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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독일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들

by noksan2023 2026.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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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들

 

 

 

 

 

 

사진 속 한국인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외국에서 힘들게 일하는 상황일 텐데도,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들은 왜 그 먼 곳까지 가서 일해야 했을까?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경제 개발을 이루기 위하여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다. 특히 같은 분단국이었고, 경제가 발전한 서독에 차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으려면 공신력 있는 금융 기관의 보증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최빈국이었던 한국을 보증해 줄 외국계 은행은 없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서독 정부와 협의 끝에 한국의 인력을 서독으로 수출하고 그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빌리기로 합의하였다.

 

서독은 기피 업종이었던 광부와 간호사의 인력 부족이 심각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63년 광부 파견을 시작으로, 간호사까지 약 2만 명가량의 인력을 파견하였다. 1950년대부터 서독으로 파견된 간호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기독교 선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민간 교류 방식이었다. 

 

초창기 한국 간호사들의 업무는 중증 환자의 대소변 처리식사 시중 등 독일인들이 꺼리는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한국 간호사들은 헌신적이고 성실하게 일하였고, 이 모습은 많은 독일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는 1970년대 후반 석유 파동 등을 겪으며 자국민 우선 정책을 펼친 서독 정부가 한국 간호사들의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추방하려 했을 때 많은 독일인이 한국 간호사들과 함께 싸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 병원의 집단 해고와 강제 귀한 등에 반대하는 의미로 간호사복의 한쪽 소매를 자르는 결의를 보여 주었다. 

 

서독으로 파견된 간호사의 한 달 월급은 대략 700마르크 정도였다. 이는 당시 한국 장관의 월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계약 기간은 3년이었지만, 많은 파독 간호사가 서독의 높은 생활 수준과 귀국 후의 일자리 문제 등으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일에 남거나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민하였다. 독일에 남은 간호사 중에서는 공부를 시작해 의사나 약사가 된 사례가 많았다.

 

2000년대 초 우리나라가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자, 노후를 고국에서 보내고 싶은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이 경상남도 남해에 집단으로 이주하여 독일 마을을 형성하였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1만 명이 넘게 파견된 간호사들은 먼 이국땅에서 외국인이라는 차별과 무시를 이겨 냈다. 그리고 환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과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 독일인에게 긍정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심어 주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독일에서는 한국인 간호사의 취업을 선호하고 있다. 

 

 

 

파독 간호사派獨 看護士

 

 

 

베를린서 파독간호사 사진전의 사진

 

 

 

정의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한 해외인력수출의 일환으로 한국정부에서 독일(서독)에 파견한 1만여 명의 간호사.

 

시대적 배경

 

1960년대 한국은 심각한 실업난과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외화부족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였다. 반면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사태를 겪게 되었다. 특히 간병인과 같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간호 인력의 부족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내용

 

정확한 의미에서 간호 인력의 독일 송출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송출은 기독교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간교류의 형식이었다. 이후 1966년부터 독일 마인츠 대학의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 대규모 간호사 파견이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한국해외개발공사가 간호 인력의 모집과 송출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만 226명의 간호 인력이 독일에 파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파독간호사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한 1천만 마르크 이상의 외화는 한국 경제개발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따라서 최근 이들의 국가발전에 대한 공헌에 대해 정부차원에서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파독 근로자

 

 

 

태백 기념관에 파독 광부 사진

 

 

 

개요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한 해외인력수출의 일환으로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가 한독근로자채용협정(Anwerbeabkommen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Südkorea) 등을 통해 서독에 파견한 노동자로 직종은 광부와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였다.

 

상세

 

파독 근로자(광부,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는 일반적으로 1960~70년대 경제 개발을 위한 원조 및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파견된 광부, 간호요원 및 기능공을 뜻한다. 한국 정부의 협정에 의한 것 이외에도 민간 알선을 통해 서독으로 파견된 소수의 간호사가 있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파견 시기와 파견 인원은 출처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현재 정부의 공식적인 집계인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는 1963~1977년 사이 광부 7,936명, 간호요원 11,057명 및 기능공 931명 등 총 18,899명으로 밝히고 있으나 1963년 이전에 주로 민간 알선을 통해 파견된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의 파견은 포함되지 않는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이전까지 주로 미국에서 무상원조를 받아오던 상황에서 미국이 서구 경제 회복과 자국 국제수지 악화에 따라 기존의 무상원조를 줄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다른 서방 국가에 대해서도 경제 지원의 유치를 시도했다. 이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하기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서독은 1961년 3월 기술원조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협력이 시작되었으며 1961년 12월 '한․독 정부간의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공공과 상업차관 합계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3,700만 달러 상당)의 유상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한국은 인구 급증으로 인한 실업난에도 처해 있었으며, 이는 전후 부흥에 의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서독의 수요와 맞는 상황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전에는 대한석탄공사가 지멘스와 광부 송출 각서를 맺었다가 쿠데타로 흐지부지된 바도 있다. 그러나 서독 광산업계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면서 1962년 기업별로 인력 유치 의사를 밝히며 서독 정부를 압박하고 1963년 5월에 공식적으로 서독 노동부 차원의 유치 의사가 전달되면서 1963년 12월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한․독 정부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광부와 달리 간호인력(간호사, 간호조무사)은 1963년에 정부가 파견하기 이전인 1950년대부터 이미 민간에서 파견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독의 고도성장으로 간호 인력이 부족해지자 마인츠 대학교 병원에 재직하던 이수길 박사를 비롯한 한국계 의사들이나 독일 종교인들의 주선으로 1950년대부터 간호사 송출이 시작되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오히려 주독대사관이 가뜩이나 광부들이 대거 들어온 통에 관리가 어렵다고 간호사 파송을 반대할 정도로 미온적이었으나 1966년 광부 송출을 전담하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이수길과 업무 계약을 맺었고 1969년에는 독일병원협회와 협정을 맺어 파송이 진행되었다.

다만 1972년을 정점으로 간호인력 파송은 감소했는데 이는 간호인력 상당수가 계약기간을 어기고 이탈하여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주하는 문제가 있었고 서독으로 파견된 인력은 곧 한국의 의료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73년 서독 정부가 외국인 노동력 도입 중지 방침을 내림에 따라 유예를 거쳐 간호 인력은 1976년, 광부는 1977년 파송이 종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서독이 차관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한국 측의 지급보증이 불가능하여 파독 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잡는 방식으로 해결했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하의 근거를 볼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 서독 정부의 대한 차관은 1961년 의정서에 의한 1억 5천만 마르크와 1964년 차관협정에 의한 1억 5,900만 마르크가 있는데(이 중 정부 차관은 각각 7,500만, 5,400만 마르크) 광부 파독 협상은 1963년에 있었다. 정부의 간호사 파견은 1966년부터이며 서독 정부와의 협정에 의한 파견은 1969년이다.
  • 물론 양 조약문에 광부 임금을 담보로 잡는 문항은 없으며 1964년(재정)과 1967년(상업) 차관협정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은행의 지불보증만이 명기되어 있다.
  • 광부 파독 협정에 규정된 인원은 1969년 개정 전까지 총인원 1천명인데 이들의 임금은 서독의 차관을 보증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다. 1966년 기준 파독 광부의 평균 임금은 600마르크 수준인데 1천명이 10년치 임금을 다 모아도 7,200만 마르크밖에 되지 않는다.
  • 광부 임금을 담보로 잡을 절차가 정해져 있지 않다. 당시 협상 실무를 맡았던 백영훈 중앙대학교 교수(당시 직함)의 회고에서는 광부의 월급 1달분[7]을 코메르츠방크에 예치한 것을 담보로 취급했다고 하는데 파독 근로자의 임금으로는 상업차관은 제쳐두고 정부 재정차관만 충당하려 해도 20년분은 모아야 한다. 또 회고에서는 광부 5천명, 간호사 2천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 협정으로 합의하고 파견한 근로자에 비해 매우 많은 수다. 아마도 협상 과정에서 아이디어로서 제시된 적은 있을 수 있으나 실제 담보 기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실제로는 파독 근로자의 월급이 코메르츠방크에 예치는커녕 거쳐가지도 않았다.
  • 당시 상업차관(서독 정부의 보증 형식)의 실무를 담당한 독일재건은행(KfW)은 공식 서한에서 "한국 차관 사업이 파독 근로자 사업과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파견 조건으로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1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계약조건을 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불확실하다. 조사에 의하면 송금을 전혀 안 하는 경우도 많이 존재했다. 물론 파독 노동자들이 간 것이 정부 주도이든 아니든 간에 경제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파독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독일에서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작업 중에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었다.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정해본 교수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1967년 당시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보내온 송금액을 한국 상품수출액의 35.9%, 무역외수입의 30.6%를 차지했다"면서 "이들이야말로 한국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게 도운 일등공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상기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1965~1967년 3년간 서독 근로자의 송금액은 총수출 대비 1.6~1.9%로 정해본의 발언과는 격차가 크다. 이는 정해본이 전체 본국 송금액과 혼동했거나 다른 기사에서 정해본의 발언이 잘못 인용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 해외인력수출_KBS 20130504 방송

 

 


당시 파독 간호사로 재직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본 간호(대변 치우고 식사수발 등)가 주요 업무였다고 하며, 직업 현장에서 무시와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파독 가자마자 당장 IV 꽂고 각종 처치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 아니었다. 광부도 지하 1,000m가 넘는 석탄광산 막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더구나 이렇게 중노동을 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광부가 아니라 고졸로 현재의 대졸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지원자들은 선발 심사전형에서 떨어질까 싶어 일부러 손에 연탄 가루를 묻히는 등 험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면서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했다.

왜 이렇게 고학력자들이 많았냐면, 정부에서 정한 자격 요건부터 중졸 이상으로 제한했고 워낙 경쟁이 치열했다 보니 소위 빽 있는 사람들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빽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학력을 가질 확률도 높았다. 이런 인텔리들이 왜 굳이 이런 막노동을 하러 왔냐면 돈은 물론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해외로 나가려면 정부 허가가 필요하던 시기였다. 그 시절에 해외에 다녀온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당연히 경쟁률이 미어터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온 인텔리 출신 광부들은 일은 서툴렀을지언정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오히려 실제 광부 출신들보다 독일 생활에 잘 적응했고, 광부 일이 끝난 뒤 타 직업으로 전직하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악바리 같은 집념을 보여주면서 독일에 남게 된 한국 간호사도 있으며 이들의 노고로 지금도 한국 간호사, 한국 간호조무사 자격이 있으면 독일에서 해외 취업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계약기간 이후에는 대다수 간호사들이 계약을 연장하고 독일에서 살게 되었다. 광부들 가운데 60% 가량도 독일에 남아 유럽 한인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1960년대는 합법적인 이민이 시작된 때였기 때문에 이 기회에 독일 및 타 국가로 이민하는 인구가 늘었다.

한편 독일 사회의 파독 근로자들에 대한 대접은 모범적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어느 나라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은 시궁창이기 쉬운데, 독일에서 근로한 한국인 광부나 간호사들은 해외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이나 현장에서 차별 외엔 사회적으로 큰 핍박을 받지 않았고, 급여나 복지도 독일인과 똑같이 대우받았다. 1960년대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은 자신들도 독일인과 동등하게 손가락을 조금 다쳐도 공상 환자로 분류되어 100%의 임금을 받고, 배탈이나 감기에도 80%의 임금을 받으며 쉴 수 있는 독일의 선진 노동 환경에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더구나 요즘도 그렇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지 국가에서 범죄나 각종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한국인들은 독일에서 범죄나 부정에 연루되는 일도 적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크게 배척받을 까닭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을 대표하여 파견되었다는 의식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곧 한국 전체의 잘못으로 평가받는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어서 더더욱 처신에 신경을 썼다. 휴일에 외출할 때도 타 국가 노동자들은 평소 입던 대로 후줄근한 차림으로 외출을 나갔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파독 광부들은 광부 일을 할 때 들었던 '글뤽 아우프(glück auf)'라는 말을 자신들의 모토로 쓰고 있으며, 이 인사말에서 이름을 따온 '글뤽아우프 복지회'라는 단체도 있다. 독일 광부들의 전통적인 인사말로, 광산에서 일할 때 사고가 생기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마치길 바라는 뜻의 인사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살아서 만납시다'로 번역되었다.

파독 근로자 중 노후는 고국에서 보내고 싶어 독일인 배우자와 함께 귀국한 사람도 많은데 그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 남해독일마을이며 파독역사전시관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현재 40여 채가 넘으며 이 중 절반은 민박업을 겸하고 있다. 남해군청이 땅을 분양할 때 반드시 파독 근로자이거나 그들의 가족일 것[19], 독일식으로 집을 지을 것, 민박업 외에는 불가 등 엄격하게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동네가 무척 깔끔한 편이다. 독일 주택 외에도 독일식 광장도 있고 독일 관련 행사도 열려서 독일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파독 노동자들과 만나 위문하는 자리도 있었다. 뤼브케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위문하였던 곳은 뒤스부르크시에 위치한 곳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해외에서 이런 고생을 하게하여 미안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손들에게는 이런 불행을 겪게 하지 맙시다.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고 파독 노동자들과 육영수 여사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편 근로자 파독이 박정희 재임기 경제개발의 아이콘과 같이 부각되는 것과 상반되게 독일 근무 후 현지 정착하지 않고 귀국한 노동자들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심지어 간호사들이 몸을 팔고 다닌다는 등의 헛소문이 돌아 명예가 실추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20]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 위문 시 약속한 재취업 주선 등의 건의사항이 묵살되었고 현지 사망자의 유해를 형편없이 처리하고 심리 상담 등 관리가 소홀하여 자살자가 나오기도 했다.

2020년 파독 근로자의 예우를 목적으로 한 "파독 광부ㆍ간호사ㆍ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2023년 8월 독일의 국적법 개정에 따라 67세 이상 파독 근로자는 어학증빙 없어도 독일 국적 취득이 가능해졌다

 

매체에서의 파독

 

  • 만화 검정 고무신의 주인공 이기영, 이기철 형제의 삼촌이 파독 광부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TV를 사서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와 영자 부부가 각각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일했으며,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주인공 오말순의 남편 반상일이 파독 광부로 일하러 출국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광부 일을 하다가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사망한다. 결국 과부가 된 오말순은 홀로 아들 반현철을 키우는 힘겨운 삶을 보내게 된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위르겐 힌츠페터가 "독일에서 일하는 광부와 간호사 중에 한국인이 많다."며 언급한다.
  • 독일 ZDF가 투자하고 한국계 독일인 영화감독인 조성형 씨가 남해독일마을을 촬영한 '그리움의 종착역'은 파독 간호사와 독일인 남편이 남해독일마을에서 정착한 모습을 담았다.
  • 이미자의 2022년 콘서트인 이미자 특별감사콘서트가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에 대한 헌정 목적으로 이루어진 콘서트다. 참고로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의 하재헌 하사에 대한 헌정도 포함되었다.
  • 태백산맥으로 유명한 작가 조정래가 6.25 전쟁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다룬 작품인 소설 한강 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생활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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