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2부 1920년대_문보참 산회폐물산 치2교개민

문화통치
보통경찰통치 : 표방만
참정권 없음
산미증식계획
회사령 철폐
물산장려운동
치안유지법
제2차교육령
개량론
민립대학운동
문화통치

문화 통치(文化統治)는 3·1 운동 이후 일제가 조선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무단 통치방식을 버리고 내세운 새로운 식민지 통치방식을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는 등 여러 유화정책을 실시했지만, 이는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은폐하고 미화하려는 위장수단일뿐이었다. 실상은 탄압과 감시, 민족문화 말살,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화된 기만적인 식민 통치 방식에 불과하다.
헌병경찰제를 보통 경찰로 대체했으나 이 기간 동안 경찰의 수는 더욱 늘어났으며, 일본의 식민통치에 비판적 내용의 기사를 실은 신문 언론사에 대하여 정간과 폐간, 기사삭제 등이 이루어졌다. 민족 운동을 막기 위해 한민족을 기만하고 분열시키는 성격이 강했으며 가혹한 식민통치를 대외적으로 은폐시키고 국제 여론의 악화를 막기 위한 성격이 짙었다. 또한 이 기간에도 조선인들에 대한 고문과 탄압은 여전했다. 경제 대공황과 태평양 전쟁 등을 거치면서 조선에 대한 통치방식이 민족말살통치로 변경됨에 따라 문화 통치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배경
3·1운동의 전개로 인해 높아진 조선인들의 독립의지와 반일정신이 높아져갔다. 일제가 비폭력주의 운동이었던 3·1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과 보복학살을 자행하자 국제여론의 악화되었다. 이런 국제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기존의 무단통치를 버리고 문화통치를 실시했다.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화정책을 실시하였다.
문화 통치로 바뀌게 된 배경은 겉보기에는 대외적 상황과 여러 정치적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련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문화통치로의 통치제제 변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일본인 군인이 맡던 조선 총독 자리에 대해 문관 임명 제한을 철폐했다. 그러나 일본은 문화 정치를 내세운 이후부터 해방이 된 1945년까지 조선 총독 자리에 문관을 임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경찰제도
일본은 무력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이름과 제복만 바뀌었을뿐 실질적으로는 경찰인력과 시설을 늘렸다. 문화 정치를 내세운 첫 해인 1920년만 해도 경찰관서의 수는 1918년보다 3.6배, 경찰관의 수는 3.4배에 달했다. 민족운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탄압하기 위해서 치안에 필요한 장비, 유지비 등을 세배로 증가시켰다. 더불어 고등경찰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오히려 헌병경찰제도때 보다 더욱 심하게 우리 민족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민족신문의 발행 허용
민족신문(조선어 민간 신문) 3종의 발행을 허가하였다. 일제는 검열, 정간 등의 조치를 이용, 민간 신문을 친일 언론화 시키려 노력했지만, 민간 신문들은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일장기 삭제 사건에서 보듯이 일제의 통치하에서도 조선 민족의 정신을 고양하고 사기를 높이려 애썼다. 식민통치 말에는 중일전쟁과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일본제국 전체가 전시 비상체제에 돌입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한 총독부의 견제와 탄압이 심해졌다. 결국 1940년 두 신문 모두 폐간당했다. 폐간 시킨이후 1945년 해방과 함께 복간했다.
지방 행정에 조선인 참여
지방 제도 개정, 도 평의회등의 각종 행정기관을 설치하여 조선인을 참여시킨다고 하였으나 실제론 선거권 제한, 일부 친일파(親日派)와 부유한 재산가만이 참여함으로써 실권없는 자문기관 수준에서 그쳤다.
교육기회의 확대
교육 기회의 확대는 명목상일 뿐 오히려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조선인들에게 가르치는데 이용되었으며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까지만 지원했을뿐, 식민통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고등교육은 가르치지 않았다. 또한 교육을 해주겠다고 여러 학교가 당시에 설립되기는 하였으나 토지조사사업때 이주해 온 일본인들의 자녀가 주로 입학하였고 조선인들의 취학률은 낮았다.(당시 조선의 전통교육기관인 서당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없어지거나 변질되었기에 서당은 언급하지 않겠다.)
치안 유지법
또한 일제는 태형령을 없애 조선인에게 비인간적인 형벌을 내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독립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강력한 탄압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문화정치’_다양한 친일 세력을 육성하여 식민 통치의 안정을 꾀하라
머리말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비록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일제는 단지 총칼로 무장한 권력에만 의존해서는 식민통치가 안정되지 못하며, 비용 측면에서도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개량적인 통치정책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변화에는 일본 정계에 서민 출신인 하라 다카시(原敬)가 수상으로 취임하여 이른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가 열린 것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와 대비해 ‘당근과 채찍’을 병행한 1920~30년대의 통치방식을 ‘문화정치’라 부른다. 무력에 기초한 식민지배정책이라는 점에서 문화통치와 무단통치는 본질상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군이 치안을 직접 담당하던 헌병경찰체제에서 문관인 보통경찰이 치안을 전담한 보통경찰체제의 성립, 민족운동을 분열시켜 체제 내로 흡수하기 위한 민족분열정책과 조선인 대우 및 지방제도 개선 등 부분적인 양보 정책(=개량 정책)을 추진했다는 면에서 현상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책의 변화와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식민 지배정책의 수정
한반도를 뒤덮었던 3·1 운동의 열기가 다소 가라앉은 1919년 4월, 일본 내각 수상 하라 다카시는 당시 군부를 대표하고 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대신(陸軍大臣)과 협의한 후 식민지 조선의 지배정책 개혁안으로 4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문관(文官) 위주로 제도를 개정할 것,
둘째, 교육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동일 방침을 취할 것,
셋째, 헌병제도를 개편하여 경찰제도로 할 것,
넷째, 조선을 일본의 연장으로 인정하여 조선을 동화(同化)할 것
이러한 원칙에 기초하여 하라 수상은 조선 총독을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으로 교체하고 조선총독부의 관제를 개혁하였다. 1919년 6월 조선총독부 관제개정안이 일본내각을 통과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8월 12일 예비역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조선총독(朝鮮總督)에, 내무관료 출신의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가 정무총감(政務總監)으로 임명되었다. 9월 서울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시정방침훈시」에서 관제개정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관제개혁’의 취지는 지금 폐하의 조칙(詔勅)에 지시된 바와 같이 …… 총독은 문무관의 어느 쪽에서도 임명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다시 헌병에 의한 경찰제도를 보통 경찰관에 의한 경찰제도로 대치하고 다시 복제를 개정하여 일반 관리·교원 등의 제복대검(制服帶劍 : 제복을 입고 칼을 차는 것)을 폐지하고 조선인이 임용·대우 등에 고려를 가하고자 한다. 요컨대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에 따라 정치상·사회상의 대우에 있어서도 내지인(內地人 : 일본인)과 동일한 취급을 할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치’에 의한 관제 개정이 사실상 그 본질에서는 무단통치와 같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총독정치의 기본을 순전한 문화정치로 한다는 방침을 명백히 하고 크게 문화적 개발에 힘을 기울이기 위하여 보통 문화정치라고 일컬어지지만 반도통치(半島統治)의 근본방침에 있어서는 조금도 상이한 바가 없다. 그 시정상의 강령은 치안 유지, 민의 창달, 행정 쇄신, 국민생활 안정, 문화 및 복리 증진 등이다. (조선총독부, 『시정25년사』, 314~315쪽)
이러한 방침에 따라 사이토 총독은 다섯 가지 강령을 시행하기 위해 ‘경찰제도 혁신, 교육의 보급·개선, 산업 개발, 교통·위생의 정비, 지방제도 개혁, 사법상의 개혁’ 등 제도 개선을 추진했다. 이 제도 개선 중 핵심은 경찰제도, 즉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꾼 것이다.
보통경찰체제의 수립
3·1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제는 탄압의 제1선에 서있던 군을 제2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대신 문관인 경찰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보통경찰체제로 전환하였다.
보통경찰체제의 수립을 위해 일제는 조선총독부 본부의 관제 개정과 더불어 지방관 관제를 개정했다. 첫째, 지방관 관제 밖에 있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에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와 각 도 경무부는 폐지하였다. 대신 각 도지사로 하여금 경찰권을 대행시키게 하고 그 아래 제3부를 두어 도사무관으로 하여금 제3부장으로 삼고 지방 경찰·위생사무 등에 관해 지사의 명을 받아 부하를 지휘감독하게 했다. 그리고 1921년 2월 지방관 관제 중 제1부를 내무부로, 제2부를 재무부로, 제3부를 경찰부로 고쳤다. 둘째, 지방에 경찰서를 두고, 과거 헌병분대 또는 헌병분견소를 두어 경찰서를 두지 않은 지방에도 이를 보급하게 했다. 셋째, 경찰서 확충에 따라 다수의 경찰관을 필요로 하게 되어 새롭게 경찰관강습소를 두어 신진 경찰관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도지사에게 경찰권이 부여됨에 따라 도지사는 일반행정과 경찰행정을 통일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문관경찰제도가 확립하여 일반행정기관과 경찰행정기관이 일체화됨에 따라 총독부와 도의 지배력이 크게 강화되게 되었다. 그리고 1부·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를 원칙으로(필요한 곳은 2개 이상의 경찰서 또는 주재소를 설치) 전국에 경찰기관을 확장하는 한편, 경찰서장은 경시 또는 경부가 맡고 경부 밑에 경부보와 순사를 두었다. 특히 종래 조선인에 한해 임명했던 순사보를 ‘내선차별의 철폐’라는 이름 아래 폐지하는 대신 조선인 순사보를 모두 순사로 진급시켰다.
그렇지만 군이 치안유지 기능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대를 증파하는 한편, “헌병은 군사경찰 및 국경의 감시에 관한 것은 조선군사령관, 행정경찰·사법경찰에 관한 것은 조선총독의 지도를 받는다.”(1919년 8월 19일, 칙령 397호 제2조)고 하여 헌병이 일반 행정경찰과 사법경찰에 관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와 1930년대 전반에 걸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은 ‘경찰과 헌병을 주체로 하고 군은 그 후거(後據 : 일종의 차선책)임을 원칙으로 삼고, 각 위술지(衛戌地)에서 오로지 교육·훈련에 임하며, 상황에 따라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는 것을 본칙(本則)’(『조선군사개요사(朝鮮軍槪要史))으로 하는 기본 틀로 유지되었다.
보통경찰체제가 수립됨에 따라 군이 치안유지의 전면에서 물러나 그 역할을 문관경찰에 위임하게 되자 경찰 자체의 힘을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번져나가자 경찰의 기능 강화와 인적 보충을 강요받았다. 이에 따라 ‘문화정치’를 강조한 사이토의 통치 하에서 식민지 조선의 경찰력은 오히려 그 전에 비해 현저한 증가를 보였다.
먼저 경찰관서와 경찰관의 변화를 보자. 경찰관서의 경우 1919년에는 736개소이던 것이 1920년에는 6,387개소로 3.6배로 증가했고, 경찰관의 경우, 헌병과 경찰을 합쳐 14,501명이던 것이 1919년 8월 제도 개정 이후에는 16,897명으로 약 2,400명이 증원되었고, 1920년 1월 이후 제2차 경무기관 확장으로 약 4,250명이 추가 증원되었다. 다소의 변동은 있지만 중일전쟁 전까지 2만 명을 전후하여 경찰력을 유지하다가, 1939년부터 23,000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물리적 수단으로서 경찰이 식민지배 기간 내내 주요한 역할을 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른바 ‘보통경찰체제’ 하의 2만 명에 이르는 경찰관은 전체 식민지 관리 10만 명(면리원 포함)에서 약 20%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치안기구가 양적으로도 통치기구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어 이른바 ‘경찰국가’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문화정치’에 의한 보통경찰제 수립은 물리력에 의존한 식민지배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경찰력을 강화시켜 조선민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의 강도는 더해 갔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을 하던 지바(千葉了)도 “사이토 총독이 새로 부임하자, 문명정치는 문약정치(文弱政治)라고 냉안시하고 보통경찰제는 백면서생의 탁상공론이라고 일소에 붙이면서 새 통치책의 실패를 예견했던 사람들도 점차 무단군헌(武斷軍憲) 이상의 위력을 새 경찰력에서 발견하게 되었다.”(『조선독립운동비화(朝鮮獨立運動秘話)』)고 하여 ‘문화정치’가 ‘무단통치’ 이상으로 조선을 지배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인정했다.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1920년대의 이러한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10년대는 식민지배 구축기로서 군사적 통치를 통해 행정의 전반을 관장할 수밖에 없었다. 헌병경찰의 행정 관여는 중앙의 식민권력이 지방에 이르게 하는 데는 효율성을 가져다주고 일단은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했으나, 동시에 그것은 3·1 운동에서 나타나듯이 노골적인 무력 지배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에 대처하기 위해 일제는 군을 통치의 1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공간을 문관관리(문관경찰)로 대체함으로써 조선인의 불만을 무마한다는 소극적인 정책과 더불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 등을 통해 그 수익의 일부를 조선인 자산가들에게 분배하여 식민지 체제내로 끌어들임으로써 안정된 기반하에 식민지 수탈을 추진한다는 적극적인 정책을 계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20년대는 1910년대에 비해 군이 굳이 통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식민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고, 식민체제가 상대적인 안정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유화정책
사이토 총독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몇 가지 유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총독부 산하 소속 관서 직원의 제복을 폐지함으로써 3.1운동 이후 격렬해진 조선인의 항일의식과 민심을 회유·무마하고자 했다. 총독부 직원의 제복 착용은 대만총독부 제복을 모방하여 통감부 시절부터 착용해 왔으나, 강점과 더불어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제복 착용을 극도로 권장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초등학교 교사도 옷소매에 금줄이 하나 있는 제복을 착용하고 칼을 허리에 찬 채 교실에 들어갔을 정도였다. 이러한 제복 폐지와 착검 금지는 형식상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생긴 상징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무단통치하에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던 언론, 집회 및 출판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한글신문사의 설립과 함께 정치·사회단체의 설립과 활동도 허가했다. 그러나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은 총독부의 허가주의 방침에 따라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민의창달(民意暢達)이란 명목으로 지방유지의 소집 및 개정의 취지전달, 민정시찰원의 파견, 중추원의 회의 회합, 도참여관 소집 등을 시행하여 조선인 엘리트를 통한 민심 수습책을 펼쳤다.
3·1 운동 이후의 이러한 변화양상은 『구례유씨가의 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청결검사’를 나온 헌병의 태도가 “전에 비하여 백성에게 너그러운 모양”(1919. 8. 5)이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찰의 고압적인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정책 변화가 통치의 말단에도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3·1 운동은 식민지 조선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각종 사회단체가 설립되고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주장을 제한된 공간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1924년 5월 13일자 일기에는 “주사 재종속이 근년에 스스로 소작회장이 되었는데, 몰래 부자의 촉탁을 당하여 본서에 갇혀 있다고 하여 면회차 신문사에 가서 탐문을 하니 방금 풀려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소작회장, 신문사 등 1910년대에는 등장하지 않던 단어들이 일기 속에 나타난 것이다.
민족분열정책으로서의 문화정치
일제는 민족운동에 대해 무력으로 탄압하는 한편, 친일파를 육성하고 민족부르주아의 상층부 및 동요분자를 체제내의 개량으로 끌어들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 정책에 전력을 기울였다.
사이토는 먼저 사회의 다방면에 걸쳐 친일파를 육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1920)에서 그는 ‘친일파(親日派)’와 ‘배일파(排日派)’를 구분하고 ‘배일파’는 탄압하되 ‘친일파’에겐 사정이 허락하는 한 ‘편의와 원조’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 초부터 친일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활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책은 친일과 배일 할 것 없이 일체의 결사를 금지했던 1910년대의 지배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를 이용하여 민족운동의 열기를 약화시키려던 일제의 정책이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증오와 반대투쟁으로 실효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키자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민족부르주아지에게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1919년 말 이후 정치단체를 제외한 결사의 자유가 인정되자 전국 각지에서 수천에 이르는 각종 단체가 결성되어 한국 민중에게 반일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이토는 “생각컨대 앞으로의 운동은 작년 봄에 일어났던 만세소요같이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이 아니라 근저로부터 실력 있는 조직적 운동이 될 것임을 미리 각오해야 할 것”이라 판단한 뒤 이 배일기운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사상(事象 : 배일기운을 뜻함)에 대해 압박을 주어 없앤다는 따위는 도저히 바라서는 안된다. …… 다른 방책이란 없고 위력을 동반하는 문화운동뿐이다. …… 기운은 이 운동을 위해 안성맞춤으로 옮겨가고 있다. 따라서 문화운동도 오늘만이 충분한 효과를 올릴 수 있는 전망이 확실한데 만약 이 기회를 놓쳐서 그들이 목적하는 바에 상당한 기틀을 잡은 뒤에야 갑자기 추세를 돌리려고 하더라도 일조일석(一朝一夕 : 짧은 시간)에 해낼 수는 없다. 이것이 우리가 특히 오늘날 문화운동을 촉진해야 한다고 힘주는 까닭이다.
‘위력을 동반하는 문화운동’이란 식민지 통치권력을 배경으로 위압과 회유로 실력양성을 지향하는 민족감정을 역이용해서 독립 부정의 방향으로 그 칼끝을 돌리게 한다는 뜻이다. ‘문화운동’이라는 이름아래 총독부가 이러한 배일기운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은 1921년 5월 이광수를 중국으로부터 회유 및 귀국시키고, 같은 해 6월 복역 중인 최린과 최남선을 형기 만료 전에 조건부로 석방하는 가출옥(假出獄)을 시키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 강령으로 실력양성, 참정권 획득청원(또는 자치청원), 민족성 개조(改造)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주의 우파에 대한 선전공작에 들어갔다.
요컨대 일제가 내세운 ‘문화정치’란 3·1 운동으로 성장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고양에 대처하면서 식민지 수탈체제의 강화로 나타난 민심의 악화를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말로 은폐하는 한편, 민족부르주아의 일부를 실력양성주의, 문화주의라는 체제 내 개량주의로 끌어들여 조선 사회를 분열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보통경찰통치
개요
보통경찰제는 헌병 대신 경찰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제도이다.
목적
3.1운동이 벌어진 이후, 조선총독부 내에서는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고, 이에 경찰제도가 바뀌게 된다. 무단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나온 제도가 "보통경찰제" 이다.
내용
일제는 각 군/부에 1개의 경찰서를 각 면에 1개의 주재소를 설치하였으며, 헌병을 대신할 경찰인력을 증원시켜 나갔다. 또한, 순사보, 헌병보조원 출신의 조선인들을 모두 순사로 임용하면서 유화책을 펼쳐나갔다.
실상
실상은 헌병이 경찰로 바뀐 것 뿐이였다.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패악질을 부리는 것은 똑같았으며, 헌병 출신이 옷만 경찰복을 갈아입은 후 업무를 수행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경찰들을 긴급하게 채용함에 따라 배달원,목욕탕 관리원 등 자격미달인 자들이 대거 임용되었다는 점도 지적 대상이다.
이후
1930년대가 접어들면서 일제는 부/군에 2개의 경찰서, 면에 2개의 주재소를 설치하고, 특히, 국경지대에는 더 많은 경찰서를 설치해 집중적으로 감시하였다. 보통경찰제를 실시할 때보다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이 더 강화되었다.
참정권 없음

산미증식계획
정의
1920년부터 일제가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한 쌀 증식정책.
개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업 부문의 식민지적 재편을 완료한 일본 제국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성장한 일본 독점자본의 요구에 부응,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삼기 위해 1920년부터 3차에 걸쳐 추진한 식민지 경제정책이다.
제1차 계획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었다. 제2차 계획은 1926년부터 1935년까지의 10개년 계획이었다. 그런데 10개년 계획이 1934년에 중단된 것은 조선미의 대일수출 증대로 일본 농업이 위기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1937년, 일본은 중국본토 침략을 개시하였다. 군량미 수탈을 위해 다시 조선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1940년 다시 산미증식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이것이 전시 중에 실시된 제3차 산미증식계획이다.
역사적 배경
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산업자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이 강화되면서 대중생활은 궁핍화했고, 특히 농촌의 희생이 강요되었다. 일본의 농업 생산력은 급격히 떨어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증대되고 있던 조선미에 대한 수요는 대전 후 격증하였다.
더욱이, 1918년에 대규모의 쌀폭동이 일어난 데다가 1920년부터 대불황이 닥쳐왔다. 따라서, 자연 자원의 부족 및 농업 발전의 정체에 기인한 식량과 원료 부족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일본 독점자본은 식민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서의 식량 증산을 강행해 식량의 안정된 공급로를 확보해야 할 절박한 사정에 처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이 이미 완료되어 식량 공급지로 활용할 수 있는 기초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을 과잉 상태의 독점자본을 투하할 시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또 자국의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한 식량 공급지로 전환시키기 위해,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
내용
1. 추진 분야
세 차례에 걸쳐 계획 실시된 산미증산계획은 농지 개량에 의한 것과 농사 개량에 의한 것, 두 가지 부문에서 추진되었다. 농지 개량에 의한 증산 계획은 관개시설의 개선, 지목교환·개간·간척에 의한 농지 확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농사 개량에 의한 계획은 품종 개량·퇴비 장려·적기 번식·심경·제초운동 등을 전개해 단위 면적에서의 수확량을 증가시키자는 것이다. 1917년에 이미 「조선수리조합령」을 발포하여 수리조합을 창설하고 수리시설의 개량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총독부에서는 토지 개량 및 증산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없었으므로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수리조합은 산미증식계획의 수립과 함께 비로소 활동을 개시하였다.
2. 제1차 계획
산미증식운동이 본격적으로 계획 실시된 것은 1920년에 들어서부터이다.
농지 개량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1920년 11월 식산국에 토지개량과를 신설해 농업수리·토지개량·국유미개간지개척 등 일체의 사무를 관장시켰다. 또, 같은 해 이 사업에 필요한 「토지개량사업보조규칙」과 「조선공유수면매립령」을 공포하였다.
농사 개선을 위해서는 이미 1906년 통감부 시대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였다. 1908년 종묘장을 도청 소재지에 설치한 이래 1911년부터는 종묘장을 확장시켜왔다. 제1차 산미증식계획 수립과 더불어 1911년 종래의 종묘장 시설을 쇄신하고, 읍·면 채종답의 경작자에게는 보조금을 주고 5개년 만에 한 번씩 우량 종자를 바꾸었다.
그리고 권업모범장이 조선 풍토에 맞는 신품종의 육성을 담당하게 하고, 각 도 종묘장이 각각 장려 품종을 정하게 하였다. 그 결과 1926년까지 종자 갱신은 100만 정보를 돌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종전의 자급 비료와 함께 판매 비료의 사용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1차 산미증식계획은 전체적으로 조선내 미곡 증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계획을 갱신해 1926년부터 제2차 계획을 세우고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3. 제2차 계획
조선총독부는 제2차 계획에서 토지개량사업을 한층 강행하기 위해 우선 관제 및 법령을 정비하였다. 1926년 6월 식산국 산하에 이미 설치되었던 토지개량과 외 수리과와 개간과를 신설하였다. 1927년 5월 다시 토지개량부를 설치하고 위의 3과를 통괄해 증산 계획을 추진하였다.
1927년 12월 「조선토지개량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해 수리조합사업의 건전한 발달을 기하기로 하였다.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개량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해 정부의 원조 하에 토지개량사업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제2차 산미증식갱신계획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1926년 이래 12개년을 기해 35만 정보의 토지 개량을 실시하고 농사 개선을 병행해 472만 석을 증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토지개량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농사 개선을 위해 1928년 권농공제조합이 창설되었고, 1929년 수원 권업모범장을 농사시험장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남한 지방의 미작 개량사업을 전담하기 위해 1930년 이래 농사시험장을 각지에 확장시켰다. 여기에서 조선의 기후 풍토에 적합한 품종 개량을 실시하고 재배법을 개선해 일반 농가에 보급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러한 농사개선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아 단위 면적에서의 미곡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제2차 계획기간 중 토지개량사업으로 개량된 면적은 14만 2095정보였다. 이로써 증대된 수확은 117만 3000여 석이었다. 이것은 전체 계획 472만 석의 25%에 해당한다. 이 기간에 수리조합도 증가하였다.
그 동안 창설된 조합은 123개 소이고, 몽리면적은 1만 5364정보에 달하였다. 결국, 제2차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의 미곡 생산량은 상당한 증가를 보였던 것이다. 동시에 이 기간에 대일미곡 수출이 격증하였다. 이처럼 수출량이 격증한 것은, 일인당 소비량의 감소 희생 위에 대일수출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대일미곡 수출 강행으로 국내에서는 식량이 부족해서 만주 잡곡 도입이 격증하였다. 한편, 조선미의 대일 수출이 격증하자 따라 일본 농업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품질에 있어서 조선미보다 열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고가였기 때문에, 조선미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일본미가가 폭락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1930년대부터 일본농민들 사이에 조선미 배척운동이 나타났다. 일본 정부는 이와 같은 난국에서 자국의 농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1932년 11월 미곡통제조사회를 설치하였다. 다음 해 3월에는 「미곡통제법」을 공포하여 조선미 수입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사태에 직면한 조선총독부는 1933년 1월 조선미곡위원회를 설치해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더구나 1933년 조선의 미곡 생산이 대풍작을 보자 총독부는 미곡의 장기 저장을 장려하는 등의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다음 해인 1934년, 산미증식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한 조선총독부는 허구에 가득찬 농촌진흥운동이라는 것을 추진했으나 이것은 자력갱생이라는 구호 제시에 그쳤을 뿐이다.
4. 제3차 계획
1939년에 들어서부터 조선 미곡 증산계획은 다시 제기되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군대와 군수산업 건설에 많은 농민이 징발되어 일본의 국내 농업은 노동력이 부족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일본에서의 쌀 생산량은 감소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미는 대륙파견군의 식량을 담당하게 되어 그 증산이 또 다시 요청되었다. 그러나 1939년 조선에서는 미증유의 대한발이 있어서 예년에 비하여 약 40%의 감수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향후 10개년을 기해 680만 석의 증산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제3차 산미증산계획은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추진했기 때문에 많은 자재와 자본을 투입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제3차 계획에서는 제1·2차 계획에 있어서와 같은 토지 개량에 의한 증산보다도 농사 개선에 의한 단위면적당 수확량 증대에 중점을 두었다.
제3차 계획에서는 농사 개선에 의한 증산 목표를 511만 석, 토지개량사업에 의한 증산 목표를 169만석으로 예정하였다. 그러나 토지개량사업은 소극적인 개량에 불과했고, 농사 개선도 계획된 1단보당 3석이라는 것부터가 탁상공론에 가까웠다.
더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인적 자원과 비료 부족이 가중되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제3차 증산계획은 한낱 계획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 뒤 조선총독부는 국내 미곡 소비량을 절약하여 대륙주둔군의 식량을 공급하는 소극적인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회사령 폐지
개요
會社令 / 朝鮮會社令(朝鮮会社令)
회사령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회사를 설립할 경우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한 조령(條令)이다. 1910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 제령 13호로 공포되어 3일 후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고 1920년 3월 31일까지 존속하였다.
표면상의 명분은 조선인은 회사 경영 경험이 부족하여 사기를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으나, 한국사학계에서는 조선 자본과 기업의 성장 억제를 위한 정책이라는 해석이 주류이다. 하지만 회사령을 제정한 것은 조선인 자본 통제를 포함해 더 있었다.
영국을 포함한 식민지 관리에서 원자재는 식민지에서 대량 생산하여 수입하고 공산품은 본토에서 수출하는 구조를 형성하여 값싼 소비재와 식민지를 상대로 한 공산품의 무역흑자를 형성하는 것이 기본 구조이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원자재(쌀) 생산량을 늘리고, 회사령을 통해 조선 내부의 창업을 조선총독부가 통제했다.
그래서 회사령은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조차 조선에 회사를 세우기 쉽지 않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회사의 설립과정에서 허가제도를 두어 통제하는 것은 물론, 운영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정하는 모호한 기준에 따른 "공공의 질서" 및 "선량한 풍속"에 위반될 때에는 회사를 폐쇄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회사령의 모호한 규정은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회사 창립자들에게도 불리하게 적용되어 원성이 빗발쳤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인에게도 이렇게 엄격한 규정을 들이민 것은 조선의 모든 자본을 총독부의 통제 하에 두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또한, 아직 일본 본토의 산업이 자국 기업의 타국 진출을 용인할 정도로 성숙되지 않았고, 그러한 상태에서 규제 장치가 없으면 일본 기업이 인건비가 싼 조선에 경쟁적으로 진출하여 일본 본토의 산업이 붕괴되는 결과가 초래되므로 이를 막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즉, 총독부 몫의 조선의 자원과 자본이 일본에서 건너온 대기업 사업가들에게 빨려들어가 일본 본토로 유출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 본토 산업자본의 육성을 위해 만들어낸 법이라고 볼 수 있다.
폐지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1920년 4월 1일에 폐지했다.
회사령 폐지를 앞둔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을 맞으면서 일본 제국은 남양군도, 산둥 반도 등 구 독일 제국의 식민지를 전리품으로 챙기는 등 쏠쏠한 정치적 이득을 봤다. 문제는 1차대전의 전쟁특수를 통한 버블경제가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주가지수인 닛케이 225[4] 지수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공식 종전)이후 4개월만에 80%나 폭락했고 전쟁특수로 떼돈을 벌었던 졸부(통칭 나리킨)들은 일시에 알거지가 되었다. 1차대전의 버블을 타면서 선물 거래로 거대한 부를 쌓았던 반복창도 마찬가지. 문제는 졸부들만 알거지가 된게 아니라 일본 제국 경제 자체가 얼어붙으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관동 대지진도 이 시점에 터지는 바람에 경기는 더욱 얼어붙고... 그러면서 일본 제국의 신민들이 죄다 은행으로 뛰어와서 뱅크런을 일으키며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자 다이쇼 덴노가 직접 은행들을 영업정지시키고 예금자 보호령[5]을 내렸다. 당시 예금자 보호는 일본 정부와 일본의 은행들이 긴급 자금을 조성하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개년에 한해 예금자들한테 1만 엔(현재 한국 돈으로 대략 1억 원) 어치의 예금 한도에 대해서 금(Gold)으로 보상하는 정책이었다. 여기까지 해서 버블경제 붕괴에 따른 은행 파산을 막는 데는 성공했는데, 일본에는 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 본국 정부는 식민지들한테 긴급하게 금과 은을 채굴할 것을 통보했고,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국 정부의 요구를 따라 금광 개발을 위해 회사령을 철폐한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회사령 철폐 직후에 조선과 대만, 남양군도 등 일본의 식민지들에서는 금광, 은광 개발이 성행했고 1922년 예금자 보호 프로그램이 종료된 이후에 와서야 차츰 다른 회사들이 식민지에 생겨나거나 일본에서 진출하였다.
1920년에 1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호황이 사그라들자 일본의 상공업자들은 이전보다 더욱 거센 반발을 보였고, 이로 인해 회사령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회사령 철폐 이전이나 이후나 조선인 상업자본은 규모가 미미했기 때문에 회사령이 철폐된다고 해서 조선인 회사가 우후죽순 창립되는 일은 없었고, 그 이득은 주로 일본인 상업자본에게 배분되었다. 이런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벌어진 것이 물산장려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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