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 3 사건_분열의 서막

위 사진은 제주 4·3 평화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 볼 수 있는 조형물이다. 눈 쌓인 겨울에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아이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다. 여성은 온몸을 옷으로 감쌌지만, 옷이 그리 두툼하지 않아 보인다. 또 추운 겨울임에도 맨발 차림인 것을 보아 이 여성은 무언가를 피하려고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온 것 같다. 여성이 피하려고 했던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들이었다. 왜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들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였을까?
해방 직후 남한에 들어선 미군정은 친일 경력의 경찰과 공무원 등을 다시 채용해 통치에 활용하였다. 이는 해방 후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반대되는 행위었다. 여기에 미군정의 경제 정책 실패에 따른 높은 실업률과 물가 상승으로 불만은 점점 커졌다.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불만도 쌓여 가던 중 이를 폭발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1947년 제주도민이 연 3·1 운동 기념식에서 경찰이 실수로 주민을 다치게 하고도 오히려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총을 쏜 것이다.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총파업으로 맞서며 항의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오히려 제주도민들이 북한의 사상에 동조하는 빨갱이라며 탄압하였다. 여기에 정부의 지원을 받던 우파 단체 서북 청년회가 빨갱이 색출을 명분으로 제주도에 몰려가 약탈, 고문 등을 일삼았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로 수백여 명의 청년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대라 불린 그들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불참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탄압이면 항쟁이다."
라는 그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봉기의 결정적인 원인은 미군정과 서북 청년회의 제주도민 탄압이었다.
새롭게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와 주한 미군 고문단은 제주 청년들의 봉기를 자신들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규모 군대와 서북 청년회를 토벌대라는 명목으로 제주도로 보냈다. 토벌대는 해안에서 5Km 떨어진 곳으로 들어간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을 수색하여 발견한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아였다. 빨갱이란 명목으로 희생당한 주민은 3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간혹 토벌대에 협력한 주민들도 무장대에 의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제주 4·3 사건은 해방 직후 대한민국을 보여 주는 축소판이었다. 이 사건으로 추구하는 사상이나 체제가 다르면 죽여도 상관없다는 극단적인 대립 속에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우리에게 경계심을 주는 평화 인권의 나침반이다.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에 소리 없이 스러져 간 그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이유이다.
제주4·3사건濟州四三事件
내용 요약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사건은 1954년에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정의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 · 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 · 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 · 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 · 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 · 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 · 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 · 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 · 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 · 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 · 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 · 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 · 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 · 3특별법」(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 · 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 · 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 · 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 · 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의의와 평가
4 · 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 · 3특별법 공포 이후 4 · 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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