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45.8.15.) 두문자_건 준 인 공 맥 포 정 난 모 3

1.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45.8.15.)
2. 조선인민공화국(45.9.6.)
3. 맥아더 포고문(45.9.9.)
4. 정당의 난립
5. 모스크바 3상 회담(45.12.)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정의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약칭 ‘건준(建準)’.
내용
1945년 8월 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유력해지자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일어날지 모를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민족지도자와 협력관계를 맺고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隆作]를 앞세워 협상대상자를 찾았다.
민족지도자 중에서 여운형(呂運亨)은 총독부 제안을 받아들이고, 8월 15일 오전 8시 엔도와 만나 일본측이 요구한 자주적 국내치안유지와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고,
① 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 3개월간의 식량 보급,
③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④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간섭 배제,
⑤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 것에 대한 간섭 배제
등을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하였다.
여운형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시켰고, 8월 16일 오후 1시 서울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은 한·일 두 민족의 자주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하면서, 경위대 편성을 넘어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하여 질서를 도모할 것과, 식량정책을 넘어 경제상 통화와 물가에 대한 신정책을 수립하고 근본적인 정치운영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이들은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준비사업 선전공작과 치안활동을 개시하였다.
8월 17일에는 건준의 중앙조직이 발표되었는데,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 안재홍, 그 외 5개부서로 총무부장 최근우(崔謹愚), 재무부장 이규갑(李奎甲), 조직부장 정백(鄭栢), 선전부장 조동호(趙東祜), 무경부장(武警部長) 권태석(權泰錫)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8월 18일에는 여운형이 제1차 위원회를 개최, 건준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하였다. 자치기관을 신속하게 조직하고, 조직이 완료되면 건준에게 연락하며, 건국준위원회 공작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즉,
① 어느 기간까지 자발적으로 자치수단을 강구하여야 한다.
② 자치수단은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여야 된다.
③ 자치수단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어야 한다.
④ 모든 공사기관의 기능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속인원은 현 직장을 엄수하여야 한다.
⑤ 각 원은 각기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공작에 협력하여야 한다
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민족주의계열 일부 및 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 건준의 조직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8월 18일 김병로, 백관수, 이인 등은 민족주의계열과 건준 합작을 위해 여운형 안재홍과 담판을 제의하였고, 이들 간에 19일 ‘전국유지자대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그날 밤 여운형이 해방 후 최초의 테러를 당하면서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또한 테러로 여운형이 공석인 상황에서 21일 고경흠(高景欽), 윤형식, 정백 등 소위 장안파 공산주의 계열에서 상의 없이 건준 경성지회를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8월 22일에 건준 2차 중앙조직이 구성되었다. 여운형, 최근우, 이동화(李東華), 이병학(李丙學), 이여성(李如星), 이상도(李相燾), 장권(張權), 권태석, 권태휘(權泰彙), 김약수(金若水), 박문규(朴文奎), 이강국(李康國), 최용달(崔容達), 이광(李光), 정의식, 정화준(鄭和濬), 김교영, 홍기문(洪起文), 고경흠, 윤행식, 최성환, 최익한(崔益翰), 정백, 안재홍, 양재하(梁在廈), 이승복(李昇馥), 이의식, 유석현(劉錫鉉), 이규갑, 김준연(金俊淵), 함상훈(咸尙勳), 이용설(李容卨), 정순용 등 총 33명으로 확대되었다.
중앙조직이 발표된 다음 날부터 좌우협상 및 건준 확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8월 23일 선전부장 권태석은 백관수를 만나 좌우를 아우른 건준 확대위원을 논의하였고, 여운형은 건준이 신국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행위라는 민족주의계열의 비판을 겨냥해 건준은 신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준비와 치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25일에 권태석은 다시 김병로, 백관수, 이인, 박명환, 김용무, 박찬희, 김약수 등과 만나 확대위원 명단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위원장 직무대리인 안재홍이 직권으로 5명의 우익인사를 추가하고 건준 내부에서 좌익적인 소장파 백여명을 추가하는 등의 문제로 좌우간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러한 중앙집행부 내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8월말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위해 지역 조직을 구성하였다. 8월 26일 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全朝鮮職域自治本部)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무경부 산하에는 장근(張槿)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사무국장에 정상윤(丁相允), 총무부장에 송병무(宋秉武) 등이 17개 부서를 맡게 되었다.
9월 2일 서기국을 통해 발표된 강령을 보면 ①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개 항을 내세웠다.
그러나 건준과 민족주의계열의 협상이 결렬된 상황에서 8월 31일 여운형은 사직을 선언하고, 안재홍도 건준에 사표를 제출했다.
건준은 9월 1일 사회주의계열 인사 중심으로 135명의 확대위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9월 4일에는 확대위원회가 열렸으나 135명 중 일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임수리 건을 18대 17로 부결시키고,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가하였다. 한 증언에 따르면 같은 날 허헌, 박헌영, 여운형, 정백 등 4인이 회동하여 인민공화국 수립문제와 구성을 협의했다. 이틀 후인 9월 6일 위원회는 600여 명으로 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서울 경기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헌법기초위원을 겸직하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李承晩)·여운영·허헌·김규식(金奎植)·김구(金九)·김성수·김병로·안재홍·이강국·신익희(申翼熙)·조만식(曺晩植) 등 55명을, 고문에 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김창숙(金昌淑)·이시영(李始榮) 등 12명을 각각 선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7일 해체되었고, 9월 11일,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 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으며, 9월 14일 인공중앙위원회에서 인공의 정부 부서 및 정강, 시정 방침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운형은 9월 7일 2차 테러를 당하였고, 상해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김성수·장덕수 등은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이들 조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은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2.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정의
1945년 8·15 해방 직후 조직되었던 단체.
내용
여운형을 중심으로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6일 전국국민대표자대회에서 그 성립을 결의하였다. 곧 미군이 진주하여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돕겠다는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의 포고문이 9월 2일 비행기로 서울시 일원에 발포되었고, 9월 6일에는 미군선발대가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여 조선호텔에서 일제측과 예비교섭을 시작하던 그 날 저녁,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급히 전국인민대표자대회의 이름으로 건국을 선포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조직의 이름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함과 동시에 중앙의결기관으로,55명으로 구성된 중앙인민위원과 20여 명의 후보위원,12명의 고문을 선출하였다. 55명의 중앙인민위원의 인적 구성은 민족주의자 9명, 여운형계의 중도좌파가 10명 내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공산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박헌영계의 재건파공산당계열이었다.
1945년 9월 14일자로 중앙인민위원회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결정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함과 동시에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외세와 반민주주의적·반동적인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정강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하고”,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고,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충실을 기하며”, “노동자·농민과 기타 일체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과 “세계 민주주의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꾀한다”는 것이었으며, 시정방침은 정강 실현을 위한 27개 항목의 정책으로, 이상주의적인 고도의 문화복지국가 건설을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중앙인민위원회 각 부서는,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대리 조동호·김계림, 외무부장 김규식, 대리 최근우·강진, 재무부장 조만식, 대리 박문규·강병도, 군사부장 김원봉, 대리 김세용·장기욱, 경제부장 하필원, 대리 김형선·정태식, 농림부장 강기덕, 대리 유축운·이광, 보건부장 이만규, 대리 이정윤·김점권, 교통부장 홍남표, 대리 이순근·정종근, 보안부장 최용달, 대리 무정(武亭)·이기석, 사법부장 김병로, 대리 이승엽·정진태, 문교부장 김성수, 대리 김태준·김기전, 선전부장 이관술, 대리 이여성·서중석, 체신부장 신익희, 대리 김철수·조두원, 노동부장 이주상, 대리 김상혁·이순금, 서기장 이강국, 대리 최성환, 법제국장 최익한, 대리 김용암, 기획부장 정백, 대리 안기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연합군의 진주가 임박한 상황에서 급박하게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송진우 등 민족주의자들은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귀국을 촉구하기 위하여 9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회를 조직하였으며, 한국민주당의 창당을 서둘렀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지를 천명하기 위하여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송진우·김성수·서상일·김준연·장택상 등 330명의 발기인 이름으로 발족하였다. 9월 8일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여 명의 이름으로 된 조선인민공화국타도 성명서가 발표되었으며, 9월 16일에는 한국민주당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로써,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계열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팽팽한 대립이 나타났으며, 10월 10일 미군정은 “남한에는 미군정만 있을 뿐 다른 정부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정부를 참칭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였다.
또한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하여, 10월 23일 정당 대표들을 망라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킴으로써 조선인민공화국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표명하였으며, 11월 7일에는 방송을 통하여 정식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 취임을 거절하였다.
11월 12일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발족시켰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를 정당으로 개편하기 위해 미군정청의 집회 허가를 얻어 11월 20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다. 700여 명이 모인 이 대회는 중앙인민위원회의 보강을 위하여 여운형·허헌·최용달·이승엽·홍남표·이기석·이여성·조두원·안기성·홍덕유·이상훈·정백 등 12명으로 구성된 전형위원만을 선출하였다.
12월 12일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은 방송을 통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이 정부행세를 하는 것은 비합법적인 일이므로 이를 단속할 것을 경고하였고, 이후 그 세력은 1946년 2월에 발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하였다.
3. 맥아더 포고문(45.9.9.)
- 현정부 유지령
- 모든 정부 부정
- 조선총독부 => 미군정
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
맥아더 사령부 포고 제1호(1945. 9. 9)
조선 인민에게 고함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조선 인민에 대한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문 제1호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일본 제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아래 여러 국가 군대 간에 오래 행해져 왔던 무력 투쟁을 끝나게 하였다.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고 또 그를 대표하여 일본 제국 정부의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그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따라서 조선 인민은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원조 협력하여야 한다. 본관(本官)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의 권한으로써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서 시행된다.
제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들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혹은 무급 직원과 고용인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적인 기능과 의무를 수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하여야 한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제4조 주민의 재산소유권은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업무에 종사하라.
제5조 군정 기간에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또는 정의가 명확하지 않거나 같지 않을 때에는 영어 원문을 기본으로 한다.
제6조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될 것이며 주민이 이행해야 될 사항을 명기할 것이다.
1945년 9월 7일, 요코하마에서 작성
미육군 태평양방면 육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Proclamation No.1 by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To the People of Korea
As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 I do hereby proclaim as follows:
By the terms of the Instrument of Surrender, signe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Emperor of Japan and the Japanese Government an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Japanese 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the victorious military forces of my command will today occupy the territory of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Having in mind the long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nd the determination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the Korean people are assured that the purpose of the occupation is to enforce the Instrument of Surrender and to protect them in their personal and religious rights. In giving effect to these purposes, your active aid and compliance are required.
By virtue of the authority vested in me as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 I hereby establish military control over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and the inhabitants thereof, and announce the following conditions of the occupation:
ARTICLE Ⅰ
All powers of Government over the territory of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and the people thereof will be for the present exercised under my authority.
ARTICLE II
Until further orders, all governmental, public and honorary functionaries and employees, as well as all officials and employees, paid or voluntary, of all public utilities and services, including public welfare and public health, and all other persons engaged in essential services, shall continue to perform their usual functions and duties, and shall preserve and safeguard all records and property.
ARTICLE Ⅲ
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peace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
ARTICLE Ⅳ
Your property rights will be respected. You will pursue your normal occupations, except as I shall otherwise order.
ARTICLE V
For all purposes during the military control, English will be the official language. In event of any ambiguity or diversity of interpretation or definition between any English and Korean or Japanese text, the English text shall prevail.
ARTICLE VI
Further proclamations, ordinances, regulations, notices, directives and enactments will be issued by me or under my authority, and will specify what is required of you.
Given under my hand at Yokohama
this seventh day of September 1945
Douglas MacArthur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
「Proclamation No. 1 : To the people of Korea」, 7 September 1945, G.H.Q. U.S. Army Forces, Pacific, Office of the Commanding General, Yokohama, Japan
해설
이 자료는 1945년 9월 9일 태평양에 주둔한 미 육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한반도의 38도 이남 지역의 인민을 상대로 발표한 문서다. 해당 포고문은 미군이 4회에 걸쳐 발표한 포고(布告, Proclamation) 중 하나로, 미군정의 지위와 조선 인민의 의무를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원문자료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해당 포고문 「맥아더 포고문 제1호」의 제1조와 제3조는 미군정이 38도선 이남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것임을 알리고, 미군정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제2조와 제4조는 당분간 일제 치하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보호하고, 생산활동을 계속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제5조는 영어를 공용어로 설정한 조항으로, 미군정이 원활한 통치를 위해 명시한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제6조는 미군정이 필요한 경우에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 등을 공포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그 스스로 잠정적인 입법권을 보유했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미국이 점령군의 입장에서 한반도 이남의 지역과 인민을 통치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는 미군정을 통치 주체로 선포하는 제1조와 제6조는 물론, 미군정에 대한 반발을 허용치 않는 조항(제3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식민지기 사유재산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점(제4조)에서, 미군정이 한국인이 바라는 식민 잔재 청산보다는 당장 사회안정을 확보하는 것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생업을 그대로 이어가라는 주문(제2조, 제4조)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이 곧 ‘독립’을 의미하지 않았다. 1943년 카이로 회담 이래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한국의 독립에 합의했으나, 이는 연합국이 판단할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이뤄진다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군은 해방된 한반도를 주권(主權)은 물론, 주권을 행사할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간주했다. 이에 미국은 1945년 9월 1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미군정청)을 설치하고, 미군정으로 하여금 38도 이남의 주권 정부로서 권력을 행사하게 했다.
미군정이 주권 정부를 자임하는 가운데 군정청에서 내놓는 포고문, 군정법령, 행정명령, 그리고 군정청 부령 및 지령 등은 곧 남한 사회를 통치하는 법이었다. 특히 미군이 진주한 시점에 즈음하여 발표된 포고문은 점령 정책의 골자를 밝히는 최상위 규범이었다. 「맥아더 포고문 제1호」는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 지역에 상륙하고 바로 다음 날 서울에 진주하면서 발표된 포고문으로 중요하게 참고된다. 이 문건과 더불어 앞서 9월 2일에 발표된 하지의 포고문, 10월 10일 미군정 장관 아놀드(Archibold V. Arnold) 소장이 내놓은 성명서, 그리고 10월 17일에 미 3부조정위원회가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전송한 「초기 기본 지시」 역시 미군정기 시대상을 확인하기 위해 활용된다.
이후 미군정은 1947년 5월 7일 남조선과도정부가 등장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미군정이 해방 직후 3년 동안 펼친 점령 통치는 이후 한국 현대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분출하던 해방 공간은 미군정의 입장에 부합하는 이들이 주도권을 잡는 방향으로 재편되었고, 일제 식민체제에 부역하던 관료, 군인, 경찰 등은 반성과 성찰 없이 재기용되었다.
4. 정당의 난립_한민송성 조인형 조국홍 독촉이 조신두 한독구
한국민주당 : 송진우, 김성수
조선인민당 : 여운형
조선국민당 : 안재홍
독립촉성중앙협의회 : 이승만
조선신민당 : 김두봉
한국독립당 : 김구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정의
1945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약칭 한민당이라고 한다. 1945년 9월 16일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발기인 1,600여 명이 모여 창당대회를 가졌다. 이에 참석한 정당·단체는 고려민주당·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국민대회준비회·충칭(重慶)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 등이었다.
이들 정당·단체를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들은 1945년 9월 4일 서울 종로국민학교에서 대표 82명이 모여 신당발기총회를 가지고 당명을 ‘한국민주당’으로 결정하였으며, 9월 8일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여 명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 타도성명서를 발표하고 충칭임시정부 절대지지태도를 밝혔다.
9월 21·22일에는 총회위임에 따라 지역을 안배한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공동비율로 8인의 총무(후일 1인 추가)와 사무국 외 각 부서와 중앙감찰위원 30인을 선출함으로써 당의 체제를 모두 갖추고 송진우(宋鎭禹)를 수석총무로 선출하였다.
정강은
①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② 민주주의 정체수립을 기함
③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④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⑤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이었다.
정책은
①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②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③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④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⑤ 중공업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⑥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⑦ 국방군의 창설
등이었다.
부서와 인선은 영수(領袖:여럿 중의 우두머리)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문창범(文昌範)·서재필(徐載弼)·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중앙집행위원으로 수석총무 송진우, 총무 원세훈(元世勳)·백관수(白寬洙)·서상일(徐相日)·김도연(金度演)·허정(許政)·백남훈(白南薰)·조병옥(趙炳玉)·김동원(金東元), 사무국장 나용균(羅容均), 서무 이병헌(李炳憲), 문서 정광호(鄭光好), 수급(需給) 서기준(徐基俊), 회계 유흥산(劉興山), 외무부에 부장 장덕수(張德秀)와 윤보선(尹潽善)·윤치영(尹致暎)·구자옥(具滋玉)·이활(李活) 외 5인, 조직부에 부장 김약수(金若水)와 김종범(金鍾範)·김재학(金載學)·서용길(徐容吉)·배섭(裵涉) 외 15인, 선전부에 부장 함상훈(咸尙勳)과 백낙준(白樂濬)·이하윤(異河潤)·송남헌(宋南憲)·곽상훈(郭尙勳) 외 5인, 정보부에 부장 박찬희(朴瓚熙)와 고병남(高炳南)·임봉순(任鳳淳)·이길용(李吉用)·김덕은(金德殷) 외 5인, 노동부에 부장 홍성하(洪性夏)와 전진한(錢鎭漢)·변희용(卞熙용)·성낙훈(成樂勳)·나경석(羅景錫) 외 5인, 문교부에 부장 김용무(金用茂)와 양원모(梁元模)·양주동(梁柱東)·오종식(吳宗植)·신도성(愼道晟) 외 5인, 후생부에 부장 이운(李雲)과 유자후(柳子厚)·이원철(李源喆)·김효석(金孝錫)·한진희(韓珍熙) 외 5인, 조사부에 부장 유진희(兪鎭熙)와 이관구(李寬求)·정노식(鄭魯湜)·장발(張勃)·손재형(孫在馨) 외 5인, 연락부에 부장 최윤동(崔允東)과 서상천(徐相天)·김산(金山)·윤택중(尹宅重)·김법린(金法麟)·유석창(劉錫昶) 외 5인, 청년부부장 박명환(朴明煥), 지방부부장 조헌영(趙憲泳), 훈련부부장 서상천, 중앙감찰위원으로는 위원장 김병로(金炳魯)와 서정희(徐廷禧)·현상윤(玄相允)·유억겸(兪億兼)·이기붕(李起鵬) 외 20인이었다.
이 당은 그 창당선언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와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우리의 정부로 맞아들이겠다는 것을 당면한 대방침으로 삼았고, 임시정부의 환국 후에도 그것으로 일관하였으나,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무렵에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운동에 동조하여 임시정부와 정치노선을 달리하고 대한민국 수립의 주요한 추진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군정고문 또는 군정청 요직에 다수의 당원이 앉아 미군정의 정책에 협조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이나 대외정책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러나 창당 초기에 내세웠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강·정책과는 거리가 먼 대응을 보였다.
1945년 12월 30일 수석총무 송진우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고 김성수(金性洙)를 수석총무로 추대하여 당세를 유지해왔으나, 1946년 10월 좌우합작운동의 여파로 원세훈·이순탁(李順鐸)·박명환·김약수 등 창당에 참가하였던 중진간부 100여 명이 이탈하여 한때 큰 혼란에 빠졌다. 이로부터 이 당은 전형적인 보수정당으로서 한국정당사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이 그 보고서에서 한국민주당을 보수적 지주정당으로 지적하였듯이, 농지개혁에 있어서 유상매입·유상분배원칙을 고집하여 지주층의 대변자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반민족행위처벌법> 처리과정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친일파집단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이나 1948년의 남북협상문제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부정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 당은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관점이 냉전논리여서 미소 양체제는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대화하려는 남북대회는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이 당은 분단된 한국정치사에 있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 이후 한국야당사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당 간부 가운데에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많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적 사상의 영향과 반공이념을 통한 한국민주당의 보수적 정치이념은 오늘날에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 당은 야당으로서의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1949년 1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대한국민당의 신익희(申翼熙) 세력과 대동청년단의 지청천(池靑天)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이 출발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해 2월 10일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새출발을 하였다.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정의
1945년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던 중도좌파 계열의 정치정당.
내용
1945년 해방과 함께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같은 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자, 송진우 등 민족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환국을 기다려야 한다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이에 대립하였다.
사상적으로 좌·우의 중도노선에 있던 여운형은 우익진영의 협력을 잃게되었고,공산주의자들은 같은 해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한편, 민족주의자들은 같은 달 16일,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고, 10월 10일에는 아놀드(Arnold,A.V.) 미군정 장관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에 추대되었던 이승만(李承晩)은 11월 7일 주석 취임을 거절한다는 성명을 냈다.
여운형은 11월 12일 그의 직계세력이던 건국동맹을 주축으로, 고려국민동맹·인민동지회·일오회 등 군소정파를 규합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하였다.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에는 장건상(張建相)이 선임되었으며, 서기장 이만규(李萬珪), 사무국장 이임수(李林洙), 정치국장 이여성(李如星), 조직국장 김세용(金世鎔), 선전국장 김오성(金午星), 기획국장 송을수(宋乙洙) 등의 인사를 단행하였다.
당의 강령은
① 조선민족의 총역량을 결집하여 진정한 민주주의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 전민족의 완전광복을 기함
③ 진보적 민족문화를 건설하고 전 인류의 문화 향상에 공헌을 기함
이라는 3개 항이다.
이 강령을 구현하기 위하여 30개 항의 정책을 채택하였는데, 대체로 조선공산당과 노선을 같이하였다.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를 정당으로 개편하기위해 미군정청의 집회 허가를 얻어 11월 20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다. 700여 명이 모인 이 대회는 중앙인민위원회의 보강을 위하여 여운형·허헌·최용달·이승엽·홍남표·이기석·이여성·조두원·안기성·홍덕유·이상훈·정백 등 12명으로 구성된 전형위원만을 선출하였다.
1946년 여름 남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 및 조선인민당의 3당 합당운동이 일어나자 당내 찬반 대립으로 심한 갈등이 일어났으며, 결국 남조선노동당의 결성으로 기울어졌다. 이 와중에 여운형은 11월 12일, 자파세력을 중심으로 따로 사회노동당을 조직함으로써 조선인민당은 창당 1년 만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사회노동당은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고 1947년 2월 27일 스스로 해체하였다. 이즈음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재건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동조세력들을 모아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결성하였는데, 당의 강령·정책이 조선인민당과 상당히 유사하였다.
조선국민당朝鮮國民黨
정의
1928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내용
1920년대 중반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1928년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정의부·신민부·참의부 등을 중심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민족주의계열 및 사회주의계열의 많은 단체들이 이에 호응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를 구성하였다.
이 조직회는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화전(樺甸)과 반석(盤石)에서 세 번이나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진행하였으나, 유일당 조직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어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와 전민족유일당협의회로 분리, 각기 다른 장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각각 민족유일당조직동맹과 민족유일당촉성조직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유일당운동이 부진해진 상황에서 일부 인사들이 성급하게 민족유일당으로 조선국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졌다. 주요 참여 인사로는 김계산(金桂山)·마진(馬晋)·연두익(延斗翼)·조종한(趙鍾漢) 등이 있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정의
1945년 10월 23일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기관 형성을 위해 조직된 정치단체.
내용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는 1945년 10월 23일 조선호텔에서 각 정당 대표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독촉의 회장으로 추대된 이승만(李承晩)은 독촉이 좌 · 우익을 망라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정치체가 되어 자신이 민족통일전선의 최고지도자로 부각되기를 의도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지지를 내세우면서도 임정이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임정 귀국 전까지 독촉의 조직을 완성하고 좌익세력을 독촉에 포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23일 임정 제1진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독촉의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을 서둘렀다. 그러나 1945년 11월 28일부터 시도된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은 전형위원 선출 방식에서 갈등을 드러냈다.
여운형(呂運亨)은 전형위원 7명 중 5명이 한국민주당원이라면서 퇴장했다. 조선공산당 측 인사는 한 명도 없어 인민당과 조선공산당은 전형위원회에 불참했다. 임정 세력은 독자적인 활로를 꾀했다.
이승만은 1945년 12월 13일 자신이 지명한 전형위원들을 소집하여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전형위원회를 진행했지만, 좌파세력은 독촉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임정 세력 역시 임정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정을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
탁치정국 하인 1946년 1월 15일 독촉은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정 세력 중심의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한다고 발표했다. 독촉을 주축으로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해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었다.
1946년 1월 18일 독촉은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고 이승만에게 최고위원 선출권을 일임했다. 반탁투쟁을 반소 · 반공과 연결시키면서 임정 세력을 흡수하고자 한 것이었다. 독촉은 좌 · 우익 망라, 임정 포섭 등 처음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최고지도자로서 이승만을 부각시킨다는 프로그램에는 부응했다.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
정의
1946년 평양에서 창당되었던 정당.
연원 및 변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계열을 주축으로 1946년 2월 16일에 창당되어 같은 해 8월 29일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기까지 6개월간 존속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중국의 옌안(延安)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집단으로서, 당초 이 집단은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경력을 내세워 남북한을 통괄하는 정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동맹은 중앙본부를 평양에 두는 한편, 1946년 1월 간부 여러 명을 서울에 보내서 경성특별위원회(京城特別委員會)를 만드는 등, 정치활동을 본격화하고 그 해 2월 공식적인 정당으로 출범하였다.
같은 해 6월 30일 제1차 대표자대회를 열면서 경성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중앙위원회(南朝鮮新民黨中央委員會)로 개칭하였다. 이로써 조선신민당은 사실상 이원화된 조직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북한지역 신민당은 주석 김두봉(金枓奉), 부주석 최창익(崔昌益) · 한빈(韓斌), 조직부장 이유민(李維民), 선전부장 김민산(金民山)이었고, 남한지역 신민당은 위원장 백남운(白南雲),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 조직부장 심운(沈雲), 선전부장 고찬보(高贊輔)였다.
당 강령 및 정책의 기조에서는 친일파 · 반민주주의자를 제외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구축, 조선민주공화국을 수립하여 일제와 친일파로부터 몰수한 대기업을 국영화하고 소작제를 폐지하는 등 민족경제를 재편성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독립 · 평등 · 상호이익존중 · 우의에 기초하여 세계평화를 실현할 것을 밝혔다.
이는 모택동(毛澤東)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를 당시의 북한 현실에 원용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신민당은 공산당보다 덜 급진적이었으며, 노동자 · 농민보다는 소시민 · 지식층 · 중산층에 당의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신민당은 독자적 활동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북조선공산당의 대중정당화 방침에 호응하여 1946년 8월 합동대회를 통해 북조선노동당으로 새 출발하게 되었다.
한편 남한에서도 1946년 8월부터 3당(공산당 · 인민당 · 신민당)합당사업이 본격화되어 1946년 11월 23일 합당대회를 통해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신민당은 남과 북에서 공산당 중심으로 전개된 대중정당화 전략에 흡수되어 신민주주의 정치노선을 실현해 보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내용 요약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상해(上海)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으로도 부른다. 해외 독립운동 전선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이봉창 · 윤봉길의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당 본부를 항저우[杭州]로 옮기기도 하였다. 1935년 7월 5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의 결성으로 자진 해산하였다.
정의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결성한 정당.
변천 및 현황
중국 관내 지역의 유일당(唯一黨) 운동(運動)주1이 좌절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을 포함한 28명의 인사들이 1930년 1월 25일 결성한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체였다. 이 시기의 한국독립당은 상해 한국독립당으로도 불리운다.
해외 독립운동 전선 통일과 지방 파벌 청산을 목표로 설립된 한국독립당은 이사장제를 채택해 초대 이사장에 이동녕을 추대하였다. 이사(理事)는 조완구(趙琬九), 안창호, 이시영, 조소앙(趙素昻), 김구(金九), 김철(金澈)이 맡았다.
당의 활동 방안 등은 당원 전체가 모이는 당대표대회(黨代表大會)를 통해 논의하여 결정하였으며, 이사들은 이사회를 통해 당의 실무를 맡았다. 집행부서로 총무부, 재무부, 선전부, 내무부, 비서부 등을 두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당의 주의로 표방하였다.
비밀리에 조직되었던 한국독립당은 1931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민국임시정부선언(大韓民國臨時政府宣言)」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의 표현기관(表現機關)이라 밝히며,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한 몸임을 알렸다.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 이후 거세진 일제의 검거로 한국독립당 주요 인사들은 상하이를 떠났으며, 독립운동자금 문제로 내분을 겪기도 하였다. 위기를 타개하고자 1933년 1월 15일 상하이에서 ‘재호한국독립당대회(在滬韓國獨立黨大會)’를 개최해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이사장은 송병조(宋秉祚)가 맡았다.
당대회가 있고 약 1년 후 당 본부를 항저우로 이전하며 새로운 활동을 꾀했다. 기관지 『진광(震光)』을 발간하였고, 1934년 3월 3일에는 강병학(康秉學, 康秉鶴)의 의거주2를 일으키게 하였다.
1932년부터 김규식(金奎植)에 의해 진행된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에 참여하였다. 통일동맹은 창립 초기에는 소속 단체 간의 연락기관으로 기능하였으나, 단체 통일을 위해 각 단체들이 노력한 결과 한국독립당은 1935년 5월 25일 임시대표회를 소집해 신당 결성 회의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6월 20일 난징[南京]에서 열린 ‘각혁명단체대표대회’에 참석한 한국독립당은 7월 5일 통일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결성되면서 자진 해산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참가를 반대한 김구, 이동녕 등은 11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였다.
5. 모스크바 3상 회담(45.12.)
내용 요약
모스크바삼상회의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이다. 한국 문제는 그 중의 한 의제였다. 채택된 의정서에는 한국에 미군사령부와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민족 독립달성을 위해 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탁통치의 의미를 미·소가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함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정의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개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이 모여 모두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때 한국에 미 · 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주1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다.
경과
흔히 모스크바의정서 한국조항은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결정으로 간주되며, 이 의정서대로 따랐으면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조항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어느 것 하나 결정되지 않은 휴지조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게 한다.
모스크바의정서의 한국관계 조항은 4개의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첫째 항부터 인용하여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장기간의 일본지배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가능한 속히 제거하기 위하여, 코리아의 산업과 운수 및 농업 그리고 코리아인의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코리아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위의 첫 번째 항은 미국안에는 없던 다소 선언적인 내용으로서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언급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독립을 위하여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조선민족에 호의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첫 번째 항을 과대평가한다면 모스크바결정은 신탁통치에 관한 의정서가 아니라 독립의 실현방법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탁치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이라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 조항은 하나의 선언적 수사(rhetoric)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이 탁치안도 확정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모스크바의정서의 3대 축인 신탁통치와 독립, 임시정부 구성 등에 관해서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둘째, 코리아임시정부의 구성을 돕기 위하여, 그리고 적절한 방책을 미리 만들기 위하여, 남부코리아의 미군사령부와 북부코리아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립할 것이다.”
두 번째 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첫 번째 항에서 규정된 임시정부의 구성이 즉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 · 소공동위원회(이하 공위)라는 기관이 설립된 후 공위의 도움으로 구성된다는 수순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공위의 임무에 대해서는 세 번째 항에서 설명하고 있다.
“셋째, 코리아 민주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코리아인의 정치 · 경제 · 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및 코리아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 · 원조(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오는 세 번째 항에서 탁치는 ‘독립달성의 수단’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공위의 주된 임무는 ‘신탁통치방책의 작성’이며, 두 번째 항 서두에 나와 있는 ‘임시정부 구성을 돕는 것’도 부차적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탁통치 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 첫 번째 과정은 결정의 주체인 공위가 코리아 임시정부와 정당 ·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신탁통치 방안을 작성한다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두 번째 항 둘째 문장과 세 번째 항의 첫째 문장 서두, 둘째 문장 서두에 나온다. 이는 코리아인을 단지 행정관(administrator)이나 고문(consultant)으로 임용할 수 있다는 미국안의 규정보다 코리아인 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것으로써 소련 측에 유리한 규정이다.
이상과 같이 신탁통치 실행안의 작성 과정에 대한 기술이 이 의정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는데, 이를 크게 도식화하면,
① 공위가 임시정부와 정당 ·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탁치방안 작성
②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탁치 협정’안을 4개국 정부가 심의
③ 신탁통치협정안을 미 · 소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는 것
이 그 수순이다.
의정서의 마지막 항인 네 번째 항은 미 · 소 사령부간의 긴급회담이 2주일 내로 개최된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것 외에는 무엇이 모스크바의정서의 확실한 결정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의정서 자체는 비구체적이며 모호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모스크바회담에서는 ‘최고 5개년에 걸친 4개국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고 막연히 결정되었을 뿐인데, 이의 구체적 실행방법은 미 · 소가 주체가 되어 조선인과 영 · 중과는 단지 협의만 하여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스크바회담의 한국문제 해결 방식의 요점이다. 즉 미 · 소가 결정당사자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던 것이다.
이 의정서를 신탁통치에 관한 의정서라고 하지만 신탁통치 실시의 구체적 실행 방법을 결정했다기 보다는 ‘신탁통치 실시방안의 결정 수순’을 대략적으로 규정한 문서에 불과하다. 원래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면 그 구체적인 실행안이 분할점령 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 곧바로 실행하지도 못하고 미 · 소는 분할점령을 단행하였다. 그렇다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 안을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단지 ‘5개년 이내 4개국 신탁통치안’을 미 · 소가 조선인 · 영 · 중과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것 외에는 결정된 것이 없었다. 물론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구체적 지침 없이 실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위가 열렸으나 국내의 반탁 · 모스크바결정 노선 대립과 미 · 소대립에 직면해 앞의 3단계 수순 중 1단계에서 전혀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 문서의 구속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었다.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신탁통치를 미국은 불평등한 ‘지배’의 의미가 부각된 ‘정치훈련’의 의미로 받아들인 반면 소련은 평등한 ‘도와줌’의 의미가 부각된 ‘협력 · 원조’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기본적인 명칭 면에서도 탁치와 후견으로 다르게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개념규정마저 일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모든 번거로운 결정을 이후 개최될 공위에 떠넘겨버렸으니, 한국문제에 관한 한 아무것도 결정이 되지 않은 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 · 소협력이 공고하다면 결정이 유보된 문제의 해결을 기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히 합의된 결정이 미 · 소간의 불화에 의하여 실행되지도 못한 채 파기되고 마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 냉전 출현의 국지화에 또 한 가지 기여한 것이 반탁 · 모스크바결정 지지라는 국내 세력의 대립이었다.
그렇다면 미 · 소가 왜 이렇게 명확한 것 하나 없이 비정상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는가에 대하여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을 것이며 그에 의거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규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두 가지 흥미 있는 추론을 하고자 한다.
첫째 미 · 소 양국은 탁치의 실시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속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탁통치는 우호적인 정부수립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구체적인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이익에 합치되는 동시에 소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속셈을 충족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 쪽의 배타적 이익보장이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안이 신탁통치안이었다. 또한 그것이 위임통치처럼 식민지의 변형이 될지 아니면 소련의 주장처럼 독립의 지름길이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신탁통치안은 식민지의 혁명적 민주주의에 정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건하게 발산시키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제국적 · 반식민주의적 정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1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의 패전국 식민지에 적용되었던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을 미국의 이익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임통치나 탁치는 모두 세력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정책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차별성이 있다. 문호개방적 탁치안은 식민지의 혁명적 기운을 의식하여 위임통치의 구식민주의적 특성을 신식민주의적으로 변화시켜 식민지 민중의 요구에도 타협하면서, 동시에 구식민세력(영국 · 프랑스 · 독일)을 견제, 구식민지적 방식을 통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구식민지가 무장력이 필요한 반면, 신탁통치는 별다른 무장력의 지출 없이 보다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방안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우세를 보장하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한 반면, 소련은 국내 정치세력을 끌어들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신탁통치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의 수단으로 소련에 의하여 규정되었으나, 이는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우호적 정부수립을 위한 수단 외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미 · 소 모두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는 형식 논리에서나 가능했으며, 실제로는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탁치를 채택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미 · 소 모두 탁치를 통해 우호적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가차 없이 파기시켜 다른 수단을 택할 가능성이 애초부터 있었다.
미 · 소가 서로 양보하여 타협하지 않는 한 ‘조선을 위한 통한안(統韓案)’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후의 역사(1947년)에서 미국의 일방적 파기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
둘째는 어느 한쪽도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으나, 지엽적(枝葉的)인 한국문제를 합의해주고 보다 중요한 중국 · 일본문제에서 많은 것을 얻거나 미 · 소 화해분위기를 먼저 해쳤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 큰 고려 없이 합의했다는 설명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 · 소는 각각 실현가능성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미 · 소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단독행동으로서의 ‘단정수립’(미국)과 ‘양군철퇴 · 즉시독립’(소련)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이후의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또한 미국의 경우 신탁통치안을 주도했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1945년 4월 12일 미 · 소간의 공식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뜨고 이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트루먼(Harry S. Truman)이 승계한 상태에서 정책결정을 주도하였던 국무부는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을 무시하면서 신탁통치안과 모순되는 분할점령을 결정하였다.
국무장관 번스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 · 소협력을 위하여 탁치안을 받아들였지만 트루먼과 같이 자신의 아이디어도 아니었으므로 실현가능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부터 논의를 주도하게 된 국무부는 탁치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일관적인 행태를 보였다.
첫째와 둘째 가설을 종합하면, 미 · 소 양국은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으나 신탁통치안이 실현된다면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수립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속단하여 별 다른 고려 없이 합의하였다는 설명이다. 다소 수사적으로 규정한다면 신탁통치안은 ‘동상이몽의 세력확보책’이었다.
신탁통치안의 결정과정부터 미 · 소는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지만 실현을 가로막고 미 · 소대립을 조장시킨 한 요인은 신탁통치안의 규정이 각자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을 정도로 애매모호하여 구속력을 갖지 못했던 점이다. 즉 동상이몽의 불확실성이 국내 정치세력의 좌우대립과 어우러져 신탁통치안의 폐기를 가중시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미 · 소간 타협의 산물이며, 어느 누구의 독단에 의하여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1945년 12월 16일 미국은 유엔 주도하의 4개국(미 · 영 · 중 · 소) 5년 내(5년 연장 가능) 신탁통치를 규정한 안을 제출하였지만 소련은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고, 대신 일본문제에 주의를 돌렸다.
18일과 19일 회합에서 소련은 미국의 양보를 얻어 일본점령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을 받았다. 이에 소련은 보다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중국문제에서 미국의 주장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전후 미 · 소의 협조는 최고조에 달한 것처럼 보였으며 냉전은 결코 시작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문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던 소련은 12월 20일 이후 4개항으로 된 안을 제출하면서 유화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소련안은 ‘선 임시정부 수립, 후 후견’을 골자로 한 것으로써 ‘선탁치 후정부수립’을 규정한 미국안과는 상당 부분 다른 것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라는 용어를 러시아어 Опёка(영어의 tutelage에 해당)로 번역하여 “조선인의 자주적 정부수립을 미 · 영 · 중 · 소가 원조한다”는 후견 제안으로 수정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미국안에 나타난 미 · 영 · 중 · 소의 참여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우세(3대 1)로 소련에 불리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참여를 보장하여 우호적 정부수립을 기도하는 실리를 챙기기도 하고 조선인의 자주적 욕구를 반영하는 명분을 살려 일거양득을 얻으려 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소련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하였던지, 아니면 타협의 분위기를 무산시키지 않으려고 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실현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지 소련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양보를 단행하였다. 합의된 의정서는 약간의 문구수정만 빼고는 소련안과 거의 같았다.
따라서 모스크바결정 중 한국문제 조항은 당시에 조성된 한시적인 미 · 소 협조의 상징이었으나, 당사자 간 협조가 불가능하다면 그 문구가 해석상의 논란 없이 치밀하게 구성되지 않은 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질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예측이 이후 역사에서 여지없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의의 및 평가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대해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결정된 역사적 회의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크게 두 가지의 과소평가와 왜곡이 있다.
첫째는 모스크바삼상회의가 한국문제를 논의하려고 만난 회의라는 평가이다. 이 회의의 결과로서 1945년 12월 28일 오전 6시(모스크바 시간)에 발표된 코뮤니케(의정서)를 보면 한국에 관한 결정이 주변적인 문제 중의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7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의정서의 세 번째 항목이 한국에 관한 조항이며, 또한 한국문제는 토의과정에서 토론된 여섯 가지 의제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된 외상회의에서 한국문제는 주변적인 의제로 처리되었지만, 당시 한국인들이 한국문제를 모스크바 결정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두 번째 왜곡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곧 신탁통치이며, 이 회의에서 미 · 소가 신탁통치 실시에 합의했다는 주장이다. 의정서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신탁통치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합의를 단지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미 · 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것 외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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