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이승만_동지와 라이벌의 사이 그 어디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필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경향신문」1948.2.11.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가까워지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며 통일 정부 수립의 당위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해 온 이승만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본래 동지였다. 독립 협회에서 뛰어난 연설로 주목받은 이승만은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은 우드로 윌슨으로, 이후 미국 대통령이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김구는 평소 이승만을 형님이라 부르며 존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국제 연맹에 위임 통치를 탄원한 일로 탄핵당하였고, 이후 임시 정부는 분열하며 위기에 처했다. 김구는 임시 정부를 지키기 위해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이끌었고,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되어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노력하였다.
김구와 이승만은 해방 이후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민족주의 진영의 양대 지도자로서 반탁 운동을 주도하는 등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협상이 부진해지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협상이 최종 결렬되자 유엔은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결정하였고, 북측의 반대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사실상 결정되었다.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참여해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 외국 군대 철수 후에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통일 임시 정부 수립 절차 합의, 남조선 단독 선거 반대 등의 합의를 이끌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은 이 합의를 무시하였고, 남한에서는 예정대로 5월 10일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김구는 1949년 청년 장교 안두희의 손에 암살당하였다. 현실 정치에서 이승만은 승자가 되었고, 김구는 패자로 남은 것이다. 이승만의 뛰어난 정치적 셈법을 상대하기에는 김구가 부족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지금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둘의 모습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이승만은 독재자라는 꼬리표와 함께 역사에서 퇴장하였고, 김구는 죽어서 더 크게 살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개요
이승만(李承晩)은 대한민국 초대, 2대,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개항기에는 독립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미국에 머물면서 외교독립 노선을 주장했으며,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1925년 탄핵당했다. 2차대전 기간에는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대미 외교를 벌였다. 1945년 해방 직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 및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펼쳤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재임기간 중 3년간의 6·25 전쟁을 겪었다. 1950년대에는 여러 차례의 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였으나 1960년 4·19로 대통령 직에서 하야하였고, 그 직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
몰락한 왕족의 후손, 개화운동에 투신하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했다. 그는 세종대왕의 형으로 유명한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혈연 상으로는 조선 왕실의 종친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집안은 직계 7대조로부터 이승만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오른 사람이나 생원·진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몰락한 왕손 집안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왕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승만의 내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준 것으로 보이며, 후일 그가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대외적으로 왕족 의식을 표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승만은 비교적 일찍부터 서구 문물에 눈을 떴고, 이를 바탕으로 1890년대부터 각종 개화 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895년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며, 1896년부터는 배재학당 내의 청년단체인 협성회에 적극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언론·정치 분야의 청년 개혁가로 활동을 개시했다.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에 연사로 참여하면서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가담했고,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박영효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 1월 체포·투옥되었다. 이 때부터 이승만은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게 되는데, 감옥생활은 역설적으로 이승만이 나름의 사고 체계를 확립하고 독서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승만이 옥중에서 도서실과 학교를 설치해 운영하고, 자유롭게 집필 활동을 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기간 이승만은 기독교도가 되었는데, 기독교로의 개종은 이후 이승만의 삶의 행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4년 8월 석방된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승만은 1905년 2월 조지워싱턴 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입학해 학사를, 이어서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석사를(1910년 3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1910년 7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최소 12년이 소요되는 학위 과정을 5년 반 만에 마친 것인데, 이는 그가 한국에 선교사로 가서 목회 활동을 하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에 주어진 특혜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 필요하다며 하버드와 프린스턴에 2년 내 박사학위 보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제시기 활동_외교독립 노선 추구
이승만은 유학을 마치고 1910년 8월 귀국, 2년간 선교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미국행을 선택,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1913년부터는 하와이로 거처를 옮겨 교육 및 선교 활동에 집중했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외교독립 노선’을 고수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서구인의 여론에 호소하거나 강대국의 외교정책에 편승하는 등의 방식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독립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특히 그의 ‘외교활동’의 주요 대상은 미국으로, 이승만의 대미 외교는 미국 의회 및 행정부를 대상으로 한 청원 외교, 일반 시민 및 여론을 대상으로 한 여론 선전 및 호소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승만 나름의 판단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들 자신의 독립 노력을 평가절하함으로써 일종의 ‘독립 부정’의 논리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대통령 직에서 탄핵당하게 되는데,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 후 정부 소재지인 상하이에 머문 기간이 6개월에 불과할 정도로 직무 수행이 성실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가 1919년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한국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 등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민 단체, 한인 학교,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대 들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다시 전면에 나설 기회를 잡았다. 1941년 이승만은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복원, 대미외교를 위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를 통해 임시정부를 한국의 정식 정부로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이미 내부적으로 전후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 실시를 구상 중이었던 미국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또한 1942년부터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항일 운동을 독려하는 라디오 단파 방송을 하기도 했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이승만은 활동 무대를 국내로 옮겼고, 강경한 반공주의 및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내세우며 활동했다. 그는 1945년 10월 귀국 이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45년 12월 말 이른바 ‘신탁통치 파동’이 발생한 이후에는 김구 등과 더불어 반탁진영의 중심에 섰다. 이승만은 강경한 반소련·반공 태도를 견지했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통한 정부 수립 등 미국과 소련의 타협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 방안에도 부정적이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인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쪽만의 임시 정부 또는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일찍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1947년 가을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적으로 결렬됨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타협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이 사실상 좌절되자 이승만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유엔 감시하에 실시된 194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은 그 해 7월 국회에서의 선거를 통해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통해 전근대적 소작제도를 철폐하고 농민 생활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친일행위 조사 및 처벌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친일파 청산의 좌절을 야기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하며 1953년 7월까지 지속된 6·25전쟁은 이승만 정권이 본격적으로 장기 집권을 추구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먼저 이승만은 1951년 안정적인 집권 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1952년 5월 국회가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며 자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국회를 압박하고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로의 개헌을 추진, 이를 관철시켰다. 이를 ‘발췌개헌’이라 하며, 개헌에 힘입어 1952년 8월 이승만은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한편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6·25전쟁 휴전협상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휴전협상이 타결을 향해 가던 1953년 6월에는 기습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협정에 서명하지는 않되 조인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미국과 타협했고, 휴전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영구집권 추구와 몰락
휴전 이후 이승만은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제도적 차원에서는 각종 관제단체와 헌병대·특무대·경찰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이념적 차원에서는 북진통일론과 반일주의를 강조했다. 대내외적 위기가 찾아왔을 때 다양한 형태의 관제시위를 통해 여론을 동원하고 대통령 중심의 단결을 강조하는 모습은 1950년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의 영구집권 시도는 더욱 노골화되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졌다. 원래 헌법상 대통령 임기는 4년이고 총 2회까지만 재임이 가능했는데,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회수의 제한 없이 대통령에 계속 당선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렇게 개정된 헌법에 의해 치러진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6년 선거에서는 경쟁자인 진보당의 조봉암이 상당한 득표를 하고, 대통령 유고시 직책을 승계하게 되어 있는 부통령에는 여당 후보인 이기붕이 낙선하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는 등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는 양상이 보이기도 했다.
1956년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의 이반은 이승만 정권으로 하여금 1960년 3·15 부정선거라는 헌정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를 자행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야당의 선거 참관인 축출 등 노골적인 선거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고, 4·19가 발생하게 된다. 이승만은 이에 굴복하여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한 후 5월 말에 자신의 오랜 활동 근거지였던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은 몇 차례에 걸쳐 귀국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후속 정부들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1965년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4·19 이후 이승만에 대한 한국 사회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보수 진영 일각에서 이승만 재평가 논의가 등장하면서 이승만의 공과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김구金九

내용 요약
김구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주석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신민회,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 되는 사람이 그 곳으로 옮겨왔다.
생애 및 활동 사항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웠다. 14세에 『통감』 · 『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이후 재차 연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청국으로 향하던 중 ‘단발령’에 대한 전국적 항거와 의병 봉기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귀향을 결심, 1896년 3월 9일 아침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鴟河浦)에서 일본도로 무장을 하고 변복을 한 채 조선인 행세를 하던 쓰치다[土田讓亮]를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6월 21일(음력 5월 11일) 집에서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8월 13일 인천감리서로 이감되어 9월 10일 인천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0월 22일 법부는 그의 사형집행을 주청하는 상주안건을 국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1897년 1월 22일 김구의 사형집행을 제외하는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마침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석방이 되지 않자 이듬해 3월 탈옥을 결행하여 성공하였다.
탈옥한 뒤로 삼남 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 · 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감리교회(鎭南浦監理敎會)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총무로 일했다.
이러는 가운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진남포 엡웟청년회 대표로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 · 이준(李儁) · 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늑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 · 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 · 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 · 8 이봉창(李奉昌)의거와 4 · 29 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 · 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 · 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 · 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 · 이봉창(李奉昌) · 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 ·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 · 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 · 10 제헌국회 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 ·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4 · 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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