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탄생 2기 두문자_2미소여 총 3천 소(47.5.~48.2.26.)

-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 여운형 암살사건
- UN 총회 상정
-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UN 소총회 회부
1.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1947.5.21.)_신탁통치 파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5월 21일 열렸지만 소련의 무리한 요구가 회의를 또 결렬시켰다. 소련이 공위 참가를 위해 등록한 남한측 425개 단체를 118개로 줄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과 회원 1만명 이하의 군소단체는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반탁운동을 '의사표현의 자유'로 간주하며 소련의 제의를 거부했다.
미소공위가 계속해서 공전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1. 한반도 문제를 미영소중 4국회의에서 논의할 것
2. 남북한에 각각 입법기관을 설치할 것
3. 남북 입법기관 대표들이 논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남북분열을 조장하는 제안이라며 반대해 결국 2차 공위도 10월 18일 5개월 만에 결렬됐다.
2. 여운형 암살사건呂運亨 暗殺事件(1947.7.19.)
정의
1947년 7월 19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 등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
내용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했던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여운형과 같은 중도파 세력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는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金奎植)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좌우합작운동 실패 후 잠시 정계를 떠났던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난항을 거듭하였고, 이 와중에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달리는 차 안으로 난입한 괴한에 의해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여운형에 대한 테러는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첫 번째 테러 발생 이후 여운형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테러에 시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테러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고, 1947년 3월에는 결국 계동에 있는 그의 집이 폭파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여운형은 1947년 5월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총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달 뒤 여운형은 결국 12번째 테러를 피하지 못하고 암살당하게 되었다.
총격 후 범인은 곧바로 도주했다. 경호원이 범인을 추격하였지만 갑자기 등장한 경찰에 의해 오히려 범인으로 몰려 시간만 지체되고 말았다. 이후 경찰은 한지근이라는 청년을 체포한 후, 이 사건을 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한지근은 미성년자라고 나이를 속여 사형을 면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일어난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끌려간 뒤 그의 생사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은 여운형이 사망한 지 27년 후인 1974년이 되어서야,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가담한 4명이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한지근과 자신들이 어떻게 여운형을 암살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지근 등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나갔다. 여기서 이들은 당시 극우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근환과 염동진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1974년에 나온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나온 직후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설명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가깝게 들어맞았다고 증언하였다.
결국 여운형 암살은 해방 직후 많은 테러 행위에 관여한 극우테러단체들이,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에 불만을 품고 상호 연계하여 그를 제거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이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집을 근거로 활동했음에도 경찰에 의해 적발되지 않았다는 점, 여운형이 여러 차례 테러를 당했음에도 그 배후와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 무엇보다 암살사건 발생 이후 경찰이 사건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 등을 보았을 때, 경찰 역시 이 사건을 사실상 방조했다고도 평가되고 있다.
3. UN 총회 상정

UN 김사하 인구 비례 남북 총선거 실시
감시단 입국(북한 거절)
김규식 민족자주연맹 김국 한국독립당 통합
한국과 유엔의 인연은 1947년 미국이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유엔총회에 한국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시작되었다. 1945년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곧 이어 남북한으로 분단되고 미국 및 소련이 각각 남한과 북한을 관리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남북한 문제해결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활동이 무산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독립' 문제를 제2차 유엔 정기총회에 안건으로 제출하였다. 이 안건에 대해 유엔총회 운영위원회에서 소련과 폴란드는 반대, 대만과 영국 등은 찬성하였다. 그 결과 총회는 압도적 다수로 이 건의를 채택하여, 총회 제1위원회(정치위원회, 소총회)에서 토의, 보고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8일부터 유엔에서 미국의 주도로 한국 문제가 본격적으로 토의되자, 소련은 미국의 노력에 제동을 걸었다. 소련은 미국의 논의 제안이 '불법'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오히려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즉 9월 26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를 통하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군대가 1948년 초에 동시에 철수할 것을 제안하였다.
소련의 제안에 대응하여 미국은 10월 17일 총회 정치위원회에 새로운 수정초안을 제시하였다. 즉, 미국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양 점령 지구에서 점령군 주관 하에 선거를 실시할 것과 유엔임시위원단이 이 선거를 감시하여 총회에 보고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맞서서 소련은 외국군 철수에 관한 결의안을 총회에 제출하였으나, 소련의 초안은 정치위원회와 총회 본회의에서도 대다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소련은 총회의 한국문제 토의에 한국대표의 참석문제를 제안하였다. 한국문제는 해당관련 국민의 참가 없이는 올바로 해결될 수 없다는 이유로 남북한 국민대표를 초청, 참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이에 대하여 유엔총회가 한국민을 대표하는 인사들을 선임하는 것은 불가능함으로 그것을 위해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결국 정치위원회는 10월 30일 제91차 회의에서 미국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11월 4일 정치위원회에서 미국이 수정 초안을 제출, 채택되었고,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정치위원회 결의를 기초로 유엔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안'을 결의 안 제112호로서 채택(찬성 43 반대 0, 기권6)하였다. 결의안의 주요 내용은 인구비례에 따른 비밀투표로 선거를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실시, 제헌의회의 구성과 이들에 의한 국회구성 및 헌법제정,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 그리고 점령국들과 90일 이내에 철군문제를 협의하는 것이었다.
국제 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남북한 총선거 결의안
1947년 11월 14일 결의 (제112호)_한국 독립에 관한 문제 결의안
A
총회가 당면하고 있는 한국문제는 근본적으로 한국 국민 자체의 문제이며 그 자유와 독립에 관련되는 것이며, 또한 본 문제는 당해 지역 주민의 대표가 참가하지 않고는 공명정대히 해결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까닭에, 총회는 1. 본 문제 심의에 있어 선거에 의한 한국국민의 대표가 참여하도록 초청할 것을 결의하며, 2. 나아가서 이러한 참여를 용이케 하고 촉진시키기 위하며 또한 한국 대표가 단지 한국의 군정당국에 의하여 지명된 자가 아니라 한국국민에 의하여 사실상 정당히 선거된 자라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조속히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여 한국에 부임케 하고 이 위원단에게 전 한국을 통하여 여행, 감시, 협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것을 결의한다.
B
총회는, 한국국민의 독립에 대한 요청이 긴급 정당함을 인정하고 한국의 국가 독립이 재설립되어야 하며, 전 점령군은 그 후 가능한 최단기간 내에 철수되어야 할 것을 확신하고, 한국 국민의 자유와 독립은 한국국민의 대표의 참여 없이는 공명정대히 해결될 수 없다는 전술의 결론과 또 선거에 의한 한국국민의 대표의 참여를 용이케 하며, 촉진시킬 목적으로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이하 위원단이라 칭한다)을 설치한다는 결의를 상기하며,
1. 위원단은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대표로써 구성할 것을 결정한다.
2. 한국국민의 자유와 독립의 조속한 달성에 관하여 동 위원회와 협의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기 위하여, 1948년 3월 31일 이내에 성년자선거권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시행하고, 이 대표자들로 하여금 국회를 구성케 하고 한국의 중앙 정부를 수립할 것을 권고하며 각 투표 지구 또는 지역에서 선출될 대표자수는 위원단 감시 하에 시행되어야한다.
3. 다시 선거후 가급적 조속히 국회가 소집되어 중앙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그 수립을 위원단에 통고하여야 할 것을 권고한다.
4. 다시 중앙 정부 수립 직후에 정부는 위원단과 협의하여 아래의 사항을 실시한다.
(a) 보안군을 구성하고 이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군사단체와 유사군사단체를 해체할 것.
(b) 남북한이 군사령관과 민정당국으로부터 정부 여러 기능을 이양 받을 것. 또한,
(c) 가급적 조속히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이 한국으로부터 완전 철수하도록 점령양국과 절차를 작정할 것.
5. 위원단은 한국 내에서 감시와 협의한 바를 참작하여 한국의 국가독립과 점령군 철퇴를 달성시킬 전기 방침 수행을 용이케 하고 또 촉진시켜야 할 것을 결의한다. 위원단은 그 얻은 바 결론을 첨가하여 총회에 보고하여야 하며 사태의 진전에 비추어 본 결의의 적용에 관하여 중간위원회(이하 소총회라 역함) (만일 설치된다면)와 협의할 수 있다.
6. 위원단이 그 책임을 수행함에 있어 모든 원조와 편의를 이에 제공하도록 관계 각 회원국에게 요청한다.
7. 한국 독립 완성에 이르는 준비적 과도기간 중에는 총회 결정을 수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 국민의 여러 문제에 간섭함을 삼갈 것과 또한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철저히 삼갈 것을 모든 유엔 회원국에게 요청한다.
A/RES/112(II),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Resolutions : official records of the 2nd session of the General Assembly, 16 September-29 November 1947』(A/519), 1948. 1. 8.
The resolution on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112 II) (November 14, 1947)
A
Inasmuch as the Korean question which is before the General Assembly is primarily a matter for the Korean People itself and concerns its freedom and independence, and
Recognizing that this question cannot be correctly and fairly resolved without the participation of representatives of the indigenous population,
The General Assembly
1. Resolves that elected representatives of the Korean People be invited to take part in the consideration of the question
2. Further resolves that in order to facilitate and expedite such participation and to observe that the Korean representatives are in fact duly elected by the Korean people and not mere appointees by military authorities in Korea, there be forthwith established a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to be present in Korea, with right to travel, observe and consult throughout Korea.
B
The General Assembly,
Recognizing the urgent and rightful claims to independence of the people of Korea;
Believing that the national independence of Korea should be re-established and all occupying forces then withdrawn at the earliest practicable date
Recalling its precious conclusion that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cannot be correctly or fairly resolved without the participation of representatives of the Korean people, and its decision to establish a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hereinafter called the "Commission") for the purpose of facilitating and expediting such participation by elected representatives of the Korean people,
1. Decides that the Commission shall consist of representatives of Australia, Cannada, China, El salvador, France, India, Philippines, Syria,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2. Recommends that the elections be held not later than 31 March 1948 on the basis of adult suffrage and by secret ballot to choose representatives with whom the Commission may consult regarding the prompt attainment of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and which representatives, constituting a National Assembly, may establish a National Government of Korea. The number of representatives from each voting area or zone should be proportionate to the population, and the elections should be under the observation of the Commission;
3. Further recommends that as soon as possible after the elections, the National Assembly should convene and form a National Government and notify the Commission of its formation;
4. Further recommends that immediately upon the establishment of a National Government, that Government should, in consultation with the commission: (a) constitute its own national security forces and dissolve all military or semi-military formations not included therein: (b) take over the functions of government from the military commands and civilian authorities of north and south Korea, and (c) arrange with the occupying Powers for the complete withdrawal from Korea of armed forces as early as practicable and if possible within ninety days
5. Resolves that the Commission shall facilitate and expedite the fulfilment of the foregoing programme for the attainment of the national independence of Korea and withdrawal of occupying and consultations in Korea. The Commission shall report, with its conclusions, to the General Assembly and may consult with the Interim Committee (if one be established) with respect to the application of this resolution in the light of developments;
6. Calls upon the Member States concerned to afford every assistance and facility to the fulfilment of its responsibilities;
7. Calls upon all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to refrain from interfering in the affairs of the Korean people during the interim period preparatory to the establishment of Korean independence, except in pursuance of the decisions of the General Assembly; and thereafter, to refrain completely from any and all acts derogatory to the independence and sovereignty of Korea.
A/RES/112(II),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Resolutions : official records of the 2nd session of the General Assembly, 16 September-29 November 1947』(A/519), 1948. 1. 8.
이 사료는 1947년 11월 14일 제2차 국제연합(UN, 이하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남북한 총선거 실시에 대한 결의안이다. 결의안은 A와 B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A는 한반도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는 데 유엔이 개입하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이하 위원단)을 파견하여 한반도의 현 상황과 선거 과정을 감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B는 위원단 구성 국가, 선거 일자 및 방법, 정부 수립 후 위원단과의 협의 내용, 위원단의 활동 내용, 한반도 독립 과정에 간섭 불가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945년 12월 17일 개최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2차례 회의 끝에 양측의 의견 차이로 결렬되었다.
미국은 1947년 7월 말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한다면 한반도 문제를 4대 강국 회의에 다시 회부하고, 소련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47년 8월 26일 소련에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4개국 회담을 제의했지만 소련은 9월 4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합의점을 도출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9월 16일 소련에 한반도 문제를 유엔의 의제로 상정할 것이라고 통고하고 다음 날인 17일 ‘한반도 독립문제(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를 제목으로 하는 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제출했다. 국내에서는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이 한국의 독립을 확정해 줄 과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서 다루는 것에 대해 소련은 반대했지만 결국 총회 정식의제로 채택되었고, ‘정치위원회’라고도 칭해지는 제1위원회에 배정되었다.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은 1948년 3월 31일까지 남북한 전 지역에서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한 후 점령군을 철수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점령군이 존재하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선거는 불가능하다며 점령군의 즉각 철수와 남북한의 대표를 한반도 문제 토의에 참여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미국은 10월 29일 한국인 대표를 선출하는 대신 위원단을 설치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여기에 필리핀, 인도, 중국, 프랑스 등의 수정안이 반영되어 제1위원회 결의안이 작성되어 총회에 보고되었다.
유엔총회에서는 제1위원회 보고서를 찬성하는 측과 미소 양군의 조기 철수를 제안한 소련의 결의안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어 격렬한 논의가 전개되었지만, 결국 1947년 11월 14일 제1위원회 안이 결의안(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Resolution 112(II))으로 채택되었다.
결의안에 따라 위원단은 우크라이나가 대표파견을 거부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8개국으로 구성되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8일 입국하여 12일 서울에서 첫 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소련이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여 유엔 결정은 38선 이북에서 시행될 수 없었다. 유엔은 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에서만의 선거’를 결정하였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한국민주당은 소총회의 결의를 환영한다는 뜻을 밝히고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반대로 김구(金九, 1876~1949)와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은 소총회 결정이 통일을 가로막는다며 비판하고,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평야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결국 남한에서만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제헌헌법」을 제정·공포하였으며,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승만은 행정부를 구성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북한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이어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열어 5·10선거를 부정하였다. 북한은 남한에서 지하 선거를 통해 뽑힌 대의원 360명과 북한에서 선출한 대의원 212명으로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채택한 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4.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년 새해가 밝으면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하지 장군은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비해서 단계적인 조치를 취함과 아울러 공산당의 파괴적 활동에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이승만은 하지의 이러한 행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그동안의 비판적 언행을 접고, 하지의 단정 수립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김구는 1월 26일 유엔 위원단의 초청을 받아 이들과 현안을 논의하고 나서, "미소 양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는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이 철퇴한 후 남북 요인회담을 통하여 총선거를 준비 한 후 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의견서'를 유엔 위원단에 서면으로 제출하였다.
김구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 보내는 의견서'는 자신의 통일정부수립에 관한 내용 등을 6개항으로 정의한 것이다. 요약하면
① 전국을 통한 총선거로 통일된 완전 자주정부의 수립
② 총선거는 인민의 절대자유 의사에 의해 실현
③ 북한에서 소련이 입경을 거절한다는 구실로 유엔이 임무를 태만이 하지 말것
④ 북한에서 연금된 조만식 선생 등 남북한의 일체의 정치범 석방
⑤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와 일시 진공상태의 치안은 유엔에서 부담할 것
⑥ 남북 한인 지도자회의 소집
등이다. 한국 문제는 한인이 해결해야 한다면서 소련군 뿐만 아니라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미국의 영향력에 힘입어 단정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세력들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김구는 일제에 협력하였던 사람들까지 나서서 자신을 향해 '크레믈린의 신자', '소련의 적화노선을 지지하는 자'라는 등의 욕설과 비난에도 개의치 않으면서 유엔 위원단의 메논 의장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에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바라는 서한을 보내는 한편, 주한 중국대사 유어만(劉馭萬)을 통해 이승만, 김규식과 회담을 주선하여 줄 것을 요구하여 3인 회담을 가졌으나 합일점을 찾지 못하였다.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세는 단독정부 수립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조국분단의 가능성과 무력충돌의 위기를 안고 있는 단독정부의 수립을 한사코 막아보려던 김구는 통일조국 수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신념으로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해방 후의 심경과 특히 통일정부수립에 관한 집념 그리고 나라 사랑의 의지가 배인 대문장이다. 몇 부분을 발췌한다.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 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미군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서 단선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칠십유삼(七十有三)인 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민족의 이익을 위하여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寃鬼)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김구,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 발표
삼천만동포에게 泣告함
친애하는 삼천만 자매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2차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천만의 生靈을 犧牲하여서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3차전쟁은 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그 아들을 또 다시 戰場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될 운명이 찾아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냐?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하는 자는 파시스트 强盜群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强盜 일본 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外力에 아부하는 자만은 或曰 남침 或曰 북벌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宿望하고 있지만은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실현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敵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될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새 상전의 투지를 북돋을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여움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 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恩典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 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歡笑중에 경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되 우리 한인은 恐怖중에서 죄인과 같이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背恩忘德하는 자라고 질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신문기자 리챠드의 입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 하겠는냐?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유엔은 이러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기를 방지하여서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없는 내정간섭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서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남북통일의 완전 자주독립의 정부를 수립할 것과 미소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의 보이코트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다.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加强하여서 세계평화 수립을 順利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諸公들의 혁혁한 업적을 한국독립운동사상에 남기므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민족간에 있어서 영원한 恩誼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을 三尺童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미군주둔 延長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徒輩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造出하여서 단선 군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위원단을 迷惑케 하기에 전심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서울신문, 1948. 2. 11)
미군정의 卵境下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明察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 매족의 一進會式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병합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합병을 면치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賭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동경까지 가서 합병을 請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영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위원단이 금일의 군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서 한국의 寃情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다. 유엔위원단 諸公은 한인과 영원히 不解의 怨을 맺을 것이오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나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死坑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여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와 같은 원칙은 우리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瞬息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혹은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국 蔣主席의 이른 바 ‘不變으로 應萬變’이라는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바와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軍政廳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邪恩忘念은 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삼천만 자매형제여!
우리가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오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민족의 공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미군정의 앞잡이로 인정을 받은 한민당의 영도하에 있는 소위 臨協은 나의 의견에 대하여 大口小怪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서 원칙도 없고 조리도 없이 詬辱만 가하였다. 한민당의 후설이 되어 있는 ○○○○는 ×××란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 일찍이 趙素昻 嚴恒燮 양씨가 수도청에 구인되었다고 虛言을 造出하던 그 신문은 이번에 또 ‘애국단체가 제출한 건의를 김구씨 同意表明’이라는 제목으로써 허언을 造出하였다. 이와 같은 비열한 행위는 도리어 애국동포들의 분노를 야기하여 각 방면에서 시비의 聲恨이 높았다. 이리하여 내가 바라던 단결은 실현도 되기 전에 혼란만 더 커졌을 뿐이다.
시비가 없는 사회에는 改良이 없고 진보가 없는 법이니 여론이 환기됨을 방지할 바이 아니나 千載一遇의 호기를 만나서 원방에서 來監한 귀빈을 맞아가지고 우리 국가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이 순간에 있어서 이것이 우리의 취할 바 행동은 아니다.
일절 내부투쟁은 정지하자! 小不忍이면 亂大謀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보자.
(서울신문, 1948. 2. 12)
삼천만 자매형제여!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민족의 百年大計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 번 잊어버려 보자. 甲은 乙을 乙은 甲을 의심하지 말며 唾罵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은 外軍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할 것 뿐이다. 계속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有 3인 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내며 영예을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군군청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主持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민족의 이익을 위하여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할 것이오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위하여서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언도를 당해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본 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지금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安逸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怨卑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동포 자매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抑塞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深思하라.
(서울신문, 1948. 2. 13;경향, 조선, 1948. 2. 11)
서울신문,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8년 02월 11일, 12일
5. UN 소총회 회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 韓國臨時委員團
정의
‘제2차 유엔(UN) 총회’(1947.11.14) 결정에 따라 5·10 총선거의 공정한 감시 및 관리를 위해 입국한 유엔 산하의 임시기구로서 영문 약칭은 UNTCOK(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내용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유엔 총회는 소련의 불참 속에(찬성 41, 반대 0, 기권 4)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하 위원단) 파견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이 1948년 1월 7일 한국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도 지명되었으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유엔 총회가 결의한 전 한반도 선거는 무산되었다. 위원단은 선거를 남한지역에서만 실시할 것인가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중국·필리핀·엘살바도르·프랑스는 단독 선거라도 실시하자고 주장했고 호주·캐나다·인도·시리아 대표는 반대했다. 결국 위원단은 독자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엔 총회에 자문을 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격론 끝에 소련 등 공산진영 11개국이 불참하고 11개국이 기권한 상태에서, 31개국(캐나다·호주 제외)이 찬성하여 위원단이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위원단은 논란 끝에 1948년 5월 선거안을 찬성 4, 반대 2(호주·캐나다), 기권 2(인도·프랑스)로 가결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극우단체를 제외한 한국 내의 모든 정당이 선거를 보이콧하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선거안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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