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탄생 1기 두문자_미소 위 정 좌 칠 과 행 트

미소 위 정 좌 칠 과 행 트
1.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 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실패 : 찬탁만 참여(소련) vs 표현의 자유 모두 참여(미국)
46년 2월 :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46년 3월 : 민주개혁(토지개혁법 단행)
정의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소 점령군에 의하여 1946년에 설치되었던 공동위원회.
개설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 뒤 개최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에서는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미·영·중·소에 의해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 점령군 사이에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46∼1947년 사이에 1차의 공동회담과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내용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원조하기 위한 미소 양국 간의 공동위원회 설치를 규정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으로 알려진 미소 공동회담이 미국의 아놀드(Arnold, A.V.) 소장과 소련의 스티코프(Shtikov, T.E.) 중장이 각각 대표를 맡아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은 분단으로 인한 경제, 행정상의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난항을 겪다가 2월 5일 1개월 이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폐회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회담의 개시와 더불어 소련측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한국 내 협의대상자의 선정기준으로,
①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할 것
② 진실로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것
③ 장차 한국을 대 소련침략의 요새지로 만들려는 반소련 집단이나 인물이 아닐 것
등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측은 한국인들의 대부분이 모스크바협정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며, 따라서 신탁통치에 반대한다고 하여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결국 타협안이 제시되었고 4월 17일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이 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코뮤니케’이다.
그러나 그 뒤, 이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두고 발생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5월 6일 무기휴회를 선언하게 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자 우익진영의 이승만(李承晩)은 정읍발언을 통해 단정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여운형과 김규식 중심의 중간파는 미국의 지원 아래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6년 말 과도 입법의원이 성립하게 되자 미국은 더 이상 좌우합작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었고 좌우 정치세력의 불참 속에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1947년에 들어서 독립국가 수립 등 한국문제 처리가 지연되는 데 따른 내외적 압력이 높아지면서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위한 일련의 노력을 전개했다.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Hodge,J.R.) 중장과 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Chistiakov,I.) 대장 사이의 서신, 그리고 미국 국무장관 마샬(Marshall,G.C.)과 소련 외상 몰로토프(Molotov,V.M.) 사이의 서신을 통한 장기간의 교섭 끝에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공동위원회가 속개되자 국내 각 정치세력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좌익계와 중간파는 당연히 공동위원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한민당(韓民黨) 등 일부 우익 진영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문제는 임정수립 뒤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공위참가를 결정하였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김구의 한독당(韓獨黨)에서도 일부가 이탈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를 표명하여, 이승만과 김구의 추종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공위참가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6월 25일까지 공동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425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 수는 36개였다. 그러나 남북한 총 461개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는 7,000만 명이나 되어 당시 인구의 두 배나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예정대로 공동위원회의 미소대표들은 6월 25일 남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서울에서 가졌고, 또 평양에 가서 6월 30일부터 며칠간 본회의를 개최하고, 7월 1일 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합동회의를 가졌다.
이처럼 진전을 보이는 것 같았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8월에 들어서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 측의 ‘삼국 외상회의 결정고수’와 미국 측의 ‘의사표시의 자유’라는 제1차 공동위원회의 대립점으로 되돌아갔다.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 문제로 인하여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8월 중순 미군정이 불법 파괴활동을 자행한다는 이유로 남로당 및 좌익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면서 더욱 악화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련 측 대표 스티코프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과 공위업무를 지지해 온 남한의 좌익요인의 탄압은 공동위원회사업을 방해하는 처사”라고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측 대표 브라운(Brown,W.G.)은 “남한 내정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며 오히려 북한에 감금되어 있는 중요인사를 석방하라고 요구함으로써 양측의 대립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결국 1947년 여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실질적 결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전을 이룰 가능성이 없게 되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시켜 버렸다. 1947년 9월 17일 미국무장관 마샬은 2년 동안의 미소공동위원회의 노력이 성과가 없었음을 전제하고, “한국문제가 국제연합 총회에 상정됨에 따라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한국을 독립시키는 수단이 강구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국제연합 총회 소련 수석대표 비신스키(Vyshinskii,A.Y.)는 “한국문제의 국제연합 상정은 미소간의 협정을 직접 위반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마샬의 제안은 9월 21일 국제연합총회 운영위원회에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10월 18일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 제62차 본회의에서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소장은 국제연합에서 한국문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는 소련 대표단의 서울 철수를 발표하였고, 10월 21일 50여 명의 소련 대표단 일행이 평양으로 출발함으로써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5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46.5월)

정의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 등 조선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
내용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하여 당의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이었다. 1945년 8·15광복 이후 여러 정치세력들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빌딩을 접수하여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이를 위조지폐 발행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재정난으로 인하여 당 활동자금 조달방책을 모색하고 있던 중 조선정판사에 지폐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원인 박낙종 사장에게 그들의 계획을 알렸다.
박낙종은 같은 곳에서 근무하던 공산당원 김창선(金昌善)에게 당 재정부장 이관술(李觀述)과 당 중앙집행위원이며 해방일보사 사장인 권오직(權五稷)의 지령을 전하였다.
1945년 10월 20일서울시 소공동 74번지에 있는 근택빌딩 내 조선정판사 사장실에서 사장 박낙종, 서무과장 송언필(宋彦弼), 재무과장 박정상(朴鼎相), 기술과장 김창선, 평판기술공 정명환(鄭明煥), 창고계주임 박창근(朴昌根) 등이 비밀리에 모여 위조지폐를 인쇄, 공산당에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 7시 공장종업원들이 퇴근한 뒤 김창선이 평판과장으로 있을 때 절취, 보관하고 있던 100원권 원판(징크판) 등으로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위조하여 이관술에게 제공, 공산당의 활동비로 사용하게 하였다.
출처 불명의 위조지폐가 나돌아 경제를 혼란시키자 경찰은 수사에 착수하여 김창선이 지폐원판 1매를 서울오프셋인쇄소윤석현(尹奭鉉)에게 보관시킨 것을 탐지하고 범인체포에 나서 1946년 5월 4일과 5일 중부경찰서(당시 本町경찰서) 형사대가 이재원 등 일당 7명을 체포하였다.
이어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 7일 공산당원 16명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하였다. 공산당측에서는 5월 17일 성명을 발표하여 구속된 정판사 직원 14명을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7월 29일 서울지방법원 제14호 법정에서 양원일(梁元一)판사 주심, 최영환(崔榮煥)·김정렬(金貞烈) 두 판사의 배석으로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공판은 30여 회 열렸는데, 공산당은 사건을 담당한 판사 및 조재천(曺在千)·김홍섭(金洪燮) 두 담당검사들을 협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판 때 방청석은 물론 판검사석과 서기석을 점령하고 테러단까지 동원하여 공판정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특히, 제1회 공판 때에는 새벽부터 정동 일대에서 수백 명의 공산당원들이 「항쟁가」를 부르며 소란을 피워 기마대를 비롯한 수백 명의 경관이 동원되었다.
사태의 악화를 우려하여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수도청장 장택상(張澤相) 두 사람이 법정에 나타나자 방청석에 있던 공산당원들은 소란을 피워 법정은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또, 개정되자마자 10여 명에 달하는 좌익 변호사들의 재판 기피로 폐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28일의 선고공판에서 이관술·박낙종·송언필·김창선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이광범·박상근·정명환에게는 징역 15년, 김상선·홍계훈·김우용에게는 징역 10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당시 공산당에서는 『해방일보』등의 좌익신문을 통하여 이 사건을 전혀 허위날조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당시 우익지들이 주장하던 ‘조선공산당위폐사건’이라 하지 않고 ‘조선정판사사건’이라 칭한 것은 국민들의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5월 16일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는 정간되고 말았다.
또, 미군정 당국은 공산당의 불법행동에 강력한 조처를 취하게 되어 공산당은 지하로 잠입하여 파괴공작을 벌이게 되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관술 선생, 재심서 '무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6·25 전쟁 중 처형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이관술(李觀述) 선생에게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2023년 7월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지 약 2년 6개월만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현복 부장판사)는 12월 22일 위조통화 등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됐던 이관술 선생 사건에 대한 재심 사건의 선고 기일을 열고, 무죄를 선고했다(2023재고합12). 재심 대상 판결은 경성지방법원이 1946년 11월 28일 선고한 1946년형공제2336호 판결 중 이 선생에 대한 부분이다.
앞서 10월 13일 재판부는 미군정기 판결이 대한민국 법원의 사법 심사 대상(재심 대상)이 된다고 판단하고, 이 사건에 대해 재심 개시 결정했다. 미군정기에 선고된 재심 대상 판결은 대한민국 정부에 승계되어 법원의 사법심사 대상이 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이날 선고에 앞서 "험난한 과정이었을 텐데, 재심이 개시되고 본안심리를 거쳐 판결절차까지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신 청구인과 변호인측에 경의를 표하고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중립적 입장에서 절차진행에 적극 협조해 준 검찰측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다만 현재 마련된 사법체계 하의 소송절차에서 소송물인 개별 대상에 대한 심판권만을 행사할 수 있는 재판부 입장에서 판단하다 보니, 피고인에 대한 부분을 넘어선 사건 자체의 실체까지 선언할 수 없다는 점은 다소 아쉽더라도 양해해 주길 바란다"며 "이 판결이 망 이관술 선생과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희망한다"고 부연했다.
[사건 개요]
1902년생인 이관술 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다. 경성학생 독립운동에 나선 제자들을 보호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경성트로이카(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 지도부로 활동하다 옥고와 수배 생활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선생은 해방 후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돼 1946년 11월 미군정기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대전 골령골에서 처형됐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이 선생 등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가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까지 서울 소공동 근택빌딩에 있는 조선정판사에서 6회에 걸쳐 200만 원씩 총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사건이다. 미군정(美軍政)이 주도해 수사와 발표가 이뤄진 사건이다.
이 선생은 공동 피고인들과 공모해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까지 근택빌딩에서 행사를 목적으로 인쇄판을 이용해 매회 조선은행권 백원권 약 200만 원씩의 지폐를 각 위조해서 조선공산당 당비로 사용함으로써 통화를 위조 및 행사한 혐의로 위 공동피고인들에 이어 순차 기소됐다.
재심 청구인은 이 선생의 손녀로 형사소송법 제424조 제4호에서 정한 재심 청구권자(피고인의 직계친족)에 해당한다.
[쟁점]
검사가 재심공판절차에서 제출한 증거는 △1심 판결문 원문 및 번역문 △대법원 판결문 원문 및 번역문 △위폐사건 공판기록 원문 및 번역문 △녹취록이고, 그 중 실질적인 증거는 재심대상판결문과 재심대상판결 당시 공판기록이었다.
재심대상판결문이 유죄의 증거로 거시한 각 증거들과 이 사건의 수사·공판절차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재심대상판결이 적법절차에 따라 취득한 증거조사결과에 따라 행한 사실인정은 최소한 사법적(司法的)으로는 사실인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그러나, 재심대상판결이 채택해 유죄의 증거로 거시한 증거의 증거능력이나 증거판단에 명백히 오류가 있다고 밝혀진 경우라면 재심대상판결의 기재는 단순한 전문 또는 재전문증거로서의 증명력밖에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이 사건에선 재심대상판결문이 유죄의 증거로 거시한 각 증거들과 재심대상 사건의 수사·공판절차에 관해 특별한 문제가 있는지 여부 및 그 증거능력과 증거가치가 어떠한지가 쟁점이었다.
[법원 판단]
재판부는 현행 대한민국헌법과 형사소송법을 기초로 형성된 형사소송절차에서의 인신구속이나 증거법칙과 관련한 법리들을 재심개시당시 사건인 이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재심대상판결문이 유죄의 증거로 거시한 각 증거들 중 피고인이 공범임을 지목하는 것을 포함한 공동피고인들의 자백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어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음에도 재심대상판결문은 증거능력 없는 주요 증거들을 증거로 거시했고, 재심대상판결문이 유죄의 증거로 거시한 나머지 증거들은 그 내용도 확인되지 않는 전문 또는 재전문에 불과한 상태"라며 "재심대상판결문의 존재 및 그 기재만으로는 피고인이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공범들과 함께 지폐를 위조하고 행사했다는 행위를 했음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볼 수 없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미군정기 판결에 대한 재심사건의 심리에 있어,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상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사항에 관해 형성된 법리라면 그 법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고 △따라서 현재의 헌법과 형사소송법상 근본적이고 핵심 사항에 관한 것인 인신구속에 관한 법리와 증거법칙을 이 사건에 적용하면, 재심대상판결이 피고인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거시한 증거들 중 주요한 것은 증거능력이 없고 나머지 증거들은 증거가치가 희박하므로 △증거능력 없거나 증거가치 없는 증거들을 유죄의 판단 근거로 거시한 재심대상판결문의 존재 및 기재내용만으로는 유죄로 볼 수 없어 피고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재심대상판결 당시를 기준으로, 현재의 형사소송절차상 법리의 적용은 '가능'
재판부는 "재심대상판결 당시는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되기 전이고 미군정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의한 인신구속제도 및 현행 형사소송법과 같은 구체적인 증거법칙에 관한 규정들을 마련해 두지 못한 상태였다"면서도 "그러나 재심대상판결 당시에도 사법경찰관의 인신구속이 무제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만 허용되며, 형사소송절차에서 사용되는 유죄의 증거는 의회주의에 입각한 법령에 의한 적법절차에 따른 것이어야만 한다는 일반적인 법원칙 내지 법질서는 규범적으로 형성된 상태였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는 △미군정 개시 전의 형사절차에 관한 법령으로 조선형사령이 존재하고 있었고, 조선형사령은 사법경찰관의 유치기간을 명시적으로 10일로 한정하는 규정을 두었으며 해석상 갱신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던 점 △일제강점기에는 조선형사령의 유치기간과 별도로 예심제도를 통한 무제한 구류가 허용되긴 했으나 예심제도는 8·15 해방 직후 실무상 폐지된 상태였던 점 △그와 같은 상태에서 미군정이 개시되면서 군정법령 제21호 제1조는 조선형사령을 포함한 일제강점기의 모든 법령에 대해 미군정이 폐지하지 않는 한 효력이 유지됨을 선언했던 점 △해방 후 승전국의 점령군으로 한반도에서 역할을 담당한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는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 지역에 군정실시기관으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을 창설하고 군정(미군정)을 개시했는데, 미군정은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북 지역의 군정기관과 달리 의회주의와 권력분립 정신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향한 군정기관이었던 점을 들었다.
재심대상판결이 유죄의 거시한 증거들의 증거능력·증거가치 '부정'
재판부는 " 피고인과 공동피고인의 진술증거에 관해 보면, 이 부분 진술은 수사단계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해당 혐의에 가담한 사실을 부인했으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피고인에 대한 유죄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며 "또 피고인을 포함한 공동피고인들의 관여 내용을 포함한 공동피고인들의 자백 진술과 관련해서는, 수사에 관여한 사법경찰관들이 자행한 불법구금 등 의용 형법 제194조 위반 범행(특별공무원직권남용죄)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그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할 수 없거나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한다고 인정되므로 모두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재심대상판결에서 유죄의 증거로 거시된 제3자의 진술증거 및 검증조서, 압수물 등에 관련해서도 "해당 증거들은 이 사건에서 제출되지 못해 그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고, 그 자체로서는 전문 또는 재전문증거로서의 증명력만 있을 뿐, 유죄의 증거로서 독자적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심 청구인]
재심 신청인인 손옥희 씨는 입장문을 통해 "사건 발생 80년이 지나서 무죄 판결을 받아 기쁘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라며 "문민정부 이후 죄 없는 할아버지의 신원을 밝혀내야 한다고 30여 년을 전국으로 다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재심의 무죄 선고는 79년에 벌어진 사법 역사의 과오와 함께 해방 후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잡는 너무도 중요한 출발이 됐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없는 죄를 만들어 최대의 모욕과 박해를 하고 경제 파괴범으로 몰아붙여도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며 사건을 함께한 신윤경(사법연수원 42기) 법무법인 동화 변호사, 장경욱 변호사(29기), 재심을 맡은 재판부와 검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선고기일 방청석에선…]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자 방청석에 앉아 있었던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관계자들은 일제히 "만세" "축하합니다"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 손 씨도 방청석에 환한 미소를 보였다.
3. 이승만의 정읍 발언(46.6월)

정의
1946년 정읍에서 단독정부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승만의 발언.
내용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보도되었다.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의 대결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46년 6월 3일,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이승만은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다.
이 발언 이후,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그해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에 건너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촉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이고 돌아왔다.
그러나 소련붕괴 이후 공개된 소련정부의 기록, 특히 스탈린의 북한에 대한 지시자료를 검토한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의 북한 단독정부수립 계획은 이승만의 발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정읍 발언)과 한국 민주당의 성명
이승만, 정읍환영강연회에서 단정수립 필요성 주장(1946. 6. 3)
정읍환영강연회에 임석(臨席)한 이승만은 공위(共委) 재개의 가망이 없는 경우의 남조선임시 정부수립과 민족주의통일기관 설치에 관하여 주목되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5일, 「대표적 민족통일 기관을, 이승만 박사 정읍서 중대 강연」
소련이 거부하더라도 남한에 중앙 정부수립(1947년 12월 19일)
한민당 담화
한민당(한국민주당) 선전부에서는 19일 만약 소련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된 결과로 수립된 정부라도 정당한 통일중앙 정부가 될 것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삼천만 한인은 다 같이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북한에서도 남한과 동시에 유엔 한국 위원단 감시 하에 총선거가 실시되도록 협조하여 주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소련 등 6개국이 이미 유엔 한국 독립안의 보이콧을 선언하고 우크라이나가 위원단의 수락을 거부한 만큼 남북통일총선거 실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만일 이 경우에는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의 자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국제공약과 세계회의에 의거한 최후적인 방법을 채용하여 수립된 이 한국정부는 정당한 통일중앙 정부로 세계만방이 승인할 것이고 중경에 있는 중국정부가 중앙 정부인 것과 같이 이 한국정부만이 삼천만 전 한민족을 대표하여 통치권을 행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한국정부는 유엔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세계 공론에 의하여 불법 점거로 말미암아 침범된 영토주권의 회복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0일, 「소련이 거부하더라도 남한에 중앙정부수립, 한민당 담화」
李承晩, 井邑歡迎講演會에서 單政樹立 必要性 主張(1946. 6. 3)
井邑歡迎講演會에 임석한 李承晩은 共委再開의 가망이 없는 경우의 南朝鮮臨時政府樹立과 民族主義統一機關設置에 관하여 주목되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는 無期休會된 共委가 再開될 起色도 보이지 않으며 統一政府를 苦待하나 如意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南方만이라도 臨時政府 혹은 委員會 같은 것을 組織하여 38以北에서 蘇聯이 撤退하도록 世界公論에 呼訴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決心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民族統一機關設置에 대하여 지금까지 努力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民族의 대표적 統一機關을 歸京한 후 즉시 設置하게 되었으니 각 地方에 있어서도 中央의 指示에 順應하여 組織的으로 活動하여 주기 바란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5일, 「대표적 민족통일 기관을, 이승만 박사 정읍서 중대 강연」
蘇聯이 拒否하더라도 南韓에 中央政府樹立(1947년 12월 19일)
韓民黨談話
韓民黨宣傳部에서는 十九日 萬若 蘇聯의 보이코트로 因하여 南韓에서만 總選擧가 實施된 結果로 樹立된 政府라도 正當한 統一中央政府가 될 것을 强調하여 다음과 같은 談話를 發表하였다.
“三千萬 韓人은 다같이 南北統一政府가 樹立되기를 切望한다. 그러므로 北韓에서도 南韓과 동시에 유엔韓國委員團監視下에 總選擧가 實施되도록 協助하여 주기를 期待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蘇聯 등 六個國이 이미 유엔韓國獨立案의 보이콭을 宣言하고 우크라이나가 委員團의 受諾을 拒否한 것만큼 南北統一總選擧實施를 期待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만일 이 境遇에는 南韓에서 總選擧를 實施하여 韓國의 自主政府를 樹立하여야 한다. 國際公約과 世界會議에 依據한 最後的인 方法을 採用하여 樹立된 이 韓國政府는 正當한 統一中央政府로 世界萬邦이 承認할 것이고 重慶에 있는 中國政府가 中央政府이든것과 같이 이 韓國政府만이 三千萬 全韓民族을 代表하여 韓國의 統治權을 行使할 것이다. 그리고 이 韓國政府는 유엔의 一員으로 參加하여 世界 公論에 依하여 不法 占據로 말미암아 侵犯된 領土主權의 恢復을 遂行하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20일, 「소련이 거부하더라도 남한에 중앙정부수립, 한민당 담화
이 사료는 이승만(李承晩)과 한국민주당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두 개의 신문 기사이다. 특히 첫 번째 서울신문이 보도하고 있는 내용은 이승만의 ‘6·3 정읍 발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사료에서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와 단일정부 수립을 위해 진행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 진영 간의 이해 차이로 결렬된 이후 이루어졌다. ‘정읍 발언’은 처음으로 제기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주장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번째 사료는 1947년 11월 유엔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치를 것을 결정하였음에도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이 이에 반대하자 한국민주당이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진행할 것을 주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민당은 남북 통일 총선거 실시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해 자주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실제로 이후 유엔은 1948년 2월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를 진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일시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소련·영국·중국은 해방된 한반도의 처리 방침에 관해 이전부터 논의를 계속하고 있었고, 일련의 회담을 거쳐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 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개최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반도 신탁통치에 관하여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었고, 미국·소련·영국·중국 4개국이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며, 한반도에 단일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이를 위한 협의기구로서 미국과 소련 대표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를 합의하였다.
이러한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 소식은 국내에 큰 파장을 초래하였다. 처음 이 소식이 국내에 전파되었을 때, 좌익과 우익은 진영 구분 없이 신탁통치를 ‘독립 유예’로 인식하고 반대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초 좌익 단체들이 입장을 바꾸어 찬탁으로 선회하면서 ‘우익=반탁 vs 좌익=찬탁’ 구도가 만들어졌고,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은 좌익과 우익 간의 갈등 구도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신탁통치를 계기로 격화된 좌우 진영 갈등은 1946년을 거치면서 폭력을 포함한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영 간 정상적인 대화가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면서,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회의 진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개최되었지만, 양국은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할 한국의 정치사회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의정서」(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문)에 반대하는 단체는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더라도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하여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 갈등의 핵심은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누가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당시 우익 세력은 반탁을 주장한 반면, 좌익 세력은 찬탁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즉 「모스크바 의정서」에 동의하는 세력만 참여 가능하다면, 좌익만이 참여할 수 있지만, 미국은 좌익세력만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반탁의 입장을 갖는 정치사회단체더라도 협의 대상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이 갈등은 결국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 후 무기한 휴회되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 즉 ‘남한 단정 수립론’은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었다. 이승만은 4월부터 6월까지 삼남 지방을 순회하는 행보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반공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이루어진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실질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남 지역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여 우익·반공주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성급한 의견이라는 비판이 이루어졌고, 미군정 역시 ‘남한 단정 수립’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나 1947년에 들어서면서 냉전으로 인한 진영 간 대립이 전 세계적으로 거세졌고, 그 여파로 한반도 내 통일정부 수립의 가능성 또한 요원해졌다. 이에 따라 미 군정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사료인 1947년 12월 19일 한민당의 담화는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남한 지역의 정부 수립 입장을 ‘정읍 발언’ 때보다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결국 미국이 주장했던 유엔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는 진행되지 않았고, 38선 이남 지역과 이북 지역에 각각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더욱 공고화되었다.
4. 좌우합작위원회(46.7월)
여운형, 김규식
신탁통치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
정의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기구.
내용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국은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소극적이었던 중요한 이유는 남한 지역에서 우익 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약하다는 것이었다. 즉 임시정부 수립 시 미국 측의 이해를 대변해줄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켜 시간을 번 다음 우익 정치세력을 강화하고 좌익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 결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부터 미군정은 대대적인 좌익 탄압에 들어갔다.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진 것도 1946년 5월이었으며 박헌영을 비판하는 조봉암의 서신을 전격 공개한 것도 이무렵이었고 7월에는 3개 좌익계 신문에 정간조치를 내렸는가 하면 9월 초에는 박헌영과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러한 전방위적 탄압에 맞서 좌익진영에서는 이른바 ‘신전술’로 대응해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한편 1946년 5월경 국내 정치세력은 미군정의 분류 기준에 따르자면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세력, 김규식·원세훈 등의 중도 우파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좌파세력,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하는 극좌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익 탄압과 함께 우익 세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좌우합작이었다. 즉 좌익진영을 극좌와 중도 좌파로 구분하여 조선공산당과 같은 극좌 세력을 고립시키고 여운형 중심의 중도 좌파 진영을 견인하여 우익 주도의 정국 구도를 짜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좌우합작 추진과정에서 미 본국의 국무부와 미군정 간에는 일정한 시각차가 존재하였다. 미 국무부는 극좌와 함께 극우세력도 배제하고 중도 좌우 세력 중심으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정치세력을 구성하고자 한 것인 반면 미군정은 극좌 세력 고립화와 중도 좌파 견인을 통한 좌익진영 약화를 더욱 중시하고 있었다.
좌우합작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은 미군정 고문 버치(Bertsch, L.) 중위였다. 버치 중위의 지원으로 좌우합작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46년 5월 25일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우측의 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 좌측의 여운형(呂運亨)과 보좌역인 황진남(黃鎭南)이 만나게 되었다. 이후 5월 30일에 2차, 6월 14일에 3차의 회합을 거듭하였고, 또 합작운동 개시에 관한 하지(Hodge, J. R.) 중장의 성명이 나오면서 7월 19일에 좌우 대표가 결정되었다.
우측 대표는 주석 김규식, 대표 원세훈·김붕준(金朋濬)·안재홍(安在鴻)·최동오(崔東旿)이며, 좌측 대표는 주석 여운형, 대표 허헌(許憲)·정노식(鄭魯湜)·이강국(李康國)·성주식(成周寔)이고, 우측 비서는 영문 김진동(金鎭東), 국문 송남헌(宋南憲), 좌측비서는 영문 황진남(黃鎭南), 국문 김세용(金世鎔), 미국측 연락장교 버치 중위, 소련측 연락장교 미정(未定)이었다.
양측 대표는 정례회의를 위한 두 차례 예비회담(7월 22일·25일)을 거치면서 같은 해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하였다. 7월 26일 제1차 정례회담을 가졌지만 합작 원칙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즉 좌익 진영의 합작원칙 5개 조항과 우익 진영의 좌우합작 8원칙이 대립되었는데, 5원칙은
① 모스크바 삼국 외무장관 회의 결정 내용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운동 전개,
②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및 민주주의 기본과업 완수,
③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반동거두 배제와 ‘테러’ 박멸 그리고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
④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⑤ 군정 고문기관 및 입법기관 창설 반대
등이었다.
우익의 좌우합작 8원칙은
① 신탁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와 자주독립정신에 기하여 해결할 것,
② 정치·경제·교육의 모든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할 것,
③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이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할 것
등이었다.
좌우합작 원칙 문제로 대립하던 중 10월 4일 1주일 동안의 북조선 방문에서 돌아온 여운형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절충안인 7원칙을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①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③ 토지개혁 실시, 중요산업 국유화,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
④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 추진,
⑤ 남북의 정치운동자 석방 및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 제지 노력,
⑥ 입법기구의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 방안 모색,
⑦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 절대 보장
등이었다.
좌우합작 7원칙 작성 등으로 일정한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1946년 10월 항쟁이 본격화되는 정세 하에서 좌우합작 운동은 제대로 진행되기 힘들었다. 좌익 진영 최대의 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은 10월항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함과 동시에 인민당, 남조선신민당과의 3당합당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국이 10월항쟁과 좌익 3당합당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좌우합작 운동의 대중적 동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에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항쟁의 진상조사와 원인 규명 및 대책 마련을 위한 한미공동회의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하지 중장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좌우합작 운동이 10월항쟁 와중에 표류하고 있을 무렵 좌우합작 제6항의 합의를 근거로 미군정은 10월 12일 군정법령으로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에 관한 법령」을 발포하여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였다. 미군정은 좌우합작 운동의 성공보다 입법의원 설치를 위한 토대로 활용하고자 했고 여운형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법의원 설치를 강행했다. 결국 하지와 미군정은 입법의원 설치가 완료되자 좌우합작 운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 당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관망 내지 부정적 입장이었다. 김구와 임정세력은 반탁을 강조하면서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이승만 또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좌익 진영의 박헌영도 여운형에게 미국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등 부정적 입장이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좌우합작 운동에 우호적이지 않았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다. 여운형과 김규식 중심으로 중간파 세력이 결집하는 데에는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1946년 말 10월항쟁의 여파 속에 좌익 3당합당이 이루어지고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의 동력은 급속히 소진되기 시작했다. 1947년 들어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7월의 여운형 암살 등을 거치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고,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간파 세력은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함으로써 그 명맥을 잇고자 하였다.
5. 좌우 합작 위원회의 좌우 합작 7원칙(46.10월)
좌우 합작 위원회 합작 원칙(1946. 10. 7)
본 위원회의 목적(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을 촉성할 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 원칙을 아래와 같이 의논하여 정함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삼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 공동 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遞減買上)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시가지의 기지와 큰 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 노동 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 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와 민생 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가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 행동을 일절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단기 4279년(1946) 10월 7일
좌우 합작 위원회
『동아일보』, 1946년 10월 8일, 「합작의 7원칙 발표」
左右合作委員會 合作原則(1946. 10. 7)
本 委員會의 目的(民主主義臨時政府를 樹立하야 祖國의 完全獨立을 促成할 것)을 達成하기 위하야 基本原則을 下와 如히 議定함
1) 朝鮮의 民主獨立을 保障한 三相會議決定에 依하야 南北을 通한 左右合作으로 民主主義臨時政府를 樹立할것
2) 美, 蘇共同委員會 續開를 要請하는 共同聲明을 發할것
3) 土地改革에 있어 沒收, 有條件沒收, 遞減買上等으로 土地를 農民에게 無償으로 分與하며 市街地의 基地及大建物을 適正處理하며 重要産業을 國有化하며 社會勞動法令及政治的自由를 基本으로 地方自治制의 確立을 速히 實施하며 通貨及民生問題等等을 急速히 處理하야 民主主義建國課業完遂에 邁進할 것
4) 親日派 民族叛逆者를 處理할 條例를 本合作委員會에서 立法機構에 提案하야 立法機構로 하야금 審理決定하야 實施케할것
5) 南北을 通하야 現政權下에 檢擧된 政治運動者의 釋放에 努力하고 아울러 南北左右의 테로的行動을 一切卽時로 制止토록 努力할것
6) 立法機構에 있어서는 一切 其權能과 構成方法運營等에 關한 代案을 本 合作委員會에서 作成하여 積極的으로 實行을 企圖할 것
7) 全國的으로 言論 集會 結社 出版 交通 投票等 自由를 絶對保障되도록 努力할것
檀紀 四二七九年 十月 7日
左右合作 委 員 會
『동아일보』, 1946년 10월 8일, 「합작의 7원칙 발표」
이 사료는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좌우합작 7원칙’이다. 여기에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할 것,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요청, 토지개혁·중요산업 국유화, 친일파·민족반역자 처리 문제 등 정치·사회개혁의 요구가 담겨 있다.
좌우합작에 대한 시도는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 휴회 직후이다.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과 여운형(呂運亨, 1886~1947)·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 남한의 정치세력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우익과 좌익 내부의 온건파들을 합작의 형태로 세력을 얻도록 하여 미군정의 정치 기반으로 삼고, 이후 소련과의 협의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은 미소 양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우가 연합하는 길 만이 민족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하였다.
1946년 5월 25일 미군정 고문 버취(Leonard M. Bertsch, 1910~1976)의 주선으로 우익의 김규식·원세훈(元世勳, 1887~1959)과 좌측의 여운형·황진남(黃鎭南)이 회담을 개최하였다. 이후 5월 30일과 6월 14일 등에도 양측 인사들은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7월 19일 김규식과 여운형을 대표로 하는 좌우 대표가 결정되었고,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1946년 7월 25일 좌익 단체인 민족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전면 지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정권의 인민위원회 즉시 이양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5원칙’을 결정하였다. 우익 역시 7월 29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 발의로 임시정부 수립 후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등의 내용을 담은 ‘좌우합작 8원칙’을 제시하였다. 양측은 상대방의 원칙을 비난하며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고, 좌우합작위원회는 출발과 동시에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좌우합작에 반대하는 조선공산당을 좌우합작위원회로 복귀시키려는 여운형의 시도, 중도 좌우파만을 합작해서 남한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김규식의 구상, 좌우합작의 결과를 입법기구 수립으로 몰아가려는 미군정의 움직임이 결합하면서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들어가 9월 초 박헌영(朴憲永, 1900~1956)과 이강국(李康國, 1906~1956)에 대한 체포령, 좌익계 신문 정간 조치 등을 취하였다.
여운형과 김규식 등 좌우합작운동 참여자들은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을 조정하여 통일원칙인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하고, 10월 7일 공식 발표하였다. 하지만 많은 정치세력들은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된 직후 1항의 해석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합작에 참여했던 우익에서 내분이 발생하였다. 특히 한국민주당은 반탁의 태도를 재천명하고, 토지문제에 대해서 단호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좌우합작 7원칙 발표 후 침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10월 14일 좌익의 합작 반대를 비판하면서 약간의 불만족이 있긴 하지만 지지한다고 밝혔였다. 김구(金九, 1876~1949)는 좌우합작 지지노선을 명확히 표명하였지만, 좌우합작 7원칙에 서명하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다.
여운형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10월 15일 사회노동당을 발족하면서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반하여 민전은 10월 11일 의장단 회의를 거친 후 좌우합작 7원칙을 정식으로 반대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등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면서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우합작 운동은 제대로 추진되기 어려웠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제2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6.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김규식
행정권 이양
초대 행정장관 안재홍

정의
1946년 미군정이 정권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과도적 성격을 띤 입법기관.
내용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미군정 당국은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 온건한 좌우파의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알선하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다.
1946년 6월 29일 군정장관 러치(Lerche,A.L.)는 조선 인민이 요구하는 법령을 조선 인민의 손으로 제정하는 입법기관의 창설을 미군사령관 하지(Hodge,J.R.)에게 건의하여 그 해 7월 9일 하지의 동의를 얻어 8월 24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을 발표하게 하였다. 입법의원은 모스크바삼상회의협정에 의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당시 정황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고 국내 정국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때라, 군정연장설·통일정부지연설 등을 이유로 입법의원 창설에 대한 비난이 컸다. 이에 하지와 러치는 입법의원이 행정권 이양의 한 단계이며 인민이 정부 운영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한 표현으로서, 남조선 단일정부 수립이나 기타 아무런 다른 목적도 없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입법의원은 1946년 10월 21일부터 31일에 걸쳐 민선의원 45명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관선의원 45명은 하지가 임명하였다. 그 해 11월 4일 개원이 예정되었으나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선거의 부정과 친일인사의 등장 등이 지적되면서 서울과 강원도의 입법의원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재선거를 실시하여 개원이 1개월 연기되었다.
정식 개원일인 12월 12일을 하루 앞둔 11일의 예비회담에서 한민당 출신 의원들은 서울시와 강원도의 재선거에 불만을 표시하고 등원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법령에 규정한 회의구성의 정족수(전체의원의 4분의 3)가 미달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하지는 전체의원의 2분의 1로써 정족수를 구성하는 수정법안을 공포하여 이날 예비회의를 성립시켰고, 참석의원 53명 중 49표의 절대다수로 김규식이 의장에 당선되었으며, 1946년 12월 12일 57명의 의원이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한국 근대사상 최초의 대의정치기관이 탄생되었으나 이곳에서 제정한 법령은 군정장관의 동의를 얻어야 그 효력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회와는 그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행정부·사법부와 더불어 남조선과도정부로 하여금 삼권분립의 형태를 갖추게 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입법의원의 구성을 살펴보면 의장에 김규식, 부의장에 최동오(崔東旿)·윤기섭(尹琦燮),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는 법무사법에 백관수(白寬洙), 내무경찰에 원세훈(元世勳), 재정경제에 김도연(金度演), 산업노동에 박건웅(朴建雄), 외무국방에 황진남(黃鎭南), 문교후생에 황보익(黃保翌), 운수체신에 장연송(張連松), 청원징계에 김용모(金溶模) 등이었다.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서는 자격심사에 최명환(崔鳴煥), 임시헌법과 선거법기초작업에 김붕준(金朋濬), 행정조직법기초작업에 신익희(申翼熙), 식량·물가대책에 양제박(梁濟博), 적산대책(敵産對策)에 김호(金乎), 부일협력(附日協力)·민족반역자·전범(戰犯)·간상배(奸商輩)에 대한 특별법률조례기초에 정이형(鄭伊衡) 등이었다.
입법의원에서 통과시킨 중요 제정법령으로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제102호법령>의 제7조 개정, <하곡수집법>, <미성년자노동보호법>, <입법의원선거법>,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조선임시약헌 朝鮮臨時約憲>, <사찰령 폐지에 관한 법령>, <공창제도 등 폐지령>, <미곡수집령> 등이 있었다.
입법의원에서 처리한 것은 공포된 법률 11건, 심의한 법률 50여 건에 지나지 않았으며, 입법의원을 거치지 않고서 군정법령으로 공포된 것이 80건이나 된 것을 보면, 1948년 5월에 해산되기까지 약 1년 반 동안 앞으로 수립될 정부의 입법부로서의 준비단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7. 트루먼 독트린(47.3월)

트루먼 독트린.
상원 의장님, 하원 의장님, 그리고 미 연방의회 의원님들께: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상황의 심각함이 저를 상하 양원 합동 의회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이 나라의 외교정책과 안보가 걸려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심의 및 의결을 위해 제가 제시하고 싶은 현 상황의 한 양상은 바로 그리스와 터키에 관련된 사항입니다.
미국은 그리스 정부로부터 재정적·경제적 보조를 해달라는 긴급한 요청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 경제 사절단(the American Economic Mission)의 그리스에 관한 예비 보고와 주그리스 미 대사의 보고는 그리스가 자유 국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그리스 정부의 성명을 뒷받침합니다.
저는 미국인들과 연 의회가 그리스 정부의 호소를 무시하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략)…
지금 그리스의 생존은 공산주의자의 지도를 받는 수천 명의 무장한 이들의 테러 활동으로 위협받고 있으며, 그들은 곳곳에서, 특히 북쪽 국경 지역에서 정부 당국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파견한 위원회(A Commission appoin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가 그리스 북부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그리스와 알바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간의 국경 침범 혐의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는 이 상황에 대응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스군은 규모가 작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전 영토에 대한 정부의 권위를 회복하려면 물자와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가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민주국가가 되려면 지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미국은 그러한 지원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에 어느 정도의 구호 및 경제 원조 제공을 늘렸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략)…
우리는 유엔이 이 위기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매우 급박하여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한데, 유엔과 그 관계 기구들은 필요한 종류의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재정 및 기타 지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행정을 개선하는데 대하여 우리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에게 가능한 모든 재원의 사용을 우리가 감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1달러 한 장까지도 그리스를 자립시키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꽃피울 수 있는 경제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그리스의 인접국인 터키도 우리의 주목을 요합니다.
독립국이면서 경제적으로 건전한 국가로서 터키의 미래는 그리스의 미래 못지않게 전 세계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현재 터키가 처한 상황은 그리스의 그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터키는 그리스를 괴롭히는 재난과 같은 사태를 모면해왔습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영국이 터키에 물질적인 원조를 제공했습니다.
…(중략)…
그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터키가 필요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미국은 도움을 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저는 미국이 그리스와 터키에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 갖는 큰 영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이것을 여러분과 지금 논의하고자 합니다.
미국 외교정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국가들이 강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일본과의 전쟁에서 근본적인 쟁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의사와 삶의 방식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국가들로부터 승리를 거두어 왔습니다.
강압 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국가 발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은 유엔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고, 유엔은 그 회원국들의 지속적인 자유와 독립을 가능케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자유민들(free peoples)이 전체주의 체제를 강제하려는 공격적인 움직임에 맞서 그들의 자유로운 제도를 지키고 그들 국가를 보전하는 것을 돕지 않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직간접적인 공격으로 자유민들에게 강요된 전체주의 체제가 국제 평화의 기반을 잠식하고 그리하여 미국의 안보를 약화시킨다는 명백한 인식입니다.
…(중략)…
세계사의 현 시점에서 국가 거의 모두가 두 가지 삶의 방식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그 선택은 자유롭지 못할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첫 번째 삶의 방식은 다수의 뜻에 기반하며 자유로운 제도, 대의 정부, 자유 선거, 개인의 자유 보장, 종교와 표현의 자유,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로 구별됩니다.
두 번째 삶의 방식은 다수에게 강제로 부과되는 소수의 뜻에 기반합니다. 그 방식은 테러와 강압, 통제되는 신문과 라디오; 조작된 선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의존합니다.
저는 무장한 소수나 외부 압력의 예속 시도에 맞서 저항하는 자유민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자유 시민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일구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경제적 안정과 평화로운 정치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재정적 원조의 형태로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중략)…
잠깐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리스 민족의 생존과 통일이 보다 광범위한 맥락에서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가 무장한 소수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인접국인 터키에 미치는 영향은 즉각적이고 심각할 것입니다. 중동 전체에 혼란과 무질서가 퍼져나가는 일도 당연할 것입니다.
게다가, 독립국 그리스의 소멸은 전후 복구를 하면서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남길 것입니다.
너무나도 강력한 역경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 나라들이 그들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은 그 승리를 빼앗긴다면,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일 것입니다. 자유로운 제도의 붕괴와 독립의 상실은 그들뿐 아니라 전 세계에도 엄청난 재앙일 것입니다. 스스로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여러 이웃 나라들이 빠르게 좌절하고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스와 터키를 돕지 않는다면,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1947년 3월 12일, 미 트루먼 대통령 의회 하원 연설
Truman Doctrine.
Mr. President, Mr. Speaker, Members of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The gravity of the situation which confronts the world today necessitates my appearance before a joint session of the Congress. The foreign policy and the national security of this country are involved.
One aspect of the present situation, which I wish to present to you at this time for your consideration and decision, concerns Greece and Turkey.
The United States has received from the Greek Government an urgent appeal for financial and economic assistance. Preliminary reports from the American Economic Mission now in Greece and reports from the American Ambassador in Greece corroborate the statement of the Greek Government that assistance is imperative if Greece is to survive as a free nation.
I do not believe that the American people and the Congress wish to turn a deaf ear to the appeal of the Greek Government.
…(중략)…
The very existence of the Greek state is today threatened by the terrorist activities of several thousand armed men, led by Communists, who defy the government's authority at a number of points, particularly along the northern boundaries. A Commission appointed b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is at present investigating disturbed conditions in northern Greece and alleged border violations along the frontier between Greece on the one hand and Albania, Bulgaria, and Yugoslavia on the other.
Meanwhile, the Greek Government is unable to cope with the situation. The Greek army is small and poorly equipped. It needs supplies and equipment if it is to restore the authority of the government throughout Greek territory. Greece must have assistance if it is to become a self-supporting and self-respecting democracy.
The United States must supply that assistance. We have already extended to Greece certain types of relief and economic aid but these are inadequate.
…(중략)…
We have considered how the United Nations might assist in this crisis. But the situation is an urgent one requiring immediate action and the United Nations and its related organizations are not in a position to extend help of the kind that is required.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 Greek Government has asked for our aid in utilizing effectively the financial and other assistance we may give to Greece, and in improving its public administration. It is of the utmost importance that we supervise the use of any funds made available to Greece; in such a manner that each dollar spent will count toward making Greece self-supporting, and will help to build an economy in which a healthy democracy can flourish.
…(중략)…
Greece's neighbor, Turkey, also deserves our attention.
The future of Turkey as an independent and economically sound state is clearly no less important to the freedom-loving peoples of the world than the future of Greece. The circumstances in which Turkey finds itself today are considerably different from those of Greece. Turkey has been spared the disasters that have beset Greece. And during the war, the United States and Great Britain furnished Turkey with material aid.
…(중략)…
As in the case of Greece, if Turkey is to have the assistance it needs, the United States must supply it. We are the only country able to provide that help.
I am fully aware of the broad implications involved if the United States extends assistance to Greece and Turkey, and I shall discuss these implications with you at this time.
One of the primary objectives of the foreig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is the creation of conditions in which we and other nations will be able to work out a way of life free from coercion. This was a fundamental issue in the war with Germany and Japan. Our victory was won over countries which sought to impose their will, and their way of life, upon other nations.
To ensure the peaceful development of nations, free from coercion, the United States has taken a leading part in establishing the United Nations, The United Nations is designed to make possible lasting freedom and independence for all its members. We shall not realize our objectives, however, unless we are willing to help free peoples to maintain their free institutions and their national integrity against aggressive movements that seek to impose upon them totalitarian regimes. This is no more than a frank recognition that totalitarian regimes imposed on free peoples, by direct or indirect aggression, undermine the foundations of international peace and hence the security of the United States.
…(중략)…
At the present moment in world history nearly every nation must choose between alternative ways of life. The choice is too often not a free one.
One way of life is based upon the will of the majority, and is distinguished by free institutions, representative government, free elections, guarantees of individual liberty, freedom of speech and religion, and freedom from political oppression.
The second way of life is based upon the will of a minority forcibly imposed upon the majority. It relies upon terror and oppression, a controlled press and radio; fixed elections, and the suppression of personal freedoms.
I believe that it must be th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to support free peoples who are resisting attempted subjugation by armed minorities or by outside pressures.
I believe that we must assist free peoples to work out their own destinies in their own way.
I believe that our help should be primarily through economic and financial aid which is essential to economic stability and orderly political processes.
…(중략)…
It is necessary only to glance at a map to realize that the survival and integrity of the Greek nation are of grave importance in a much wider situation. If Greece should fall under the control of an armed minority, the effect upon its neighbor, Turkey, would be immediate and serious. Confusion and disorder might well spread throughout the entire Middle East.
Moreover, the disappearance of Greece as an independent state would have a profound effect upon those countries in Europe whose peoples are struggling against great difficulties to maintain their freedoms and their independence while they repair the damages of war.
It would be an unspeakable tragedy if these countries, which have struggled so long against overwhelming odds, should lose that victory for which they sacrificed so much. Collapse of free institutions and loss of independence would be disastrous not only for them but for the world. Discouragement and possibly failure would quickly be the lot of neighboring peoples striving to maintain their freedom and independence.
Should we fail to aid Greece and Turkey in this fateful hour, the effect will be far reaching to the West as well as to the East.
We must take immediate and resolute action.
…(후략)…
이 사료는 1947년 3월 12일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이 미 의회에서 발표한 연설로, 일명 ‘트루먼 독트린(the Truman Doctrin)’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트루먼은 그리스와 터키가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두 국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트루먼 독트린에 따르면, 그리스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를 받는 무장 단체의 위협을 받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극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그리스 및 터키의 위기와 붕괴는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중동 전체에 혼란과 무질서를 낳을 것이기에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에 경제적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양 진영의 대결, 즉 ‘냉전’의 등장을 상징하는 연설문이기도 하다. 트루먼은 모든 나라가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일종의 갈림길에 섰다는 인식을 제시한다. 그 두 가지란 ‘다수의 뜻에 기반한 자유로운 삶’과 ‘다수에게 강제로 부과되는 소수의 뜻에 기반한 삶’이며, 좀 더 직접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의 문제를 가리켰다. 트루먼이 말하는 ‘전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점차 미국과 갈등의 골이 깊어졌던 소련을 의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항하여, 공동의 적을 함께 격퇴하기 위하여 연합한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전후(戰後) 세계에 대해 다른 구상을 품었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전후 세계의 질서는 자유 무역과 열린 시장을 근간으로 했다. 미국은 전후에 독일의 재건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유럽 질서가 부활하기를 희망했다. 반면 소련은 전후 세계 체제의 재편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여러 나라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도왔다.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세워졌다. 이에 미국은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을 경계하고 소련과 선을 긋기 시작하였다.
양측의 잠복한 갈등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2년도 지나지 않아 터져 나왔다.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화 이후 인근에 위치한 그리스와 터키에서도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더 이상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스는 본래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영국은 기존의 그리스 정부를 지원하여 기존의 체제를 지켜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1947년 영국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내세워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중지할 것임을 미국에 통보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그리스와 터키를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의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이다.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 트루먼 행정부는 서구의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서구의 불안정한 상황이 공산주의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고 나아가 미국과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을까 우려하던 중이었다. 이러한 트루먼의 불안감은 그의 독트린에서도 드러난다. 트루먼 독트린은 그리스와 터키의 붕괴가 인근 지역의 도미노 현상을 초래할 것이기에, 양국의 위기는 해당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그는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하여 소련이 지중해와 중근동(the Middle and Near East : 서남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지역)에 대해 펼칠 팽창정책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역사에서 표방된 수많은 외교정책 가운데서도 ‘독트린’은 단순한 외교정책의 선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미국 외교의 굵직한 원칙과 주의(主義)의 표방으로서 미국 외교사 전체의 흐름에서 한 획을 긋는다. 앞 시대 지도자의 독트린은 후대 지도자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외교 원칙으로서 인식되었다. 트루먼 독트린 역시 냉전을 가속하는 결정적인 기점 중 하나가 되었고, 그것이 담고 있는 냉전적 사고와 반공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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