이 구성되었으며, 한국이 반발했지만 무시하고 진행했다. 협상의 지휘계통상 한국과 북한의 결정권은 미약했거나 거의 없었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을 협상장 밖으로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했고, 한국의 정전반대시위를 격화시킨 한 요인이었다. 공산군 측의 정전협상은 스탈린(Joseph Stalin)-마오쩌뚱(毛澤東)-리커농(李克農)으로 이어지는 지휘계통과 북한군 장성을 수석대표로 하는 회담 대표단으로 구성되었다.
협상 개시 당시 대표단 구성은, 유엔군 측은 수석대표가 미군 해군제독, 나머지 3명의 대표는 미국의 육·해·공군소장으로 안배했고, 유엔군사령관이 임명한 한국군 대표를 한 명 포함시켰다. 대표단 내에서 한국군 대표는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대표성이나 발언권을 보장받지 못했고, 결정권이 없었던 ‘옵저버’ 수준이었다. 협상과정과 결과에 대해 한국 정부나 언론이 가진 정보는 미국의 통보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불확실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공산군 측 대표단은 북한군 대장을 수석대표로 내세우고 중국군 대표가 두 명 포함되어 표면적으로 북한이 주도하는 인상을 주었다. 실질적으로는 공산군 측 회담을 중국군 대표가 주도했지만, 회담장 내에서 북한은 발언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분과위원회나 각급 회의에 참가했고 협상과정을 직접 경험했다는 점에서 남한과 비교되었다. 이러한 회담 구조는 전후 군사정전위원회까지도 이어진다.
정전회담은 몇 개의 수준이 다른 협상계통으로 진행되었다. 본회담 대표회의(Conference on Armistice Proposal), 분과위원회 회의(Sub-Delꠓegation Meeting), 연락장교회의(Liaison Officers Meeting), 참모장교회의(Staff Officers Meeting)가 그것이다. 정전회담의 기본은 본회담으로, 쌍방 5명의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의제 합의와 최종 결정, 이를 공식화하는 대표회의였다. 1951년 7월 10일부터 8월 16일까지는 개성에서 본회담이 열렸으며, 1951년 10월 25일부터 1953년 7월 19일까지는 판문점에서 열렸다. 본회담은 총 159회 열렸으며, 회의 의제 채택을 위한 제1의제 10회, 제2의제(군사분계선 협상) 17회, 제3의제(정전 감시 방법과 기구 협상) 8회, 제4의제(포로송환 협상) 79회, 제5의제(관계 제국 정부에 대한 건의사항 협상) 8회, 기타(1953. 4. 26 ~ 7. 27) 37회 개최되었다.
정전회담 의제와 쟁점
정전회담은 의제 선정부터 양측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주요 의제는 전쟁의 전개과정, 관련 각국의 협상정책, 한국의 정전 반대 요인과 맞물려 복잡한 협상 과정을 거쳐 타협점을 찾아 나갔다. 협상 시작 전에 양측은 회담을 “순수하게 군사적 문제에 국한”하기로 합의하고 회담을 개시했지만 어디까지가 군사적 문제인가에 대해 판단은 서로 달랐다. 회담 개시 후 의제 선정 과정에서 양측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것과 외국군 철군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공산군 측은 외국군 철군 문제는 정전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자 군사문제라고 주장했고, 미국은 이것은 정치문제라고 판단했다. 회담이 시작되고 17일 만에야 양측은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 설정, 정화(停火) 및 정전(停戰) 감시기구 및 권한, 포로송환, 정치회담 건의 등 네 개 항목을 의제로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첫 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문제는 정전회담에서 가장 핵심적 사안이었다.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유엔군 측은 우월한 해·공군력을 반영한 보상을 요구했고, 점차 이것을 포기하는 대신 전선의 조정을 통한 지역흥정을 통해 개성지역을 확보하고자 하다가, 최종적으로 실제 지상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에 동의했다. 협상이 시작된 후 양측의 군사적 목표는 서로가 유리한 조건에서 정전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항공작전을 강화했으며, 공산군 측은 병력과 장비를 증강하면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어느 한 편의 군사적 압력은 상대편의 더 큰 군사적 반격을 불러왔다.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잠정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했지만, 한 달 내에 나머지 의제 합의가 되지 못하면서 회담과 전쟁은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의제인 정전 감시기구와 권한 문제에서 핵심 사안은 유엔군 측이 제기한 군사력 증강 금지와 감시권한 문제였다. 공산군 측은 이를 외국군 철수와 결부시켰다. 모든 외국군 철수가 실현되면 군사력 증강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며, 따라서 감시 문제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 측은 북한지역 비행장 건설 또는 복구를 제한하려고 했고, 이에 맞서 공산군 측은 소련을 정전 감시기구의 중립국으로 내세웠다. 결국 유엔군 측이 북한지역 비행장 복구 금지 주장을 철회하고, 공산군 측이 중립국 감독위원회에서 소련을 빼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 회담에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 구성, 외부로부터의 병력 및 무기 도입 금지, 군사분계선 이북 도서(서해 5도 제외)에서 철군하는 문제 등이 합의되었다.
세 번째 의제인 포로송환 문제는 쉽게 처리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으나, 실제로 정전협상을 파행으로 이끈 주요인이 되었다. 거의 열 배나 되는 양측 포로 숫자의 엄청난 차이와 포로 성분의 복잡성이 문제의 발단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미국이 주장한 자원송환원칙을 두고 대립했다. 미국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에게 송환 여부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로협상에서 양측의 주요 관심사는 위신이 손상되지 않는 적절한 선에서 ‘송환포로 숫자’를 맞추는 것이었다. 중국은 중국군 포로가 전원 송환된다면 북한군 포로에 대해서는 자원송환을 적용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포로 심사 결과 중국군 포로의 송환 선택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중국은 이를 문제 삼아 강경책을 선택했으며, 이로 인해 정전회담은 무기한 결렬되고 전쟁은 일년 이상 더 지속되었다. 폭격 피해가 컸던 북한은 즉각적인 정전을 원했지만 결정권이 없었고 중국의 결정에 따라야만 했다. 남한은 포로협상에서 납북자 송환 문제가 다뤄지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포로협상이 더 복잡해질 것을 우려해서 이 문제를 제외시켰다. 양측은 납치문제의 논란을 피해 실향사민 귀향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타협했다. 포로협상이 타결되는 시점에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인 반공포로석방으로 회담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정전협정 체결을 막지는 못했다.
마지막 의제인 정치회담 문제는, 회담의 군사적 성격을 넘어서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방안이었다. 양측은 이 조항에 비교적 쉽게 합의했는데, 협정 조문이 구속력이 약한 ‘건의한다’는 정도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전협정 체결의 의미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 정화(停火) 및 정전(停戰)의 구체적 조치,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쌍방 관계정부들에 보내는 건의, 부칙 등 모두 5개 조 63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별도로 부록과 임시적 보충협정이 함께 체결되었다.
정전협정 전문(前文)에는 “쌍방이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衝突, conflict)을 정지(停止)시키기 위하여,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력행위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停戰)을 확립할 목적으로” 상호 합의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정전협정이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시적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며, 전후에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과도적 성격의 협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전협정 체결로 전투는 ‘중지’되었지만, 한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정전협정문에 빠진 이승만 서명…두고두고 ‘당사국 논란’

한국 땅에서 발발한 전쟁에서 남측 민간인 99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국군 15만명이 죽거나 실종됐지만 정전협정문에 한국 대통령의 서명은 담기지 못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과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만이 서명한 뒤 원본을 나눠 가졌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서명이 담기지 않은 이유와 한국의 정전협정 당사국 논란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전쟁 발발 직후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넘겼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휴전 논의에 불을 붙이자 반발하며 국군이 단독으로라도 북진해 통일하겠다고 주장했다.
정전협상이 약 2년 만에 타결될 기미가 보이던 1953년 6월18일 새벽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 2만7389명을 불시에 석방했다. 포로 교환 문제를 두고 협상의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치열하게 싸워온 두 진영은 또 협상을 중단해야 했다. 미국 특사에게 이 대통령은 정전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요구했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수 있었다.
이 대통령 서명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갈린다. 이 대통령이 의지에 따라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미국과 협의는 했지만 정전에 명시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고 버티면서 서명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애초에 정전협정 서명국이 될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전협정은 개념상 교전권을 가진 대표들 사이 약속이므로 유엔군 사령관만이 서명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이다.
한국이 서명하지 않은 사실은 추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논의에서 한국의 당사국 자격 논란으로 이어졌다. 북한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논의에서 당사자를 북한과 미국으로 한정하려 했다.
한·미는 이 대통령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 정전협정 준수 의도를 분명히 했고, 한국은 정전협정 후속 회담인 제네바 정치회담에 당사국 자격으로 참석했다는 점 등을 들어 맞섰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자와 통화하면서 “국군이 참전한 것이 명백한 만큼 정전협정의 당사국 지위는 공고하고 향후 평화협정 논의에서도 한국은 당사국으로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휴전선休戰線

정의
6·25전쟁이 1953년 7월 27일 22시에 휴전됨으로써 한반도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설정된 군사분계선.
내용
휴전선은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 또는 정전(armistice)이라는 협정에서 비롯된다. armistice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 arma(무기)와 institum(휴지기)이 합쳐진 말로, 병기의 휴식을 뜻한다. 북한공산군이 1950년 6월 25일에 불법으로 남침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당일 북한군에 대하여 침략행위를 중지하고 군대를 38선 이북까지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북한은 이에 불응하였다.
6월 27일에는 리(Lie,T.) 유엔사무총장이 재차 이를 요구하였으나 불응, 6월 30일 미국 트루먼(Truman,H.S.)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미국지상군이 참가할 것을 발표하였다. 7월 12일에 워커(Walker,W.H.) 중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8군사령부가 한국에 설치되어 한국에 주재하는 전 유엔군 및 국군의 작전권을 통합하여 단일지휘를 맡게 되었다.
유엔군은 9월 28일에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북쪽 국경선 초산까지 북진하였으나, 1950년 10월에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총회는 전후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하여 12월 14일 ‘정전 3인단’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회의 결과 총회 의장이 된 이란 대표 엔테잠(Entezam,N.)과 인도 대표 라우(Rau,B.), 캐나다 대표 피어슨(Pearson,L.B.) 외상이 52:2표의 다수결로 유엔정전3인위원회의 대표로 선임되었다. 이 3인단의 임무는 한국에서 만족할 만한 정전의 기초를 결정하고 이를 총회에 권고하는 것이었으나 중공 대표와의 회담교섭에 실패하였다.
오히려 1951년 1월 1일에 중공과 북한이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므로 그 해 2월 1일에 유엔총회는 중공이 한국의 침략자라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전쟁 1년을 맞으면서 1951년 5월 18일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인 존슨(Jhonson,E.)은 상원에서,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하며, 북한이 남침을 한 지 만 1년이 되는 6월 25일을 기하여 휴전한다. 그리고 이 해 12월 1일 이내로 한국 내의 모든 외국군이 철수하자.”는 휴전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유엔기구 밖에서 나온 최초의 실질적인 휴전안이었는데, 이 제안에 대해서 소련에서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즉, 유엔의 말리크(Malik,J.) 소련 대표는 1951년 6월 23일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휴전을 정식으로 제의해 왔다.
한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소련의 화평제안을 놓고 6월 26일 긴급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때 정부는 국토가 양단되어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휴전안은 결단코 반대한다고 결의하였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6월 27일 공보처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한국의 국토는 비록 황폐해졌으나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며, 적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몰아낼 때까지 어떠한 유화정책에도 양보할 수 없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38선상의 정전을 반대하면서, 38선의 정전은 곧 자살행위라고 결의하였다.
6월 30일 한국 정부는 정전반대5개조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① 중공군의 철퇴
② 북한군의 무장해제
③ 유엔의 침략원조 방지
④ 한국 대표의 국제회의 참석
⑤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의 침범을 불법으로 한다는 것
등이다. 6월 30일과 7월 1일에는 38선 정전을 반대하는 국민총궐기대회가 전국에서 열렸다. 1951년 6월 29일 트루먼 대통령은 리지웨이(Ridgway,M.B.)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현지에서 공산측과 휴전교섭을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부터 공산측과의 협상은 어떠한 문제라도 워싱턴 당국의 승낙 없이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처음 원산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덴마크병원선인 주틸랜디아호(Jutilandia號) 선상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의하였으나 공산측의 반응이 없어 다시 원산비행장·개성, 임진강 사이의 공로(公路)에서 하자고 계획을 변경, 수립하였다.
7월 1일 중공은 처음으로 리지웨이 사령관의 제의를 수락하면서 회담장소로 서울에서 서북쪽으로 35마일 떨어진 38선 이남의 개성을 택하였다. 한편, 공산측은 마치 유엔군이 전황이 불리해지자 휴전안을 제의해 온 것처럼 선전하면서 공산군이 전쟁에 승리한 것으로 선전하였다.
최초의 공산측의 휴전회의 제의가 김일성(金日成)과 펑더화이(彭德懷)의 이름으로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보내졌다. 1951년 7월 8일 개성 내봉장에서 예비회담을 갖고, 이어서 7월 10일 같은 장소에서 제1차 본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의 유엔군측 대표는 미국군의 조이(Joy,C.T.) 해군중장·크레이기(Craigie,L.C.) 공군소장·호디스(Hodes,H.I.) 육군소장·버크(Burke,A.A.) 해군소장, 한국군의 백선엽(白善燁) 소장이었고, 공산군측 대표는 북한의 남일(南日) 대장·이상조(李尙朝) 소장·장평산(張平山) 소장, 중공군의 덩화(鄧華)중장·세팡(謝方)소장이었다.
유엔군 대표들은 순수 군인 출신이었고, 공산군측 대표들은 군사경력과 함께 정치적 경험을 가진 정치군인이었다. 1951년 10월 하순 2개월 만에 휴전회담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장소가 옮겨졌다. 11월 27일 쌍방은 30일간의 잠정적 군사분계선을 실제접촉선으로부터 2㎞씩 떨어진 너비 4㎞의 비무장지대로 설치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후 휴전선이 확정되고 휴전선감시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가 휴전협정 제2조에 규정되었다. 1952년 5월 22일 유엔군 수석대표직이 해리슨(Harrison,W.K.)으로 바뀌고, 매코넬(McConnell,F.C.)이 추가되었으며, 한국군 이한림(李翰林) 준장이 유재흥(劉載興) 소장과 교체되었다. 1952년 10월 8일까지 1년간 200회의 회합과 345시간의 시일을 소비한 휴전회담은 제안단계에서 휴전성립 여부를 기다리게 되었다.
1952년 10월 14일 제7차 유엔총회에 한국휴전문제가 16번째 의제로 채택되었으나, 1953년 4월 14일 10시 30분(한국시간 4월 15일 0시 30분) 유엔정치위원회에서 브라질 대표에 의하여 한국의 휴전협상은 유엔총회에 상정할 것 없이 현지인 판문점에서 해결짓도록 하자는 결의안이 정식으로 제출되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1953년 4월 11일에 상이포로교환협정이 조인되었고, 한편 국내에서는 1953년 3·1절을 계기로 휴전반대운동이 열화처럼 일어나 5월 말까지 연 7,000회에 달할 만큼 전국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반대운동의 주요 원인은, 첫째 미국이 포로문제에 대해 공산군측에게 일대 양보를 하여 석방이라는 우리 입장을 무시하고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를 중립국관리위원회에 이관시킨 점, 둘째 중립국 가운데 공산국가와 인도가 한국에 파병된다는 것, 셋째 5·25송환제안을 함에 있어 한국과 일체의 협의가 없었다는 점 등이다.
미국은 6월 25일 로버트슨(Robertson,W.S.) 대통령특사를 보내어 한미 현안문제를 논의한 결과, 한국 정부는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여 휴전협상의 전망은 밝아졌다. 미국의 조건은
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② 장기적 경제원조
③ 한미 양국은 90일이 경과하여도 성과가 없는 경우 정치회담에서 탈퇴
④ 한국군 확장업무 수행
⑤ 정치회담 개최 전에 한미고위회담 개최
등이었다. 이로 인하여 북진통일과 휴전선에서 중공군을 철수시키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국군 대표는 5월 25일 이후 불참을 선언하고 조인식에도 나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울분을 느끼는 가운데 7월 27일 10시에 휴전협정을 지켜보았다. 공산군측 대표는 김일성·남일·펑더화이였고, 유엔군측은 사령관 클라크(Clark,M.W.)·해리슨이었다.
3년간의 민족상잔의 피해만 남긴 채 휴전선을 중심으로 중립지대를 설정하여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조직되어 양측의 휴전협정 준수와 위반 등을 감시하게 하였다. 한국은 휴전협정의 체결을 결사반대하면서 국토와 민족통일을 유엔군에 호소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분단선인 38선은 휴전선으로 대치되었다.
휴전 이후 북한은 수만 건의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간첩남파, 무장공비침투, 각종 테러사건 등을 자행해 왔으나 그 사실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핵위협카드로 남한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는 각종 전략전술을 펴왔다.
그 중 휴전선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이 북한의 ‘평화협정론’이다.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병행하여 판문점에 있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철수시키고 이어 1995년에는 폴란드 대표단마저 강제축출함으로써 정전협정이 무력화되어 휴전선에는 한 때 긴장감이 감돌았다.
실제 무장군인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무력시위를 자행했으며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중립국감시위원들의 회의에서 북한의 무력시위에 대해 엄중 경고하였다.
그 후 남한을 배제한 상태에서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던 북한은 제네바 합의(1994.10.21.) 이후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기구들을 무력화시키는 행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사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빌미로 진행한 미국과의 회담을 북·미평화협정 체결로 마무리지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어떠한 반대급부를 바라며 진행시켜 온 경수로 협상과는 달리 유엔군 사령부 해체, 주한 미군 철수 등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군사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남북한의 국제적 위상 및 정통성 문제와 맞물린 정치적 사안이기 때문에 북한은 이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 입장은 한결같다. 미국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정전체계가 유지되어야 하며 한반도 평화협정은 남북한간에 합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주한 미군을 현단계에서 감축할 경우 북한으로 하여금 상황을 오판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주한 미군의 감축계획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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