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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여수 순천 10 19 사건_손가락 총에 죽어나간 사람들

by noksan2023 2026.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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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순천 10 19 사건_손가락 총에 죽어나간 사람들

 

 

 

 

 

 

 

사진 속 여수 시민들은 가운데 빈 곳을 두고 두 무리로 나뉘어 앉아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반란군을 도운 협력자로 분류되었다. 이들 중 다수는 재판도 없이 즉결 처분을 당하였다. 도대체 여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부 수립 후에도 제주도의 무장봉기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당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948년 10월 19일 14연대 군인들이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등을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이들은 단숨에 여수를 점령하고 순천까지 장악하였다. 이때 그동안 미군정의 탄압으로 숨죽이고 있던 이 지역의 좌파 단체들이 인민 위원회를 구성해 행정을 장악하였다. 인민 위원회는 우파 단체 인물과 경찰을 처형하였다. 

 

정부는 군대를 보내 봉기한 군인들을 제압하며 순천을 시작으로 주변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14연대 봉기 군인들과 좌파 세력은 이를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저항을 계속하였다.

 

여수와 순천을 되찾은 군인들은 14연대 봉기 군인들과 인민 위원회에 협력한 사람들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인과 경찰의 손가락질 하나면 사람이 쉽게 죽어 나갔기에 그들의 손가락을 손가락 총이라 불렸다.

 

여수 순천 10·19 사건으로 피해 지역의 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14연대가 봉기하였을 대는 우파이거나 협조를 거절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14연대 봉기 군인의 가족이거나 빨치산에 식량을 제공한 사람들도 진압 군인들에게 처형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도 정당한 절차없이 희생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한국을 철저한 반공 사회로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사회주의와 관련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빨갱이라는 사회적 딱지를 붙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수 순천 10·19 사건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들도 숨죽이며 살아야 하였다. 2021년이 되어서야 여수 순천 10·19 사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진실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재판도 없이 죄명도 묻지 않고 이렇게 죽인 것은 이건 사형이 아니고 학살이다. 이건 국법으로 사형을 시킨 것이 아니고 국민을 데려가 학살을 한 것이제. 이건 국가의 죄다. 요것은 벗어 줘야 될 것 아니냐 그거여.

- 여수 순천 10·19 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박00 씨 구술

 

 

 

여수·순천 10·19사건麗水·順天 10·19事件

 

 

 

여수·순천 10·19사건 때 학살된 사람

 

 

정의

 

1948년 10월, 여수 주둔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

 

개설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은 법적으로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ㆍ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 ·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여순사건의 배경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첫째,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진압 명령 거부 배경과 둘째, 여기에 호응했던 여수 · 순천 지역의 동향이다.


우선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던 제14연대의 진압 명령 거부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광주에서 편성된 제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金知會), 홍순석(洪淳錫)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병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좌파적 경향을 띠는 인물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후 제4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新月里)에서 제14연대가 창설되었고, 창설 요원 가운데에는 김지회, 홍순석과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池昌洙)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창설 과정에서 좌익 계열 모병관들은 반이승만 계열, 좌익 수배 사범 등을 적극적으로 모병하였으며, 그 결과 연대 내에는 남로당의 세포 조직이 침투하게 되었다.

또한 제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 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제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 · 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되었다. 이는 제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여수 · 순천 지역의 정치적 동향을 살펴보면,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 계열의 우세 속에 좌 · 우익간의 공존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평온했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1948년 들어와 급변하는데, 이는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빈발하기 시작한 양측 간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 행위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 · 폭력화되면서 이 지역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는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의 형태로 변모되어 갔다.

 

경과

 

제14연대의 진압 명령 거부는 숙군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 하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 15~16일 경 육군본부는 제주4·3사건 진압을 목적으로 제14연대의 제주도 파병 계획을 하달하였으며, 이는 연대 내 남로당 조직에도 전파되었다. 이때는 반이승만 계열로 간주되던 전임 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중령이 상부에 의해 체포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숙군에 대한 불안감과 제주도 파병에 대한 반발감이 겹치면서 제14연대의 일부는 진압 명령 거부를 결정하였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제14연대에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이 하달되자 이 날 저녁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 지창수는 연단에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며 부대원들을 선동하였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여기에 찬동하였고, 반대파는 즉각 사살되었다.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후에는 즉시 여수로 진격하였다. 이때 참여한 인원의 수효에 대해서는 1,000~2,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고, 제14연대는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진격시켰다. 순천 경찰은 이에 응전하였으나 패퇴하였고, 20일 오후 순천도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광주 제4연대 소속 진압군이 제14연대에 합류하였다. 사기가 높아진 제14연대는 주변 지역으로 공격을 속행하였으며, 그 결과 22일에는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여수 · 순천 지역에서는 제14연대의 점령에 호응하여 지역의 좌익 계열 인사들을 주축으로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일부 학생들이 제14연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의 좌익 지하조직은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남로당은 급격하게 진전되는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 청년들은 지역의 우익 인사 · 경찰관 및 그 가족을 보복심에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인민위원회에 의해 경찰서장 등의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보복 · 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에 나서기도 하였다.

제14연대의 움직임이 상부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20일에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제14연대 진압 목적의 전투사령부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진압군 지휘는 육군총참모장 송호성이 맡았고, 총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10월 22일 정부에 의해 여수 ·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고, 같은 날 14연대와 진압군 간의 첫 교전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鶴口里)에서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기를 잡은 진압군은 그대로 순천으로 진격하였으며, 하루가 넘는 교전 끝에 23일에는 순천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14연대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하였으며,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 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하였다.

10월 24일, 전투사령부의 송호성(宋虎聲) 준장이 이끄는 여수 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美坪洞) 일대에서 제14연대의 기습을 받고 후퇴하였다. 여수 공략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사이 지창수가 이끄는 제14연대는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월 25일부터 재차 탈환 작전에 나섰다.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 대대 가량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이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제14연대의 주력이 빠져나간 여수에는 극소수의 군인과 무장한 일부 민간인만이 여기에 대항할 뿐이었다. 이틀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여수는 10월 27일 완전히 진압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로써 여순사건은 종결되었다.

진압군의 제14연대 진압 과정에서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초기 진압작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군은 강경한 작전을 구사하였으며, 민가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통해 협력자를 모두 색출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14연대와 무관한 민간인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또한 제14연대 진압 이후에도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이 비공개 군법회의를 통해 계속되었다.

한편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제14연대는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게릴라(빨치산)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사살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결과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 · 재산 피해를 남겼다. 피해에 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확인되며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여순사건은 정부 차원에서 정치적 위기감을 갖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비난하며, 진압 명령 거부에 직 · 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던 좌파 계열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이에 더하여 김구를 비롯한 반이승만 계열의 우파도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공격받았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사건 직후 ‘극우의 정객’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기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김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국회에서도 위기감을 느껴 「국가보안법」을 1948년 12월 1일에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정부의 위기감은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5% 가량의 장병들이 군을 떠났다.

 

 

 

여수·순천 사건_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개요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이후,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를 적성지역으로 규정하고 10월 17일 이른바 중산간 지역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다. 그러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려 했으나, 이들은 정부의 증파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켜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정부는 서둘러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모든 지역의 상황을 정리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였다. 이를 여수·순천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숙군(肅軍) 조치를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생 배경

 

이 사건은 군이 자국 정부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인 만큼, 당시의 한국군의 집단적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찰의 경우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자마자 식민지 경찰기구를 군정 통치에 적극 활용한 반면, 한국군의 경우 정부 수립 전까지 주권국가가 아닌 상황에서, 미국 점령군이 타국의 군을 창설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방경비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해방 이후에 지역단위로 모집된 국방경비대에는 일본군·관동군·학병 출신, 중국군·광복군 출신 등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고, 자연히 식민지 시기부터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구축한 경찰보다 내부적으로 동질성이나 응집력이 떨어졌다.

이처럼 군은 군정 당국에게 중앙집중적인 경찰보다 활용도가 떨어졌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정규군이 아닌 경찰 예비조직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장비나 대우 면에서 경찰보다 낮은 취급을 받았다. 임무 역시 정규군으로 외부 침입을 방어하기보다는 국내 치안유지에 주로 투입되었고, 직업적 자부심을 가지기 힘든 상황에서 탈영도 잦았다. 이후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본격적인 국군으로 확대 재편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급격한 병력 팽창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좌익활동 경력자들이 군 내부로 유입될 수 있었다. 현장에서 할당받은 정원을 채우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반(反) 이승만 운동을 해온 청년들이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두 무장 집단 사이의 갈등은 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1947년부터 48년 사이에는 군·경사이의 충돌이 극심해져 전남 동부 지역인 순천, 영암, 구례 등에서는 ‘영암사건’ 등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경찰은 군을 무시하며 ‘경찰 보조인력, 사상적으로 불순, 향토적 오합지졸’이라고 헐뜯었고, 군은 군대로 경찰이 ‘친일 경력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했다. 내무반에서 ‘지서를 습격하다 왔다’고 말하면 호응을 받았으며, 경찰에게 맞고 들어온 장병의 복수를 하러 출동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수립된 직후에는 군대 내에서는 한창 내부 남로당 계열 혹은 김구 계열을 포함한 반 이승만 세력을 걸러내는 숙군(肅軍)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순사건을 촉발한 여수 주둔 14연대 역시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구속된 상황이었고, 내부에서 좌익 경력이 있는 장병들은 극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모집과정이 지역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14연대 역시 대부분 여수를 비롯한 인근 전남지역 출신 장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제주도는 1946년 별도의 도로 승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전남권으로 간주되었고, 동향 사람들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에 대한 거부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전개 과정

 

10월 19일, 여수 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했을 때, 남로당 소속 상사 지창수가 병기와 탄약을 장악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하며 부대를 장악했다. 이것이 북한 측 주장처럼 박헌영의 남로당이 주동했으나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이승만 측 주장처럼 김구가 공산주의자와 결탁한 것인지, 혹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최근 학계는 대체로 남로당 중앙은 물론 지부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않은 14연대만의 봉기였으나, 남로당이 사후 승인과 지원을 통해 참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남로당이 조직 역량의 한계로 무장투쟁을 의도하지 않았던 시점일 뿐 아니라, 초기에 남로당 측 장교들 역시 사살되었고, 봉기에 참여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목적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0월 20일 새벽 1시경, 반란군이 여수 읍내로 진격할 당시에는 약 1,200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여수를 장악한 후 순천으로 출발했을 때, 순천에 파견되어 있던 2개 중대가 반란에 합류했다. 이후 순천을 접수하기 위해 전투하는 중에 광주에서 지원 나온 4연대 2중대가 합류하여 인원은 최종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인민위원회 재결성, 이전의 ‘인민공화국’, 단독정부 반대, 토지개혁 및 친일파 처단 등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21일에는 남원·구례·보성을 22일에는 고흥·광양·곡성 지역을 장악하고, 지역 내에서 친일파, 경찰, 우익인사를 처단했다. 지역마다 남로당 조직들이 긴급회의를 거쳐 합류했는데, 조직을 노출한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어느정도 대중 지지를 획득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부 측에서는 10월 21일부터 광주에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국 측 임시군사고문단과의 협력 아래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다음날인 22일에는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순천 탈환 작전을 펼쳤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 김백일, 백선엽 등이 강경 진압을 주장하며 총사령관 송호성을 배제했다. 이처럼 강경한 진압작전 아래 반란군은 기존의 산개·확대 작전에서 입산하여 장기전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으며, 지휘관 역시 중위 김지회로 교체되었다. 23일 정부군은 순천을 점령했고, 여수 탈환 작전을 시작하였다. 우익청년단까지 총동원되어서 진행된 여순사건 진압은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육해공 합동작전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27일 여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으며, 도주한 반란군을 지리산까지 추적하였다. 이듬해 2월이 되어서야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나, 남은 반란군은 한국전쟁 시기까지 지리산에서 유격대 활동을 이어갔다.

 

민간인 학살

 

진압군은 지역을 점령하면 그동안 반란군 측에 가담했던 부역(附逆)자를 색출하기 위해 주민들을 공터에 소집했다. 불응하거나 이탈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부역자로 간주했다. 그러고는 현지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을 시켜 부역자였던 사람을 지목하도록 했다. 지목당하면 법적인 절차 없이 즉석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손가락 총’이라고 불리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외모, 허위고발, 허위투서, 과장된 소문, 자백 강요 등 자의적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개입했다. 특히 여수에서 5연대 장교 김종원은 즉결참수로 악명이 높았다. 여수 만성리굴 부근에서는 1949년 1월 13일 종산 국민학교에서 끌려온 125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1949년 11월 전남도가 집계한 여순사건 인명 피해는 1만 1,131명이었다.

이처럼 인명피해가 극심했음에도 유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마음놓고 애도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시신을 마음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부 측에서 여순사건이 ‘현지 좌익분자들의 계획적 음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4·19로 이승만 정부가 종결된 뒤에야 1960년 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 특위’를 구성했지만, 곧이어 일어난 5·16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다시 탄압당했다. 이후 피해자와 유족들은 오히려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2000년에 관련 특별법이 제정된 4·3 사건과 달리 여순사건은 관련 특별법이 2001년부터 처음 발의된 이후 20여년이나 제정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해자들은 2011년부터 당시 군사법원 재판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2020년에는 민간인 희생자 1인에 대한 재심에서 처음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후 2021년 6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사건의 영향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인 숙군(肅軍)이 진행되어 좌익계열과 광복군계열을 포함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군인들이 제거되었다. 이미 제주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살해되었을 때 조사는 진행되었지만, 여순사건은 군 내부 프락치 색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1949년 2월에서 11월 사이에 영관급 6명, 위관급 67명, 하사관 176명 등 352명이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숙군 작업이 얼마나 크게 전개되었는가를 말해준다. 1948, 49년에 파면된 장교는 각각 18명, 224명이고, 불명예 제대한 사병은 각각 1,693명, 2,440명이었다. 육사 2기인 박정희도 남로당 군 프락치였으나 프락치 관계 정보를 제공해 살아남았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9월에 발의된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 명칭을 바꾸어 통과한 것이다. 여순사건 이후인 10월 27일 이 법이 다시 거론되어 초안이 작성되었고, 11월 9일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때 내란행위 특별조치법이라는 명칭이 기존 형법의 내란죄와 중복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이 되었던 것이다. 법안 내용도 내란행위 자체보다 반국가적 정당단체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해 내란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결사나 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는 것으로 중심이 바뀌었다. 이것은 행위 이전의 단계를 처벌하는 법으로, 형법의 대원칙과는 상충된다는 점에서 제정 당시부터 논란이 되었다. 이후 이 법은 초헌법적인 효과를 발휘하면서 정치, 사회, 사상, 문화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서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에 제약이 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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