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포로수용소_또 하나의 전쟁터

사진 속 소년은 북한군 포로로 입술을 꼭 다문 결연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가슴에는 태극기, 양쪽 팔뚝에는
"멸공, 애국"
을 문신으로 새겼다. 비슷하게 팔뚝에
"Anti Commuist"
"Resist Communist and Russia"
라는 글씨를 새긴 북한군 포로도 많았다. 이 소년은 북한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지만, 남한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반공 포로였다. 북한군 포로가 왜 이런 선택을 하였을까?
사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서울, 경북 등 38도선 이남에 살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들은 북한군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징발한 의용군이었다. 당시 북한은 부족한 전투 병력을 의용군으로 채웠는데, 이렇게 북한군으로 징발된 남쪽 출신 젊은이들이 싸우다가 붙잡혀 포로가 된 것이다.
이들은 정전 협정에서 결정될 포로 교환 방식에 촉각을 세웠다. 만약 제네바 협약에 따라 무조건 본국 송환이 결정되면 북한군 포로는 북한으로 가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이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하지만 정전 협정에서 포로 교환 방식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그때부터 수용소 안은 남한에 남겠다고 결심한 반공 포로와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공산 포로로 나뉘어졌고, 두 세력은 전쟁 같은 경쟁을 시작하였다.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이승만 만세를 외쳤고, 또 다른 측은 인공기를 흔들며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 공산 포로와 반공 포로 간에 심한 폭력 사태가 일어나자 수용소는 이들을 격리해서 수용하였다. 수용소 안은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되었다.
당시 거제 포로 수용소에서는 타이완에서 온 국민당 정보 요원이 중국군 포로를 심문하였다. 이때 중국군을 대상으로 끔직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이 자행되었다. 중국군 포로의 몸에 반공이라는 문신을 새기거나, 고문과 협박을 통해 스스로 문신을 새기게 한 것이다. 반공 문신을 새긴 포로들은 고향인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한에 남았다.
이를 지켜본 반공 포로들은 자기 몸에 태극기와 반공 문신을 새겨 넣으며 남한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강제로 반공, 멸공을 새긴 포로들도 있었다. 반공 포로가 장악한 수용소 안에 있었던 어린 포로들은 본인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문신을 해야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어서 반공이란 글자를 몸에 새긴 채 북으로 송환되었다.
사진 속 어린 북한군이 어느 경웨 속하는지는 알 수 없다. 6·25 전쟁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남과 북 중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 몸에 새겨진 문신도 그 선택을 강요받은 흔적이다.
거제도 포로 소요사건巨濟島 捕虜 騷擾事件

정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공산군 포로들이 1952년 초부터 일으킨 일련의 수용소폭동 사건.
역사적 배경
판문점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1952년도에 접어들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도합 15만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소에는 포로 폭동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는 주로 국군 경계병과 포로들과의 알력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포로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공산군측에서 친공포로들을 조정하여 폭동을 유발시킨데 있었다.
경과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이 수용소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이들을 상호 격리 수용하는 한편 송환 희망포로의 수를 결정하기 위하여 포로조사가 진행되었다. 소위 제62동 수용소는 친공포로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유엔군 조사단이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952년 2월 18일 오전 조사팀이 조사준비를 하여 제62동에 진입하였을 때 포로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미군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포로측에서는 55명이 즉석에서 사망하고 22명이 후에 사망하였으며 140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동년 2월 23일 판문점 공산군측 대표단은 ‘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혈사건’이라며 항의를 하였다. 분명 이 사건은 유엔군측 대표단에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는 수용소 내 규율을 확립하기 위하여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으나 수용소내의 폭동과 사건은 계속되었다. 3월 13일에도 포로막사 옆으로 지나가던 경비대 행렬에 막사내의 포로들이 무차별 투석전을 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발생한 충돌에서 포로 즉사 10명, 치명상 2명, 부상으로 후송 26명이 발생하는 사고가 일어났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협약이 안고 있는 취약점으로 인하여 수용소측에서는 포로를 적절히 다룰 수가 없었다. 이는 포로를 보호하는데 집착한 나머지 포로에 대한 대우와 포로수용국의 제한조치만을 규정하고 있는 반면 포로가 조직체를 형성하여 포로수용국에 위협을 가하는 사태에 대응할 조항은 담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1952년 5월 6일 제76포로막사의 포로들은 경비병에 의한 폭행과 수용소내의 금품수색을 구실로 헌병대대장과의 면회를 요청하였다. 헌병대대장으로부터 이에 대한 조사를 확약받은 포로들은 다시 포로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수용소장 돗드 준장은 포로명단 작성을 위해 면담에 응하기로 하였다.
5월 7일 오후에 돗드 장군이 제76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 중에 일단의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수용소장이 포로들의 계획된 음모에 빠진 것이었다. 피랍은 미 제2군수사령관을 통해 즉시 미 제8군사령관에게 보고되었다. 제8군사령관은 승인 없이 무력사용에 의한 구출작전은 불허한다는 지시를 내렸으며 제2군수사령관은 설득에 의한 구출을 시도하였다.
포로수용소장 납치에 성공한 포로들은 요구사항을 작성하기 위하여 수용소측의 허락을 받아 포로수용소내의 모든 포로지도자들을 제76포로수용소 막사로 모이게 하였다. 포로들의 최초요구는 각 막사간에 전화 시설을 갖추고 포로조직을 인정하라는 등 7개항이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이 사건에 긴급 대처하기 위해 미 제1군단 참모장 콜슨(Charles F. Colson)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는 콜슨 준장을 통해 돗드 준장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는 요구서를 포로들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콜슨 준장은 수용소주변에는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실제로 콜슨 준장은 5월 10일을 목표로 제76포로수용소를 무력으로 진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포로들은 이에 대해 강경히 맞서 대담한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결과
콜슨 준장은 공산군 포로단체를 인정하였지만 송환문제는 그의 재량권 밖이었다. 콜슨과 돗드 준장과의 전화통화가 있었는데 돗드는 ‘포로들이 살해된 적이 있었음을 시인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포로들이 필수적이라고 요구하는 사항들을 포함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콜슨은 돗드의 제의에 동의하고 일단 포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을 회신하였다.
이러한 약속을 얻어낸 친공포로들은 돗드 장군을 1952년 5월 10일 저녁 석방하였다. 그러나 콜슨이 포로들에게 한 약속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다. 돗드 준장이 석방된 후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후임인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즉각 콜슨의 협정을 공갈에 의한 것이라며 무효를 선언하였다. 그는 공산포로 자체내의 지휘자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하여 포로들이 사망하였고, 또 이곳 포로수용소에는 국제적십자사대표나 기자단 대표들이 항상 자유롭게 방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클라크 장군은 콜슨 장군을 즉각 해임하고 미 제2사단 부사단장 보트너(Haydom L. Boatner)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한 즉시 거제도 경비대를 증원하도록 명령하여 5월 20일까지 제187공정연대전투단과 전차 1개 대대를 증강시킴으로서 전체병력이 14,820명에 달하였다.
의의와 평가
돗드의 피랍사건은 휴전회담에서 공산군측에게 좋은 선전무기가 되었다. 회담석상에서 수석대표 남일은 콜슨의 회신문에 기초하여 “끝없는 일련의 유혈사건이 유엔군측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유엔군의 이른바 포로조사라는 것이 공산군측 포로들을 강제로 잡아 두려는 음모임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포로들은 의도적으로 수용소 내에 침투한 공작원들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휴전협상에서의 공산군측의 입장을 지원하며 유엔군의 입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유엔군에서 제안한 일괄타결안도 포로사건과 맞물리어 타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거제포로수용소

거제포로수용소(Geoje-POW Camp)는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1년 2월에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1953년 7월까지 운영된 포로 수용소이다.
거제도는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 수월하면서도, 당시에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선박 밖에 없어서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현지 안내문
한국전쟁 중 UN군에 포로가 되었던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이다.
1950년 11월부터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저산지구 등 360만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포로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을 수용하였다.
이 곳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돗드 준장이 납치되는 불미스런 사건까지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폐쇄되었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졌다. 현재는 수용소의 잔존건물 일부만이 곳곳에 남아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의 장소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시설과 규모
1950년 11월 27일부터 유엔군에 의해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 장평동,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총면적 12 km2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개시되었다.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 7, 8, 9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수용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부상병 포로의 송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송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포로 송환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송환 시키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송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송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670명이었다.
포로들의 탈출과 송환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 19일 이곳을 제외한 여덟 곳의 포로수용소에서 35,000명 가량의 비송환포로들을 탈출시켰다. 이곳에 있던 포로들은 북으로 송환되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 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장으로 활용되고 있다.[3]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하여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시위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프랜시스 도드(영어판)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헤이든 L. 보트너(영어판)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이 일어났다. 보트너 준장은 6월 10일에 도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포로를 분산 수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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