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개혁 vs 농지 개혁

위 사진은 북한의 토지 개혁 홍보 포스터이다.
"토지는 농민의 것"
이라는 구호가 보인다.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지주제를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던 바였다. 해방을 맞이한 후 농민들은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때 토지 개혁을 먼저 시행한 쪽은 북한이었다.
1946년 3월 5일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무상 몰수, 무상 분배 원칙의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몰수 대상은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 민족 반역 행위자들과 월남자들의 토지, 지주들의 토지였다. 소작을 주는 모든 토지는 몰수되었다. 이렇게 몰수한 토지는 집마다 가족의 수와 노동력(나이)에 따라 점수를 매겨 분배하였다. 남의 땅을 소작만 하던 농민들이 땅을 얻게 되면서 농민들은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분배된 토지에 대한 매매 소작 저당은 허락하지 않았다.
지주들에게 북한의 토지 개혁은 너무 가혹하였다. 5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는 토지 뿐 아니라 집이나 가축까지 몰수당한 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지주들은 월남을 택하였고, 남으로 내려온 이들 중에는 서북 청년회와 같은 극우 단체를 만들어 강력한 반공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북한의 토지 개혁 소식은 남한 농민들에게도 전해졌다. 이에 남한에서도 조만간 토지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미군정이 제정하려 했던 토지 개혁법은 지주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1948년 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이 관리하던 일본인 소유 농지만을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였다.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농지 개혁법이 제정되면서 유상 매수 유상 분배의 농지 개혁이 진행되었다. 농지 개혁법 제정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이었던 조봉암이 큰 역할을 하였다. 농지 개혁은 1950년부터 시작하여 6·25 전쟁 전까지 70~80%가 진행되었다. 참으로 절묘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농지 개혁을 시행했기 때문에 남한 정부는 1950년 가을부터 전국에서 분배 농지의 상환금(쌀)을 수납하기 시작하였다. 이 쌀을 군량미로 하여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재정이 부족한 정부는 지주의 토지 매수를 위해 지가 증권을 발행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지주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지가 증권의 가치가 폭락하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중소 지주는 몰락하였다. 하지만 농지 개혁으로 지주 소작제가 사라졌고, 대부분 농민이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북한과는 달리 전체 토지에서 산림 등을 제외한 농지에 대해서만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토지 개혁이 아니라 농지 개혁이라고 한다.
토지개혁土地改革

정의
이미 시행되고 있던 토지에 관한 제도나 규정을 종합적으로 변경 또는 신설하는 토지정책.
개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토지제도나 토지소유 형태 등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아니하나, 대체로 주민들은 마을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생활을 하였기에 토지는 원칙적으로 마을공동체의 공동소유라고 할 수 있으며, 공동생산과 공동분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원시공동체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고 족장에 의한 토지의 사유화와 공동체 성원들의 황무지 개간 등으로 점차 가족단위의 토지지배도 나타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의 토지 개혁
고구려·백제·신라의 토지제도는 고대국가가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전쟁 승전물인 점령지를 국유화하면서 일부는 족장에게 식읍으로 주고 또 일부는 공신들에게 분배해 주었으며, 정복당한 나라의 국민을 노예 또는 농노화하여 그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루어짐에 따라 지배지의 전 토지가 국가 소유지가 되었으며 토지국유제로 발전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또한 경작은 농민과 노예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부는 사적 점유와 경작이 있었으리라 보인다.
그리고 신라의 통일과정에서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비약적으로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통치하기 위해서 토지제도 재편성의 필요성이 나타났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새로운 토지제도 내용은 관료전(官療田)·정전(丁田)·관모전답(官謨田畓)·내시령답(內侍令畓)·연수유답(烟受有畓)의 등장이다. 경덕왕대에 국가체제를 정비했지만, 그 이전 687년(신문왕 7)에 문무관인에게 직급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한 관료전이 있었는데 2년 후에 폐지되었다.
다시 757년(경덕왕 16)에 녹읍제도로 환원하여 관직이 있는 동안 봉급 대신에 직전(職田)으로 지급하고 퇴관시에는 반납하게 하였는데, 이 제도는 통일신라 말까지 존속했다.
정전은 722년(성덕왕 21)에 실시되었는데, 일반백성이 국가에서 토지를 분배받고 경작하여 수확의 일부를 조(租)로써 국가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의 수입으로 하는 것인데, 60세가 되면 국가에 반납하였다.
이 제도는 토지국유제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제도로서 농민들을 토지로 구속하여 국가재정 수취를 증대할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관모전답·내시령답·연수유답 등은 국가 직속지로서 관료와 촌주 및 농민에게 지급하던 토지인데, 특히 연수유답은 정전제가 소멸된 뒤 정전과 비슷하게 모든 농민에게 분배한 농민보유지로 보인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귀족·관료들의 소유토지가 사전화와 겸병 등으로 사유농장으로 확대되고 사전·직전 등이 매매·증여·양도되었다.
또한 불교가 성행함으로써 국가의 보호로 사원에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이의 확대는 면세와 국역의 면제 등으로 국가재정의 결핍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토지국유제의 문란과 통일신라의 붕괴를 가져 오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기간까지 토지개혁은 국가의 흥망성쇠, 왕권의 변동과정에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강화의 하나로 이루어졌으며, 국가소유 토지의 분배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고려 조선시대의 토지 개혁
고려 건국 초기에는 전지역에 대해 중앙집권의 지배권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지방토호들에 대한 소극적인 회유책으로서 전제개혁이 이루어졌다.
귀순하는 지방 장군이나 성주의 기득권을 보장하여 기존의 토지와 농민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하고, 전조(田租)를 감면, 면제해 주었다. 군사적·정치적으로 충성하였던 군인·신하에게는 역분전(役分田)을 보상 지급하여 일시적으로 봉건지배세력과 농민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976년(경종 1) 전시과제(田柴科制)를 실시하여 모든 국토에 대한 중앙집권적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국내의 경작지와 삼림을 국가의 토지대장에 등록한 다음, 문무백관에서부터 한인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여 당해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을 당대에 누릴 수 있도록 하였으나, 상속·매매는 허용하지 않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토지국유제를 확립한 토지개혁이었다.
그 뒤 성종 때 중앙집권적 통치기구가 정비됨에 따라 중앙·지방 해당 관서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공해전시(公廨田柴)를 설정하여 각 기관에 전시를 지급하고, 그 토지로부터 수납받은 전조(田租)로써 모든 비용을 충당했다.
그러나 잦은 관직의 교체로 새로운 관리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토지가 부족하여 1014년(현종 5)·1034년(덕종 3)·1076년(문종 30)에 각각 부분적으로 개정했으나 근본 전시과체제는 유지되었으며, 단지 관리에 대한 토지 지급액이 점차 감소되어갔다.
인종 때에는 외척의 정권 농단(壟斷: 간교한 수단으로 이익을 독차지 함)으로 토지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져 수조지의 쟁탈과 토지겸병에 의한 귀족들의 사유토지 집적이 확대됨에 따라 전시과체제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더욱 무인정권이 출현하고 몽고 등 외세의 침입에 따라 정치·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져 군사적 쟁탈에 의한 권문세가의 토지 독점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전시과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국가재정을 위협하여 결국 고려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공전(公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재정이 핍박할 뿐더러 새로운 관료에 대한 전시지급이 곤란해져서 정치적·사회적 동요가 일어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흥사대부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성계(李成桂)는 1389년(공양왕 1)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실시하고, 1390년에는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여 기존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태우고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함으로써 토지개혁을 결행하였다.
이로써 구세력의 물질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신정권의 지배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양전사업이란 고려 말기 이래 사전 확대 과정에서 은결되어 국가의 지배에서부터 빠져 있던 토지를 국가소유로 편입시키고 토지의 등급을 조사하는 토지조사사업으로 국가재정의 수취원을 확대했으며, 합리적인 지대징수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과전법의 공포로 전직·현직 문무백관에게 녹봉을 주는 대신 18과(科)로 각각 차등있게 경기도의 토지를 지급하고 세습을 인정함으로써 전국적인 사전을 공전화하고, 사전은 경기도에 한정하고 세습을 허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무마시키면서 결국 사전을 축소시켜 사전에 대한 국가통제를 강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인과 한량 등 중소 봉건지배층에 대해서는 경기 이외의 지방토지를 군전(軍田)으로 지급하였다. 과전법제도에서는 사전에 대해 전세(田稅)를 부과하여 재정수입원으로 충당하였다.
한편으로는 세습을 허용하는 등 당초부터 개인의 소유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기에 조선 후기에 사전 주인이 실질 지주가 되어 봉건적 소작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관료가 증가하고 세습이 계속됨에 따라 경기도의 토지가 부족하게 되어 1417년(태종 17)에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토지를 과전으로 지급하는 등 과전이 공전을 잠식하는 폐단이 나타나 1466년(세조 12)에는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제(職田制)를 채택하였다.
직전제는 현직 관료에게만 차등있게 토지를 지급하되 전조의 수납을 국가가 대신하고, 수전자(受田者)에게는 국고로 보상해 줌으로써 공전잠식을 방지할 뿐더러 사전 주민의 불법적인 농민수탈의 폐해를 방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료신분의 세습화로 인해 결국 토지도 세습되었고, 1592년(선조 25) 일본의 침입으로 인해 정치·사회가 더욱 혼란해지고 농지 결수도 3분의 1로 감소되어 농민의 부담은 더욱 늘어나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등 직전제도 사실상 붕괴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됨으로써 사전이 확대되어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관료적 지주가 등장하고, 상대적으로 공전의 경작권을 상실한 농민은 관료적 지주와 소작관계를 형성하는 등, 봉건제 아래의 토지의 사적 소유관계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농지가 황폐해짐으로써 일부 농민은 개간 등을 통해 토지를 집적하고, 문호개방 이후에 한편으로는 상업·수공업이 활성화하고 화폐유통·교환경제가 진전됨에 따라 농민도 자본을 집적하여 토지를 매입하는 등, 농민 출신의 지주와 신흥 지주가 등장함으로써 근대 토지 소유 현상이 사실상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토지개혁
1905년 일본은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후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전면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던 식량문제를 우리나라의 식량을 빼돌려서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그 선행조건으로서 토지개혁의 일종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1905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의 구체적 공작에 착수했던 일제는 1906년에 외국인의 토지소유와 매매·교환·증여 등을 법적으로 확인하는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저당규칙」을 반포 실시하도록 우리 정부에 요구하였다.
1910년 3월에는 우리 정부 내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실시조사에 착수하게 하였으나 그 해 강제점령에 의해 동사업의 업무는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계승되었던 것이다.
1912년에 토지조사령을 발표하여 이 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조선민사령」·「부동산등기령」·「부동산증명령」을 발표하여 이른바 ‘소유권 불가침과 무제한 보호’를 실질 내용으로 하는 근대 토지사유제도를 확립했다.
조사사업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첫째, 토지에 대한 소유권 조사로서, 그것은 지적을 설정함으로써 토지 등기제도의 창설을 기하는 것으로, 지적 설정을 위해 토지의 소유지·지번·지적 및 소유권자를 조사하여 각 토지의 위치와 형상, 그리고 경계 등을 조정하였다.
그러한 내용을 포함하는 소유권 조사는 이 사업의 뼈대를 이루는 것으로서 신고주의에 입각해서 실시되었다. 둘째, 토지가격 조사로서 식민지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토지의 시가, 임대가격, 그리고 토지수익 등을 확립하여 토지가격을 통일적으로 조사하여 지세의 부과기준을 선정하려는 것이었다.
셋째, 지형·지모 조사로서, 지형도 제작을 위해 실시한 조사였다. 이와 같은 사업을 통하여 1필지마다 그 지번·지목·면적·지가·지주 및 등급을 기재한 토지대장과 기타 부속대장 및 5만:1 또는 1만:1의 지형도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법률적인 조처를 토대로 하여 실시한 이 사업은 1910년 10월에서 1918년 12월에 이르는 8년간의 기간과 총경비 2,410여만 원과 300∼400여 명의 상임직원이 동원되어 완결됨으로써, 부동산 등기제도의 창설을 가져 오는 대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지국유제가 무너지면서 왕족·관료·토호 등이 국유지를 사점한 데 대하여, 농민은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고 현물지대를 납부하는 외에 신개간지를 점유할 수 있는 등 당시 우리 나라의 토지소유제는 국가와 국왕에 의한 추상적 소유권과 실제로 농업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의 경작권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토지소유관계였던 것인데, 이와 같은 토지소유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토지소유권을 법률적으로 편성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일제는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신고주의를 채택하여, 당시 일반 소작인의 경작권이 관습적으로 토지소유권으로 신고될 만큼 성장해 있지 못한 상황에서 더욱 강력한 수세권자인 지주에게 토지소유권이 인정됨으로써, 자유로운 소농민의 토지소유가 성립될 가능성은 이 신고주의 방법 때문에 처음부터 배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업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적으로 토지의 현실적인 보유자로서의 관습상의 권리인 농민의 경작권이 상실되고 토지에서 분리되어, 대다수의 농민이 영세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둘째, 지주에 대해서는 무제한적이고 배타적인 의미의 사유권을 법률적으로 보장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의 지배계층과 구조적으로 타협하고 유착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원활하게 진행했던 것이다.
셋째, 궁장토·역토·둔토·목장토 등의 거대한 면적의 공전을 국유지로 만들었고, 민유지로서 일반농민에게 투탁되었던 투탁전·무토궁방전·무토면세전 등을 강압적 방법에 의하여 국유지로 편입시켰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일제는 우리나라 최대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 조세수입의 확고한 원천을 마련하여 식민지통치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의 경지면적을 보면, 1910년과 비교해서 논은 약 83.79%, 밭은 약 79%가 증가하였다. 이것은 주로 이 사업이 은결과 신개간지를 중심으로 한 데 기인하여, 경지면적의 증가가 지세수입의 증가를 가져왔음은 당연한 것이다.
다섯째, 농촌사회에서 농민층이 극심하게 분해되었다. 이 사업으로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현실적인 경작권을 상실한 소작농은 소작권에 대한 권리가 불안정해져 치열한 소작경쟁이 일어났다.
더구나 일본 자본의 토지점유와 고리대상업자본적 성격은 농민을 고율의 소작료로 인한 압박에 신음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즉, 한편에 반봉건적 기생지주와 다른 한편에 다수의 영세농과 소작관계를 편성하여 일제의 전 지배기간 동안 농민이 몰락하도록 제도화했다.
결국 일제는 일본 자본이 쉽게 침투할 수 있도록 하는 우선적인 작업으로 종래의 수조권자인 봉건계층을 토지소유권자로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다수의 현실적 토지보유자인 농민은 전통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경작권을 상실하여 지주·소작 관계를 악화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농지가 없거나 부족한 농민이 대부분인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형식적으로는 근대적인 토지소유제도가 성립되었으나 본질적으로는 토지개혁이 실시되지 못하였으며, 반봉건적인 영세농 및 소작관계의 재편성일 뿐이었다.
토지조사사업 이후 토지소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되자 일본의 대재벌회사들은 우리의 소지주들을 착취대상으로 삼아, 과다한 각종 공과잡부금을 부담하지 못하는 약점을 이용해 착취를 일삼았으며, 결과적으로 헐값에 농지가 일본인 소유로 넘어 가게 하였다.
광복 이후의 토지 개혁
북한에서는 1946년 1월 31일 농민연맹이 결성되고, 그 해 3월 3일 대표회의를 열어 토지개혁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시대 확립한 토지등기제도를 폐지하고 일제시대 발급한 토지대장을 모두 회수할 것
둘째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고용노동자, 토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 무상분배할 것
셋째 농민의 지주에 대한 부채 취소
넷째 관개기설·산림 등을 몰수하여 국유화할 것
등이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이틀 뒤인 3월 5일 이 요구를 받아들여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으며, 토지개혁 수행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한 형사법으로 「토지개혁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부동산·농기구 등의 매매·처분 등을 금지시켰다. 이어 3월 7일에는 토지개혁 법령의 구체적 실시규정으로 ‘북조선 토지개혁 법령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3월 8일에 ‘토지개혁에 관한 세칙’이 공포되고, 3월 말까지 짧은 시간에 정부 매수가 완료되었다. 이어 토지의 농민에 대한 분배는 도인민위원회가 ‘토지소유권에 관한 증명서’를 교부하여 이를 토지대장에 등록함으로써 완료하는 절차를 밟았다.
따라서, 5월 22일 발표된 ‘토지소유권 증명 교부에 관한 세칙’은 6월 20일까지 증명서를 교부하도록 함으로써 토지개혁 과정이 절차상으로는 6월 말에 끝나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더불어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는 헌법 제86조에 의거 토지개혁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먼저 미군정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1950년 6·25전쟁 발발 직전에 단행된 토지개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 말 문호 개방 후 어느 정도 조짐을 보이던 농민 토지 소유현상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철저하게 저지되고 대신 지주 토지소유제가 강화되었다. 일제의 토지 투자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자작농 대 소작농의 비율은 1914년 50:50, 1930년 18:25, 1940년에는 2:3으로 달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율 지대가 성행하게 되었고 생산력이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소작쟁의도 날로 심각해졌다.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지역이 아니라 패전국인 일본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토지개혁설은 본래 해방과 동시에 나돌기 시작하였는데, 방법을 둘러싸고 토론은 날로 뜨거워져 갔고, 좌우익 간의 사상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북한의 토지개혁(1946년)으로서, 미군정도 전후 세계적인 민주경제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농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는데, 군정의 토지개혁 논의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사실 8·15광복 이후 우리나라의 농지소유관계는 일제 때의 소유관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 봉건적 소유관계였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우리나라의 농지소유 형태는 아시아의 공동체 성격이 짙었으며, 조선 말기를 지나서도 이 질서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면서 그 터전 위에 전체 농민이 공전 또는 사전에 얽매어 가족노동을 중심으로 영농을 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소작인은 그대로 소작인으로, 종래의 수조권자(호족, 관리)는 그대로 지주로 바뀌었다. 또한 조선 재래의 대토지 소유자는 대부분 부재지주였고 농지·농업·농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부재지주의 대리인인 마름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한편 일본인 지주도 토지를 투기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토지 경영을 관리인에게 일임하거나 다른 곳에 위탁하여 경영함으로써 부재지주나 마찬가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농민의 지주에 대한 불만 역시 심각하였다.
1930년의 소작 관행 자료를 보면, 정조(定租: 작황과 관계 없이 해마다 일정한 금액을 내는 도조)의 경우 최고 9할, 보통 5할, 타조(打租: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을 반씩 나누는 방법)의 경우 최고 7.5할, 보통 5할, 집조(執租: 지주가 소작인을 입회시키고 벼 수확 예상량을 협정하는 도조)의 경우 최고 8할, 보통 5할이었다.
이 외에도 잡다한 부담금도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관행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1932년 12월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整令)」을 제정, 발표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어 1934년에는 소작권 보호를 위한 「조선농지령(朝鮮農地令)」을 제정, 발표하여 소작기간 3년, 소작권 상속인정, 소작권 전매금지 등을 규정하고, 소작료율을 지주와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지주의 심한 반발과 비협조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1945년부터는 소작농가가 줄고 있있다.
그 이유는 해방 이후 곧 실시되었어야 할 농지개혁이 지연되면서, 농지개혁을 예상한 지주들이 소작권을 박탈하여 자작농으로 전환하거나 토지를 강매하여 사실상 소작을 자작으로 가장하였기 때문이다.
광복 후 농민운동의 고양, 북한의 토지개혁 등으로 1947년 이후에는 토지개혁이 기정 사실화되어 있었다. 문제는 개혁방식에서 ‘무상몰수·무상분배’, ‘유상매수·무상분배’, ‘유상매수·유상분배’ 안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논의의 쟁점이었다.
좌익세력이 약화되고 농민운동이 분열, 쇠퇴하면서 무상몰수·무상분배안은 배제되었고, 미군정의 구일본인 소유토지 분배방식을 따라 유상분배의 토지개혁 방식이 거의 결정되었다.
먼저 농림부는 ‘농지개혁법안’ 작성에 착수하여, 1948년 11월 22일에 그 초안을 발표하고, 1949년 1월 24일 국무회의에 상정, 통과시켜 ‘농지개혁법안’은 2월 5일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한편, 국회에서도 독자적인 ‘농지개혁법안’을 산업노동위원회에서 기초안을 만들어 1949년 2월 1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국회 본회의 심의과정에서 각종 수정안이 속출하여 광범위한 수정을 거친 끝에 보상과 상환액은 각각 평년작의 15할 및 12할 5푼, 보상과 상환은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법」이 1949년 4월 28일 통과되어 정부에 회송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재정상의 이유로 보상액이 일치하도록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국회에서 거부하여 1949년 6월 21일 공포하였다.
농림부는 농지개혁의 연내 실시를 목표로 예산확보를 꾀하는 한편, 전국적인 농지 소유 실태조사에 착수하였으나 예산의 부족, 정부측의 농지개혁법 개정 요구로 지연되었다.
국회는 다시 정부의 의사대로 지가상환액을 15할로 인상하고, 지주에게는 기업자금으로 정부 보증하에 융자할 수 있는 지가증권을 발급하기로 한 개정안을 채택, 통과시켰다. 드디어 1950년 3월 10일 개정법이 공포되어 농지개혁 실시를 위한 지리한 입법조처가 완료되었다.
3월 25일에는 그 시행령이, 4월 28일에는 시행규칙이 각각 공포되었으며, 1949년 6월 21일 현재로 실시된 농가 실태조사도 완료되어 농지소표(農地小票)에 의한 대가조사(對價調査)와 농가별 농지일람표의 종람(縱覽)이 완료되고, 분배 예정통지서 발급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법과정에서 입법 자체는 지주들의 광범위한 소작 방매(小作放賣)를 방조하였다. 농지개혁에 대한 농림부 시안이 발표되고, 농지개혁이 기정 사실이 되자 소작권 이동(小作權移動)과 소작권 박탈을 금지하는 농지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안이 1948년 12월 초에 국회에 상정되었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이 곧 상정될 것이라는 이유로 심의되지 않았고, 1949년 3월 10일 재차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농지개혁법」 심의를 위한 의사일정 변경으로 심의가 보류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광범위한 소작지 방매행위가 빈발하여 더욱 불완전한 농지개혁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확정된 「농지개혁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농가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 내지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둘째, 개혁방식에서는 경자유전(耕者有田: 경작하는 자가 땅을 가져야 함)의 원칙하에 소작지를 유상매수하여 경작 농민에게 유상분배하되, 전답의 소유 한도는 최고 3정보를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셋째, 분배대상으로는 대상 농지를 현재 경작하고 있는 농가와 경작능력에 비하여 적은 농지를 경작하는 농가, 농업경영에 경험이 있는 순국선열의 유가족, 영농력을 가진 피고용농가 및 국외에서 귀환한 농가의 순위로 하고, 분배·소유하게 될 분배농지의 대소규모는 수배농가(受配農家: 배급을 받는 농가)의 노동력과 농업생산 수단의 보유상태에 따라 결정하기로 하였다.
분배받은 농지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하되,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는 매매·증여, 기타 소유권의 처분이나 담보권의 설정을 제한하도록 하였다.
넷째, 매수농지에 대한 평가는 평년작 주생산물 생산량의 15할로 하고, 지가보상은 정부가 지가증권을 발급하고 지가증권을 기업자금으로 사용할 때에는 정부가 융자·보증을 하여 증권 액면은 보상액을 환산한 당년도 당해 농지 주생산물 수량으로 표시하되, 증권의 보상은 5년간 균분연부(均分年賦: 해마다 똑같이 나누어 냄)로 하여 매년 액면 농산물의 법정가격으로 산출한 금액으로 지급한다.
다섯째, 지가상환은 당해 농지의 보상액과 같은 액수로 하며, 5년간 균분연부로 하여 매년 정부가 지정하는 현품 또는 대금을 정부에 납입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의 농지개혁사업이 1950년 5월 이후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정부는 농지개혁사업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한편, 1949년 6월 21일 현재를 시점으로 조사 완료된 농가 실태조사에 의하면, 총매수 대상면적은 60만 1,048정보(총경작 면적의 29.5%)였으며, 총분배 예정면적은 83만 3,881정보(총경작 면적의 40.2%, 귀속농지 23만 2,833정보 포함)였다. 미군정에 의한 귀속농지 분배분은 3정보를 초과하지 않는 한 농지개혁사업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실시에 들어갈 즈음 6·25전쟁이 일어나 농지개혁사업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6·25전쟁으로 농지개혁에 관한 관계서류가 분실·소실되고 때로는 중첩되었다.
정부는 서울 수복 즉시 개혁사업에 재착수하였지만 관계서류가 없어진 탓으로 분배 대상농지는 더욱 축소되어 농지매수와 분배가 일단락을 보게 된 1957년 12월 31일 현재, 농림부가 집계한 분배농지와 수배농가 호수는 47만 22정보에 154만 9,532호에 불과하였다.
이는 1949년 6월 21일 현재 분배예정 면적의 56%에 불과하며, 일반 농지의 경우 겨우 44.6%, 귀속농지의 경우 87.8%이다. 더욱 광복 이후 농민운동의 고양과 그에 따른 농지개혁에 대한 불안, 그리고 소작료 3·1제의 실시에 따른 소작수입 감소 등의 요인에 의해 소작지 방매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정부 수립 후 토지개혁이 기정 사실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소작권 이동과 소작권 박탈을 금지하는 임시조처법안이 보류됨으로써 1948년부터 1949년 간에 소작지 방매가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토지개혁의 본래 목적 달성의 실패요인이 되었다.
이 토지개혁의 평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게 내릴 수 있는데, 그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혁이 실시된 뒤 10여 년이 넘도록 농업생산력은 일제 때의 그것에 비해 크게 증가하지 못해 토지개혁이 농업생산력을 증진했다고는 볼 수 없다.
둘째, 농지개혁 후에 광범위하게 소작농이 다시 생기는 현상으로 1970년도 중반에 고미가정책을 써서 미세하게 하락한 경우를 제외하면 소작농 호수 및 소작농은 계속 증가 추세를 보여 농가경제의 자립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또한, 농가 부채가 1960년대 및 1970년대를 지나면서 계속 증가하여 농민생활은 나아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의 농지소유 충족감으로 사회가 안정되었고, 경작자에게 농지를 소유하게 함으로써 성실하게 영농을 하고 농토를 가꾸게 하였으며, 농민들을 고율소작료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생활에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농지개혁법
개요
농지개혁법(農地改革法)은 농민에게 균등한 경작권을 주기 위하여 가구당 보유할 수 있는 농지를 제한하며 초과된 농지는 다른 농민에게 유상 또는 무상의 방식으로 강제 분배하도록 하는 법률이다. 1949년 6월 21일에 제정되었다.
아시아에선 20세기 중반 대한민국, 일본 등에서 집행되었고, 이 중 한국의 경우는 미군정 당시 미국이 입법을 시도했으나 한국민주당 등의 반발로 귀속농지에 대한 분배 작업만 개시되었을 뿐 통과되진 못하였다. 그리고 이는 제헌헌법 제86조에 명시하는 것으로 제1공화국에 떠넘겨 졌다.
제1공화국에서는 미국 측에서 낸 방안보다 지주들에게 일부 유리한 방식으로 수정함으로써 1949년 6월 마침내 법률 제31호로 공포되었으나, 빈농에게 농지가격의 최대 30%까지 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제7조 제1항 제5호가 삭제되고 정부보증융통식증권을 지가증권으로 바꾸는 등의 개정작업을 거치느라 집행되지 못하였고, 1950년 3월 10일 법률 제108호로 개정이 완료되어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서부터 집행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농지개혁법(1960. 1. 13. 법률 제561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이며 제6공화국 문민정부 때인 1996년 폐지되어 현행 '농지법'의 전신으로 남게 되었다.
농지개혁법의 제정 배경
1945년 8.15 광복 후 한반도에 자작농의 비율은 많이 낮았으며[6], 이것은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을 심화시킬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기존의 소작료는 수확량의 5할이었고 많게는 6~8할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소작료를 낸다고 끝이 아니었다. 종자, 비료, 농기구를 자비로 마련하고 마름 같은 소작관리인의 보수도 부담하는 일이 흔했으며 심할 경우 지주의 세금 부담까지 대신 떠안는 등 그 폐해가 심각했다.[7] 이에 광복 후 미군은 미군정을 설립하면서 농업 정책의 일환으로 농지개혁법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일단 나중으로 미뤘다. 그들의 주 임무는 원래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그들을 일본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당대표)였던 송진우 역시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토지 정책에 있어서도 종래의 불합리한 착취 방법을 단연 배제하기 위하여 일본인 소유 토지의 몰수에 의한 농민에게 경작권 분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소유 토지도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동시에 매매 겸병을 금하여 경작권의 전국적 시설을 촉진하여 민중의 생활을 권보하지 않으면 아니될 줄 믿습니다."
- 송진우의 연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 기사
그러다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 때는 북한의 소식이 여과없이 신문을 통해 남한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남한 농민들도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당연히 우리는 왜 토지개혁 안 하냐고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에 공산주의 세력의 농촌 침투를 우려한 미군정은 소작료를 수확량의 3분의 1만 낸다는 3.1제(33%)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소작료가 크게 줄어들어 농민들의 부담이 많이 줄었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했다. 기존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개편한 신한공사 체제에서 토지개혁이 시도되었으나 지주들의 반발과 곧이어 실시된 1948년 제헌 국회 총선거의 여파로 연기되었다.
농지개혁법 제정
이승만은 1946년 2월에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 정책 33항'에서 이미 농지개혁을 당면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지주층을 주요 지지층으로 둔 한국민주당의 협력을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국무총리와 초대 내각 임명과정에서 한국민주당 인사를 대거 배제하면서 한국민주당 측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리고 초대 농림부장관 자리에는 공산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조봉암을 임명하여 농지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의 급진적인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다른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의 완만한 농지개혁법이 1949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한 농가의 토지 소유한도는 3정보(1정보는 약 3,000평)로 정해졌으며, 토지의 1년 소출의 1.5배를 매각지가로 산정하여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5년 동안 매년 소출의 30%를 정부에 균등 상환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지주에게 보상으로 매각지가에 상응하는 액면가의 지가증권을 발급하였다. 또한 지주에게는 국가사업 우선참여권이 주어져(예를 들어 적산 불하시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한다던가) 이들의 재산이 산업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되었고, 5월부터는 토지장부 열람이 개시되었다.
다만 불과 1달 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농지개혁은 잠깐 중단되었다가 서울을 비롯해 남한 대부분 지역을 수복하고 난 후인 10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본래 전쟁으로 인해 1년 연기하려고 했지만 북한이 잠시나마 점령했던 남한 지역에서 시행했던 토지개혁에 대응하여 하루빨리 농지개혁을 시행하지 않으면 전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전황이 안정된 1951년 5월, 정부의 귀향 권고에 따라 피난갔던 삼남 지역의 농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한강 이북 지역의 농민들 역시 1952년 5월 부로 귀향이 허락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농민들은 분배받은 농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1945년 말 한국 전체 경지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농지가 1951년 말에는 96%로 치솟았다. 드디어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대로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받았으나, 전쟁통의 식량 문제 때문에 지가증권을 헐값에 매각한 사례가 허다하였다. 막말로 나라가 망하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지가증권의 가치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지가증권의 가격은 더더욱 바닥을 쳤다. 절반가격은 양반이고, 액면가의 10%에 판매되기도 하였다. 지가증권 거래로 피를 본 대표적인 이들이 호남평야에 땅을 가지고 있던 대지주들이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으로 지켜진 영남 지방에 비해서 호남은 거침없이 털렸고, 호남 지역 지가증권 가격은 특히 헐값에 거래되었다. 사실 정부 수립 초기 인플레이션 때문에 5년 유예였던 지가증권의 가치는 상당히 낮았는데, 정부가 적산불하와 귀속재산 구매에 액면가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지가증권이 그나마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의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일제강점기 지주제가 사라지고 지주와 소작인 간의 대립을 줄이고 나아가 이 법안의 상정으로 북한 지역에서 주민들이 북한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일단 농민들이 첫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5월부터 개시한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정부가 인정한 내 소유의 땅이 있다는 인식 정도는 줄 수 있었고, 그 덕에 내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 정부에 협조해야 할 이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당 법이 없었으면 6.25 전쟁의 전황이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수확량의 30%를 5년간 낸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일제강점기 소작농의 소작료가 일반적으로 수확량의 50%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5년간 소작료 할인받으면서 땅을 거저 갖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해방 이후 삼칠제가 시행된 것을 감안해보면 지주에게 낼 돈을 국가에 5년을 내고 땅을 갖는 것이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훨씬 더 큰 이득이다.
일부 한국사학자들은 북한의 토지개혁과 비교하면서 이 유상몰수, 분배를 열등한 제도로 서술하기도 하는데, 이는 북한의 토지개혁의 실제 의도인 집단농장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전쟁 이후에 40%의 현물세를 거뒀는데, 이는 일제 때의 소작료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다만 지주는 월남해서 사라진지 오래고 전쟁으로 나라가 박살난 판에 생산성을 따질 겨를이 아니었으니 반발이 적었을 뿐이다.
이미 소련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약 30년이 지난 시점이다보니, 당시에도 공산국가의 집단농장에 대한 이야기는 알 사람은 다 알았다. 예전에는 다들 소작농이라 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농지개혁법으로 꿈에도 그리던 자작농이 된 상황에서 토지를 다시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는 것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실제로 6.25 전쟁 초기 인민군이 점령한 38선 이남 지역에서도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기초한 토지개혁이 시도되었지만 농민들의 호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내걸더니 이내 논작물 수확고의 27%, 밭작물 25%에 달하는 막대한 현물세를 강요하면서 남한 농민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사실상 국가에 조금 싼 소작 부쳐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럴 바에야 5년간 30% 내고 온전히 내 땅 되는 게 장기적으론 훨씬 낫다. 아무리 당대 교육수준이 낮았지만 이 정도 셈조차 할 줄 모르면 농부도 못해 먹는다.
여기에 강력한 유상매입 유상분배에 대한 지주층의 저항이 제대로 전개되기도 전에 터진 6.25 전쟁과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면서 한때 국토 대부분이 인민군의 점령으로 질서가 붕괴되었던 개전 초기 삼남지역에 발생한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 틈에서 지방의 지배계급 정점에 서 있던 지주들이 대부분 사라지면서 일제강점기부터 토지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였던 식민지적 계급체계가 명목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으로도 소멸했던 것이 토지개혁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전쟁이 실보다 득이 많을리가 없지만 6.25 전쟁과 농지개혁법 집행 시기가 우연히 맞아떨어지면서 지주제가 사라진건 참 역사의 아이러니다. 좀 더 정확히는 지방 대지주가 토지개혁에 저항하기도 전 전부 전쟁통에 죽거나 땅을 잃고 이주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한반도의 모든 토지권리문서가 불에 타 없어지고, 소유권이 붕떠서 정부 손에 돌아가면서 이를 국가가 지방 자영농에 비교적 투명하게 분배하여, 전후 간신히 자리를 잡은 자영농들은 농사일로 생계를 꾸릴수 있었고 인구 재건의 발판이 되었으며, 이후 전후 1세대들이 후일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도시로 상경해 산업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농업, 산업구조에 대해 연구하는 대다수의 경제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 제국주의, 식민지 할 것 없이 초토화 되었던 전세계 국가들 중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장 빠르게 재건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로 이 토지개혁 성공을 꼽는다. 경제사학자들이 토지개혁 성공을 꼽는 나라들은 대한민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이 있는데 이들중 공산주의 경제를 고수하다가 주저앉은 북한을 제외하면 모두 혼란시기 토지개혁을 통해 자영농 비중을 대폭 늘려서 초기 농촌에 쏠린 생존압력을 덜어주면서 국가 안정에 기여했고, 국가경제를 농업중심에서 제조업중심으로 완전하게 재편하는 과정에서도 비교적 부담없이 과거 농업경제에서 농지에 묶여 잉여인력으로 집안 농사나 돕던 사람들을 도시에 끌어올려 산업화 인력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하고 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국가경제구조를 재편하고 산업화의 힘으로 경제를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를 제외한 대다수의 식민지국가들은 독립이후에도 토지개혁을 실패해 국가가 세워졌음에도 극단적인 양극화가 해소되지 못한채 빈민들만 무차별적으로 증가해 심각한 국가발전 정체를 맞았으며 여전히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같은 남아메리카 국가들,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국가들이 있다.
또한, 이 토지개혁 한 방으로 인해 이승만은 농촌을 자유당의 표밭으로 만들면서 지지기반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이는 1960년 4월까지 이승만이 집권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이 급격히 보수화되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치구도인 우촌좌도 양상이 확립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과 비슷하게 남북분단+냉전의 최전선(?)+독재자의 상황에 놓여있던 국가가 있었으니 바로 남베트남이다. 이쪽도 한국처럼 토지개혁을 시도했지만 한국보다 기존 사정부터가 훨씬 더 나빴고 결국 베트콩의 창궐로 남베트남의 패망과 적화통일이라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때는 북베트남도 이전에 토지개혁의 악영향으로 인해 남베트남으로 온 사람이 많긴 했지만. 그런데 그렇게 토지개혁이 실패했던 남베트남조차도 통일 후 집단농장화가 그 이상의 대재앙으로 이어졌고 오히려 남부발 개혁으로 판도가 뒤집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계
이 법안이 상정될거 같다는 소문이 국민 사이에서 유포되기 시작하자, 지주들은 허겁지겁 토지를 빈농층에게 강매하거나, 심지어는 "토지"개혁이 아니라 "농지"개혁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법 적용에서 최대한 벗어나려는 경우도 나왔다.
또한 정부의 의도인 '토지자본에서의 산업자본의 전환'과는 달리, 토지채권의 값은 6.25와 초인플레이션을 걸치면서 엄청나게 떨어져 지주에서 자본가로 전환한 계층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더해서 농지개혁법이 실시되고 얼마 안 지나서 6.25 전쟁이 터지면서 피난을 다니던 지주들이 인민재판에 걸려 죽거나 피난처에서 지가증권과 생활물자를 교환하는 일도 있었다. 오히려 경남 진주의 정 씨 가문처럼 농지개혁법 발표 즈음하여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무상 분배하다시피 한 사람들이나, 평소 품삯을 후하게 주고 소작료를 적게 받은 사람들, 전남 영암의 현준호(현재 현대그룹 회장인 현정은의 할아버지이다.)처럼 OO년 후 토지분배를 약속한[28] 일부 지주들이 살아남아 가문을 보전하고 오늘날까지 대를 잇는 자본 계급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소위 '문중 땅'이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농지개혁에 대비해서 같은 집안 사람에게 농지의 명의를 이전해주었는데 그 사람이 땅만 쏙 받아먹고 돌려주지 않는 등... 또한 하루하루 지주 밑에서 끼니하나 떼우기 힘들던 머슴들의 경우 소작농과 달리 농지개혁의 수혜를 받지 못했는데 이에 반감을 품은 머슴들 상당수가 6.25 전쟁 당시 남하해 온 인민군에 부역행위를 하기도 했다. 당시 남한을 적화통일하려고 마음먹은 북한은 그 짧은 점령 기간동안 남측에서도 급진적 토지개혁을 하려 했으며 지주의 땅을 나누어 다같이 잘살자는 구호를 내세우며 대중에게 자신들의 사상을 강제적으로라도 주입하려 했는데 여전히 재산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던 머슴들이 그들이 활용하기 딱 좋은 도구였던 것이다.
아울러 남한의 토지개혁에 대한 농민의 기대가 얼마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1950년 5월에 토지대장 열람이 개시되기는 했지만 전쟁 이전에 농지개혁이 완료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 존재한다. 즉 정말 농민이 이 법안 때문에 북한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다. 1950년 북한의 남한지역 토지개혁에 농민들의 호응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위의 입장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 위에서 이루어진 토지개혁이라 토지를 공짜로 받아도 이것이 그대로 내 것이 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부 재력가는 사학재단을 만들고 자기 땅을 재단 땅으로 하여 농지개혁을 면하기도 했다. 일부 재력가들이 사학을 설립하면 토지개혁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 사학을 설립하고 재산을 재단 산하에 넣었는데 이 재력가들 중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 체제에 협력하거나 다른 노력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 세워진 학교/재단이 전부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본 교육시설이 있는 부지외에 뜬금없이 먼곳에 학교 재단소유의 땅이 있다면 의심해 볼 법하다.
6.25 전쟁으로 인해 그 전까지 남북한의 경계 역할을 수행하던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복한 38선 이북의 수복지구에서도 휴전 이후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이전에 북한 당국이 실시한 토지개혁은 무효화되고 대한민국의 농지개혁법에 따른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는데, 결과까지 완전히 무효화해서 재분배하기는 어려움이 많았기에 월남했던 지주가 돌아와 자기가 직접 경작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경우를 제외하면 북한의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분배받은 경작자가 그 토지를 다시 분배받아 계속해서 경작하는, 사실상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한다.
폐지
이후 산업화와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농사를 짓는 가구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이제는 역으로 농가 하나당 농지 소유 한도가 3ha밖에 되지 않는 영세한 농업 규모가 문제가 되면서 1990년대부터는 정부도 대규모 기업농 육성을 통한 농가 경쟁력 제고로 농업노선을 전환했다. 그리하여 1994년 농가당 농지 소유 한도를 3ha(3만㎡, 약 9천평)에서 10ha(10만㎡, 약 3만평)으로 늘리고 비농민의 농지 소유를 3천평으로 제한하는 새로운 농지법이 제정되어 1996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농지개혁법은 시대의 소임을 다 하고 폐지되었다.
매체에서의 언급
- 이태준의 농토 - 일제강점기 시절의 대갓집 머슴살이에서부터 시작하여 빈농을 거쳐 해방을 맞는 농민 억쇠를 그린 소설. 공간적 배경이 북한이기 때문에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 채만식의 논이야기 - 구한말까지는 자영농이었지만, 일제강점기때 자신의 논을 빼앗기고 소작농이 된 한생원을 그린 소설. 한생원은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에 빼앗긴 자신의 논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35] 공간적 배경이 남한으로 남한의 토지개혁이 주소재이다.
- 채만식의 낙조 - 논이야기와는 다르게 지주의 입장에서 토지개혁을 바라본 특이한 소설.
- 조정래의 태백산맥 - 전남 벌교와 그 인근에서 벌어지는 소작농과 지주들 사이의 갈등이 수많은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인구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당시 전라도의 실정 상, 등장인물들도 대다수가 소작농 집안 아니면 지주 가문 출신이다.
- 오유권의 농지상한선 - 잘 알려지지는 않은 소설이지만, 어떻게 구 지주 계급들이 옛날에 자기들이 가졌던 땅을 되찾았나 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기타
반 이승만 정서가 강했던 박정희는 "우리민족이 나갈 길"이라는 저서에서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농촌 경제의 성장을 가져오지 못하고 농민의 현물 중심의 수취가 농가에 부담을 줬으며 지주계급의 산업자본 전환에 미약하여 국가경제를 무너뜨렸다고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2023년 7월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연사로 나서서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는 데 가장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장관은
"수백 년 유지된 지배 계층이 한순간 소멸했고, 기존 대지주가 지가(地價)증권으로 생산 설비를 취득해 대한민국이 제조, 공업, 서비스업 국가로 확장할 수 있었다"
며
"만석꾼의 나라에서 이병철, 최종현 등 창업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대전환의 계기가 됐다"
고 말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공산주의 활동까지 했던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과감히 중용해 함께 농지개혁을 이뤄냈다는 점은 이 결정적 장면을 더 빛나게 한다"
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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