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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대한민국 탄생 3기 두문자_남북 4김 43 510 대한 조선

by noksan2023 2026.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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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탄생 3기 두문자_남북 4김 43 510 대한 조선

 

 

대한민국 수립과정3

 

 

 

 

남북협상南北協商

 

 

 

김구 일행은 4월 19일 오후 3시경 자동차로 서울을 떠나 6시 20분경 38선 경계선인 여현(礪峴)에 도착해 기념촬영을 한 후 평양으로 향했다.

 

 

 

 

정의

 

1948년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등 단독정부수립노선에 대항한 일련의 정치회담.

 

내용

 

1947년 5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과 소련 대표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이에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고, 그 해 11월 국제연합 총회는 미국이 제안한 한국통일안을 통과시켰다.


1948년 1월 이 결의에 의한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단 방문을 소련과 북한측이 거부함으로써 남북의 통일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민족내부적으로는 남북협상을 통해 자주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종래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 뒤에 점진적으로 통일을 성취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다. 이들은 “남북정치요인회담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고 하여 국론은 이승만 계열과 김구·김규식 계열로 양분되었다.

1948년 2월, 14개 정당과 51개의 사회단체로 구성된 중간파 정치세력의 집결체인 민족자주연맹은 위원장 김규식의 주재로 정치위원 홍명희(洪命憙)와 원세훈(元世勳) 등 5명과 상무위원 안재홍(安在鴻)·여운홍(呂運弘)·최동오(崔東旿)·유석현(劉錫鉉)·이상백(李相佰) 등 17명이 김규식의 숙소인 삼청장에서 연석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결의하였고,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의 승낙을 얻어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의 연서로 보낼것에 합의하여 같은 달 16일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전달을 의뢰하였다.

이에 대해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단의 인도대표 메논(Vengalil Krishnan Krishna Menon)과 중국대표 리우위완〔劉馭萬〕 등이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북한측 회답이 오는 대로 국제연합 소총회에 반영하기로 하였고,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단 의장 메논은 국제연합 소총회의 보고연설에서 한국문제해결 4개 방안 가운데 제3안으로 “남북한의 지도자회담과 같은 한국의 민족적 독립을 확립할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며, 또한 최소한도로 그것을 주시한다.”라는 방안까지 제안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자, 그 달 26일 국제연합 소총회는 미국대표의 제안에 따라 메논의 제1방안, 즉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시킨다.”는 방안을 표결에 붙여 31대2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보도가 국내에 전해지자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한국민주당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비롯한 정당단체 대표들은 이승만을 방문하여 국제연합 소총회결의안 통과 축하국민대회를 열기로 하고, 이후의 선거대책을 토의하였다. 한편, 김구는 국제연합 소총회의 결의에 대해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단독정부도, 북한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남북통일을 위하여 최후까지 노력하겠다.”라고 선언하였다.

그 뒤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서신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김일성과 김두봉을 비롯한 9개 정당단체 대표자들의 연서로서 3월 25일의 평양방송과 서신으로 북한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제26차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알려왔다.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와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조선의 민주주의독립국가 건설을 추진시키는 것을 공동목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서한을 민족자주연맹·한국독립당·남조선노동당 등 17개 정당사회단체와 김구·김규식 등의 15명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에도 이를 전달하였다.

북한이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정부수립 제의를 국제연합이 반영할 수 있을 때에는 아무런 회답을 하지 않다가, 국제연합 결의에 의해 남한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이러한 제의를 한 것은, 남한측의 정부수립노선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북한측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갈망하는 국민감정과 기대에 김구와 김규식은 3월 31일 그 동안 남북간에 오고간 서한을 공개하면서 “이번 회담은 그들이 미리 준비한 잔치에 참여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우가 없지 않으나, 우리 두 사람은 남북요인회담을 요구한 이상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라고 공식태도를 밝혔다. 그 동안 이승만은 남북협상에 관해서는 김규식과 양해한 바에 따라 일체 언급을 회피하고 총선거 준비를 진행하였다.

국내의 여론이 찬반 양론으로 갈라져 들끓는 가운데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측의 진의를 알아보기 위하여, 4월 8일 안경근(安敬根)과 권태양(權泰陽)을 평양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김일성과 김두봉을 직접 만나 김일성으로부터 “우리가 통일을 위하여 만나 이야기하는 데는 아무런 조건도 있을 수 없다. 두 선생님께서는 무조건 오셔서 우리와 모든 문제를 상의하면 해결된다.”라는 회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보고에 김구는 북행을 결심하였으나, 김규식은 여전히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평양회의는 당초 예정했던 4월 14일에서 19일로 연기되었다. 이 사이에 서울에서는 4월 14일 저명한 문화인 108명이 연서하여 남북요인회담의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북협상만이 조국의 영구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는 구국의 길이다.”라고 성원하여 북행의 명분을 찾던 김규식도 북행을 결심하게 하였다. 김규식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던 미군정의 하지(John Reed Hodge) 사령관은 그의 정치고문 버치(Leonard Bertsch) 중위를 보내 북행을 만류하였다.

김규식은 민족자주연맹 긴급간부회의를 소집, 자신이 북행에 앞서 김일성에게 5개 항의 조건을 제시하여 그 수락을 전제로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조건은 어떠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이를 배격할 것,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어떠한 외국의 군사기지도 이를 제공하지 말 것, 미소 양군의 철퇴는 양군 당국이 조건·방법·기일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 등으로, 김일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4월 18일 권태양과 배성룡(裵成龍) 두 특사가 다시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나, 5개 항의 조건을 수락한다는 의사를 확인하였다. 이 사실은 이날 밤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한으로 보도되었다. 김규식은 이것으로 북행의 명분을 세우고, 22일 민족자주연맹의 대표단 16명과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이미 김구가 단독으로 떠난(4월 19일) 뒤였다.

이렇게 남북연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남북연석회의란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의 준말로,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관심사인 문제를 토의하는 회의 방식이었다. 남북연석회의는 1948년 4월 19∼23일 평양에서 열려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을 결의한 것이 출발이었다. 당시 북한은 한반도 전역에서의 총선거 실시라는 유엔 결의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가로 막았으며 내부적으로는 인민회의에서의 헌법 초안 마련, 인민군 창설, 주요 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조 작업을 진행하여 독자 정권 수립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

남북연석회의 제1일회의는 4월 19일 오후 1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대표자 54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 주석단 28명 입장, 김일성 사회, 대표심사위원 9명, 김두봉·허헌(許憲) 외 여러 명의 축사로써 일정을 완료하였다.

제2일회의는 4월 21일 오전 11시에 개회, 북조선 정세에 관한 김일성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 1시부터 백남운(白南雲)과 박헌영(朴憲永)의 남조선정치정세보고에 이어 토론이 있었다.

제3일회의는 4월 22일 오전 10시 20분부터 백남운의 사회로 개회, 청년대표의 축하, 21일에 이은 토론, 오후 김구·조소앙·조완구·엄항섭(이상 한국독립당), 원세훈·김붕준(金朋濬)·최동오·윤기섭(尹琦燮)·송남헌(宋南憲)·신숙(申肅)(이상 민족자주연맹), 홍명희(민주독립당)의 입장, 김구·조소앙·조완구·홍명희 등 4명을 주석단으로 보선하였다.

제4일회의는 4월 23일 김원봉(金元鳳)의 사회로 개회, 북조선여성대표의 축사, 이어 홍명희의 ‘남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낭독이 있은 다음 이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뒤, 본회의의 이름으로 「삼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채택, 이극로가 낭독하고, 여기에 이 회의에 참가한 16개 정당대표와 40개 단체대표가 서명하였다. 4월 25일에는 오전 11시부터 김일성광장에서 34만 명의 연석회의 축하대행진과 시민대회, 오후 4시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의실에서 김일성 초대연 등이 있었다.

제5일회의는 4월 26일 미소 양군의 즉각 철군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양국에 전달할 것을 결의, 채택하고, 허헌의 남조선대책보고연설이 있은 뒤 단선단정반대전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연석회의의 공식일정이 끝났다.

4월 26일 연석회의의 공식일정이 끝난 다음 27일부터 30일까지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김일성·김두봉·허헌·박헌영·최용건(崔鏞健)·주영하(朱寧河)·백남운 등 15명으로 구성된 남북요인회담이 개최되어, 김규식이 제시한 바 있는 5개 항의 조건을 중심으로 토의가 이루어졌다.

이어, 남북통일정부 수립방안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유리한 방법이다.”

둘째,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뒤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셋째,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다음 연석회의에 참가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적 조선입법기관을 선거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넷째, “위의 사실에 의거하여 이 성명서에 서명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였다.

남북요인회담을 진행되는 사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은 이른바 ‘4김 회담’이라고 하여 김두봉의 제의 하에 연백평야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문제,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문제, 조만식(曺晩植)의 월남허용문제, 만주 여순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유골 국내이장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수리조합 개방, 전력 송전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수락하였고, 조만식과 안중근 이장문제는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한 며칠 뒤, 다시 수리조합과 전력송전을 중단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남북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미소냉전체제의 국제정세하에서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국가수립을 위한 노력은 분단시대의 중요한 민족적 과제라 할 수 있다. 남북협상이 민족의 꿈으로 사라질 것을 예견하면서도 두 지도자가 북행을 결행한 것은 민족과 역사 앞에서 자기의 의무를 완수하겠다는 애국적 행동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북행은 김일성단독정권 수립책략에 이용된 것이었다고 평가 되기도 한다.

이후 북한은 대남전략에 입각하여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또는 정치협상회의를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협의하는 회의체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 당국 간 회담인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되어 불완전하나마 사실상 서로의 실체를 인정한 후에도 이 연석회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그 명칭은 시기에 따라 바뀌어 왔지만 기본적으로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모여 남북의 입장을 떠나 개인적인 의사를 표명하고 이를 집합하여 결론을 낸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4김회담

 

 

양김씨 이미 항복

 

 

 

 

4김 회담은 1948년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모여 통일 정부 수립을 논의한 역사적인 회담으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주요 인물로 참여했습니다.


회담의 배경


4김 회담은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담은 남북한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 아래 분단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회담을 제안하였습니다.

 

주요 인물

  •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자.
  • 김규식: 민족자주연맹의 지도자로, 남북 협상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 김일성: 북한의 지도자로, 회담에서 남북한의 정치적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 김두봉: 북한의 정치인으로, 회담에 참여하여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였습니다.

 

논의된 내용


4김 회담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의제가 논의되었습니다.

  • 미소 양군의 철수: 한반도에서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습니다.
  • 남한에서의 총선거 반대: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에 반대하였습니다.
  • 내전 방지: 미소 양군 철수 후 내전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습니다.
  • 민주 정부 수립: 조선 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합의하였습니다.

 

결과 및 의의


회담은 결국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남북한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북한 역시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4김 회담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시도로 평가되며, 이후 한국의 분단이 고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회담은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남아 있으며, 남북한 간의 대화와 협상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사례로 여겨집니다.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연석회의 주요 참석자

 

 

 

 

남북협상(南北協商) 또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全朝鮮諸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 또는 남북 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1]는 남한만의 단독정부(현 대한민국) 수립을 반대하는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대책을 논의한 회담을 말한다. 1948년 4월 19일부터 시작된 이 회의는, 김구, 김규식 등 남한 단독 총선에 반대하는 남한 일부 정파 대표들과, 소련의 대리인으로 북한의 실질 권력을 장악해 가던 김일성 및 김두봉과 같은 남북의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에 이용만 되었다는 평가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통일운동의 한 지침을 제공했으며 한국민의 통일의지를 발산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양존하고 있다. 그러나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연석회의의 배후에 스티코프, 레베데프 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 조선인들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주체적 노력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밝혀졌다. 대체로 아래 내용은 각주인용한 문헌에서 보듯이 한국의 우파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쓰인 내용이 많으니 독자들은 이를 감안해서 판단해야 한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중도파 중심의 남북 통일정부 수립방안에서 이승만 및 한국민주당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바뀌고, 한반도 문제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연합(UN)으로 넘어가게 된다. 소련은 미국의 방안에 맞서 스티코프가 1947년 9월 26일에 1948년 초까지 남북한에서 미ㆍ소 양군을 철수한 다음 한국인들끼리 협의해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2] 미국은 이러한 소련의 제의가 그들이 북조선에 설치한 괴뢰정권이 전조선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기도하는 것이라며, 그 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엔총회에서의 한국문제 토의를 밀어붙였다. 당시 서울에 있던 미국의 고위관리는 미ㆍ소 양군이 조기에 철수하고 나면 북한에는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의 지지를 받는 공산정권이 남을 것이고, 남한에는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우익이 우세한 과도입법의회와 도합 5만 명 정도의 경찰관, 국방경비대 및 해안경비대가 남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UN 감시하에 한반도 전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단일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소련이 거부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김규식은 여운형이 암살된 후 민중동맹·신진당·사회민주당 등 중도파 세력을 규합하여 민족의 자주노선을 표방하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다.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하던 이승만 세력 및 한국민주당 등과 같이 김구 역시 1947년 12월 초까지도 북한이 총선을 거부할 경우 남한의 단정수립을 지지하였다.[3] 47년 10월부터 조소앙 주도하에 한독당의 일부 간부가 중도파세력 중심의 각 정당협의회에 참가하면서 남북협상론에 동조하자 김구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한독당 간부들을 해당행위자로 규정하고 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12월 2일에 한민당 당수 장덕수(張德秀, 1894 ~ 1947. 12. 02) 암살사건이 발생하고 그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었다. 당시 중국 총영사 류위완(劉馭萬)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에는 "김구는 한민당 당수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된 혐의가 적지 않습니다. 김구 본인은 비록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았지만 암살범을 비롯하여 8인이 미군사법정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김구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이후 김 씨와 미군정당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라 하였다.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거절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하지 군정 사령관과 사이가 좋지않아, 김구 측의 요청을 접수한 이승만 측근들이 비록 하지에게 요청한다 해도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으로 판단하여 이승만에게 그러한 사실을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승만은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치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는 이들과 결별하고 다시 김규식과 함께 노선을 같이했다.

1948년 1월 8일, 총선거 문제 논의를 위해 UN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했다. 1월 26일, 27일 양일간 한국임시위원단과 김구·김규식·이승만 사이에 열린 회담자리에서, 김구는 '미·소 양군 철군→남북요인회담→총선에 의한 정부 수립'의 3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이어 2월 4일에는 북쪽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또 1948년 1월 8일에는 총선거 문제 논의를 위해 한국에 들어온 UN 한국임시위원단에게 남북협상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2월 10일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인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한 후 3월 8일, 또다시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이에 김일성·김두봉은 3월 25일, 자신들이 속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명의로 수락에 답하였다. 김일성, 김두봉 등은 성명서를 통해 평양방송을 통해 조선의 정치현상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전제하는 유엔 총회의 총선거 결정을 반대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조선의 통일과 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정부의 수립에 관한 대책 등을 토의하기 위해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하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김일성과 김두봉 등은 사실상의 의회와 같은 기능을 하는 단체인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해놓고 있던 상태였다.

 

이로부터 닷새 후인 3월 30일에는 북조선노동당을 비롯한 북쪽의 9개 정당·단체의 이름으로 남쪽의 한국독립당 등 모든 정당·사회단체 앞으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는 서신을 보내기에 이른다.

이렇듯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김구·김규식의 회담 제의를 수락하자,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정당·사회단체는 즉각적인 지지와 적극적인 참여를 천명함으로써 4월 19일 평양에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중국 총영사 류위완(劉馭萬)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에는 김구, 김규식의 방북 성사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김규식은 회의 성공에 회의적인데 남으로 돌아온 뒤에는 정계에서 은퇴할 것이라 합니다. 김구의 행동은 예측불허인데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소련은 남한의 선거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2김이 북상을 결정하기 전 연락원을 통해 회의 선결조건 5가지를 제안하였고, 북한은 이를 완전히 수용하기로 하여 2김의 북상이 성사되었습니다. 2김이 제안한 5가지를 아래에 보고 드립니다.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국제원조의 조건 하에 2김은 아래 5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진정한 민주정부를 건립하며 어떠한 독재체제도 거부한다.
둘째, 사유재산제를 승인하며 독점적 자본주의를 거부한다.
셋째, 전국적인 보선을 실시하며 통일된 중앙정부를 건립한다.
넷째, 어떤 우방도 한국 영토 내에 군사근거지를 설치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미소 양국은 즉각 담판을 개시하여 점령군의 철퇴 시간과 조건을 토의해야 한다(이는 철병의 선결문제와 선후방법을 칭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철병방법을 전 세계에 공포해야 한다.

 

방북 전 양김씨 주변 인물들의 동향

 

김구가 주위 사람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북을 결심하고 강행한데는 거물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의 설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시백은 중국공산당원 자격으로 중경에서 지하공작을 하면서 한국독립운동단체에 대한 공작을 맡고 있었는데, 임시정부 요인들과 격의 없는 관계를 형성하였고,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과도 친했으므로 쉽게 김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송남헌의 『해방3년사』에는 그가 김구에게 김일성의 서신을 전달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해방 후 비밀리에 서너 차례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 홍명희가 김구의 방북을 설득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홍명희는 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소위 "7거두 공동성명(七巨頭共同聲明)"을 발표하기도 했고,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와 밀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남북협상단의 일원으로 북한으로 간 홍명희는 서울로 귀환하지 않았고, 평양에 남아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까지 되었다.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사망하자 맏딸이 1950년 1월 김일성과 결혼하여 그의 장인이 되기도 했으므로 일찍부터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보인다. 홍명희의 딸은 김일성과 결혼 얼마 후에 일찍 죽어 그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잘 모르고 속아서 추천했던 김규식의 또 다른 비서 권태양(權泰陽, ?~1965)은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간첩 성시백의 직계였으므로, 권태양도 김규식의 방북 결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김규식의 방북을 수행했다가 서울로 돌아왔지만, 6.25 당시 김규식의 납북에 직접 간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김규식이 방북을 결심하는데는 문화인 108인이 지지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성명서를 발표한 문화인 108인 중에는 홍명희의 장남으로 역시 월북한 홍기문(洪起文, 1903 ~ 1992) 같은 인물도 끼어 있었다.

남북협상에 참여한 요인 중 한 명인 조완구는 북한에 잔류한 홍명희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방북한 요인들의 주변에는 북한 간첩들이나, 북한에 포섭된 인물들이 많아서, 방북을 유도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연석회의와 4김 회담의 개최

 

4월 19일부터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연석회의에는 남한의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조선의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는데 이는 당시 남북을 통틀어 좌·우익세력 대부분을 망라한 것이었다. 실제로 남한 쪽에서는 남조선로동당·근로인민당 등 좌익계열 정당뿐 아니라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 등 우익계열 정당들도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헌영·백남운·김구·김규식·조소앙 등 명망있는 좌익 및 우익 인사들도 참석했다.

회의 시작일인 19일에는 연석회의를 이끌어 갈 주석단 선거, 축문·축전 소개가 있었고, 20일에는 휴회, 21일에는 김일성의 '북조선 정치정세보고'를 시작으로 백남운·박헌영의 '남조선 정세보고'를 들었으며, 22일에는 전날 발표된 정세보고에 대한 활발할 토론이 진행되었다. 특히 22일의 토론에서는 UN 한국임시위원단의 단독선거 실시를 규탄하고 5.10 단독선거의 실시를 저지하는 것은 물론 남북 모두에서 외국군이 당장 철수해야 한다는 총의를 모았다. 이들 토론을 기초로 회의 마지막 날인 23일, 남북의 대표자들은 단선을 저지하기 위한 각 정당·사회단체의 구체적인 행동통일을 규정한 '남조선 단선단정반대투쟁 대책에 관한 결정서'와 "조선인민이 자기의 뜻대로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민주국가를 창설할 수 있도록 미소 양국군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군해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요청서'와 함께 '남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전 조선 동포에게 격함' 등이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연석회의가 끝난 4월 26일부터 30일 사이에는 김규식이 방북 직전 제안한 독재정권 배격·총선거 실시·전쟁방지방안 마련 등 5개항을 중점적으로 다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또는 '15인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 이 '15인지도자협의회'에는 남측의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이극로·엄항섭 (이상 우익)·허헌·박헌영·백남운 (이상 좌익)과 북측의 김일성·김두봉·최용건·주영하(북은 모두 좌익)이 모였다. 한편 이와 함께 김구와 김규식의 요청으로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간 4김 회담, 김규식과 김일성의 양김회담도 열렸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는 논의되지 못하였으며, 여기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단지 

 

1. 남한에 대한 송전계속 

2. 연백수리조합의 개방 

3. 조만식의 월남허용 

 

등을 김일성에게 피력하였고, 김일성은 1항과 2항은 수락하였으나 3항에는 이견이 있어 합의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일성은 백범과 우사가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전기와 농업용수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그리하여 4월 30일,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공동성명서 4개항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외국군대는 우리 강토로부터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 남북 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외군이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들 大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성취된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수립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下記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과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서 일반적·직접적·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全文임).
  • 남조선 단독선거는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이 성명서에 서명한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全朝鮮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報告文及決定書≫, 54∼55쪽;金南植·李庭植·韓洪九 편,≪한국현대사자료총서≫13, 돌베개, 1986, 305∼306쪽).

 

그러나 1항은 남북한 동시 총선을 거부하고 소련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양군 철수 후 북한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남한을 침략, 적화시킬 우려 때문에 미군정과 남한 우파들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2항과 3항은 북조선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남측 인사들의 반발

 

이렇듯 협상 과정에서 북측이 일방적인 태도를 보이자, 남측의 인사들의 반발이 심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은 병을 핑계로 4김회담에만 참석한 뒤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연석회의 중 참석자인 장건상·여운홍 등은 의사결정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장건상은 연석회의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

 

고 주장하였다가 이를 문제 삼은 북조선에 의해 한동안 연금 되기도 하였다. 장건상은 김구, 김규식이 떠난 지 보름 뒤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도 그와 친분이 있던 북로당 위원장 홍명희·김두봉 덕택이었다고 한다.

지도자 연석회의 기초위원회의 위원으로는 홍명희, 엄항섭, 여운홍이 보선되었는데 기초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에서 박헌영이 미국을 제국주의로 5.10 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 반동분자 등으로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며 비판하자, 이에 격분한 여운홍은

 

"이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정서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되겠으니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

 

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박헌영은 "개인이 왈가왈부하지 말고 민주주의적인 결정으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결국 초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다시 반대발언을 했다가는 서울에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낀 여운홍은 일체의 발언을 중지하고 표결 등에서도 기권을 선언하였다. 이후 여운홍은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48년 5월,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보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 조소앙은 남북협상 참가 후 인터뷰에서 이번 방북 길은 완전히 실패다. 우리가 완전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고 하였다.

 

연석회의 이후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서의 연석회의 경위와 합의사항을 설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요지는 남조선(南朝鮮)의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와 미소양군철퇴(美蘇兩軍撤退)를 요구(要求)하는데 남북 대표자들이 의견 일치를 보았고,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으며, 단전(斷電)도 하지 않고, 저수지(貯水池)도 원활히 개방(開放)할 것을 쾌락(快諾)했으며, 조만식(曺晩植)의 남행(南行) 요구에 대해 미구(未久)에 성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등이다. 미군이 기록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에 나오는 양김씨의 말을 요약하면 : 김구는 남한만의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발언은 계속할 것이지만 방해하지는 않겠다고 하고, 김규식은 단선에 반대하지는 않으나 참여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양김 모두 미소양군이 철수하더라도 북한의 남침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김규식은 김일성이 단전을 하지 않고, 농업 용수도 계속방류히겠다고 했다고 하였으며, 자신은 공산주의를 좋아하지 않지만, 궁적적으로는 한국 전체에 공산주의가 압도할 것으로 느꼈다고 했다. 김구는 북한식의 정권이 남한에도 들어서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규식은 정계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을 하겠다고 말했다는 것 등이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제2차 연석회의를 해주에서 개최할 것을 김구와 김규식에게 제의하며, 북쪽에서도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예정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남쪽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한다 하여 이에 맞서 북쪽에서도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은 또다른 민족분열이라 하여 참가를 거부하였다.

이에 1948년 6월 29일 김구·김규식의 참가 없이 평양에서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일방적으로 개최하여, 남한의 5.10 총선거로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 국회를 비법적 조직체로 규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7월 19일, 김구·김규식은 "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국기까지 바꾸었다. 물론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인 것이다. 그로부터 남한·북한은 호상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하여 민족상잔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한국 전쟁을 예언했으며, 조소앙은 여현이라는 곳에서 성명을 발표, "남북협상은 (남측 인사들이) 이용당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출처 필요]

그러나 김구·김규식의 제2차 지도자협의회 거부 후인 8월 21일, 남쪽의 각 시·군 '대표'가 해주에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남로당원 132명을 비롯하여 조선인민공화당원 68명, 신진당원 31명, 사회민주당원 43명, 민주한독당원 35명, 근민당원 62명, 전평회원 66명, 민주독립당원 53명 등 앞서의 연석회의에 남가했던 모든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북측의 일방적인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와 그 결과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는 결국 북조선의 단독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가져와, 남북 모두가 단독 정부를 세워 분단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김구·김규식은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된 후에도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단정 반대세력을 규합하여 1948년 7월 21일,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 집결"과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민족통일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UN에 남북 두 분단국가의 해체와 남북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암살과 이듬해 6월 25일 한국 전쟁의 발발, 김규식의 납북 등으로 이 운동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리극로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했던 조봉암은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가지 않았으나,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식하고 바로 1948년 5월 10일 5·10 단독 총선거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자체를 실패로 규정한 조소앙은 한국독립당을 탈당, 사회당을 창당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원들의 출마를 적극 권유하기도 했다. 김규식 역시도 민족자주연맹 의원들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가할 사람은 참가해도 좋다는 의견을 표시하였다.

 

방북 후 북한에 잔류한 사람들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방북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잔류하였다. 대표적인 월북 인사는 홍명희(洪命熹, 1888 ~ 1968), 김원봉(金元鳳, 1898 ~ 1958), 백남운(白南雲, 1894 ~ 1979), 이극로(李克魯, 1893 ~ 1978), 성주식(成周寔, 1891~1959), 손두환(孫斗煥, 1895~?) 등이다. 이들은 평양에 가서 갑자기 잔류를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일찍부터 북한에 포섭되어 서울에서 요인들 방북에 바람잡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로 보이지는 않았던 홍명희도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서너 차례 북한을 다녀와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밝혀졌다.

 

김구-류위완 대화록에 나타난 방북 후의 김구의 입장

 

방북 후 서울로 돌아온 김구는 물론 총선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총선 후에도 단정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중국 총영사 류위완(劉馭萬)은 1948년 7월 13일 11시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하여 1시간가량 요담을 나누었다. 류위완이 영문으로 기록한 당시의 대화록이 이화장 문서에서 발굴되어 전문이 공개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김구가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하고, 그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하다”든가, 또“소련 사람들은 아주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 말한 것으로 나온다. 김구의 발언의 의미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북한이 이미 남한이 상대하기 힘든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남침할 가능성이 크고, 그 경우 남한이 쉽게 적화될 것으로 예상한 말로 볼 수 있다.

미소양군이 동시 철수하면 남북간의 힘의 균형은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고, 남북 합의에 의한 통일이 아니라 무력 적화 통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서 불과 2년 뒤 6.25 남침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뉴욕 타임스 한국 특파원이었던 존스턴(Richard Johnston)이 쓴 1947년 10월 27일자 뉴욕 타임즈(NY Times)의 기사에 “오늘 이 곳의 미군정 고위층이 말하길 소련군과 미군 철수 이후 북한 공산주의자의 남한 공격 계획에 관한 보고서는 정확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미군정 고위층에서도 미소 양군이 철수하면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는 관측이 있었다. 존스턴은 또한 1948년 2월 18일 경향신문 기자에게 북한에는 이미 1946년 2월에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정부를 수립해 놓고 헌법도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군비도 강화해 왔으므로, 총선을 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불가피하며, 남한이 북한에 대응할만한 충분한 군사력을 갖출 때까지 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있고, 남한만이 UN의 승인을 받는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외국인 기자도 당시 남북의 상황을 보고 이 정도 판단을 했는데, 남북협상 같은 것은 애초에 성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6·25 남침과 남북 협상 참여 요인들의 납북

 

김구가 예상했던대로 북한은 불과 2년뒤 6.25 남침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는 남북협상에 임한 북한의 의도가 남한의 총선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들이 원하는 남북한 단일정부는 애초부터 남침 전쟁을 통해 남한을 적화하여 달성한다는 계획이었음을 입증한다. 전쟁 준비는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북한이 해방 직후부터 군사력 강화에 열성적이었다는 것도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소련의 대리인으로 소련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을 잃을 수도 있는 남북합의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리는 만무하고, 자신이 통일 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적화 통일만이 그가 원한 유일한 통일정부 수립 방식이었을 것은 자명하다.

연석회의가 열린지 불과 10개월 후인 1949년 3월에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나 통일을 위한 남침 전쟁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고, 이후 48차례나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간청한 끝에[46][47] 간신히 승락을 얻어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킨다. 이로보아 북한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나선 것은 남한에 분열과 혼란을 조성하고 총선을 방해할 목적이 있었을 뿐이고, 애초부터 전쟁을 통한 적화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인민군은 단기간에 서울을 점령한 후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남한 적화가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자, 남한의 주요인사들을 납북하기 시작했다. 전 북한정무원 부부장 박병엽 (필명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우선 납북 대상이었고, 협상을 위해 방북했던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조소앙(趙素昻, 1887 ~ 1958), 조완구(趙琬九, 1881 ~ 1954), 엄항섭(嚴恒燮, 1898 ~ 1962), 김붕준(金朋濬, 1888 ~ 1950), 최동오(崔東旿, 1892~1963), 원세훈(元世勳, 1887 ~ 1959), 오하영(吳夏英, 1879 ~ 1960), 박건웅(朴健雄, 1906 ~ ? ) 등이 납북되었다. 평양까지 가서 공산주의자들의 실상을 겪어보고도 그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끝내 그들에 의해 비극적인 일을 당한 것이다. 김구도 생존해 있었더라면 최우선 납북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병엽 (필명 신경완)은 이들 피납인사들의 납북 후의 운명에 대해서도 증언한 바 있다.

남한측 협상 참여 주요 인사 대다수를 납북한 것만 보아도 북한 측이 협상에 임한 목적은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총선을 방해하기 위한 대남 공작 차원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남북협상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

 

미군정은 남북협상에 처음부터 반대하였다. 미군정은 원래 이승만, 김구보다는 중도 온건파인 김규식을 지도자로 선호하였으나, 남북협상을 위한 그의 방북에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군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면서 방북을 강행하였다. 미군정은 남북협상에 반대했지만 협상파들의 방북은 막지 않았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남북협상에 대해 미군이 내린 평가는 "유엔한국위원단 연락장교 웨컬링 장군의 보고서(Report of Weckerling, liaison officer with the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 1948-06-25)"[54]에 나오는데, 대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소련과 북한의 목적은 남한의 동조자들에게 자금을 대고 부추겨서 총선을 방해하여 무력화 시키고, 미소 양군 철수 후 외국의 간섭을 배제한 한국인들의 정부를 수립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는데 있다.

    북한은 방북 인사들이 감명을 받도록 평양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보수하며, 건물들을 도색하고, 평양 근교의 도로들을 개보수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들였다. 방북인사들은 국영공장 노동자들의 열의와, 마을 사람들의 집, 의복, 재봉틀, 침실, 전기 조명, 깨끗한 부엌 등에 감명을 받았으며, 한 공장의 라운지에서 노동자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남북연석회의를 축하하기 위해 김일성 광장에 34만명의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들이 모였다고 평양 라디오는 자랑하였고, 그들의 선전선동 주제는 "미국인의 주구들만 남한의 단독선거를 지지한다", "남한의 단독 정부 계획을 타도하라", "남한의 단독선거에 참여하지 말라"는 등이었다.

    이런 것들은 남한의 반대정파 지도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계획된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지만, 김구나 김규식이 계속 이에 대한 발언을 하도록 하고, 미국 관리들에게 북힌에서 본 것들에 대해 감동받았다고 말하도록 하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른 온건파나 좌파 귀환자들은 이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상당히 저명한 좌파 한 사람은 평양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자 1주일간 구금을 당했고, 그는 북한에 비해 남한은 천국이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북한 공산 지도자들의 비타협적 태도는 러시아를 대신해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겠다는 일관된 야망의 징표라고 생각했다.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없는 남북 지도자들의 회동은 전체적으로는 실패이다. 명백히 남한의 선거를 파탄내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의 일부일 뿐이며, 남북지도자들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회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선거 며칠 전에 소련군과 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즉각적인 군대 철수와 한국 문제를 한국인들에게 맡길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준비하는 것과 인민위원회가 임시헌법을 체택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북한의 소련군 사령관은 회동에서 채택된 이 편지에 즉각 답하며 "미군도 동시에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련군은 철수 준비를 완료했다"고 하였다. 이런 것은 남한 선거에 반대하는 최대의 선전효과를 노려 치밀하게 준비한 말투이며 선거에 별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미군이 기록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에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의 발언들이 나온다. 두 사람 모두 미소 양군이 철퇴해도 북한의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가 남한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사진을 내 걸지도 않는데 북한은 어디에나 스탈린 사진을 걸어놓은 것을 지적하자 공산주의자들이 분노했다고 했다. 김규식은 김두봉은 고집불통이었고, 김일성이 더 대화할만한 상대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출발 전에는 김규식은 김일성은 가짜라는 소문도 있고, 만난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김두봉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잘 아는 사람이니 협상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소련 문서 공개로 드러난 새로운 사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군사위원으로 남북협상 당시 민정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1948년의 봄의 남북정치협상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주도한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레베데프 비망록≫에는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3월 17일부터 검토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이 비망록 3월 24일자에는 연석회의 대회일정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

 

중앙일보가 보도한 ≪레베데프 비망록≫의 요지에서 남북협상 관련 부분은 아래와 같다.

 

  • 비망록에는 북조선 인민위원장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김두봉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 대표 김규식등 이른바 「4金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에게 『헌법은 채택하지만 당분간 내각은 구성하지 않고 김구.김규식 두 선생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헌법을 통과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계획』이라고 제의, 두 정치지도자를 회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 함께 蘇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이 남북(南北)지도자 연석회의를 결렬시키거나 회의에서 퇴장하면 이들을 「미제(美帝)간첩」으로 폭로하는 대책을 수립해 놓았다.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 『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 5월 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김두봉은 4월25일 밤 레베데프 소장에게『김규식을 5월10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도록 하자』고 건의,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 그를 북한에 묶어 두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비망록에는 소군정이 소련군 극동(極東)사령부 정치위원이자 스탈린의 북한문제 전권대사격인 스티코프 대장(大將)의 재가를 받아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열겠다고 발표하고 연석회의에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 ▲남한의 총선 반대와 분쇄 ▲유엔 한국(韓國)임시위원회 조선(朝鮮)에서 추방 ▲소.미군 철수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후 실시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한 4가지 지침을 관철토록 김일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위해 소군정은 「혁명논리와 투쟁전략」을 주 내용으로 연석회의 참석자들의 결의문에 해당하는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사전에 작성해 남한대표들에게도 이같은 지침을 미리 시달하여 지침 내용대로 연설을 준비토록 지도하라고 했다.

    《출처: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11.15 종합 1면》

 

김일성은 소련이 내세운 그들의 대리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남북협상과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 소련이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 일로, ≪레베데프 비망록≫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 그 동안 북한이 김구가 김일성과의 단독 회담에서 김일성에게 자신의 노후를 부탁했다고 주장해 온 것의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58] 그러한 말이 이 비망록에 나오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소련이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발탁한 김일성 뿐만아니라,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소련에 종속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2004년에 번역 간행된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박헌영은 어떻게 행동할지 스티코프에게 자주 문의하고 있고, 스티코프는 박헌영에게 지침을 내리는 한편 수시로 남한 좌파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샵신은 박헌영이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일성, 박헌영 등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소련과 한통속인 하수인들에 지나지 않았고 조만식 등 북한의 반소 또는 반공 인사들은 오래 전에 모두 제거되었으므로, 남북협상이라는 것이 애초에 조선인들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정부를 세우는 협상을 하는 자리가 될 수 없었다.

이 협상의 실질적 당사자는 김일성, 김두봉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소련과 남한의 총선 반대파들로, 애초에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소련은 남한서 온 대표들을 공작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진지한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이 협상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소련과 북한은 남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을 빚게 만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평가

 

이승만은 크렘린 당국이 합리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고 예상하는 것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


연석회의의 결정에 따라 남한에서는 5·10선거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이를 주도한 것이 주로 좌파세력에 국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또한 북조선이 연석회의를 수락하기 전인 1948년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2월 11일부터는 1947년 12월에 작성된 임시헌법 초안을 '전(全) 인민 토의'에 붙이는 등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수순을 밟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연석회의가 결과적으로 김일성 체제 확립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비판론과 함께 '김구와 김규식이 이용만 당했다'는 조롱섞인 비판도 있다. 또한 연석회의의 이러한 한계로 인해 이후 김구·김규식이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과정과 이에 대응한 북조선의 정부 수립 등에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북조선의 3월 25일 제의에 대해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라 우려하고 있었으며, 4월 19일부터 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도 인사말만 한 번 하거나(김구), 아예 참가하지 않는 등 (김규식) 북의 프로그램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연석회의에 비판적이었다. 장건상은 남북협상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한동안 북조선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특히 김규식은 북에 이용당하지 않으면서도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독재정권 배격·총선거 실시·전쟁방지방안 마련 등 5개항을 북에 제시하기도 했다. 조소앙은 남북협상을 실패로 규정 '이번 방북 길은 완전히 실패다. 우리가 완전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성균관대학교 교수 서중석은 연석회의는 1945년 8월 15일의 광복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으며, 이 자리에서 결의된 공동성명서에 담긴 내용은 당장에 실현되기는 어려웠으나 통일국가수립 방안을 구체화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자신들이 5년간 소련군 부대에서 교육시켜 데려 온 김일성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조만식 등 반대파를 제거하여 그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해주고, 토지 몰수등 각종 공산주의식 개혁을 단행하여 1948년에 들어서면 남한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사회가 되어 있었으므로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한 일부 정파의 대표에 지나지 않는 김구, 김규식과 달리 김일성은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실질적 권력을 장악해 있었으므로 그가 원하는 통일정부라면 자신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경우 외의 다른 방안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는 곧 적화통일에 다름 아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연석회의 이후 불과 2년도 못되어 6.25 남침을 감행하였다. 이 또한 남북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진의는 협상을 통해 남북 단일 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남한의 총선을 방해할 목적이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또 해방 당시 국내에 지지기반이 전혀 없던 김일성이 소련의 대리인이 되어 소련군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북한의 권력을 장악해 있는 사정을 도외시하고, 그가 마치 북한 주민들의 대표인 것처럼 간주하여 미소양군이 철수하고 조선인들끼리 주체적으로 단일정부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그와 협상을 벌인 것도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힘을 가진 미국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을 상대로 아무런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는데, 아무런 실질적인 힘도 못 가진 못한 남한의 총선 반대파들이 북의 소련 대리인들을 상대로 아무 의미있는 합의도 끌어 내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에는 전지역 도처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내걸어 놓고 있었다.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의 대리인으로 독재를 하고 있다는 노골적인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독재도 반대하며 미소양군 철퇴와 조선인끼리의 통일정부 협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공허한 주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북한은 양김씨(兩金氏)가 이미 항복(降服)했다고 선전(宣傳)하고 있었고, 서울의 신문들도 이런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다. 북한의 의도는 처음부터 뻔한 것이었는데도 두 사람이 방북을 강행하여 결과적으로 이용당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연석회의에 동행한 남측 인사 226명 중 홍명희등 70여 명이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평양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연석회의 참석자의 약 3분의 1이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북한의 의도를 대변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한 자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양김씨의 방북은 이들이 당당하게 월북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역할도 했다.

 

 

제주 4·3 항쟁

 

 

제주 4·3 항쟁

 

 

 

내용 요약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사건은 1954년에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정의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 · 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 · 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 · 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 · 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 · 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 · 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 · 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 · 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 · 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 · 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 · 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 · 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 · 3특별법」(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 ·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 · 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 · 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 · 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 · 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의의와 평가

 

4 · 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 · 3특별법 공포 이후 4 · 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5·10 총선거五十 總選擧

 

 

1948년 5월 10일 아침 7시

 

 

 

정의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역사적 배경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의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1947년 8월 12일 완전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문제가 표류하게 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국제연합 총회 제2일에 마샬(Marshall,G.C.) 국무장관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 21일에 총회 운영위원회가 총회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통과시키고, 23일 잇따라 본회의에서 의제 채택을 통과시킴에 따라, 총회 제1차(정치)위원회에 한국문제가 정식으로 부의, 심의되었다.

이 정치위원회에서 미국측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국제연합임시위원단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하여, 소련측은 1948년 초까지 먼저 한국에서의 외국군 동시 철수를 주장,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1월 14일 총회 본회의에서 미국측 안을 43:0(기권 6)이라는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함으로써 모스크바협정이 규정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국제정치무대에서 묵살되고, 한국문제의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었다.

국제연합 결의에 따라 한국의 총선거 감시를 위하여 국제연합임시위원단이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화민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등 9개국으로 구성되었으나, 우크라이나는 이에 불참하였다.

 

 

 

 

 

 

내용

 

이 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서울 덕수궁에서 첫 회합을 가지고 임무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월 24일 소련군정당국이 이 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입경을 거절함에 따라 북한지역에서의 기능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국제연합 소총회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받고 그 해 2월 26일 위원단이 한국 내의 가능한 활동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게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국제연합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접근할 수 없었던 북한지역의 선거를 유보한 채 남한지역만의 선거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미국에 의한 이와 같은 한국문제의 국제연합총회 상정 및 총선거안은 우리나라 정계에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李承晩)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이에 찬동하였고, 이미 1947년 9월 하순까지 조속하고도 독자적인 총선대책위원회를 구성, 읍·면 단위의 지방조직까지 정비하였다.

이승만의 지론이 남한의 단독정부수립론의 개진에 있었다면, 김구(金九)는 자주적 통일정부론의 개진자로 단정론에 반대입장을 고수해 왔으나, 그 해 11월 30일 ‘이승만·김구회담’에서 독립정부수립에 관한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두 지도자가 각자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러 한때나마 동반자 관계가 성립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정부노선 일치를 표명한 지 약 20일 만에 김구가 돌연 단독정부 절대반대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러, 두 지도자는 다시 갈라서게 되었다.

미군정이 지지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했던 김규식(金奎植)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파의 중간우익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하여 냉담하였으며, 이미 군정에 의하여 불법화된 남조선노동당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선외국군철수, 후통일정부수립’이라는 김일성(金日成)의 인민위원회 주장을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승만과 다시 대립하게 된 김구의 정치적 반전은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과 동반하여 1948년 2월 16일 남북한총선거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한정치지도자회의를 김일성과 김두봉(金枓奉)에게 서신을 통하여 제의하기에 이르렀고, 한편 김구는 국제연합임시위원단에 나가 미·소 양 지구 주둔군의 동시 철수, 그 뒤 남북정치지도자 협의, 남북협상 이후의 총선거실시 등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김구의 정치적 지론에 따른 김규식·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 등은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북한공산주의자들과의 평화적 협상을 통한 독립된 통일정부 수립을 기대하고, 1948년 4월 19일부터 28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북한측은 사전에 국제연합 결정과 남조선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각본대로의 의제를 채택하였고, 김구 등은 뒤늦은 22일부터 대표자연석회의에 형식적으로 참석하게 된 격이 되고 말았다.

이른바 남북협상인 대표자연석회의는 실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소집한 집회였으므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와야 했다. 남한총선거를 목전에 둔 5월 5일에야 김구는 귀경하여 간단한 성명을 발표한 뒤 정치적 침묵에 빠졌고, 김규식은 “이제는 단독정부를 반대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남북협상에 책임을 지고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평양에서의 남북협상이 굴욕적인 실패였음을 자인하였다.

남북협상론자들은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첫째 한국의 분단을 영구히 하고 군정의 연장을 합리화하며, 둘째 외세의 개입과 간섭하에서는 민주적 자율선거가 보장될 수 없다는 그럴 듯한 논거를 폈으나, 이에 반대하며 독립정부수립을 지지하고 여기에 참가한 정치세력들의 견해는 또 달랐다.

첫째 남북한총선거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현실적 단계이며, 둘째 한국문제 해결은 근본적으로 국민 사이에 민주주의적 역량을 배양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는 합목적성을 강변하였다. 남북협상론자의 실태와는 대조적으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총선거준비운동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운동에는 한국민주당·조선민주당·조선여자국민당의 3당과 반탁국민운동체였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주체가 되었다.

 

당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산하에는 유진산(柳珍山)이 회장인 청년조선총동맹, 문봉제(文鳳濟)가 위원장인 서북청년회, 지청천(池靑天)이 단장인 대동청년단, 전진한(錢鎭漢)이 의장인 대한독립노동총연맹, 이범석(李範奭)이 단장인 조선민족청년단, 민족통일총본부 등의 단체가 모여들었다.

5·10선거의 선거대책은 1948년 3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협의되었다. 총선거일은 처음 한국임시위원단 메논(Menon,K.P.S.) 의장이 ‘1948년 5월 제1주에서 지연되지 않는 기간’으로 정했고, 그 뒤 미군정의 하지(Hodge,J.R.) 중장의 요청에 따라 5월 9일로 결정되었다가, 5월 9일이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5월 10일로 변경, 확정되었다.

3월 17일 미군정 법령으로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되었으며, 3월 20일부터 4월 9일까지 20일간의 유권자 등록기간을 설정하여 총유권자 813만2517인 중 96.4%에 해당하는 784만871인이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다.

선거관리를 위하여 군정장관 딘(Dean,W.F.) 소장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과도정부입법의원에서 선출한 김동성(金東成)·김법린(金法麟)·김지환(金智煥)·노진설(盧鎭卨)·이갑성(李甲成)·이승복(李昇馥)·박승호(朴承浩)·백인제(白麟濟)·오상현(吳相鉉)·윤기섭(尹崎燮)·장면(張勉)·김규홍(金奎弘)·최동(崔東)·최두선(崔斗善)·현상윤(玄相允) 등을 임명하였다.

선거에는 선거인 명부 등록자 중 95.5%가 투표에 참가하여 정부 수립이라는 염원이 지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선거권은 만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 국민에게 부여되었고,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에 이른 모든 국민에게 인정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나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었던 자에게는 선거권을 박탈하였고, 피선거권은 일제 때에 판관·임관 이상인 자, 경찰관·헌병·헌병보, 고등관 3등급 이상인 자,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 훈(勳) 7등 이상을 받은 자, 중추원의 부의장·문참의 등에게는 주지 않았다.

선거제도는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을 수용한 민주주의제도였고, 선거구제는 1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였다. 한국임시위원단은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로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방침이었으나, 북한지역의 선거불가능으로 북한지역 할당의석 수 100석을 유보해 두고 남한에서의 의석 수를 200석으로 할당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남한의 선거구는 부(府)·군 및 서울시의 구(區)를 단위로 하고, 인구 15만 미만은 1개 구, 인구 15만 이상 25만 미만은 2개 구, 인구 25만 이상 35만 미만은 3개 구, 인구 35만 이상 45만 미만의 부는 4개 구로 하여 200개 선거구를 확정하였다. 선거운동은 선거관계공무원과 일반공무원을 제외하고 누구든지 자유로이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총선에는 모두 948인이 입후보하여 평균 4.7: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35인의 후보자를 내어 가장 많았고, 48개 정당·사회단체에서 후보가 난립하였다. 입후보자의 특징은 입후보자 총수의 44%에 해당하는 417인의 절대다수가 무소속이었던 점이며, 10인 이내의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무려 43개나 되었고, 그 중 1인만의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26개나 되었다.

선거결과 정당·사회단체별 당선자 현황은 무소속 85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인, 한국민주당 29인, 대동청년당 12인, 조선민족청년당 6인,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인, 기타 11개 정당·단체에서 각 1인 등이었다. 당선자 중 최고득표자는 서울 성동구의 지청천으로 4만1582표를 얻었고, 최저득표자는 경기도 장단군의 조중현(趙重顯)으로 총 2,792표였으며, 무투표당선이 의원정수의 6%에 해당하는 12인이나 되었다.

그 해 5월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개원되었고,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申翼熙)를 선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_분단된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이 탄생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개요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가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분단국가의 수립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져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7월 20일 국회는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다. 이후 초대 내각이 구성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즉시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의 열망과 달리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었고, 38선 이남은 미군, 이북은 소련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전후 세계전략과 동아시아 정책에 근거해 남과 북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갔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연합동맹국으로서 협의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의 주된 결정사항은 한반도에 독립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며, 임시정부와 협의해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정사항에 따라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반탁투쟁을 벌인 정당·사회단체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상이한 태도, 냉전의 격화로 인해 1947년 10월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정착 상태에 빠지자, 9월 중순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미국의 행동은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과 중국의 동의도 받지 않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은 실질적으로 남과 북에 두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의미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이 구성되었다. 위원단은 1948년 1월 남한에 도착해 첫 회합을 갖고, 남한 지도자들과 함께 선거 감시 및 관리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 측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출입을 거부하면서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유엔소총회는 격론 끝에 1948년 2월 26일 선거 가능 지역, 즉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권고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통과시켰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는 분단국가의 시작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이었다.

남한 정국은 유엔의 결정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져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진영은 유엔소총회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단독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남조선노동당 등 좌익세력은 미소 양군의 철수와 유엔을 배제한 전국총선을 주장하면서 선거를 거부했고, 무력을 통한 단선 저지 투쟁에 들어갔다. 김구·한국독립당과 김규식·민족자주연맹 세력은 남북지도자회담에 의한 통일국가수립 협상, 즉 납북협상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남한만의 5·10총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지게 되었다.

좌익과 대다수의 중간파가 참여하지 않은 채,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남한 의석 200석 가운데, 4·3사건으로 치안 문제가 있던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5월 31일에 첫 제헌국회가 열려 최고령자로 임시의장이 된 이승만의 사회로 의장 및 부의장 선거가 진행되었다. 의장에는 압도적인 득표로 이승만이 선출되었고, 부의장에는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제헌국회는 6월 3일 ‘헌법 및 정부조직법기초위원회’ 설치를 마치고 헌법안 작성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7월 17일 제헌헌법이 제정·공포되었으며, 7월 20일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취임했다. 이후 초대 내각이 구성되었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은 최초의 보통·평등·비밀·직접선거를 실시해 대내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승인을 통해 대외적으로 합법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앞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크게는 통일, 체제 및 이념 대립의 극복, 자주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작게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세력을 체제 안으로 포용해야 하는 국민통합의 과제가 그것이었다.

남한과 북한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된 가운데, 1948년 12월에 열린 3차 유엔총회에서는 한국정부의 승인과 남북통일의 실현 문제가 다루어졌다. 미국은 결의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엔이 신생 한국 정부를 ‘전국 정부(National Government)’로서 승인하도록 하려 했지만, 공동 결의안 협의 과정에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영연방과 호주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한국 정부의 ‘전국 정부’ 위상을 포기하고, 다른 국가들과 의견을 절충해 한국 정부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선거를 감시한 지역(38선 이남)에서 수립된 유일하고 합법적인 정부’라고 규정했다. 이 내용이 담긴 공동결의안은 12월 12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었다.

 

내각 구성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된 후 같은 날 행정부 조직을 규정한 「정부조직법」이 법률 제1호로 제정·공포되었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정부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는 대통령과 국무원을 이루는 국무위원이었다. 행정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무원의 구성원인 대통령, 국무총리 및 각 행정부서의 장·차관에 어떤 인물들이 등용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 초기 정부의 성격이 결정될 수 있었고, 따라서 내각 구성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부조직 중 대통령, 부통령은 국회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제외한 행정 각부의 장관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김구마저 불참한 상태에서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은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7월 20일 국회에서 이승만은 압도적 다수표로 선출되었고, 부통령은 재선거 끝에 이시영이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에 선출되자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이화장에 조각 본부를 마련하고 각계 인사들에게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에 대한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각구성은 사실상 이승만 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내각구성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국무총리 인선문제였다. 7월 21일 이승만은 국무총리 인선에 대한 기자단과의 문답에서 내각구성의 원칙을 밝혔다. 내각구성에 있어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안정성 있는 정부를 만드는 것이며 1당 1파에 치중하지 않고 초당파적 인물을 총망라해 초대 각료를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국회에 참석해 국무총리에 북한 출신으로 조만식이 당수로 있는 조선민주당의 부당수인 이윤영을 임명하고 국회의 인준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 내 지지 세력이 없었던 이윤영은 한민당과 무소속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국무총리 인선을 둘러싼 이승만과 국회의 대립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후 정부 수립을 빠르게 실현시켜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이 두 번째로 임명한 이범석에 대한 승인 요청안은 통과되었다. 그렇지만 찬성 110, 반대 84로 반대표도 상당했다. 이승만의 이범석 국무총리 인선의 이면에는 조선민족청년단 단장인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해 국회에서 한민당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다음으로 이승만은 각부 장관 인선에 착수했다. 최종적으로 재무부장관에 김도연, 법무부장관에 이인, 농림부장관에 조봉암, 교통부장관에 민희식, 내무부장관에 윤치영, 사회부장관에 전진한, 문교부장관에 안호상, 국방부장관에 이범석, 체신부장관에 윤석구, 상공부장관에 임영신, 외무부장관에 장택상이 임명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이승만의 추종 세력이었다. 그러자 각료 인선에서 배제된 세력, 특히 다수가 입각할 것으로 기대했던 한민당은 이승만의 각부 장관 인선 과정 및 내각 구성 자체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이승만과 한민당 사이에 증폭된 갈등은 향후 이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민당이 반이승만세력으로 대립·갈등관계에 놓이면서 신생국 건설 초기에 해결해야 할 정치·경제·사회 개혁의 문제들은 난항을 거듭했으며, 이는 초기 이승만 정권의 취약성을 가중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으며, 제헌국회와 헌법 제정을 통해 민주공화국 체제를 확립하였다.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근원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 이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 의지를 국가 형태로 구현한 역사적 사건으로, 임시정부는 대통령제와 3권 분립을 채택하고 외교·군사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국내 한성임시정부와 상해 임시정부, 노령 국민회의 등이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갔다.

 

광복과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한반도는 해방되었으나, 38선 이남은 미군, 이북은 소련군 점령으로 분단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으나, 국내에서는 반탁운동과 좌우 합작운동이 전개되었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면서 남북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해졌다.

 

제헌국회와 총선거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제헌국회는 헌법 제정과 정부 조직을 담당하였다. 헌법은 대통령 중심의 민주공화국 체제를 규정하고, 3권 분립과 국민 주권 원칙을 명시하였다.

 

대통령 선출과 정부 수립


제헌국회는 7월 20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공식 선포하였다. 이날 밤 자정을 기해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아 독립 국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후 초대 내각이 구성되었으며, 농지개혁, 반민족행위자 처벌, 경제 재건 등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국제적 승인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남한 지역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받았으며, 미국을 포함한 50여 개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로써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가 고착화되었다.

 

역사적 의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임시정부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민주공화국 체제를 확립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비록 한반도 전체를 통합하지는 못했지만, 실질적인 국가 운영 체제를 마련하고 국제적 합법성을 확보한 점에서 현대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의미가 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_48.9.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48.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한국 한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군사 분계선 북부에 위치한 나라이다. 약칭은 조선(한국 한자: 朝鮮), 공화국(한국 한자: 共和國)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언론과 여론 구분에 관계없이 북한(한국 한자: 北韓)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엔이 추정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024년 기준으로 약 2,649만 명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용어는 평양말을 기초로 형성된 문화어이다. 수도는 평양시이며, 이밖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요 도시로는 남포시, 개성시, 라선시 등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 형태는 정당이 조선로동당이 있으며 사실상 일당제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6.25 전쟁, 8월 종파 사건 등을 거쳐 정적을 제거하여 수령 중심 정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그의 자손인 김정일, 김정은은 차례로 집권을 하며 선대의 수령주의를 이어받은 정치를 펼쳤다. 이 체제는 '주체사상'이라는, 김일성 일가와 그들의 당인 조선로동당의 통치를 멋대로 바꾸는 이념으로 대표된다.

스탈린과 소련군정의 계획에 의해 세워졌으며, 분단 이후부터 현재까지 김일성 일가의 맘대로, '조선이 없는 지구는 깨버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언급, '수령결사옹위정신', '나쁜놈들'로 대표되는 강경한 수령 중심의 체제의 성립과 유지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보여왔다. 이를 위해 경제 개방을 포함한 외부와의 전면적 교류를 꺼려 외부에서 이 국가의 상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국호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동국가 내에서는 자국에 대한 약칭, 혹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통칭으로 ‘조선'이 사용되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조선'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괴뢰군부를 가리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와 자국에 대한 호칭의 구별을 위해 ‘리조조선(李朝朝鮮/리조)'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대한민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언론과 여론 구분 관계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킬 때 대개 북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쓰임은 동 단어의 한국어 사전상 의미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7][8] 한국어 사전상 남한, 북한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장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고 한반도 내 군사분계선 이남을 지칭한다. 즉, 한국어 사전상 남한은 대한민국의 남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남 지역),[9] 북한은 대한민국의 북쪽 지역(대한민국 영토 중 휴전선 이북 지역)[10]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남한과 북한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대한민국의 한국어 화자들 사이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는 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남측'(대한민국) 에 대비하여 '북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양국간의 외교 혹은 문화 교류 등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북한과 비슷한 지리적 의미를 가지는 서북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서북은 지리적인 서북인 평안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도와 북관을 합쳐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일컫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자국을 '공화국', '조국', 북조선등으로 부르고, 북한 지역을 가리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중화민국, 홍콩, 마카오 등에서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북한"(중국어 정체자: 北韓, 병음: Běihán 베이한[*])이라는 명칭을 쓰고, 일본에서는 "북조선"(일본어: 北朝鮮 기타초센[*])이라는 명칭을 쓴다.

 

1945년 9월 2일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5년 9월 2일 이전 한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간주한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 조선은 모두 이 국가가 통치하는 지역의 일정 부분을 통치한 국가다.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있는 단군릉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고조선의 지도자였던 단군(과 그의 부인)의 능이라고 주장한다. 함경남도 금야군 비단리에 있는 소라리토성도 대표적인 고조선 유적이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명성왕의 묘라 추정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36호 동명왕릉과 고구려의 궁이었던 국보 2호 안학궁터와 국보 8호 대성산성 복원물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공동 2호 보통문, 국보 4호 대동문, 국보 19호 을밀대 등의 고구려 장안성에 관련된 유적도 남아있다.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에 의해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의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인정못함).

발해의 수도인 5경중 남경 남해부는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하였다. 황해도와 강원도까지 신라에 귀속되었다.

고려시대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개성역사유적지구는 2013년 6월 23일, 제3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프놈펜 회의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동북면”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으며, 지금의 함경도 일원이다. 8도제가 도입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가 설치되었다. 김종서와 최윤덕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쪽으로 오늘날과 거의 동일한 경계를 만들었다.

조선의 중심권역이었던 경기도, 충청도 출신을 가리키는 기호인과 평안도, 황해도, 개성을 출신은 가리키는 서북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11년(순조 11년)에 평안도의 홍경래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관서 지방에서는 외래사상이 일찍 유입되어 선천·정주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전파됨에 따라 많은 개신교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개신교는 관서지방에서 보수적 관료층이 아닌 근대화의 경향을 강하게 지녔던 자립적 중산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 자립적 중산층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나라의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개화를 이룩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서지방의 기독교적 전통은 상당히 강하였다. 또한 관서 지방의 대표격인 평양에서 1907년에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근대 한국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1862년 고종의 즉위식을 시작으로 구분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등 여러 이견이 있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3.1운동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본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한일합방을 맞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9월 2일 이후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군정통치했다. 이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안남북도를 중심으로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워 북한 정권 수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적화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이 생겼으며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 뒤 1947년 2월 최고의결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와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6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를 만들었으며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만들었다. 7월 10일 태극기를 폐지하고 인공기로 교체했다.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9월 9일 사회주의헌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이 날을 9.9절로 지정했다.

 

6.25 전쟁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분단이 되고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6.25 전쟁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후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6.25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조선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개성시(개풍군), 한강&임진강 하구, 옹진반도, 함박도, 연백군을 상실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속초시, 설악산, 화진포, 대붕호 (파로호), 철원평야, 양양 낙산사를 상실하게 되었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의 시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계열, 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했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했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해 혁명의 단계가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넘어왔음을 명확히 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시다"라는 내용에서 '서울'을 '혁명의 수도'인 '평양'으로 바꾸었다.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 명시
  •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의 확립
  • 주체사상의 헌법 규범화
  • 국가주석제 도입 및 권한 강화
  • 집단주의 강조(조직적체계)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사회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학자 김당택은 주체사상 채택을 비판하였다. 그는 본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

김일성은 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7월 8일 새벽2시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과정 주요 사건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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