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합작 위원회_통일 정부를 위해 맞잡은 손

단체 사진의 오른쪽 끝을 보면 얼굴만 덩그러니 나와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김규식과 더불어 좌우 합작 위원회의 결성을 이끈 여운형이다. 여운형은 1947년 7월에 암살당하였기 때문에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오른쪽 끝에 얼굴 사진만 붙여 놓은 것이다. 김규식은 사진 아랫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앉아 있다. 좌우 합작 위원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신탁 통치 문제로 좌우 이념 대립이 심화하는 가운데,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남과 북에서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는 세력들이 힘을 키워 가고 있었다. 이때 여운형과 김규식 같은 중도파가 중심이 되어 좌우 합작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중도파를 강화해 통일 정부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남한에서 좌우 합작이 이루어지면 그다음에는 북한과 합작을 추진하려 하였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민족이 우선 힘을 합쳐 임시 정부를 구성하면, 신탁 통치 문제나 일제 잔재 청산 등 좌우 간의 갈등은 해결된다고 보았다.
미군정은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좌우 합작 운동을 지원하였다. 미군정이 이승만이나 김구와 같은 극우 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이 극좌 세력과 연대해 큰 세력을 이룰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중도파가 좌파 일부를 끌어들이면서 좌파를 분열시켜 세력을 약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좌우 합작 위원회는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리 등 여러 문제에서 갈등하였으나, 진통 끝에 1946년 10월 좌우 합작 7원칙에 합의하였다. 주요 내용으로 먼저
임시 정부를 수립한 후 신탁 통치 문제를 해결한다.
토지 개혁은 몰수, 유상 매수하여 농민에게는 무상으로 분배한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리는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입법 기구를 만들어서 처리한다.
등이 있었다. 해방 이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양측이 위와 같은 합의를 끌어낸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미군정은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이하 입법 의원)을 설치해 친미 세력의 기반을 마련하려 하였다. 미군정이 임명한 입법 의원 중 다수는 입법 기구를 좌우 합작 운동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간접 선거로 선출된 입법 의원은 거의 우파였고, 이들은 좌우 합작 운동보다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미군정도 입법 의원 설치가 완료되자 좌우 합작 운동에 별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이후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협조 관계는 끝났고,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여기에 1947년 7월 좌우 합작 위원회의 중심이었던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면서 좌우 합작 운동은 동력을 잃고 결국 막을 내렸다.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1. 정의
좌우 합작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기구.
2. 내용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국은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소극적이었던 중요한 이유는 남한 지역에서 우익 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약하다는 것이었다. 즉 임시정부 수립 시 미국 측의 이해를 대변해줄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켜 시간을 번 다음 우익 정치세력을 강화하고 좌익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 결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직후부터 미군정은 대대적인 좌익 탄압에 들어갔다.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진 것도 1946년 5월이었으며 박헌영을 비판하는 조봉암의 서신을 전격 공개한 것도 이무렵이었고 7월에는 3개 좌익계 신문에 정간조치를 내렸는가 하면 9월 초에는 박헌영과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러한 전방위적 탄압에 맞서 좌익진영에서는 이른바 ‘신전술’로 대응해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한편 1946년 5월경 국내 정치세력은 미군정의 분류 기준에 따르자면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는 극우세력, 김규식·원세훈 등의 중도 우파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좌파세력,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하는 극좌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익 탄압과 함께 우익 세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좌우합작이었다. 즉 좌익진영을 극좌와 중도 좌파로 구분하여 조선공산당과 같은 극좌 세력을 고립시키고 여운형 중심의 중도 좌파 진영을 견인하여 우익 주도의 정국 구도를 짜려고 한 것이었다. 물론 좌우합작 추진과정에서 미 본국의 국무부와 미군정 간에는 일정한 시각차가 존재하였다. 미 국무부는 극좌와 함께 극우세력도 배제하고 중도 좌우 세력 중심으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정치세력을 구성하고자 한 것인 반면 미군정은 극좌 세력 고립화와 중도 좌파 견인을 통한 좌익진영 약화를 더욱 중시하고 있었다.
좌우합작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은 미군정 고문 버치(Bertsch, L.) 중위였다. 버치 중위의 지원으로 좌우합작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46년 5월 25일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우측의 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 좌측의 여운형(呂運亨)과 보좌역인 황진남(黃鎭南)이 만나게 되었다. 이후 5월 30일에 2차, 6월 14일에 3차의 회합을 거듭하였고, 또 합작운동 개시에 관한 하지(Hodge, J. R.) 중장의 성명이 나오면서 7월 19일에 좌우 대표가 결정되었다.
우측 대표는 주석 김규식, 대표 원세훈·김붕준(金朋濬)·안재홍(安在鴻)·최동오(崔東旿)이며, 좌측 대표는 주석 여운형, 대표 허헌(許憲)·정노식(鄭魯湜)·이강국(李康國)·성주식(成周寔)이고, 우측 비서는 영문 김진동(金鎭東), 국문 송남헌(宋南憲), 좌측비서는 영문 황진남(黃鎭南), 국문 김세용(金世鎔), 미국측 연락장교 버치 중위, 소련측 연락장교 미정(未定)이었다.
양측 대표는 정례회의를 위한 두 차례 예비회담(7월 22일·25일)을 거치면서 같은 해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하였다. 7월 26일 제1차 정례회담을 가졌지만 합작 원칙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즉 좌익 진영의 합작원칙 5개 조항과 우익 진영의 좌우합작 8원칙이 대립되었는데, 5원칙은 ① 모스크바 삼국 외무장관 회의 결정 내용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운동 전개, ②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및 민주주의 기본과업 완수, ③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반동거두 배제와 ‘테러’ 박멸 그리고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 ④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⑤ 군정 고문기관 및 입법기관 창설 반대 등이었다.
우익의 좌우합작 8원칙은 ① 신탁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와 자주독립정신에 기하여 해결할 것, ② 정치·경제·교육의 모든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할 것, ③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이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할 것 등이었다.
좌우합작 원칙 문제로 대립하던 중 10월 4일 1주일 동안의 북조선 방문에서 돌아온 여운형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절충안인 7원칙을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①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③ 토지개혁 실시, 중요산업 국유화,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
④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 추진,
⑤ 남북의 정치운동자 석방 및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 제지 노력,
⑥ 입법기구의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 방안 모색,
⑦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 절대 보장,
등이었다.
좌우합작 7원칙 작성 등으로 일정한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1946년 10월 항쟁이 본격화되는 정세 하에서 좌우합작 운동은 제대로 진행되기 힘들었다. 좌익 진영 최대의 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은 10월항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함과 동시에 인민당, 남조선신민당과의 3당합당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국이 10월항쟁과 좌익 3당합당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좌우합작 운동의 대중적 동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에 좌우합작위원회는 10월항쟁의 진상조사와 원인 규명 및 대책 마련을 위한 한미공동회의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하지 중장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좌우합작 운동이 10월항쟁 와중에 표류하고 있을 무렵 좌우합작 제6항의 합의를 근거로 미군정은 10월 12일 군정법령으로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에 관한 법령」을 발포하여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였다. 미군정은 좌우합작 운동의 성공보다 입법의원 설치를 위한 토대로 활용하고자 했고 여운형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법의원 설치를 강행했다. 결국 하지와 미군정은 입법의원 설치가 완료되자 좌우합작 운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좌우합작 운동에 대해 당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관망 내지 부정적 입장이었다. 김구와 임정세력은 반탁을 강조하면서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이승만 또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좌익 진영의 박헌영도 여운형에게 미국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등 부정적 입장이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좌우합작 운동에 우호적이지 않았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다. 여운형과 김규식 중심으로 중간파 세력이 결집하는 데에는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1946년 말 10월항쟁의 여파 속에 좌익 3당합당이 이루어지고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의 동력은 급속히 소진되기 시작했다. 1947년 들어서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7월의 여운형 암살 등을 거치면서 좌우합작 운동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고,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간파 세력은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함으로써 그 명맥을 잇고자 하였다.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과 좌절_좌우합작위원회

1. 개요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는 1946년 7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 우 정치인들이 연합하여 만든 기구였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원회가 휴회 된 직후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46년 7월 25일 김규식, 여운형의 주도하에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중도 좌·중도 우·우파를 포괄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원회의 목적은 남북협상을 통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 좌우합작운동위원회는 좌우합작7원칙을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좌·우익세력의 반발, 미군정의 지원중단, 여운형의 암살 등으로 인해 동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1947년 12월 6일 해체되었다.
2. 좌우합작운동의 배경
1946년 3월 20일부터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이하 미소공위)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양측 협상은 지지부진하여 결국 5월 6일부터 무기한 휴회하기로 결정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이하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반대한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없다는 소련의 주장과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가장 먼저 ‘단정론’을 제기하였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통일정부 수립이 어렵기 때문에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라고 주장했다.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이하 한민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세력들은 이승만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분단이나 분권의 경험이 없던 한국인들에게 단정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미군정과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단정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좌익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소련과 협의하여 한국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반소반공’ 의식을 가진 이승만, 김구 등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군정은 좌우익을 연결할 수 있는 중도파 인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목하였다. 미군정을 이끄는 하지 중장의 좌우합작에 대해 제안을 받은 김규식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허락하였고. 여운형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미군정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미소공위를 다시 열어야 민족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좌우합작위원회의 조직
미군정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할 임무를 맡은 사람은 버치(Bertsch, L.) 중위였다. 1946년 5월 25일 버치의 주선으로 우측 대표 김규식, 원세훈(元世勳), 좌측 대표 여운형, 황진남(黃鎭南)이 회담하였다. 5월 30일에 2차 모임이, 6월 14일에 3차 모임이 이루어졌다. 미군정 하지 중장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19일 좌우합작을 위한 대표들이 결정되었다. 우익 대표는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金朋濬), 안재홍(安在鴻), 최동오(崔東旿)였으며 좌익 대표는 여운형, 허헌(許憲), 정노식(鄭魯湜), 이강국(李康國), 성주식(成周寔)이었다. 7월 22일, 25일에 정례회의를 위한 예비회담이 진행되었고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7월 25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 사상을 뛰어넘어 하나의 임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먼저 연대하는 합작운동을 전개하고, 이후 “서울과 평양 사이에 남북연합을 추구하여 최종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좌우합작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의 원칙을 결정하기 위한 정식회담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합작원칙을 정하는 것을 두고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 좌익에서 5원칙을 제기하였는데, 여기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항은 미국과 우익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상황도 좋지 않았다. 9월 총파업, 10월 항쟁 등이 일어나서 좌익과 우익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여운형을 제외한 좌익 인사들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운형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등을 설득하였으며, 좌익과 우익이 제기한 원칙을 조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4. 좌우합작 7원칙의 발표와 각 세력의 반응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되었다. ‘좌우합작7원칙’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셋째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여하고 중요한 산업은 국유화 하며 지방자치제를 확립한다. 넷째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한다. 다섯째 정치 운동자를 석방하고 남북·좌우의 테러 행동을 제지한다. 여섯째 입법기구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일곱 번째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의 자유를 보장한다.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되자 이것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으로 나누어졌다.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던 박헌영(朴憲永)은 ‘좌우합작7원칙’이 단정을 지향하는 입법기구 수립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민당은 유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은 “국가의 재정을 파탄 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미군정의 최고 자문기관이었던 남조선대한국민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약칭함)은 좌우합작7원칙을 지지했다. 김구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독당’)은 좌우합작의 성립이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고, “좌우합작7원칙은 민주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타당한 조건이다”라고 하며 전면 지지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의 효력이 의문시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미군정은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되자 10월 8일 성명을 발표하고 이것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0월 12일에는 법령 제118호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입법의원’)을 창설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입법의원의 과반수는 미군정이 지명한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며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한 인사들이 상당수 임명되었다. 나머지 과반수는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는데 거의 대부분 극우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당선되었다. 좌익세력은 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5. 좌우합작운동의 좌절과 좌우합작위원회의 해체
좌우합작7원칙이 발표된 이후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우파들은 좌우합작위원회 확대 강화했다. 그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지하는 정당·단체들을 조직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단체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미군정은 입법의원이 성립되었다는 것 자체에 주목하였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는 문제는 깊게 고려하지 않았다. 미군정의 의도는 좌우합작 운동의 성공보다는 좌익세력을 배제한 입법의원을 설치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입법의원이 설치되는 것에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결국 미군정과 하지 중장은 입법의원 설치가 완료되자 좌우합작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946년 11월, 북에서는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선출된 의원들이 선임한 인민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결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6월 23일 각 정당, 사회단체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으로 참여하겠다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6월 25일에는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양측 대포단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며, 7월 1일에는 평양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진행이 잘 되지 않았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1947년 3월 12일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유럽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부흥을 지원하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마련했다. 7월경에는 ‘대소봉쇄정책’을 추진하였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변화는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지 않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47년 9월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시켰다. 1947년 10월 18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 측 수석대표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은 국제연합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토론이 끝날 때까지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단할 것을 소련 측에 제안했다.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T. F. Shtikov)는 소련 대표단의 서울 철수를 발표하였고, 10월 21일 평양으로 떠났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중도파는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47년 12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되었다.
좌우합작운동
좌우합작운동(左右合作運動)은 1946년에 일제강점기 이후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조선의 좌우 세력이 합작하여 연대를 추진하였던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에는 중도파 세력 인사들이 주축으로 구성되어 전개되었다.
1.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좌,우익 세력 간의 대립이 상당히 격화되었다. 좌익세력에 박헌영이 신탁통치 찬성 입장을 발표하면서 우익진영은 박헌영을 성토한 뒤, 반탁운동을 주장하였고 김구·이승만 주도로 1945년 12월부터 신탁통치반대운동이 있었다. 12월 27일 김규식은 최초에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펼쳤지만, 신탁통치 전문을 입수, 읽어본 후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였다. 안재홍 역시 신탁통치 반대에서 수용으로 돌아섰다.
한민당 내에서는 송진우가 신탁통치에 신중론 입장을 보이다가, 1945년 12월 29일 10시 경교장에 참석한 뒤, 다음날 새벽에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에 암살되었다. 1946년 1월 8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4당(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지도자와 임정세력들이 모여 이문제에 합의했는데, 핵심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데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은 장래 수립 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해결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 '4당 코뮤니케'는 해방 정국 분단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좌우의 주요 정당이 유일하게 합의한 사항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지만, 3상회의 결정에 대해 좌우가 적절하게 합의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합의는 중경 임시정부세력들과 한민당 보수파들이 반발로 하루도 못 가 휴짓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신탁통치 찬반 논란속에 대한 입장차이는 좁혀지지 못하고 있었다.

2. 제1차 미소공위 결렬과 정읍 발언
그리고 곧이어 1946년 3월에 제1차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소련은 '모스크바 3상 회의 협정 지지세력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는 주장이었고,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에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는 주장 등으로 나뉘어 서로 입장 차이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1946년 6월에 이승만의 정읍 발언과 단독정부 수립 운동,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단독정부 수립 운동'에 대한 규탄 시위 등으로 한반도 내에서는 좌, 우익세력 간의 갈등이 더욱더 심화되어 갔었다.
3. 군정기 정치계파
해방 이후, 미군정 지역 내의 정치성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김성수 계열의 한민당 - 우파세력으로 신탁통치반대 입장,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향.
- 김구 계열 대한민국 임시정부계열 - 우파세력으로 신탁통치반대 입장, 남북 통일정부 수립 지향.
- 박헌영 계열의 조선 공산당등 - 좌파세력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의결 내용 찬성 입장. 남북 통일 정부 수립 지향.
-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등 중도파세력 - 신탁통치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5]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해 남북 통일임시정부 수립 지향.
4. 전개와 목표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중도파 세력들은 좌,우대립이 계속되어,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려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결국은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 김규식을 선출하게 된다.
이들 인물 구성 중에서 중도 우익 계열에는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최동오, 김붕준, 김약수 등 인사들이, 중도 좌익 계열에는 여운형, 허헌, 성주식, 장건상, 이영, 정노식, 정백, 이강국 등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파, 우파 세력 등, 사상을 넘어서 조선 내의 모든 조직이 하나로 통합되어, 중도적 사상의 통일 정부수립하는 것이었다.
1946년 7월에 수립된 좌우합작위원회는 좌파세력들이 가져온 5원칙과 우파세력들이 가져온 8원칙에 입각하여 서로 절충하고 논의하면서 3개월 후, 1946년 10월에 합작위원회에서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하게 되어 제정하게 된다. 좌우합작 7원칙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것.
-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것.
-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및 민생문제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것.
-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것.
-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것.
-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것.
-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 교통,투표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좌우합작 7원칙은 극도로 분열되어가던 해방이후의 혼란한 정치상황속에서 좌,우익세력이 한걸음 양보해서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기에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것에 큰의의를 둔다. 당시, 좌우합작 7원칙 내용중 '제3조 토지개혁'과 '제4조 친일파 청산'이 가장 주요한 내용사안 이었는데, 이 원칙에 대해 일부세력은 강하게 반발하여 좌우합작운동에 비난하기도 했었다. 한국민주당은 토지 개혁의 방법(유상 몰수, 무상 분배)에서 무상 분배가 재정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토지 개혁의 방법에서 유상 몰수가 지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 입법 기구의 결정이 미군정의 거부권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좌우합작 7원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군정이 좌우합작에 간접적인 지원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군정이 주선한 우익계열만의 정치개편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군정은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중도파 정치인사 여운형과 김규식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미군정의 개입과 간접적 지원에 탄력을 받아 1946년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미군정의 과도 입법기구를 말한다.)이 구성되어 제정되었다. 이렇게 되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좌우세력을 결집시키는 좌우합작이 전면에 급부상하게 된다.
5. 당시 좌우익 세력의 반응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신한민족당은 공식적으로 지지를 나타냈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찬성을 하는등 좌우합작에 대해 반대가 거세었기 때문에 한독당 당수 김구의 입장은 적극 참여하기보다는 관망하는 자세로 애매하였고,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조소앙은 '신탁통치안에 반탁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좌우합작에 다소 비판적이었으며, 신익희는 반대를 나타냈었다. 한독당이 좌우합작에 소극적 입장을 보이자, 당시 친일파 처리문제에 대한 한독당의 입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승만 역시도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으며, 친일파세력과 김성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의 한민당도 좌우합작운동은 한민당의 몰락을 의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 태도를 나타냈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조선공산당 탄압을 본격화하자, 조선공산당은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등으로 맞대응하면서 미군정과 정면충돌하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남로당과 한민당등 좌,우파 세력들은 반대,불참을 하였다.
6. 당시 여론의 반응
해방정국 군정기 시기 김규식과 여운형이 주장한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은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었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8000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치형태에 대해서는 대중정치(대의정치) 85%, 계급독재 3%, 체제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등의 응답을 보였다. 이에 대해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기회주의자는 극좌와 극우에 많았”으며 “김규식·안재홍·여운형·조소앙 등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고 분석했다
7. 좌우합작위원회의 결속
1947년 이 무렵에는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진보적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미군정기 조선의 상황도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중도파 정치세력은 수차례 테러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47년 5월 21일에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미소공위 개최 이전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던 우익진영 정당,단체들은 미소공위에 협력할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우익진영 내부에서 한민당 일부세력은 미소공위에 무조건 참가할 것을 주장하여 다수의 당 중진들이 탈당하는 사태를 빚게 되었다.
한편, 중간 진영인 좌우합작위원회는 5월 23일 김규식 명의로 '합작 7원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우리의 최대목표인 공위가 재개 되었으므로 "최속기간 내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성취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좌익과 중간진영은 물론 대부분의 우익진영도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서 미소공위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통치안 문제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 후에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조건부 입장하에 미소공위참가를 결정하게 된다. 좌우합작위원회는 미소공위의 성공적 추진에 의하여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중간파 세력의 보다 광범위하게 결집하게 된다.

8. 좌우합작운동의 실패와 해체
당시 미군정은 조선 공산당 등의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좌우합작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후 냉전 체제가 심화되자 미군정은 1947년 3월에 좌우합작운동 지원약속을 철회하고 우익 세력을 옹호하게 된다. 미국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지원은 단체의 결성 이후 사실상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좌우 합작 운동은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통일임시정부의 수립을 지향하면서 한동안 활기를 띠었으나, 좌우의 대립이 더욱 극심해지면서 중도파 인사들은 수 차례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으로부터 신변의 테러와 위협을 당하게 된다. 이어서 7월 19일에는 좌우합작 운동의 구심점 역할이자, 중도좌파세력들의 중심 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합작운동은 이후 구심점을 잃어가게 되어버리고, 곧이어 1947년 10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어버리면서 미국이 결국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하게 된다. 1947년 12월에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해체되어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로써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어 실패로 끝나게되고, 한반도는 남한내에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그 취지는 김규식 등을 통해 남북협상으로 이어진다.
좌우 합작 위원회의 좌우 합작 7원칙
좌우 합작 위원회 합작 원칙(1946. 10. 7)
본 위원회의 목적(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을 촉성할 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 원칙을 아래와 같이 의논하여 정함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삼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 공동 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서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遞減買上)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시가지의 기지와 큰 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 노동 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 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와 민생 문제 등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가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 행동을 일절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단기 4279년(1946) 10월 7일
좌우 합작 위원회
좌우합작위원회 합작원칙 원문左右合作委員會 合作原則(1946. 10. 7)
本 委員會의 目的(民主主義臨時政府를 樹立하야 祖國의 完全獨立을 促成할 것)을 達成하기 위하야 基本原則을 下와 如히 議定함
1) 朝鮮의 民主獨立을 保障한 三相會議決定에 依하야 南北을 通한 左右合作으로 民主主義臨時政府를 樹立할것
2) 美, 蘇共同委員會 續開를 要請하는 共同聲明을 發할것
3) 土地改革에 있어 沒收, 有條件沒收, 遞減買上等으로 土地를 農民에게 無償으로 分與하며 市街地의 基地及大建物을 適正處理하며 重要産業을 國有化하며 社會勞動法令及政治的自由를 基本으로 地方自治制의 確立을 速히 實施하며 通貨及民生問題等等을 急速히 處理하야 民主主義建國課業完遂에 邁進할 것
4) 親日派 民族叛逆者를 處理할 條例를 本合作委員會에서 立法機構에 提案하야 立法機構로 하야금 審理決定하야 實施케할것
5) 南北을 通하야 現政權下에 檢擧된 政治運動者의 釋放에 努力하고 아울러 南北左右의 테로的行動을 一切卽時로 制止토록 努力할것
6) 立法機構에 있어서는 一切 其權能과 構成方法運營等에 關한 代案을 本 合作委員會에서 作成하여 積極的으로 實行을 企圖할 것
7) 全國的으로 言論 集會 結社 出版 交通 投票等 自由를 絶對保障되도록 努力할것
檀紀 四二七九年 十月 7日
左右合作 委 員 會
『동아일보』, 1946년 10월 8일, 「합작의 7원칙 발표
해설
이 사료는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좌우합작 7원칙’이다. 여기에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할 것,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요청, 토지개혁·중요산업 국유화, 친일파·민족반역자 처리 문제 등 정치·사회개혁의 요구가 담겨 있다.
좌우합작에 대한 시도는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 휴회 직후이다.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과 여운형(呂運亨, 1886~1947)·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등 남한의 정치세력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우익과 좌익 내부의 온건파들을 합작의 형태로 세력을 얻도록 하여 미군정의 정치 기반으로 삼고, 이후 소련과의 협의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은 미소 양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우가 연합하는 길 만이 민족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하였다.
1946년 5월 25일 미군정 고문 버취(Leonard M. Bertsch, 1910~1976)의 주선으로 우익의 김규식·원세훈(元世勳, 1887~1959)과 좌측의 여운형·황진남(黃鎭南)이 회담을 개최하였다. 이후 5월 30일과 6월 14일 등에도 양측 인사들은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7월 19일 김규식과 여운형을 대표로 하는 좌우 대표가 결정되었고,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1946년 7월 25일 좌익 단체인 민족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전면 지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정권의 인민위원회 즉시 이양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5원칙’을 결정하였다. 우익 역시 7월 29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 발의로 임시정부 수립 후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등의 내용을 담은 ‘좌우합작 8원칙’을 제시하였다. 양측은 상대방의 원칙을 비난하며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고, 좌우합작위원회는 출발과 동시에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좌우합작에 반대하는 조선공산당을 좌우합작위원회로 복귀시키려는 여운형의 시도, 중도 좌우파만을 합작해서 남한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김규식의 구상, 좌우합작의 결과를 입법기구 수립으로 몰아가려는 미군정의 움직임이 결합하면서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좌익 탄압에 들어가 9월 초 박헌영(朴憲永, 1900~1956)과 이강국(李康國, 1906~1956)에 대한 체포령, 좌익계 신문 정간 조치 등을 취하였다.
여운형과 김규식 등 좌우합작운동 참여자들은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을 조정하여 통일원칙인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하고, 10월 7일 공식 발표하였다. 하지만 많은 정치세력들은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된 직후 1항의 해석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합작에 참여했던 우익에서 내분이 발생하였다. 특히 한국민주당은 반탁의 태도를 재천명하고, 토지문제에 대해서 단호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좌우합작 7원칙 발표 후 침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10월 14일 좌익의 합작 반대를 비판하면서 약간의 불만족이 있긴 하지만 지지한다고 밝혔였다. 김구(金九, 1876~1949)는 좌우합작 지지노선을 명확히 표명하였지만, 좌우합작 7원칙에 서명하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다.
여운형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10월 15일 사회노동당을 발족하면서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반하여 민전은 10월 11일 의장단 회의를 거친 후 좌우합작 7원칙을 정식으로 반대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등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 설치에 집중하면서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우합작 운동은 제대로 추진되기 어려웠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제2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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