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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일제 강점기 1부 1910년대 두문자_무헌 조중 토회 교태

by noksan2023 2026.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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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1부 1910년대 두문자_무헌 조중 토회 교태

 

 

 

일제의 통치방식에 변화에 따른 주요 사건 정리

 

 

 

 

단통치

병경찰

선총독부

추원

지조사사업(임야/광업 1910~1918)

사령(1910)

조선육령(1911 우민화교육/교사 제복 칼 착용)

조선형령(1912 조선인만)

 

무단통치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탈취한 뒤 시행한 1910년대의 일상적인 군사지배체제

 

 

 

1910년대 무단 통치

 

 

 

개요

 

일반적으로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는 ‘병합’에서 3·1 운동까지(제1기), 3·1 운동 이후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까지(제2기), 만주 침략에서 일본 패망까지(제3기)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무력에 의한 식민지배라는 점에서 본질상의 차이는 없으나 통치정책과 양상에 따라 각각 무단통치, 문화정치, 민족말살통치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제1기의 특징인 무단통치는 말 그대로 군이 식민 사회 전반을 통치할 뿐만 아니라 주민의 일상까지 통제하는 계엄 상태가 지속된 지배체제였다. 즉 군인인 헌병이 치안유지는 물론 행정과 사법 전반에 걸쳐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직접 주민을 통치했기 때문에 헌병경찰체제라고도 부른다. 일제는 이러한 체제에 기초하여 조선총독부의 행정관리뿐만 아니라 학교 교원들에게까지 제복과 대검을 착용하게 함으로써 군사적 통치의 실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헌병경찰제도의 성립과 탄압

 

일본이 조선에서 헌병경찰 제도를 만든 것은 ‘합방’ 이전부터였다. ‘합방’을 준비하면서 「한국주차(駐箚)헌병에 관한 건」(1907.10.8.)을 만들어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은 주로 치안 유지에 관한 경찰업무를 장악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악명 높은 헌병경찰 제도가 시작되었다.

‘합방’이 되면서 조선총독부경찰관서관제가 공포되어(1910.10.1.) 일본군의 조선 주둔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警務摠監)이 되고 각도의 일본군 헌병대장이 경찰부장을 겸임했다. 또한 ‘합방’ 전에는 일본 헌병이 주로 도시에 집중 배치되었으나 ‘합방’ 후에는 분산 배치제로 전환되면서 농촌지방까지 헌병분견소와 헌병파출소를 설치했고, 여기에 순사주재소, 순사파출소까지 두어 전국의 치안을 물샐틈없이 강화했다.

헌병과 경찰의 두 조직체계가 연립하고 헌병이 최고 치안책임자로서 두 조직의 장을 겸하여 일원적인 명령계통을 유지했다. 그러나 운영에서는 양자의 특성을 살려, 경찰은 개항지와 철도연선을 비롯하여 주로 질서를 요하는 도시에 배치되어 행정·사법경찰을 주관하고, 헌병은 군사경찰상 필요한 지역, 국경 지방, 의병이 출몰하는 지방 등에 주로 배치되었다.

이처럼 일제가 헌병경찰의 배치를 분산배치제로 바꾸고 지방행정체제의 개편에 맞게 조직을 정비한 것은 헌병경찰을 중심으로 일반행정과 경찰업무를 연결시켜 중앙권력이 직접적으로 지방의 민을 관리하고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향청(鄕廳)의 폐쇄, 동리 단위까지의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전통적인 향촌 자율적 기반을 해체한 위에 조선면제, 헌병경찰제도를 정비한 것은 조선 민족에 대한 식민권력의 직접적인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헌병경찰기관의 정비와 더불어 지배망을 구축하기 위해 기관과 인원을 계속 증대시켰다. 1910년에 헌병기관 653개와 인원 2,019명, 경찰기관 481개와 인원 5,881명이던 것이 이듬해인 1911년에는 헌병기관 935개와 인원 7,749명, 경찰기관 678개와 인원 6,222명으로 증가했다. 두 기관의 인원수를 비교해 볼 때, 1911년의 경우 헌병이 경찰관보다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이는 헌병경찰이 폐지되는 1919년까지 그대로 반영되는데, 일제의 식민 통치가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경찰의 권한과 기능

 

1910년대의 식민통치를 무단통치, 또는 헌병경찰체제로 규정하고 식민지 조선 사회를 경찰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헌병경찰이 식민통치 전반에 걸쳐 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권한마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식민지 조선에서 경찰은 크게 다음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었다.

① 군사경찰 : 의병 토벌, 첩보 수집 등
② 정치사찰 : 신문지와 출판물 단속, 집회와 결사 단속, 종교 단속, 기부금 단속 등
③ 사법경찰 : 범죄즉결, 민사소송조정, 검사업무 대리, 집달리 업무, 호적사무 등
④ 경제경찰 : 납세독촉, 국경 세관 업무, 밀수입 단속, 국고금과 공금 경호, 부업·농사·산림·광업 등의 단속
⑤ 학사경찰 : 학교 및 서당 시찰, 일어 보급 등
⑥ 외사경찰 : 외국여권 교부, 일본행 노동자 및 재한중국인 노동자 단속, 채류금지자 단속, 국내외 거주이전 등
⑦ 조장행정 : 법령 보급, 납세의무 유시, 농사식목개량, 부업 장려 등
⑧ 위생경찰 : 종두 보급, 해로운 짐승박멸, 전염병 예방, 도살단속 등
⑨ 기타 : 해적 경계, 우편 호위, 도로 수축, 묘지 매장, 화장 단속, 강우량·수위 측량, 도박·무당·기생·매춘부·풍속 등 단속

위에서 보듯 식민지 경찰은 ‘경찰 본래의 사무 이외에 비상히 많은 특종 근무’를 하고 있어, 당시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경찰을 두고 “행정·사법 양부에 걸쳐 그 권력을 가질 뿐 아니라 학자의 영역에 속해야 할 언론의 지도, 교육가의 영역에 속해야 할 사회풍속의 개선, 흥신소의 영역에 속해야 할 신용조사, 실업가의 영역에 속해야 할 경제계의 연구 등” 모든 분야에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의 기능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첫째, 경찰의 가장 핵심적인 업무인 치안활동이다. 유생이 쓴 『구례유씨가일기』를 보면 “총독부의 압수령을 청탁한 헌병청 보좌원 이○칠이 출장 나와서 『매천집』 3권을 수거하여 갔다.”(1916.7.2.)고 하여 당시 대표적인 금서로서 지식계층이 소유하고 있던 황현의 『매천야록』을 헌병이 직접 출장 나와 수거해 감으로써 반일적인 분위기를 차단하려고 신경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찰이 검사 사무를 취급하는 것으로 지방법원 가운데 검사가 배치되지 않은 곳에는 경시 또는 경부가 검사 사무를 대신 취급하였다. 검사 소양이 부족한 헌병이 검사사무를 하게 되자 권력을 자의적으로 집행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순사보나 헌병보조원까지 영장을 집행하여 조선 민중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셋째, 경찰이 민사소송을 조정하는 것으로 재판소가 없는 지역의 경찰서장은 주택·건물 또는 물품의 인도, 부동산의 경계와 2백 원 이하의 금전채권에 대해 조정할 수 있었다. 조선 전체에 재판소가 있는 곳은 55개 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161개 군에서는 경찰민사조정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홍성 같은 곳에서는 사법업무가 너무 많아 경찰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다.

넷째, 경찰이 집달리 사무를 취급하였다. 경성과 기타 주요 도시를 제외한 곳에는 경찰관리가 집달리 사무를 대신 취급하고 있어, “이것도 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일로서 조선 경찰의 특수직능 중 한 가지”로 지적되기도 했다.

다섯째, 경찰이 행정사무를 지원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최하급 행정기관인 면장의 직무 집행이 아직은 유치해서 내지(일본)의 정촌장(町村長)에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자연 조장행정사무에 관해 그 의뢰가 많고, 경찰관헌도 또한 나아가 이에 응해온 인습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이들 원조사무에 관해 지방인민의 경무기관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어, 일반적으로 경찰관헌의 지시명령은 확실히 준수하여 그 효과를 얻는 데에도 매우 편리한 실정”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장행정원조사무에는 주로 도로 수축, 임야 단속, 국경지방의 관세 사무, 세금징수 원조, 농업 지도, 해충 구제, 산업 장려, 부업과 저금 장려, 미취학 아동의 교양, 청년회 등의 지도, 어업 단속 등이 있었다. 이같이 경찰이 행정사무를 겸행하는 것은 조선 하급 행정기관의 직무 이행력이 부족함과 동시에 조선 경찰의 실제적 기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섯째, 경찰이 호구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조선 민중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 체제를 강화했다. 1916년 경무총감부 훈령 1호 호구조사규정에서는 호구조사의 목적을 “관내 주민의 이동을 조사하여 그 성행, 내력과 생활 상황 등을 찰지(察知)하여, 이로써 경찰상 제반의 자료를 공급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조사내용을 상세하게 규정했다. 그리고 ‘특별요시찰인과 요시찰인, 지나(支那) 또는 조선 재류 금지명령을 받은 적이 있는 자, 형사시찰인과 가출옥자, 도박 상습혐의자, 평소 조폭(粗暴)과격한 언동을 하는 자, 불량소년, 가정문란자와 방탕음일한 자, 무자(無資)무산업하며 도식하는 자’ 등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가지고 비밀리에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근대 일본의 경찰체계가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예방중심주의며, 예방중심주의가 '일본형 위생국가의 성립이라는 독특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특징이 식민지 조선의 경찰체제 성립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구례유씨가일기』의 1918년 3월 6일자 기록은 1910년대 위생경찰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다.

헌병 오장과 보좌원, 농잠교사, 군청·면사무소 서기 등 다섯 사람이 출장 나와 청결을 검사한 후에 측간 개량의 일에 대해 설명하니 가볍지 않다. 만약 듣고 따르지 않으면 의법 조치한다고 했다. 역시 변한 것이다. 매년 청결일이 한 10여 번 계속 된 이후 읍 촌간에서 집집마다 개나 돼지를 잡아 죽이는 작폐가 가정집에까지 돌입하여 어린 돼지라도 이를 보면 다 잡아 죽이고 값도 지불하지 않고 뺏어 갔다. 지금은 이런 일이 없으나 이 역시 하나의 변괴라 할 만하다.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위생검사에 경찰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력까지 동원할 정도로 위력을 동반하여 청결을 엄격하게 강제했다. 그 결과 심지어 집안의 가축마저 도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통치시스템이 촌락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풍경이었다. 위생검사가 비록 근대적인 의료규율의 확립이라는 성격을 가지나 이처럼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강제함으로써 경찰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식민권력의 행정체계와 행정력이 지역 말단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띠면서 관철되는 1920년대 중반부터는 경찰의 행정원조사무 중 일부가 일반행정으로 이전되긴 했으나, 행정경찰의 비중은 여전히 큰 편이었다. 이는 식민지의 행정체계가 경찰이라는 물리력에 상당 정도 의존한 체계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식민지 통치 법제

 

식민지 경찰에게 과도한 권한과 임무가 부여되어 있음은 경찰과 관련한 법에서도 잘 드러난다. 1910년대 대표적인 치안관계법으로는 보안법과 「집회취체에 관한 건」이 있다. 일제는 1907년 7월 보안법을 공포하여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경찰관이 집회나 대중운동을 제한·금지·해산할 수 있게 했으며(제2조), 문서·그림의 게시나 언동도 단속했다(제4조). 그리고 1910년 8월 25일 「집회취체에 관한 건」(경무총감부령 제3호)을 공포, 정치에 관한 집회를 금지하여 9월 13일, 대한협회, 서북학회, 진보당, 일진회 등 10여개의 결사를 모두 해산시켰다. ‘병합’ 이후에도 보안법이 적용되어 모든 정치결사·집회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식민지 지배법규로서 악명을 떨친 것은 조선태형령과 경찰의 특권을 규정한 내용이다. 1912년 3월 제령 13호로 공포된 조선태형령은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해야 하는 자와 백 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해야 할 자가 조선 내에 일정한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무자산자라고 인정될 경우, 정상을 참작하여 형 1일 또는 벌금 1원을 태 1로 계산하여 이를 과하는 것이었다. 태형의 언도가 확정되면, 집행을 마치기까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 유치하여 유치된 장소에서 비공개, 비밀리에 이를 집행했다. 이는 전적으로 봉건적 잔혹성을 지닌 ‘야만적인 형벌’이었으므로 사망자·불구자 등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그런데도 일제는 “조선 국정에 알맞고 범죄의 예방진압에 유효적절하며 범죄에 대한 제재로서 단기자유형이나 소액의 벌금형에 비해 효과가 크고 그 집행방법도 편리”하다고 강변하면서 1920년 3월까지 조선인에게만 태벌(笞罰)을 실시했다.

다음으로 경찰범처벌규칙과 범죄즉결례를 통해 경찰에게 부여된 임무와 권한을 보자. 경찰범처벌규칙(1912년 3월 총독부령 제40호) 제1조에는 무려 87개에 달하는 항목을 들어, 여기에 해당하는 자는 경찰관서에서 구류 또는 과료로 처벌하게 했다. 일부의 주요 내용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② 단체 가입을 강청하는 자
③ 이유 없이 타인의 회담 거래 등에 간섭하고 또는 소송, 쟁의를 권유, 교사하고 기타 그 밖의 분쟁을 야기케 할 행위를 하는 자 

④ 함부로 다수가 모여 관공서에 청원 또는 진정하는 자
⑤ 불온연설·불온문서 등을 게시, 반포하는 자
⑥ 유언비어 또는 허위보도를 만들어 내는 자
⑦ 전선 근방에서 종이연을 올려 다른 전선에 장해가 되는 행위를 하거나 하게 하는 자
⑧ 투견 또는 닭싸움을 시키는 자

조선인의 반일정치운동은 물론 일상생활까지 단속·금지하는 이와 같은 규정은 “실로 우리 사람들을 구박하기 위한 음흉하고 간사한 나쁜 계책이지 미연의 방지를 위해 제정한 것은 아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위반자를 ‘태형’에 처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구류나 과료보다는 태형이 가장 많이 남용되어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켰다.

또 범죄즉결례(제령 10호, 1910.12.)는 구류·태형 또는 과료에 해당하는 죄,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백원 이하의 벌금 혹은 과료의 형에 처해야 하는 도박범과 상해죄, 행정 법규 위반자를 보통 재판소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즉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20원 이하의 고료, 30일 이하의 구류에 처하는 일본 내에서의 법에 비해 매우 과중하고 또 즉결 처분은 성질상 간단한 절차이기 때문에 이것을 집행하는 경찰관이 법률상의 지식 경험이 없으면 남용할 우려가 있었다. 즉결처분건수를 보면 1911년에 18,100여 건이었는데 1912년에는 21,400여 건, 1918년에는 82,100여 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것은 곧 헌병경찰에게 행정·사법 등의 방대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자의적으로 권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병 경찰 제도

 

 

▲경술국치 전후 조선에 파견된 일본 헌병들

 

 

 

정의

 

1910년대 일제가 조선인의 저항 운동을 탄압하고자 헌병과 경찰을 통합하여 치안을 담당케 한 제도.

 

내용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은 일시적으로 군정을 실시한 함경도 등의 지역에서 헌병에게 고등 경찰과 보통 경찰의 임무를 함께 담당하도록 했다. 1907년 의병 항쟁이 고조되자 일본 정부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을 보강하고, 10월에 헌병대를 확대하여 한국주차군사령부 예하의 한국주차헌병대로 개편했다. 헌병대장에는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육군소장이 부임했다. 또 1908년에는 조선인 4천여 명(1908년 말 현재 4,234명)을 헌병보조원으로 삼아 의병 토벌과 정보 탐색에 주력했다. 이후 1910년 6월 24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완전히 접수하고, 29일 「통감부경찰관서관제」(칙령 제296호)를 공포하면서 헌병 경찰 제도의 근간을 완성시켰다. 이 관제는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헌병 경찰 제도란 군사 경찰인 헌병이 일반 경찰인 경관과 함께 보통 경찰 사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곧 중앙에는 조선 총독의 지휘를 받는 보통 경찰인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를 설치했는데, 경무총감부의 수장인 경무총장은 문관이 아닌 조선주차헌병대(朝鮮駐箚憲兵隊) 사령관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지방 각 도에는 경무부를 두었는데, 경무부장은 헌병대장이 겸임했다. 또 경찰 계급인 경시(警視)와 경부(警部)를 군 계급인 위관(尉官)과 하사관이 각각 겸임하도록 했다. 이로써 헌병이 문관 경찰관에 대한 지휘권의 중추를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지역마다 일반 경찰관이 배치된 경찰서나 순경주재소와 함께 헌병분대⋅헌병분견소⋅헌병파출소 등도 경찰 관서로 기능하였다. 대체로 개항지(開港地)나 철도 연선(沿線)에는 일반 경찰관이 배치되고, 그 외의 군사적 요충지나 저항 운동이 일어난 주요 지역에는 헌병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반 경찰의 관할 구역에 비해 헌병이 경찰 사무를 담당하는 구역이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곧 헌병 경찰 제도는 조직의 성격과 조선인에 대한 지배의 측면에서 헌병이 주축을 이루는 군사적인 색깔이 매우 강한 제도였다.

헌병 경찰의 업무는 광범위했다. 의병이나 반일 조직에 대한 탄압 활동뿐만 아니라, 민적(民籍) 사무, 농사 권장, 호구 조사, 임야 감시, 도로 부설 감독, 납세 독려, 법령 보급, 묘지 단속, 위생 업무 등 민중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쳤다.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를 통해 재판 업무도 담당했다. 전근대적인 신체 형벌인 ‘태형’을 온존(溫存)시켜 조선인에게만 적용한 「조선 태형령」(1912년 공포)을 일상에서 실현한 것도 이들 헌병 경찰이었다. 이처럼 헌병 경찰에게 행정⋅사법 등 방대한 권한이 부여되고, 이들에 의한 즉결 심판 등 자의적인 횡포가 심해지면서 조선인의 반감은 누적되었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8월 총독부 관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때 조선 통치의 문제로 지목되었던 헌병 경찰 제도가 폐지되고 보통 경찰 제도로 바뀌었다. 과거 헌병 경찰이 주둔하던 곳에는 보통 경찰관이 채용되고 ‘문화 정치’가 표방되었다. 악법으로 지탄을 받은 「조선 태형령」도 1920년 폐지되었다. 그러나 경찰 관서와 경찰의 수는 오히려 크게 늘어났고 경찰 당국에 의한 미행과 사찰, 검속, 불시 심문 등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내용 요약

 

조선총독부는 1910년∼1945년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 최고의 식민통치기구이다. 군대·경찰 등 무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한반도를 통치하면서 민족운동탄압, 경제적 수탈,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다른 식민지와 달리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쳐 총독이 전권을 행사했다. 비대하게 발달한 식민지 관료제가 조선사회에 이식됨으로써 관료 우위의 권위주의 사회가 고착되고 사회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문화가 조성되는 폐단을 낳았다. 이러한 통치기구와 제도·문화는 해방 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됨으로써 탈식민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정의

 

1910∼1945년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 최고의 식민통치기구.

 

개설

 

1910년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무력(군대와 경찰)을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식민통치를 수행하고 민족운동 탄압과 수탈을 총지휘한 최고의 식민지배 통치기구였다. 조선총독부는 다른 식민지 사회와 달리 입법, 사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한 총독을 정점으로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식민지 조선사회에 이식함으로써 민족차별을 구조화하고 관료제의 비대한 발달을 초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주권침탈과 조선총독부의 설치

 

1894년 청일전쟁 중에 일본 내각은 한국에 대한 기본 전략으로서

 

① 한국의 독립을 보호한다.

②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

③ 청일 공동보호국으로 한다.

④ 세계중립국으로 한다

 

는 네 가지 방안을 토의하였다. 이 가운데서 일제는 두 번째인 단독 보호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한국 정세를 감안하여 신축성 있게 대처하다가 궁극적으로 한국의 주권을 탈취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시켜 군사상으로 필요한 지점을 일본군이 강점하는 한편, 한국의 치안을 일본군이 맡는 군사경찰을 시행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10월 27일에 ‘한국보호 확립실행’을 결정하고,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이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되고,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어 ‘보호국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제는 통감부 조직 문제를 놓고 무관조직론과 문관조직론으로 대립되었다. 군부는 과도기의 한국 지배방법으로 무관 조직을 고집했으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중심으로 한 문관 세력은 러일전쟁 후에 예상되는 육군의 발호를 경계해 문관조직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천황의 특지를 얻어 통감에 임명됨으로써 통감부는 문관조직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한국민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통감부는 일본 군대와 헌병을 증강하여 군사적 지배를 강화해나갔다.

1907년 7월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그리고 10월의 경찰권 장악 등을 거쳐 1909년 7월 6일일본 정부는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장악할 최종 방침으로「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하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1910년 5월 30일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통감으로 임명하고, 한국을 병합한 이후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①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해 정무를 통할(統轄)하는 권한을 가진다. 

② 총독은 천황에 직접 예속해 조선에서 일체의 정무를 통할하는 권리를 가진다. 

③ 총독에게는 대권의 위임에 의해 법률사항에 관한 명령을 발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단, 이 명령은 따로 법령 또는 법률 등 적당한 명칭을 붙인다. 

④ 조선의 정치는 되도록 간이하게 함을 요지로 한다. 따라서 정치기관도 역시 이 주지(主旨)에 따라 개폐한다. 

⑤ 조선의 관리에게는 그 계급에 따라 될 수 있는 한 다수의 조선인을 채용한다

 

는 것 등이었다.

일본인과 차별하여 한국인을 통치하고, 총독이 천황의 직속 하에 일체의 정무를 관장하며, 식민통치기구는 될 수 있는 한 간편한 조직으로 하고, 하급관리는 한국인으로 다수 충원한다는 것이었다. ‘민도(民度)의 차이’를 이유로 열등한 한국인을 차별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 이념을 정책으로 나타낸 이 통치기조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밝혔다. 

 

총독은 위임된 범위 내에서 육 · 해군을 통솔하며 일체의 정무를 통할한다.

② 통감부와 소속 관서는 당분간 그대로 두며 총독의 직무는 통감이 행한다.

③ 종래 한국정부에 속한 관청은 내각과 표훈원(表勳院)을 제외하고는 총독부 소속 관서로 간주하며 당분간 그대로 둔다.

 

전항의 관서에 근무하는 관리는 구한국정부에 근무하는 것과 같이 취급한다. 단, 구한국법규에 의한 친임관(親任官)은 친임관의 대우, 주임관(奏任官)은 주임관의 대우, 판임관(判任官)은 판임관의 대우를 하고, 또 관(官)에 재직하면서 채용 허가를 받은 자는 1904년 일본 칙령 제195호의 적용을 받는 자로 간주한다.” 통감부 하의 군사적 지배방침을 계승한 이 조치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세 번째 내용이다. 1905년 이후 한국정부에서 근무한 관료들을 그대로 조선총독부의 관료로 임용하고 계급도 그대로 인정한 것은 이들을 회유하여 식민지배를 안정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들 다수가 이미 일제에 대항할 의지가 없다는 판단도 있었기 때문이다.

 

총독의 지위와 권한

 

조선총독부의 최고 지위에 있는 총독은 식민지사회의 최고 권력자로서 입법, 사법, 행정, 군통수권 등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권한을 가진 사실상의 군주와 같은 존재였다. 조선총독부관제에 규정된 조선총독에 관한 주요 조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총독은 조선을 관할하며, 친임으로 하고 육해군 대장으로 충원한다.(제1조와 제2조)
- 총독은 천황에 직예(直隸)하며 위임된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고, 조선 방비를 관해 관장한다. 총독은 제반의 정무를 통할하고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주(上奏)하여 재가를 받는다.(제3조)
- 총독은 그 직권 또는 특별한 위임에 따라 조선총독부령을 발포한다. 여기서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금고, 구류, 2백 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科料)의 벌칙을 부과할 수 있다.(제4조)
- 총독은 소속된 부서의 관리를 통독(統督)하고 주임문관의 진퇴에 관해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상주하고, 판임문관 이하의 진퇴에 관해서는 전행(專行)한다.(제6조)

즉, 육 · 해군 대장에서 임명되는 조선총독은 ‘천황에 직예’하면서 행정권(제6조) 이외에 군통수권과 통치권(제3조), 입법 기능에 준하는 권한(제4조)까지 갖고 있었다.

먼저, 천황에 직예하면서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여 천황의 재가를 받는다는 규정은 조선총독과 일본 본국과의 관계문제이자, 식민지로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규정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관제가 처음 공포될 당시에는 식민지 관할 기관인 척식국이 내각 총리대신 밑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총독이 직접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천황에게 재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큰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조선총독은 일본 내각의 지휘나 감독을 받지 않았다.

1913년 일본 정부는 척식국을 내무성에 합병하면서 조선 · 대만 · 사할린에 관한 사항을 내무성척식과에서 취급하도록 개정했다. 같은 시기에 조선총독부관제를 개정(칙령 114호, 1913.6.13)하여 ‘총독은 제반의 정무를 통할하며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는다’는 제3조 조항을 ‘내무대신에 의해 내각총리대신을 거쳐’라고 개정했다. 그러나 1917년 7월 다시 척식국이 내각 총리대신 휘하의 국으로 부활하게 되자 원래대로 ‘내각총리대신을 거쳐’로 개정했다. 1913년 이후 척식국의 책임자를 친임관으로 임명하는 등 그 위상을 높였지만 내각은 여전히 조선총독을 통제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1929년척식국을 척무성으로 승격시켜 식민지 행정을 전담하게 했다. 그리고 척무성대신이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 화태청(華太廳)과 남양청(南洋廳)에 관한 사무를 통리’(척무성관제)하게 하였다. 그러나 척무성대신이 남양청장관, 화태청, 관동장관, 대만총독을 감독할 권한은 있으나 조선총독에 대한 감독권한은 없었다. 식민지 조선을 예외 대상으로 여겨 내각총리대신의 감독을 받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조선총독은 계속 천황에게 직예하는 특수한 지위를 누렸다.

이러한 관행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2년 11월 1일 ‘내외지(內外地)’의 통치기구를 일원화하면서 바뀌었다. 내무성의 내무대신이 ‘조선총독과 대만총독에 관한 사무를 통리’할 수 있도록 개정한 것이다.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기 이전에 내무대신을 거치는 절차를 만들었으며, 내무 · 대장 · 문부성 등 일본 내각의 대신들이 각각의 소관에 따라 조선총독을 감독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각 성 대신의 감독 지시라는 것이 칙령의 범위 내에서 직권으로 개별적 사무를 통리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조선총독의 권한은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두 번째로 조선총독의 군 통수권이다. ‘육 · 해군을 통솔’하는 총독의 군통수권은 1910년대를 거쳐 3 · 1운동 직후까지 존재했다. 총독의 군통수권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참모본부, 한국주차군 등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획득한 권한이었다. 군부가 이를 반대한 명분은 문관에게 군 명령권을 부여하는 것은 헌법에 규정된 통수권의 독립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인과 군부간의 권력다툼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승리함으로써 조선총독은 군통수권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19년 8월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 따라 총독의 군통수권은 ‘출병청구권’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의미일 뿐, 식민지 조선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직접적인 물리력은 변함이 없었다. 사이토 마고토〔齋藤實〕총독 이후 현역 군인이 아닌 장성들이 부임한 것은 일본의 통치권과 통수권이 각각 내각과 군으로 분리된 것과 관계 있다. 일본 헌법에 따르면 천황만 군을 통수할 수 있을 뿐, 내각이 군을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 1운동으로 일본은 군사 운용에 관한 총독의 권한을 외형상으로 약화시키고 ‘헌병경찰체제’를 ‘보통경찰체제’로 전환하였다. 군인이 치안을 맡은 계엄상태 하의 군사적 지배방식에서 일반경찰이 치안을 맡고, 행정적 지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식민지배정책을 수정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관수와 조직 규모에서 볼 때 경찰력은 오히려 크게 강화되었다. 1919년 이전 헌병과 경찰을 합쳐 14,501명이던 것이 1919년 8월 제도 개정 이후에는 16,897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 1월 제2차 경무기관 확장으로 경찰관은 2만 명을 전후하게 되었고, 1939년부터 전시체제의 강화로 23,000명으로 확대되었다.

세 번째는 총독의 입법 권한으로 제령(制令)과 부령(府令) 제정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제령은 조선총독이 조선에서 필요한 입법사항에 대해 법률과 칙령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천황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명령을 말한다. 제령은 형식상으로는 법률의 하위규범이며 천황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단서가 있지만 사후 승인도 가능했다. 조선총독이 의회의 의결 절차 없이 천황이 위임한 입법권을 행사할 권한을 가졌다는 점에서 일본 내각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또 조선총독은 독자적인 판단만으로 부령(府令)을 실시할 수 있었다. 행정권에 속하는 부령 제정에는 어떠한 승인이나 절차가 필요 없었다. 부령으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구류 또는 2백 원 이하의 벌금이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35년 동안 식민 지배하면서 제정한 대부분의 법령은 제령과 부령이었다.

통치기구의 뼈대를 이루는 조선총독부 관제는 칙령으로 제정되었다. 칙령은 총독부 내부조직의 단위(관방, 국)까지 규정하고 있으나, 총독에게 위임한 권한이 커 행정조직은 얼마든지 개편할 수 있었다. 총독은 조선총독부관제를 비롯하여 경찰관서, 감옥, 철도국, 체신관서주1, 그리고 재판소 등 하부조직의 설치와 폐지, 관할구역, 직능, 인원 구성 등 조선군을 제외한 모든 통치기구에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인사권의 경우 주임관은 상주해서 천황에게 결재를 받지만 판임관에 대해서는 전권을 가졌다(진퇴, 징계, 표창). 재정에서는 수입지출권이 있었다. 또한 조직, 인사, 예산, 업무지휘, 감독 등 사법 행정에서도 전권을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재판소가 총독에게 직속되어 있어, 칙임관급인 판검사와 주임관급인 법원 서기장의 진퇴만 상주할 뿐, 법원과 검사국의 서기 이하 행정직원 진퇴에 대해서 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사법부는 일개 행정부서로 지나지 않았다.

총독통치체제에서 유일한 입법기관은 조선총독 자신이었다. 제령은 일반적인 집행명령이나 독립명령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시행된 일종의 위임명령이었다. 즉 조선은 천황의 자유로운 대권 발동으로 통치되는 지역으로 총독에게 대권의 위임에 따라 법률사항에 관한 명령을 내릴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조선총독은 천황의 감독을 받는 것 이외에 다른 행정기관의 감독을 받지 않는 ‘특수 지위’에 있었다. 이것이 일본의 다른 식민지 장관들과 조선총독이 구별되는 점이다.

친임관의 징계 여부는 문관징계령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내각이 관여할 수 없었고, 오로지 칙지(勅旨)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일본 의회는 간접적으로 조선총독부를 통제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예산은 일본 정부의 특별회계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일본 의회의 심의대상이었다. 따라서 일본 의회는 예산의결, 결산의 심사 및 예산 외 지출에 대한 사후 승인과정에서 조선총독부 행정에 관해 일정한 영향력을 가졌고, 또한 정부에 대한 건의 및 천황에 대한 상소, 국무대신에 대한 질의 및 질문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대해 간접 통제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예산을 담당하는 재무국장과 사계국장이 일본에 가서 예산계획서를 대장성에 제출하고 주계국장에게 이유를 설명할 뿐, 일본 의회에서 조선총독이나 조선총독부 관리가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내에서도 조선총독의 권력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기구가 천황 이외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기구와 변화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만든 최고의 기구인 조선총독부는 크게 세 번에 걸쳐 구조상의 변화를 겪었다. 제1기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로 이른바 ‘무단통치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헌병경찰에 의한 군사적인 지배가 주요 특징이다. 제2기는 1920년부터 1936년까지로 3 · 1운동을 계기로 분출된 민족의 독립 열기를 체체내로 흡수하는 한편, 안정된 지배체제를 구축하려던 시기이다. 제3기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로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침략전쟁에 식민지 조선의 인적 ·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던 시기이다.

 

제1기(1910~1919)

 

병탄과 더불어 1910년 8월 29일 식민통치의 기관으로서「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칙령 318호)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당분간은 종전의 통감부와 소속관서를 존속시켜 통감에게 조선총독의 직무를 맡겼다. 또한 내각과 표훈원을 제외한 대한제국 소속의 기관을 총독부의 소속관서로 간주하여 정무의 집행을 담당하게 하였다. 1개월 뒤인 9월 30일 ‘통치기관의 통합, 지방기관의 충실, 인원의 선택배치, 경비절감’ 등 새로운 관제 시행을 위해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관제(칙령 354호)를 공포하고, 10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시행과 동시에 육군 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조선총독의 임무를 겸임하도록 명령받았다(이듬해 8월에 전임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직은 친임관으로 총독을 보좌하며 업무를 통리하고 각 부국(部局)의 사무를 감독하는 정무총감(政務總監) 아래 1관방 5부제로 구성되었다.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는 대한제국의 정부기구를 축소해서 그대로 존치시켰으나 학부는 내무부의 1국인 학무국으로 축소시켰다. 그리고 통감부 사법청을 사법부로 개조하고, 총무부를 신설하였다. 각 부의 장을 장관이라 부르고, 국의 장에는 칙임인 국장을 두었다.

소속관서로는 중추원(中樞院), 취조국(取調局), 각도, 학교,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 재판소, 감옥, 철도국, 통신국, 전매국, 임시토지조사국, 세관, 인쇄국, 영림창(營林廠), 의원 등이 설립되었다.

중추원은「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칙령 제355호, 1910년 9월 30일)에 의해 설치된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이다. 정무총감이 중추원 의장을 겸임하였고, 부의장, 고문, 참의(參議, 1910년대는 찬의 · 부찬의)에는 모두 조선인이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설치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인의 ‘민정’과 조선 사회의 관습에 관한 자문이 필요했다. 둘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른바 ‘공로자’에 대한 우대였다. 셋째, 한일합방으로 관직을 잃게 된 대한제국 정부의 고등관에게 일정한 지위를 보장해줌으로써 불만을 달래고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한제국 고등관 출신의 중추원 참의는 자연히 줄어들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참의를 연임하였다.

1915년 관제 개정을 통해 ‘조선의 구관 및 제도에 대한 조사’ 기능이 총독부 참사관실에서 중추원으로 이관되었다. 중추원에서는 1916년부터 총독부 주도하에 식민사관에 기초한『반도사(半島史)』편찬 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찬의 · 부찬의 중 일부는 구관 조사와『반도사』편찬 사업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총독이나 총독부 수뇌부가 중추원 참의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은 중추원회의였다. 총독이 구체적인 자문안건을 사전에 주고 중추원 의관(고문, 찬의 · 부찬의, 참의를 통칭)들에게 서면으로 답신을 받았으며, 의장인 정무총감이 주재하는 중추원회의에서 발언을 듣는 형식을 취했다. 중추원회의는 대개 1년에 한 차례 정도 열렸으며, 자문안이 특정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중추원회의에 회부된 자문안 중에는 조선사회의 관행이나 관습인 이른바 ‘구관(舊慣)’과 관련된 것이 제일 많았다. 1930년대 이후는 시국의 변화와 총독부의 주요 통치정책과 관련된 주제가 많았다. 1930년대 초중반에는 농촌진흥운동 관련 안건이 자주 논의되었고,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조선인의 전시(戰時)동원과 황민화운동 관련 자문안이 많았다.

식민통치의 핵심인 경찰기구의 경우, 중앙에 경무총감부, 각도에 경무부를 설치하고, 도경무부는 관하경찰서를 지휘하는 체계로 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체계로 헌병대사령부-각도 헌병대-헌병분대가 연립하여 경찰 업무를 관장하면서 헌병이 최고 치안책임자로서 두 조직의 장을 겸하는 헌병경찰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헌병경찰제 아래에서 헌병은 육군대신의 관할하에 있지만 치안유지에 관한 경찰사무의 집행은 조선총독의 지휘 아래 있었다. 헌병과 경찰관은 민족운동 탄압이라는 식민경찰 본래의 직무 이외에 범죄즉결, 민사소송조정, 검찰사무, 집달리 사무 등의 사법기능과 조장행정사무(助長行政事務) 등 행정 전반을 원조하는 기능도 갖고서 조선을 지배했다.

사법기구의 경우, 1909년 6월한국의 사법권을 박탈한 일제는 11월 1일부터 통감부사법청과 통감부재판소령을 시행, 3심4급제의 재판소(고등법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구재판소)를 설치하고, 통감부재판소에 검사국을 병치시켰다. 1910년 10월조선총독부가 설립되면서 독립해 있던 사법청은 총독부의 사법부로 되고, 통감부재판소는 총독부재판소로 되었다. 1912년 3월 18일의 개정(제령4호, 4월 1일 시행)에서 재판소를 고등법원, 복심법원과 지방법원의 3급제로 구분하고, 필요한 곳에 지방법원지청을 설치하게 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사법기관은 총독에 직속되어 중앙 행정부서의 하나로 편재됨에 따라 독립성이 없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후 1년 반 만인 1912년 4월 1일 기구를 개정하였다. 부국과(部局課)를 대폭 통폐합하거나 긴축하고, 그 분장사무를 정리 · 통합하는 동시에 산업관계 부서를 신설 · 확충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단행되었다.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총무부를 관방 총무국으로 축소하고 각 부의 서무과를 폐지한 뒤 그 사무를 총무국 총무과로 이관하였다. 

② 총독관방에 토목국을 신설하여 종전까지 총독부의 여러 부에 분속되어 있던 항만축조 · 도로 · 치수 · 영선(營繕) 등에 관한 토목행정사무를 통일시켰다. 

③ 종래 내무부에서 주관하던 위생사무와 탁지부에서 주관하던 항만검역, 이출우검역(移出牛檢疫), 밀어취체(密漁取締)와 항칙집행(港則執行) 사무를 경무총감부로 이관 · 통합하였다. 

④ 관방 소속으로 참사관실(參事官室)을 신설하여 법령의 심의입안과 해석통용, 조선의 제도와 구관조사를 관장하였다. 

⑤ 그리고 농상공부의 식산국, 상공국을 각각 농림국, 식산국으로 개편하여 관방 외 4부9국제로 하였다.

소속 관서의 경우 취조국(取調局), 전매국, 인쇄국을 폐지하고 그 사무를 각각 총독부의 여러 부와 국으로 이관했다. 통신국을 체신국으로 개칭하고 소관 업무였던 관측사무를 내무부 학무국에 이관시켰으며, 탁지부 소관의 해사(海事)에 관한 사무를 체신국으로 옮겼다. 임시토지조사국의 총재 · 부총재 제도를 폐지하고 국장으로 변경하였다.

철도국은 종래의 8과를 6과로 줄이는 동시에 철도국과 경무총감부 소속의 인쇄공장을 폐지하여 그 사무를 관방 총무국 인쇄소로 통합하였다. 1917년 7월 31일일본 정부가 만주철도와 조선철도를 직접 장악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조선철도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경영하면서(國有朝鮮鐵道委託契約) 철도국을 총독관방의 1국(監理課, 工務課)으로 대폭 축소하였다. 위탁경영체제는 조선총독부가 1925년 4월 1일부터 다시 직영하면서 해체되었다. 칙령 제84호로 조선총독부 소속관서인 철도국을 신설하여 국유철도와 부대사업, 그리고 사설철도와 궤도를 감독하는 사무를 관장하였다. 동시에 총독관방의 철도국은 폐지되었다.

1915년 4월 기구간소화라는 취지에서 다시 개정을 시행하였다. 각부 장관 아래 국장을 두는 제도를 폐지하고, 각부장관이 직접 각과의 사무를 지휘하게 하였다. 즉 종래의 9국 가운데 총무국, 토목국, 학무국 3국만 남기고 다른 6국을 폐지하고, 서기관을 전부 사무관으로 고쳐 그 정원을 감소시켰다. 사법부 소속의 민사과, 형사과, 감리과(監理課: 재판소와 감옥의 설치와 폐지, 변호사 관련)를 법무과와 감옥과로 개편하였다. 소속관서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사무정리에 따르는 정원 재배정과 사무분장을 개정하는 수준이었다.

 

제2기(1920~1936)

 

3 · 1운동으로 충격을 받은 일제는 조선의 통치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1919년 8월 19일, 조선총독부관제 개정(칙령 제386호)이 공포되어, 20일부터 시행되었다. 주요 내용은 총독 임용의 범위를 확장시킴과 더불어 “총독은 천황에 직예하며 위임된 범위 안에서 육해군을 통솔하여 조선방비를 관장한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안녕질서의 보호와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조선에서 육해군의 사령관에게 병력 사용을 청구할 수 있다”고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문관 출신자의 총독 임용의 길을 열어놓았으나 실제로 등용된 예는 없다.


개정과 함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체제로 전환하였다. 경무총감부와 각도 경무부 등을 폐지하고, 도지사가 경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래 헌병분대, 분견소 때문에 경찰서를 두지 않았던 지역에는 경찰서와 주재소를 설치하였다. 이는 군인인 헌병이 치안의 전면에 서 있으면서 식민행정을 지원하던 무단통치체제(계엄체제)가 일반경찰이 치안과 식민행정을 맡는 체제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경찰국가로서의 본질은 변함이 없었다.

식민지배정책이 바뀜에 따라 조선총독부 중앙 조직도 크게 바뀌었다. 종래의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를 내무국, 재무국, 식산국, 법무국의 4국으로 바꾸고, 내무부에 부속한 학무국을 총독 직속의 국으로 승격시켰으며, 경무총감부를 폐지하는 대신 경무국을 신설하였다. 또한 총독관방의 총무국, 토목국, 철도국을 각각 서무부, 토목부, 철도부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 본부는 다음과 같이 6국3부제로 구성되었다.

조선총독부 본부 구성〉

총독관방: 비서과, 참사관실, 외사과, 서무부(문서과, 회계과, 통계과, 임시국세조사과, 인쇄소), 토목부(토목과, 영선과), 철도부(감리과, 공무과)
내무국: 제1과, 제2과, 관측소
재무국: 세무과, 관세과, 사계과, 이재과, 전매과, 임시관세조사과
식산국: 농무과, 산림과, 수산과, 상공과, 광무과
법무국: 법무과, 감옥과
학무국: 학무과, 편집과, 종교과
경무국: 경무과, 고등경찰과, 보안과, 위생과

1920년 11월 산미증식계획이 수립되자식산국에 토지개량과를 신설하여 농업수리․토지개량 · 국유미간지 개척 등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1926년 6월 새로 수리과와 개간과를 설치하고, 이어 1927년 5월 토지개량부를 신설하여 위의 3과를 지휘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의 확대에 따른 기구 정비였다. 그리고 종래 국유임야 사업을 산림과출장소 · 지방청 · 영림창 세 곳에서 나누어 관장함으로써 일어나는 폐해를 없애기 위해 1926년 6월 중앙기관으로서 산림부(林務課, 林産課, 造林課)를 신설하여 임정(林政)기관을 통일시켰다. 1932년 7월 27일산림부와 토지개량부를 폐지하고 두 기관이 분장해 오던 업무와 식산국에 속했던 농림, 축산 등 농촌을 대상으로 한 업무를 일괄 관장하는 농림국을 신설하였다.

1924년 12월 20일 ‘일반행정 · 재정정리’ 방침에 따라 본부 관제를 개정하여(칙령 제411호), 기구를 줄이고 동시에 본부와 소속관서의 인원을 대대적으로 감축하였다. 우선 총독관방에 속한 서무부, 토목부와 감찰관 · 감사관을 폐지하고, 서무부의 업무는 관방으로 토목부의 업무는 내무국으로 이관시켰다. 법무국의 기구도 축소하여 민사과와 형사과를 법무과로 통합, 감옥과의 감옥 업무를 소속관서인 감옥으로 이관시키면서 형무소와 가출옥 및 출옥인 보호를 관장하는 행형과(行刑課)로 개칭하였다. 이렇게 해서 1925년도의 총독부 본부는 6국체제로 정비되어 제2기의 기본 골격을 갖추게 되고, 1932년에 산림부와 토지개량부를 통합하여 만든 농림국을 추가하여 1937년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소속관서에서 주요한 변화로는 세무감독국 설치가 있다. ‘제2차 세제정리’와 함께 1934년 4월조선총독부 세무관서관제(칙령 제11호)를 공포하고, 경성 · 평양 · 대구 · 광주 · 함흥에 각각 세무감독국과 전국의 주요 지역 99곳에 세무서를 설치하였다. 세무감독국에는 서무과와 세무부(直稅課, 間稅課), 경리부(징수과, 회계과)를, 세무서에는 서무과와 직세과, 간세과를 각각 두어 1943년 11월 30일까지 세무업무를 관장하였다.

 

제3기(1937~1945)

 

전시체제기 식민행정기구의 최대 특징은 조선의 인적 · 물적 자원을 전쟁 수행에 효율적이며 체계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기획부의 설립으로 상징된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9월 총독관방에 문서과에서 취급하던 자원조사와 총동원계획 사무를 분리하여 ‘물자동원계획 · 생산력확충계획 등’ 기획 업무를 관장하는 자원과를 신설하였다. 1939년 11월 28일 자원과와 식산국의 임시물자조정과(1938.9.28, 물자의 수급과 조정)를 통합시켜 기획부를 신설하였다. 설치 당시는 3과였으나 이듬해 7월 1일 제4과가 추가되었다. 기획부는 국가총동원 계획의 수립과 수행에 관한 종합사무, 시국에 긴요한 물자의 배급과 조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동원체제의 핵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치안계통의 업무도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기구들이 신설되었다. 1939년 2월 3일 방공(防空)과 소방(消防) · 수방(水防)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방호과(防護課)가 설치되었다. 당초 방공사무는 총독부 관방문서과에서 주관했으나 이후 경무국 경무과에서 주관하던 소방 · 수방사무와 통합하여 방호과로 독립한 것이다. 1943년 12월 경비과로 개칭하면서 경무과의 경위 · 경비사무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전시 통제경제의 확대로 1938년 11월 경제경찰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경무과에 경제경찰계가 신설되고, 1940년 2월 3일 경제경찰과로 분리 · 독립하였다.

한편, 1940년 10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해 기존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 · 강화하여 발족시키는 것을 계기로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를 관방으로 이속시킴과 동시에 본부와 각도에 국민총력과를 신설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10호를 1개 반으로 구성하는 애국반체제로 전 조선을 재편함으로써 식민권력이 중앙에서 촌락의 개별호에 이르기까지 ‘침투’할 수 있는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총독부는 ‘병참기지 조선으로서의 사명완수를 위해’ ‘고도국방국가체제의 확보와 이에 따르는 전시적인 행정기구의 개혁’을 1941년과 1942년에 걸쳐 단행하였다. ‘국민정신의 발휘와 국민의 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으로 총력체제’를 세운다는 목표아래 1941년 11월 19일 조선총독부 본부의 기구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였다. 개혁은 후생국(厚生局) 신설과 내무국의 사정국(司政局)으로 개편 · 강화, 그리고 식산국과 기획부의 확대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른바 ‘임전체제(臨戰體制)’의 강화였다.

예상과 달리 침략전쟁이 장기화되자 노동력 동원이 사활적인 과제로 대두하였다. 이를 위해 노무행정을 정비하는 한편, 노동자의 ‘보건위생, 체력 증진 대책, 각종 사회시설, 편리시설에 걸쳐 인적 자원의 기초배양을 위하여 응급적 · 항구적 대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후생국 설립이 필요했다. 후생국 설치안은 이미 1938년 초부터 제기되어, 일본의 후생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으나, 관제개정과 예산 문제로 일본 정부와 협의를 거쳐 마침내 1941년 말에 타결을 보게 된 것이다.

1942년 11월 1일 일본은 대동아성을 설치함과 동시에 ‘행정합리화’라는 취지의 관제개정을 실시하여후생국 · 기획부를 폐지하고 총무국을 신설하는 기구개편을 단행하였다. 후생국과 기획부를 폐지한 것은 그동안 식민통치에 대해 조선총독부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관례에 제한을 가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따라서 개편의 주요내용은 두 기관의 통폐합과 관방의 기구 축소로 나타났다. 그리고 1943년 일본 중앙정부에 군수성 · 농상성 · 운수통신성이 신설되는 것에 맞추어 조선총독부도 12월 1일 대대적으로 행정기구를 개혁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식량의 증산, 지하자원 등 군수물자의 개발증산, 육해수송력 증강, 징병 등 인적 자원의 수탈을 위해 행정기구를 일원적 통합체제로 대폭 축소 개편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른바 ‘결전행정(決戰行政)’ 체제가 수립되었다.

먼저 총무 · 사정 · 식산 · 농림 · 철도 · 전매의 6국을 폐지하고 광공 · 농상 · 교통의 3국을 신설하여 8국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철도국, 통신국과 세관의 관제를 대대적으로 개정했다. 조선내의 만주국경 지점과 대일본항만에서의 연락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세관기구를 교통수송의 담당기관과 통합한 것이다. 세관관제를 폐지한 뒤 관세법 계통사무는 총독부 재무국으로, 기타 사무는 철도국으로 이관하였다. 육해수송을 일관되게 하기 위해 종전의 조선총독부철도국을 중심으로 체신관서의 해사(海事)행정과 항공 부문, 그리고 사정국의 항만토목 부문을 통합한 조선총독부교통국 관제를 제정하였다.

또한 지방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토목사무 일부를 도로 이관하고, 영림서를 도지사의 관할 아래 두었으며, 도의 산업부와 식량부를 광공부와 농상부로 개조하였다. 또한 세제 정비에 따라 세무감독국을 폐지한 뒤, 각지의 세무서를 도지사의 관할 아래 두고, 도재무부를 부활하여 국세와 지방세, 회사경리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는 독립적인 기관의 지방기구들을 폐지하고 도지사의 지휘 아래 통합시켜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읍면에 국가의 관리를 배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45년 패전 당시 조선총독부는 관방 외에 재무국, 광공국, 농상국, 법무국, 학무국, 경무국 6국과 외국(外局)인 체신국 · 교통국 2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형성된 행정기구는 전시체제하 행정기구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였다. 즉 자원 조사와 종합적인 동원계획을 담당한 기획부의 설립, 식민지 주민의 일상적인 동원과 협력을 강요하는 동원기구의 정비, 전시경제의 특징인 통제경제기구(경제경찰과, 물가조정과, 후생국 등)의 확대, 그리고 중앙에서 결정한 정책이 효율적으로 지방 말단에서 관철되도록 한 지방행정기구의 정비 등이 이 시기에 있었다. 이후 국 단위에서 통폐합 등 복잡한 변화가 있긴 했으나 과와 계 수준에서 고유한 업무가 유지됐으므로 전시행정을 집행하는 단위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1년도 채 안 돼 바뀌는 가운데서도 행정기구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행정체계가 가지는 특징, 총독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중적이고 종합적인 행정체계와 관치주의(官治主義)로 요약되는 사회체제도 전시체제기의 행정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지방기구의 변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칙령357호)에 따라 대한제국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경기도 · 충청북도 · 충청남도 · 전라북도 · 전라남도 · 경상북도 · 경상남도 · 황해도 · 평안남도 · 평안북도 · 강원도 · 함경남도 · 함경북도의 13도를 두었다. 도에는 도장관(당초는 조선인 6명, 일본인 7명) 아래, 장관관방과 내무부 · 재무부(1915년 5월 제1부, 제2부로 개칭)와 참여관(조선인)을 두었다. 또 부(장은 부윤, 경성 이하 12)와 군(장은 군수, 317)을 두고 각 부군에는 읍면(4322)을, 그 아래 리(里), 동(洞)을 두었다. 도에는 지방관제 외에 경무부가 있어 경무총장의 지휘를 받았다.
도장관과 경무부장의 관계를 보면, 도경무부장은 도장관의 명령에 따라 도행정의 집행을 돕거나 지방경찰사무에 관해 도장관의 명을 받아 필요한 명령을 내리거나 처분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명령계통을 달리하는 현역 육군좌관(佐官)에게 도장관의 명령은 강제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1915년에 이르러 경무부장이 경무부령을 내릴 때는 먼저 도장관의 승인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한이 가해져 도장관의 통무권(統務權)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1914년과 1915년 2년에 걸쳐 ‘지방행정의 통일쇄신’이라는 목표 아래 대대적인 행정개편이 있었다. 1914년 4월 1일 거류민단․거류지제도와 한성위생회(漢城衛生會)를 철폐함과 동시에 부제(府制)를 시행하고, 군면을 통폐합하였다. 부(府)의 권한은 줄이는 대신 수는 그대로 두었고, 군은 97개 군을 줄여 220개 군으로, 면은 1,800개 면을 줄이고 8월에 다시 1개 면을 줄여 2,521개 면으로 만들었다. 도의 부속기관으로 자혜의원(慈惠醫院)주2도 이때 두었다. 이듬해 5월에 제주도와 울릉도에 도제(島制, 장은 島司)를 실시하였다.

1919년 8월 19일의 관제개정(칙령391호)으로 지방관서의 내용도 크게 바뀌었다. 제2기의 지방제도가 갖는 주요 특징은 도장관이 지방의 행정, 경찰, 재정, 문교, 토목 등 각 분야에 걸쳐 종전보다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도장관을 도지사로 바꾸고, 그 아래 지사관방과 제1부, 제2부, 제3부를 두었다. 제3부는 지방관제 밖에 있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한 뒤 각 도지사가 경찰권을 행사하면서 만든 기구로서 도사무관이 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2월의 관제개정으로 제1부를 내무부, 제2부를 재무부, 제3부를 경찰부로 개칭하였다.

〈지방관서 세부내용(1922)〉

지사관방: 비서과, 문서과
내무부: 지방과, 학무과, 권업과, 농무과, 토목과, 회계과, 심사과
재무부: 세무과, 이재과
경찰부: 경무과, 고등경찰과, 보안과, 위생과

지사관방과 재무부, 경찰부에 소속되어 있는 과는 모든 도에 공통이지만, 내무부의 경우는 각도마다 조금씩 달랐다. 예를 들면 임무과(林務課)는 경기도와 함경남도, 수도과(水道課)는 경기도와 평안남도, 사회과는 평안남도, 수산과는 전라남도에만 있었다. 상공과(商工課)는 경기도와 함경남북도에만 있었고 그 대신 다른 도에는 권업과(勸業課)가 있었다. 1924년에 상공과와 권업과는 산업과로, 임무과는 산림과로 각각 개칭하였다.

1930년 4월 지방관관제 개정에서 경기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4도에 내무부 소속의 산업과, 농무과, 산림과를 분리 독립시켜 산업부(産業部)를 신설하였다. 1941년 6월에는 모든 도로 확대하였으며, 도참여관에게 도사무관을 겸임시켜 산업부장의 직책을 맡겼다.

도재무부는 1934년 5월에 폐지되어 이재과는 내무부로 세무과는 세무서로 이관되었다. 1943년 재무부가 부활될 때까지 지방관서는 지사관방과 내무부, 산업부, 경찰부라는 기본틀을 유지하였다.

제3기에 들어, 1937년 10월 경기도와 함경북도에 외사경찰과가 신설되고, 각 도에 따라 산업부에 농촌진흥과나 토지개량과가 신설되었다. 1943년 9월 식량부를 신설하였으나, 12월 1일의 대규모 지방관관제개정으로 지사관방, 내무 · 경찰 · 재무 · 광공 · 농상의 5부제(部制)로 개편하여 도지사의 지휘 아래 지방관청의 종합행정력을 강화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리의 구성과 급여체계

 

조선총독부 관리는 크게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과 사법상(私法上)의 고용관계에 있는 고원(雇員, 관리의 보조적 업무에 종사), 용인(庸人, 주로 육체적 노동에 종사), 촉탁(囑託) 등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법적인 의미에서 관리라 하면 판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칭하였다.


이 가운데 주임관 이상을 고등관이라 하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주임관이란 장관이 상주(上奏)해서 임명한다는 뜻이며 내각의 발령을 받았다. 칙임관은 주임관을 오래한 사람을 대우하기 위해 천황이 임명하는 형식을 띠었다. 다만 친임관의 경우는 직접 천황이 임명장을 주는 친임식(親任式)을 치뤘다. 조선에서 친임관은 총독과 정무총감, 군인으로는 조선군사령관과 육해군의 대장뿐이었다. 근대 일본의 천황제 아래에서 관리는 모두 ‘천황의 사용인’이었기 때문에 고등관의 경우 천황과의 관계로서 지위를 구분한 것이다. 판임관이란 장관(식민지에서는 총독)이 임명하는 관리로서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거나 일정한 기간 동안 일정한 직무에 종사했을 경우 판임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의 주임관에 임용될 자격을 가진 자를 시보(試補)라 하며, 판임문관에 임용될 자격을 가진 자를 견습(見習)이라 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리의 구성을 보면 1911년 당시 총직원 1만 5113명 가운데 5,707명이 철도국 · 통신국 · 임시토지조사국 등 경제수탈기관에 배치되었고, 치안기관에 2,600명, 사법기관에 1,617명, 중앙행정기관에 974명이 배치되었다. 여기에 치안을 담당한 순사보 3,131명, 헌병과 보조원 7,693명, 밀정 3,000명 등 모두 1만 4824명을 더하면 실제 수는 2만 9937명이었다. 치안 등 탄압기구에 압도적으로 많은 직원이 배치되어 있어 관리의 구성상으로 보아도 경찰국가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후 식민지배가 안정화되고, 행정능력이 강화됨에 따라 일반 행정분야의 관리가 늘어났다. 1943년 당시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의 관리수는 일본인 4만 7153명, 조선인 3만 3813명으로 총 8만 966명이었고, 관리 가운데 경찰관이 차지하는 비율은 일본인 1만 4969명, 조선인 8,178명, 총 2만 3138명으로 약 29%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조선총독부는 치안과 경제적 수탈기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전체주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민족문화 말살과 동화정책을 조선 민중에게 강요한 식민지 최고의 권력기구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면서 차별적인 관리 대우 정책을 펼쳤다. 급여체계의 경우 식민지 조선에서 근무하는 일본인에게는 가봉(加俸)제도를 적용하여 본봉의 1/2 이상의 급여를 지급했다. 그리고 조선인 관리에게는 별도의 급여 지급규정을 적용해서 차별했다. 1912년의 조선인 문관 봉급표에 따르면, 조선인 고등관은 일본인 고등관에 비해 약 1등급 정도 낮은 연봉이 책정되어 있었고, 조선인이 약 30∼40%를 차지하고 있는 판임관은 공식적으로 거의 2배에 가까운 본봉의 차이를 보였다. 여기에 일본인이 받는 가봉을 합치면 그 차이는 거의 3배에 가까웠다.

1920년 8월 1일 독립되어 있던 조선인 관리 봉급 규정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인 봉급 체계로 흡수하여 일원화하였다. 조선인 관리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차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놓던 것을 폐기시킨 것이다. 그러나 ‘조선어 장려수당’ 등을 신설하여 일본인 관리를 우대함으로써 다른 형태의 차별을 개발하였다. 이러한 관료사회의 차별 정책은 민간 영역에도 영향을 끼쳐 민족적 · 사회적 차별을 구조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군대와 경찰 등 무력을 배경으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에 걸쳐 한반도를 통치한 최고 식민권력기구로서 민족운동 탄압과 경제적 수탈,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다른 식민지와 달리 입법, 사법, 행정 전반에 걸쳐 총독에게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것이 조선 총독제도의 특징이다. 총독을 정점으로 비대하게 발달한 식민지 관료제가 조선사회에 이식됨으로써 관료 우위의 권위주의 사회가 고착화되고 사회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문화가 조성되었다. 또한 전시체제기를 거치면서 식민권력이 빠른 속도로 촌락사회까지 침투하여 주민을 통제하고 동원할 수 있도록 행정력을 확대․강화해 나가는 기구를 식민지 조선에 구축하였다. 한편 식민지 관료사회에 수립된 민족차별 구조는 일반사회에도 그대로 관철되어 민족차별을 총체적으로 재생산하는 기본 동력으로 작동했다. 식민지기에 형성된 통치기구와 제도, 문화는 해방 이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됨으로써 탈식민의 주요 과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중추원_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자문기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개요

 

갑오개혁 때 관직을 잃은 고위 관료의 불만이 많아지자 갑오정권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내각의 자문기관(諮問機關)으로서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였다. 광무정권(光武政權)을 거쳐 통감부(統監府) 시기에 들어서면서 중추원의 위상은 조금씩 변화했지만, 헤이그밀사 이후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침략에 협력한 조선인 중에 관료가 되지 못한 이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이들의 명망을 조선통치에 활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중추원을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으로 남겨두었다. 1910년대에 중추원은 ‘조선반도사’ 편찬과 구관 조사 등을 담당했지만, 자문사항을 검토하는 정례회의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1년에 1회 정례회의가 정착되었으며, 다양한 안건에 자문이 이루어졌다. 중추원 인사는 기본적으로 친일적인 인사였으며, 1920, 30년대의 자치운동이나 참정권 청원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식민통치를 위해 자문기관을 만들다

 

중추원은 1894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중추원은 “실직(實職)이 없는 자헌(資憲, 정2품 아래의 문무관) 이상의 인사를 단망(單望, 조선시대의 관리임용제도로 왕의 재가를 받을 때 1명만 추천하는 것)으로 선정한 기관”이었다. 이때는 갑오개혁으로 인한 정치변동이 활발했고, 관료 중에는 “실직이 없는 자헌 이상의 인사”가 다수 나오고 있었다. 중추원은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설치된 내각의 자문기관이다.

1895년 3월 25일 칙령 제40호로 「중추원관제 및 사무장정」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중추원의 기능과 권한은 이전에 비해 매우 체계화된다. 중추원은 기본적으로 자문기관의 성격을 유지하였지만, 법률이나 칙령(勅令) 등을 심사하고 관련 사항을 정부에 건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1898년 11월 2일 칙령 제36호로 공포된 관제는 중추원을 의회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였지만, 정부 내 수구파(守舊派)의 반대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이후 몇 차례의 관제 개정을 거치면서 기관의 권한이 강화되어 1904년에는 정책을 의결하고 심사할 수 있는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07년의 ‘헤이그밀사 사건’을 거치면서 중추원의 권한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미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한 중추원을 통치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1910년 9월 30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칙령 제355호, 이하 「중추원관제」)는 중추원 존속을 통한 식민권력의 전략을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중추원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협력하였던 조선인 유력자 중에 조선총독부 관료가 되지 못한 인사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그들로 하여금 통치를 보조하는 데 활용되었던 것이다.

「중추원관제」 제1조에도 잘 나와 있듯이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隷하여 조선총독의 咨詢에 응함”을 목적으로 했다. 의장, 부의장, 고문, 찬의(贊議), 부찬의(副贊議)의 기본 조직도를 바탕으로 서기관장과 서기관, 통역관을 실무 관료로 두었다. 의장은 역대 정무총감(政務總監)이 당연직으로 겸임한다. 부의장 1명, 고문 15명, 찬의 20명, 부찬의 3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다. 부의장은 친임대우, 고문과 찬의는 칙임대우이며, 부찬의는 주임대우였다.

중추원관제는 식민지 기간 동안 모두 7번 개정된다. 그 중에 1915년과 1921년의 개정이 중요하다. 1915년 4월 30일 칙령 제62호의 「관제」 개정은 중추원의 업무에 “조선의 옛 관습과 제도조사”를 추가시켰다. 이는 종래 취조국의 업무였던 ‘구관 및 제도에 관한 조사’를 중추원이 맡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핵심은 『조선반도사』 편찬 업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이후 1918년 1월 19일 「조선총독부중추원사무분장규정」(조선총독부훈령 제3호, 이하 「사무규정」)이 공포되어 조사과와 편찬과가 신설되었다.

1922년 10월 28일 「사무규정」이 개정되면서 편찬과가 폐지되고 그 업무가 조사과로 이관된다. 1925년 6월 8일의 개정은 조사과의 ‘사료 수집과 편찬’ 기능을 삭제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 역사편찬기구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개편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추원의 『조선반도사』 편찬 업무는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수사업으로 흡수되었다.

 

식민통치에 자문을 하다

 

3·1 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이전보다 중추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위에서도 언급한 1921년의 개정은 이와 매우 밀접하다. 이로 인해 중추원의 직제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고문을 15명에서 5명으로 하는 대신에 친임대우로 격이 높아졌다. 또한 찬의와 부찬의는 명칭이 참의(參議)로 통일되었고, 65명으로 늘어났다. 

 

중추원 의관을 맡은 조선인은 당시의 최고 유력자들이었다. 1910년대에는 김윤식(金允植)과 이완용(李完用)이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이완용은 「중추원관제」 개정 이후에도 중추원에 깊숙이 관여하여 1921년부터 1927년까지 부의장을 맡았다. 1927년부터 1939년까지는 박영효가 부의장이었다. 1942년의 이진호(李軫鎬)와 1945년의 박중양(朴重陽)도 주목할 만하다. 이외에도 고문 이하의 직책에 송병준, 이하영, 윤덕영, 이지용, 권중현 등이 참여하였다.

1910년대에는 중추원의 자문기능이 거의 발휘되지 않았다. 이따금 총독의 훈시를 조선인 사회에 선전하기 위해 임시회의를 열 뿐이었다. 실제로 중추원의 공식적인 제1회 회의는 1919년 9월에 처음 열린다. 이때부터 1년에 1회씩 이루어진 정례회의에는 다양한 안건이 상정되었다. 중추원은 회의의 진행을 위해 총독부의 정책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며, 국·부·과장과 소속관서의 장에게 출석을 요구할 수 있었다. 자문 사항은 거의 매년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제1회 회의에서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 개정의 건’을 논의하였다. 1921년 12월 제4회 회의에서는 ‘남자는 만 17세, 여자는 만 15세가 되지 않으면 혼인할 수 없다는 규정을 설정하는 건’을 논의하였다. 1935년 4월에는 ‘반도(半島)의 상황에 비추어 민중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주는 가장 적당한 신앙심의 부흥책’을 논의하였다. 1940년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실황과 강화 철저를 도모하기 위한 방책’을, 1945년 7월의 마지막 정례회의에서는 ‘시국에 비추어 전의(戰意)를 앙양하는 대책’을 논의하였다.

한편 중추원은 『중추원통신』을 통해 자문활동을 대내외에 선전하였다. 1934년 7월 18일에 발행인가를 받았으며, 이후 발행 주기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1937년 1월부터 1938년 12월까지는 매월 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추원 개혁 논의가 일어나다

 

한편 1920년대 후반부터는 ‘중추원 개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의가 등장한다. 당시 조선사회에는 ‘참정권 청원운동’과 ‘자치운동’으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정치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중추원 내에서도 재현된다. 참정권 논의는 1927~1933년에 걸쳐 매년 중추원 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1928년 제8회 중추원 회의에서 이병렬은 ‘조선에 참정권을 부여하는 시기를 분명히 밝혀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제국신민(帝國臣民)이라는 자각을 촉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중추원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치운동 역시 중추원 내의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예를 들어 현준호는 1932년 중추원 회의에서 ‘중추원을 조선의회로 바꾸고 조선통치에 관한 중요사항을 의결·협찬하게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논의는 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에 걸쳐서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때는 총독부가 직접 ‘중추원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1930년대의 사회적 혼란을 무마하기 위해 ①중추원의 실질적인 심의권을 확장하고, ②내지인 참의를 임명하며, ③참의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④중추원에 건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이는 ‘조선의회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조선인 사회의 기대를 받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총독부의 개혁안은 그대로 실행되지 못하였으며, 참의를 대폭 교체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또한 수요회, 시정연구회, 목요예회(木曜例會) 등의 여러 가지 모임과 논의기구가 만들어지면서 중추원 운영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후 개혁안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伸行) 총독 시기에 일본 내무성을 통해 제출되었다. 내무성은 중추원을 시정심의회(施政審議會)로 개편하는 안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조선인의 전면적인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추원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 개혁안은 ①의원 자격을 일본인에게까지 확대하고, ②중요시책에 민의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 기관으로 삼으며, ③의원 수를 80인으로 늘리고, ④총독부의 입법과 행정 각 분야에 대한 자문과 건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일본의 패망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개혁안은 기본적으로 중추원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매우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추원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전쟁 협력은 특기할 만하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예를 들어 중일전쟁 직후에 중추원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요청에 따라 시국강연회를 열기로 하고 9명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한상룡은 경성·인천, 신석린은 개성·수원, 한규복은 청주·충주·대전, 최린은 전주·군산·남원에 파견되었다. 또한 김명준은 대구·안동·부산, 김사연은 신의주·정주·강계, 유진순은 춘천·철원, 현은은 종성·청진·회령 등에 파견되었다. 또한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国昭)의 요청에 부응하여 윤치호는 육군지원병제도의 의의에 대해 강연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중추원 참여자들은 국방헌금과 국방병기의 헌납, 황군위문단과 북지시찰단 활동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하였다.

 

 

토지조사사업

 

 

ebs 사회탐구 한국사_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이란?

 

 

 

내용 요약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근대적 토지 소유 개념을 확립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에 대한 조사 사업이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대규모로 실시되었다. 이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가 시행되어, 지세를 확보하고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농민의 관습적 경작권이 부정된 사례가 있었으며, 토지조사사업 이후 식민지 지주제가 확립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일제가 근대적 토지 소유 개념을 확립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에 대한 조사 사업.

 

제정 목적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고 통치의 기초가 되는 조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근대적 토지 소유란 소유권의 절대성을 보장하는 형식적 제도성 범주로 사업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성립되었다.

 

내용

 

일제가 강제 병합 후 1910년부터 식민지 체제 수립을 위한 제1차적 작업으로 실시한 종합적 식민 정책의 하나였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서둘러 실시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자본의 토지 점유에 적합한 토지 소유의 증명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왕조 말기에도 토지는 사유권이 확립되어 상품으로서 자유롭게 매매되고 있었으나 등기(登記) 제도 등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 제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또한, 토지에는 사유권주1 외에도 농민층의 각종 권리가 부착되어 있어서 일본 자본이 토지를 점유하는 데 장애 요소가 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의 사유권에서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그 밖의 농민의 각종 권리는 모두 배제하여 토지 매매를 자유롭게 하고, 토지 등기 제도와 지번(地番) 제도 등으로 제도적 보장을 하려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둘째, 지세 수입(地稅收入)을 증대시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조세수입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재정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세 수입을 증대시켜야 하였다. 당시 지세 수입이 조세 수입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지세 수입 증대를 위하여 은결(隱結)을 찾아내고 각 필지주2의 면적과 경계 등을 정확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즉, 일제 조선총독부의 조세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한 세원(稅源)을 확보하여 정비하려는 것이 토지조사사업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셋째, 국유지를 창출하여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개편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왕조의 관청과 궁실이 수조권주3을 가지고 있던 역토(驛土)주4와 둔토(屯土) 등 각종 관전(官田)과 궁장토(宮庄土)를 조사, 정리하여 조선총독부가 무상(無償)으로 소유지를 창출해 점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총독부가 지주가 되어 지세와 소작료를 수취하여 재정 수입을 보충하려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넷째,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에 광범위하게 있었던 미간지(未墾地)를 무상으로 점유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이미 한말부터 우리나라 안에 약간의 투자만 하여도 경작지로 개간할 수 있는 미간지가 광범하게 있음을 주목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국에 걸쳐서 개간할 수 있는 미간지의 면적 · 위치 · 지형 · 지모주6를 정밀히 조사하여 무상으로 점유하였다. 무상으로 점유한 토지를 장래 이민 올 일본인에게 불하주7하고, 개간 후에는 우리나라 농민에게 소작시켜 조세와 소작료의 수입을 증가시키려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다섯째, 토지조사사업 이전까지의 일본 상업 고리대 자본의 토지 점유를 합법화하기 위해서였다. 개항 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상권을 독점한 일본 상업 자본은 생산물의 거래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 수단인 토지 그 자체를 소유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까지 일본인 토지 점유자의 수와 점유 면적은 상당한 정도로 급증하였다. 또한 이들은 점유한 토지를 모두 우리나라의 종래 소작 관행에 따라 우리나라 농민에게 소작시켜 소작료를 수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의 토지 점유는 조선 왕조의 국법상 여전히 위법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인들의 토지 점유를 완전히 합법화하는 법률적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여섯째,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더욱 급증하는 일본인 이민들에게 토지를 불하하여 일본의 식민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일부의 민유지(民有地)까지도 국유지에 편입하여 광대한 면적의 국유지, 곧 조선총독부 소유지를 강제 창출하였다. 그리고 이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각종 일본의 식민회사들을 통해 일본인 이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불하하기 위한 제도적 보장 조처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일곱째, 식량과 원료, 특히 일본으로 미곡 수출을 증가하기 위하여 이를 지원할 수 있는 토지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일본 공업화에 따라 발생할 수도 있는 식량 부족을 예측하고 이것을 우리나라의 농업에서 공급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에 대응하는 토지 제도를 만들며, 또한 토지의 지형 · 지모 조사를 시행하여 식량 수출 증대 정책에 대응하는 체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여덟째, 우리나라 소작농을 임금 노동자로 만들어 일본 공업화로 발생하는 일본 산업 자본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충당하도록 하는 제도적 · 구조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에 부착된 소작농을 토지 소유권 및 경작권에서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일본 산업 자본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우리나라의 소작농을 일본 공업을 위한 임금 노동자로 전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는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토지 점유를 위하여 본격적으로 시행한 식민지 정책은 1907년부터 토지를 국유지와 민유지로 나누고 국유지 점유 정책이었다. 일제의 국유지 점유를 위한 식민지 정책은 민유지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일본 자본의 민유지 점유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적극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일단 경제 과정을 통한 자본의 지출을 수반하는 토지 점유였다.

이에 비해 국유지 점유는 자본 지출을 수반하지 않고 식민지 통치 권력에 의거해 무상으로 방대한 면적의 토지를 점유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국유지 점유부터 시작되었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본질은 바로 이 국유지 점유 정책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제의 국유지 점유 정책은 

 

① 농경지 점유 정책 

② 미간지 점유 정책 

③ 산림 · 임야 점유 정책 

 

등 세 부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서 산림 · 임야 점유 정책은 임야조사사업으로 돌리고 농경지 점유 정책과 미간지 점유 정책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의 농경지에 대한 이른바 국유지 조사는 기본적으로 4단계를 거쳐 완결되었다. 제1단계는 1907~1908년에 재정 정리 · 제실주8 재산 정리라는 명목으로 역토 · 둔토뿐만 아니라 궁장토 · 목장토 · 능원묘위토(陵園墓位土), 기타 각종 토지를 역둔토에 포함시켜 국유지 면적을 강제 창출하고 확보한 단계이다. 일제가 이후 ‘역둔토’라 부른 것은 국유지의 총칭이었다.

제2단계는 1909년 6월~1910년 9월에, 앞서 국유지로 창출하여 확보한 토지에 대해 이른바 ‘역둔토실지조사(驛屯土實地調査)’라는 이름으로 면적과 소작료와 소작농을 조사한 단계이다. 제3단계는 1910년 9월~1918년 1월에, 주로 민유 농경지에 대한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도중에 국유지로 창출하여 확보한 토지를 신고 또는 통지하여 토지대장 등 각종 장부를 갖추고 이른바 국유지의 소유권을 등기한 단계이다.

제4단계는 1918년 1월~1918년 12월에, 토지조사사업의 부대 사업으로서 이른바 ‘역둔토분필조사(驛屯土分筆調査)’라는 것을 실시하여 소작농별 · 지목별 강계(疆界)를 사정하고 국유지 대장과 지적도를 작성하여 국유지에 대한 지배 체계를 최종적으로 확립해 완료한 단계이다. 일제는 이 4단계를 거치면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른바 국유지를 강제 창출하였다.

첫째, 일제는 종래의 무토역토 · 무토둔토 · 무토궁장토 · 무토목장토 · 제언답(堤堰畓)과 능원묘의 내외 해자(垓子) 등을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여기서 ‘무토’라는 것은 토지의 소유권은 백성들이 가지고 오직 지세(地稅)만을 토지 소유자가 국가가 지정한 역(驛) · 특정의 관청 · 궁방 등에 납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무토의 역둔토는 그 이름이 아무리 역둔토일지라도 그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백성에게 있고, 징세권(徵稅權)만 특정의 역 · 관청 · 궁방에 이속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토의 역둔토는 명백하게 민유지였다.

무토의 역둔토에서는 소유권이 백성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역 · 관청 · 궁방이 백성들에게서 징수한 것은 소작료가 아니라 지세뿐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무토의 역둔토를 민유지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국유지에 대한 토지조사를 하면서 종래 역둔토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이러한 무토의 역둔토를 모두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이것은 일제가 백성들의 민유지를 빼앗아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킨 것이었다.

그리하여 종래의 무토역둔토를 소유하고 있던 농민은 자기의 소유지를 일제에게 빼앗기고 그 토지의 소작농이 되어 일반 소작지와 같은 생산물의 50%나 되는 고율의 소작료를 일제에게 납부해야 하였다. 또한 그 소작지에서마저도 항상 쫓겨나게 될 위협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 일제는 제1종 유토역토, 제1종 유토둔토, 제1종 유토궁장토, 제1종 유토목장토, 능원묘위토 등을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여기서 ‘유토역둔토(有土驛屯土)’라는 것은 명칭만으로는 그 역둔토의 소유권을 특정의 역 · 관청 · 궁방이 가진 토지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 때에 이르면, 유토역둔토는 다시 제1종 유토역둔토와 제2종 유토역둔토로 구분되었다. 제1종 유토역둔토란 특정의 역 · 관청 · 궁방이 그 토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농민에게서 소작료를 징수하던 토지이다. 제2종 유토역둔토는 무토역둔토와 마찬가지로 민유지에 역둔토를 설정하였거나, 또는 처음에는 유토역둔토였던 것이 뒤에 민유지화하여 소유권은 백성에게 있고 특정 역 · 관청 · 궁방이 소작료가 아니라 지세를 징수하던 토지이다.

일제가 제1종 유토역둔토에 대한 국유지 조사에는 두 가지 처리 방안이 있을 수 있었다. 하나는 이러한 제1종 유토역둔토에서는 소작농의 도지권(賭地權)과 경작권이 크게 성장하여 소작률도 총생산량의 25∼33%로 절하되어 있었으므로, 소작농의 이 권리들에 기초하여 제1종 유토역둔토를 경작 농민의 소유지로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다른 하나는 조금이라도 국유지를 더 많이 창출하기 위하여 이러한 제1종 유토역둔토를 국유지에 편입시키는 처리 방안이었다. 일제는 처음부터 국유지 창출을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의 하나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까지 관유지로 남아서 관청이 비교적 저율의 소작료를 징수하던 제1종 유토역둔토를 국유지에 편입시킨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제는 제1종 유토역둔토를 국유지에 편입한 다음, 여기에 부여된 소작농의 도지권과 경작권을 부정하고, 일반 소작지에서와 같이 소작료를 총생산량의 50%로 인상하였다. 그 결과 소작농은 제1종 유토역둔토에서 종래에 소유하고 있던 도지권과 경작권을 잃었을 뿐 아니라, 총생산물의 25∼33%였던 소작료도 50%로 인상되었다.

셋째, 일제는 제2종 유토역토, 제2종 유토둔토, 제2종 유토궁장토, 제2종 유토목장토 등을 국유지에 강제 편입하였다. 이 토지들은 본래 민유지에 특정 관청이나 궁방의 징세권을 설정한 것이거나 또는 본래는 ‘유토’였으나 매수 등 각종 경로를 통해 갑오개혁 무렵에는 사전화(私田化)해 버린 토지들이었다.

조선 정부의 특정 관청은 이 토지들에 소작료가 아니라 지세만을 징수하고 있었다. 갑오개혁 때 조선 정부는 이 토지를 민유지로 처리하여 ‘제2종 유토면세결(第二種有土免稅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제2종 유토역둔토는 토지조사의 주체가 누구든지 당연히 백성들의 사유지로 처리되어야 할 민유지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미 민유지로 확립된 제2종 유토역둔토를 모두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이것은 일제가 농민의 민유지를 무력으로 공공연히 빼앗은 것이었다.

넷째, 일제는 역토 · 둔토 · 궁장토 등에 농민들이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투탁지(投托地)주9와 관청이 서류상 잘못 처리하여 위의 토지들에 섞여 들어간 혼탈입지(混奪入地) 등을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투탁지와 혼탈입지는 비록 외형상으로는 역둔토나 궁장토였으나 내용상으로는 명백하게 민유지였다. 물론 조선 정부나 특정의 관청 또는 궁방은 투탁지와 혼탈입지를 민유지로 간주하여 소작료 아닌 지세만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농민들의 민유지인 투탁지와 혼탈입지를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켰다. 이 또한 일제가 농민들의 사유지를 무력으로 빼앗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1910년 9월까지 일제가 강제 창출한 국유 농경지는 12만 8800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국유지로 될 수 있는 제1종 유토역둔토가 약 3만 2100정보였다. 민유지를 무력으로 빼앗아 국유지에 강제 편입시킨 면적은 약 9만 6700정보에 달하였다.

일제가 강제 창출한 국유 농경지 면적은 국유지에 대한 토지조사가 완전히 끝난 1919년 2월에는 더욱 증가해 13만 7224. 6정보에 달하였다. 또 국유 농경지의 소작농은 무려 30만 7800여 호에 달하였다. 이것은 총 농가 호수의 약 10.7%, 순소작농 호수의 약 28.7%에 해당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강제 창출을 통해 국내 최대 지주가 되었고 동시에 가장 조직적으로, 무력적으로 소작농을 착취하는 지주가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일제는 방대한 면적의 미간지를 무상으로 점유하였다. 1910년 토지조사 직전의 미간지 면적은 약 120만 397정보였다. 이 가운데에서 무주한광(無主閒曠) 미간지가 약 59만 5400정보였고, 민유 미간지(民有未墾地)가 약 60만 5000정보였다.

 

 

회사령(1910년)

 

 

회사령(1910)

 

 

 

정의

 

1910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회사 설립에 관한 제령(制令).

 

개설

 

조선을 강점한 1910년 이후의 10년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한반도 전역을 전율(戰慄)의 상태에 두면서 한반도 경제의 제국주의적 재편작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 작업에는 두 가지 큰 시책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토지조사사업은 농토의 약탈과 농민수탈의 농업정책을, 다른 하나인 이 「회사령」은 일제식민지 상공업정책을 집약하고 대표하였다.

 

내용

 

1) 실시목적


이 「회사령」은 실시 목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한반도 내에 한민족 자본의 발생을 처음부터 억제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일본자본 · 외국자본의 진출도 막아 한반도를 원시적인 원료공급지이면서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고전적인 식민지 이론에 입각한 정책이었다는 견해인데, 오늘날 많은 국내학자들이 거의 무비판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견해이다.

둘째는 아일랜드(Ireland)의 역사에서 유명한 형벌 법규와 취지를 같이해 형벌로써 식민지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구속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견해이다.

즉 일본정부가 기도한 것은 조선민족자본의 성장 발전을 억제한 것뿐이었지 결코 일본자본의 조선 진출을 억제한 것은 아니었다는 견해인데, 아직까지는 소수의 학자가 주장할 뿐이다.

그런데 실시과정을 면밀히 고찰해 보면 소수설인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정부와 총독부는 「회사령」을 실시한 직후인 1911년 초 조선피혁주식회사의설립을 종용, 유치하였다.

나아가 미쓰비시제철(三菱製鐵) · 오지제지(王子製紙) · 다이니혼제당(大日本製糖) · 오노다(小野田)시멘트 등 많은 재벌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유치 · 지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출원한 회사 설립은 거의 다 허가해 준 반면에 조선인 기업의 설립 · 경영에는 엄격한 규제를 가하였다.

기존의 조선인 회사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남발하는 등의 사례들로 미루어 「회사령」은 한민족 자본의 성장 억제를 주목적으로 실시되었지, 일본인 기업의 한반도 진출을 억제하려는 의도는 별로 강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만약, 첫번째의 견해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일본자본의 한반도 진출도 강력히 억제하여 한반도를 일본상품의 시장으로만 존속시킬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면, 총독부 당국자가 굵직굵직한 일본의 재벌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제정 및 시행

1910년 12월 29일자 제령 제13호로 제정 · 발효되어 다음 해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전문 20조로 구성된 이 「회사령」은, “회사의 설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제1조).”, “조선 외에 있어서 설립한 회사가 조선에 본점 또는 지점을 설치하고자 할 때에도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제2조).”, “회사가 본령(本令) 혹은 본령에 의거해 발표되는 명령이나 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또는 공공의 질서,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는 조선총독은 사업의 정지 · 금지, 지점의 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제5조).”라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회사설립과 지점의 설치에 허가주의를 채택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회사의 행위가 공공의 질서, 선량한 풍속에 위반된다고 인정될 때에는 사업의 정지 · 금지에서 회사의 해산과 지점의 폐쇄까지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회사령」이 터무니없는 악법이니 침탈법이니 차별법이니 하는 비난을 받는 것은 그것이 일본 본국에서 시행되고 있던 「상법」 회사편과 내용을 전혀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일본 「상법」에는 회사의 자유설립주의를 규정하고 있었다.

즉, 누구든지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여 정관을 작성하면 그것으로 회사는 설립되었으며, 재판소에 등기만 마치면 되도록 되어 있었다.

3) 실시상황

1911년 1월 1일에 발효되어 1920년 3월 31일까지 만 9년 3개월간 실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전기간을 통한 실시 상황을 요약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조선 내에 있어서의 회사 설치 신청건수 676건, 허가건수 556건(82.2%), 조선 외 회사의 조선 내 지점설치 신청건수 91건, 허가건수 85건(93.4%), 조선 외 회사의 조선 내 본점 설치 신청건수 11건, 허가건수 11건(100%), 기설회사(旣設會社)에 대한 해산명령 7건, 지점폐쇄명령 1건 등이다.

표면상 숫자만 보아서는 거의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절차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관권의 간섭과 횡포가 엄청나게 자행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회사설립 허가를 받을 수 있던 자는 일본인이었거나 철저한 친일배가 아니면 처음부터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헌병경찰에 의한 간섭과 탄압이 이루어졌고, 총독정치에 대한 충성도, 재력과 신용도, 회사 설립 후의 수익성, 전망 등에 걸친 광범위한 조사가 헌병경찰의 정보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제령이 실시된 1911년부터 1920년까지 한반도 내에 본점을 가지고 있던 회사를 민족별 · 자본금별로 고찰해 보면 〈표〉와 같다. 이 〈표〉는 본사만을 조사한 것이다. 이 밖에도 많은 일본의 재벌회사들이 한반도 내에 지점을 설치해 놓고 강력한 경제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태형령(1912)

 

 

조선 태형령(1912)

 

 

 

연만 날려도 조선인이면 처벌…日 사법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

 

 

조선태형령

 

 

 

오늘(1일)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새기는 삼일절입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전 국민이 참여한 항일독립운동입니다. 어느덧 99번째 삼일절을 맞이했는데요.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3·1운동 99주년을 맞아 '근대 사법제도와 일제강점기 형사재판'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근대적 사법체계가 자리 잡은 과정과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법적으로도 핍박받은 우리 민족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3·1운동 등 독립투쟁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끔찍한 기록도 담겨 있습니다.

■ "곤장으로 벌하라"…'조선태형령' 일제강점기 악법인 이유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처벌하는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홍종현, 조병진, 조재복 등 세 명은 경북 영천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운동을 하던 중 체포됐습니다. 홍종현은 대구지방법원 1심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조병진과 조재복은 방조죄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습니다.

 



홍종현 등 3인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태형(笞刑)이란 작은 곤장이나 매로 볼기를 치는 형벌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악법 중 하나입니다. 일본은 1912년 3월 18일 '조선태형령'을 공포했습니다. 태형은 식민지 질서에 대항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조선인에게만 적용됐습니다. 교정(矯正)에 드는 비용을 아끼는 동시에 조선인에게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담긴 겁니다. 당시 같은 죄를 저질러도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에게는 구류 또는 과료형이 내려졌습니다.

 



경찰범처벌규칙(조선총독부 제40호)에 따른 처벌 대상

 

 

 

 

■ '연날리기', '돌 던지기'만 해도 처벌…독립운동 뿌리 뽑으려 했던 일본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에게 적용된 차별적 사법제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은 태형뿐만이 아닙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은 항일 투쟁을 조직화하려는 조선인들을 강력하게 처벌했습니다. 1912년 3월 25일 조선총독부가 만든 '경찰범처벌규칙'에 따르면, 대중을 모아 관공서에 청원을 하거나 불온한 책 등을 배포하는 사람은 처벌받았는데요.

 

- 함부로 대중을 모아 관공서에 청원 또는 진정을 하는 자

-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한 문서, 도서, 시를 게시·반포·낭독을 하는 자

- 전선에 근접해 연을 날리거나 기타 전선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하는 자

- 돌 던지기 등 위험한 놀이 또는 공기총 등을 가지고 노는 자

 

처벌 대상의 범위는 생각보다 더 광범위했습니다. 명확하게 일본에 저항하는 조직적 행위가 아니더라도 전선 근처에서 연을 날리거나 돌 던지기, 공기총 등을 가지고 놀면 처벌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이면 모두 불법 행위로 규정한 겁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퍼지자 여기에 가담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일본은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따로 제정해 2년이던 형량을 10년까지 늘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본령은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죄를 범한 제국 신민에게도 역시 적용'한다고 명시하며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 "내일도 독립만세를 외치겠다"…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들

이 같은 일제의 차별적 사법 제도와 탄압에도 우리 민족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은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줘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끌려가 재판받을 당시에서도 이들이 독립에 대한 뜻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쌀을 파는 미곡상(米穀商)이었던 30살 이도상 씨는 시장에서 학생들을 선동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요. 그의 판결문에는 독립운동을 절대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미곡상 이도상의 판결문

 

 

 

99년이 흘러 일제의 끔찍한 탄압은 기록으로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힘썼던 독립투사들의 정신은 기록뿐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조선 교육령朝鮮敎育令(1911.8.)

 

 

 

제1차 조선교육령

 

 

 

내용 요약

 

조선교육령은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식민지 조선의 교육정책과 방침에 대한 칙령이다. 몇 차례 수시 부분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제정 및 제정 수준의 전면적인 개정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크게 4차례 제개정되었다. 1911년 8월 23일 조선교육령이 제정, 공포되었고, 1922년 2월 6일 제2차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었다. 1938년 3월 4일 제3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고, 1943년 3월 8일 제4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다. 1945년 7월 1일자로 전시교육령이 공포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정의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식민지 조선의 교육정책과 방침에 대한 칙령.

 

내용

 

일제는 조선 병탄 직후부터 간단하고 실제적인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별도의 교육을 조선에서 실시해야 한다며 칙령으로 「조선교육령」을 제정하였다.


1911년 제정된 제1차 「조선교육령」은 무단통치와 함께 일본신민화를 꾀하기 위해 조선민족에 일본어 교수를 강제하고 일본역사와 문화를 주입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교육칙어를 조선인에 적용하고, 학교제도는 시세와 민도에 따라 간이하고 실용적으로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의 학교 수업연한을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으로 하여 일본의 학교제도와는 수업연한부터 다르게 하여 차별적이고 이동이 불가능한 학교제도가 만들어졌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은 내지연장주의 방침으로의 통치 방침 변화와 3·1운동 이후의 조선인들의 교육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제개정되었는데,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로 구분하고 「조선교육령」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 즉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교육령으로 공포되었다.

제개정 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 동일의 교육, 일본어 교수 중시, 교육칙어 폐지 등이었다. 「조선교육령」은 내지연장주의를 지향하지만 조선에서의 교육은 특례로 운영한다는 특례주의, 보통교육 단계는 별도 계통의 학교를 두고 교차 입학만 허락하는 비동일제도 별학제, 조선의 특수 사정을 고려한 교과 운영을 인정한다는 교육과정 독자주의 원칙으로 제정되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은 지원병 제도, 창씨 개명과 함께 황민화 정책의 3대 기둥이었다. 특히 「조선교육령」 개정은 지원병 제도와 동반된 것으로, 일본 군부 발 개정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조선 사정보다는 일본 '내지(內地)'의 필요에 따라, 조선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큰 틀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학교 명칭, 수업 연한, 교과 내용 등 일본과 동일한 학교제도가 조선에 적용되었고, 보통교육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일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내선공학(內鮮共學)제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보통학교에서 소학교[1941년 초등학교로 변경], 고등보통학교에서 중학교로 학교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내선별학(內鮮別學)과 차별이 여전하였다.

제3차 「조선교육령」은 5년 후 1943년 3월 다시 개정되었다. 제4차 「조선교육령」 제정은 내외지(內外地) 행정일원화 조치에 따라 일본의 교육관련 법령 개정과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대동아전쟁 완수와 대동아 건설, 황국의 도에 따라 국민연성(國民鍊成)의 일관적인 체제를 완비하여 교육의 국방체제를 정립하고자 제개정하였다. 주요 내용은 수업연한 단축과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 동원의 법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쟁 동원이 더욱 절박해지자 1943년 10월 12일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 방책을 발표하였다. 이제 법령이 아니라 방책이라는 정책 조치에 의해 학교제도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어 1944년 7월 전시교육령을 제정했으나 패전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의의 및 평가

 

「조선교육령」은 조선교육의 방침을 정한 칙령으로, 개별적인 학교령 수준이 아니라 처음으로 종합적인 교육법규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교육제도 수립의 방향을 간이 실용으로 하고, 차별적인 학교제도 수립을 정당화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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