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왕 : 숙 제 찰 반 본
숙 : 충숙왕
제 : 제폐사목소
찰 : 찰리변위도감
반 : 반전도감(수탈기구)
본 : 본조편년강목
1. 충숙왕
충숙왕은 고려후기 제27대 왕이다. 1313~1330년과 1332~1339년 두 차례에 걸쳐 재위했다. 충선왕의 왕위 선양으로 즉위했다. 안향을 문묘에 배향하고 폐단이 많던 사심관 제도를 폐지했으며, 권세가가 점령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등의 업적이 있다. 원나라의 지나친 세공 요구를 삭감하게 하고 공녀와 환관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했다. 심양왕 왕고의 무고로 원에 불려가 5년 동안 머물렀다. 정치에 싫증을 느껴 세자(충혜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돌아갔으나 충혜왕이 황음무도를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자 다시 복위했다.
1299년(충렬왕 25)에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뒤에 강릉대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에 왕위를 받고 돌아와서 연경궁에서 즉위하였다. 1314년 백이정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워오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았다. 또 민지 · 권보(權溥) 등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하였다. 그리고 강릉도존무사사(江陵道存撫使司)를 명주(溟州: 지금의 江陵)에서 등주(登州: 함경남도 안변)로 옮겼다. 또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양광도,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를 경상도, 교주도(交州道)를 회양도(淮陽道)로 고쳤다.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천(貴賤)의 복색(服色)을 정하고, 동당시(東堂試)를 응거시(應擧試)로 고쳤다.
1316년 상왕인 충선왕이 심양왕(瀋陽王)의 지위를 조카인 왕고에게 물려주어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되자, 고는 고려의 왕위를 넘보게 되었다. 1318년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 또는 士用) · 김성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을 보내어 이를 평정하게 하였다. 또 그 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을 폐지하였다.
제폐사목소를 설치, 찰리변위도감으로 고쳐 권세가가 점령한 전민(田民)을 색출해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채무관계에서 이자가 원본(元本)에 상당할 때에는 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안향을 문묘에 배향했으며,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을 설치하였다. 이즈음 심양왕 왕고는 왕위찬탈의 뜻을 품고 원나라에 무고하자 왕이 불려가 그 곳에서 5년 동안이나 머물게 하였다. 또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에 편입시켜 다스려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왕은 차츰 정치에 싫증을 느껴 한때 왕위를 심양왕에게 넘겨주려 했으나 한종유 등의 반대로 이를 취소하고, 1330년 세자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그러다가 1332년 충혜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주1해 정사를 돌보지 않자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 충숙왕이 복위되었다. 충숙왕은 원나라가 지나치게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심양왕과의 정권다툼에 시달리고, 원나라에서 5년 동안이나 체류하고 돌아온 뒤에는 조신(朝臣)을 접견하지 않고 정사도 돌보지 아니하였다. 성품은 엄숙하고 의지가 굳으며, 침착하고 총명했으며, 속문(屬文)을 잘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다.
2. 제폐사목소
제폐사목소라 함은 1318년(충숙왕 5) 5월 호세가(豪勢家)들이 점유한 전민(田民)을 찾아내어 본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을 일컫는다. 같은 해 6월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개칭하였다가 호세가들의 반발로 폐지하였다. 그러다가 1321년에 찰리변위도감으로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같이 치폐를 거듭한 것은 호세가들의 반발 외에 충선왕·충숙왕 부자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정치세력간의 대립에도 연관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1321년에 다시 설치된 것도 1320년 원의 연경(燕京)에서 고려의 정치에 간여하던 충선왕이 티베트[吐蕃]에 귀양가고 연경에 없는 틈을 타서 설치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이와같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3. 찰리변위도감
1318년(충숙왕 5) 호세가(豪勢家)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그 본주인에게 환원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노비의 부적(簿籍)과 결송(決訟)을 관장하는 도관(都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318년 5월 나라 안의 큰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가 설치되었으나, 1개월 뒤 이를 찰리변위도감으로 고쳐 세도가들이 강점한 전민(田民)을 찾아내어 본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맡게 하였으나 권세가들의 반발로 선왕(先王 : 忠宣王)에 의하여 곧 폐지되었다. 그러나 3년 뒤인 1321년 ‘拶’자를 ‘察’자로 고쳐 다시 설치되었다. 직제 및 소멸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366년(공민왕 15)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 세워져 이를 중심으로 점탈전민의 환원업무가 적극적으로 추진됨으로써 점차 그 기능이 약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같은 찰리전민도감의 잦은 치폐는 곧 충선왕과 충숙왕 부자 사이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다. 즉, 선왕인 충선왕은 왕위를 둘째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심양왕(瀋陽王)자리는 양자인 호(暠)에게 양위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려조정은 심왕당(瀋王黨)과 신왕당(新王黨)이 형성되어, 정치적 대립이 심하였다. 더욱이, 충선왕은 연경(燕京)에 머물면서 고려의 내정간섭은 물론, 실질적인 왕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숙왕과 불화가 컸다. 충숙왕 5년에 세워진 이 찰리변위도감이 충선왕의 결정에 의하여 혁파되고, 동7년 12월 충선왕이 토번(吐蕃)으로 귀양가자 이때를 이용하여 다시 설치한 것으로 당시 왕실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4. 반전도감(수탈기구)
반전도감은 수탈기구로 1328년(충숙왕 15) 12월에 충숙왕(忠肅王)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임시관서를 말한다. 각 품의 관원 및 오부방리(五部坊里)의 백성들로 하여금 백저포(白紵布)를 차등 있게 내게 하고, 또 경기(京畿) 8현(縣)의 민호에게 포(布)를 차등 있게 거두어들였다. 이 때 간리(奸吏)가 연줄을 대어 무법하게 징수하므로 중외(中外)가 소란하고, 또 내신(內臣)이 내탕병자(內帑甁子)로 쌀을 사들이며 주구(誅求)를 일삼았다. 양부(兩府)가 이를 걱정하여 5도에 찰방(察訪)을 파견하여 민폐를 막으려고 하자 내인(內人)이 이를 중지한 것을 보면, 서울과 경기 8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미포(米布)를 혹독하게 염출한 것을 알 수 있다. 반전도감은 뒤에 반전색(盤纏色)이라 하였다.
5. 본조편년강목
본조편년강목이라 함은고려후기 문신 민지가 1317년(충숙왕 4) 고려왕조에 관하여 저술한 역사서를 말한다. 일명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줄여서 ‘편년강목(編年綱目)’이라고도 한다. 모두 42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편찬동기는 정가신의 <천추금경록>을 증수하라는 충렬왕의 명으로 <세대편년절요>에 이어 저술된 것으로 보아 『세대편년절요』를 보완하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용상 궐루(闕漏)한 점이 많아, 1346년(충목왕 2)에 다시 왕명에 의해 이제현 · 안축 · 이곡 · 안진 · 이인복 등이 증수하였다고 하는데, 역시 현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전의 많은 사서(史書)가 참고되었을 것이나 확인할 수 없고, 다만 김관의의 <편년통록>과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이 참조되었음은 <고려사>를 통해 확인된다. 체재는 서명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편년체(編年體)와 강목체(綱目體)를 결합한 형식으로 여겨진다. 즉 조선조의 <동사회강> · <여사제강> 등과 같이 여러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술하되, 그 중 중요한 것과 정통(正統) · 의(義)에 합당하는 것들의 요체를 강(綱)으로 설정하고, 부차적인 내용 또는 구체적인 사실 등을 목(目)으로 설정해 기술했다고 보인다. 내용은 국조인 문덕대왕(文德大王 : 태조 왕건의 증조부로 일반적으로는 元德大王이라고 함.)으로부터 고종 때까지의 사실들을 기록했다고 한다. 『고려사』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태조의 선대를 기술한 단편적인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한편 민자가 설정했던 소목론(昭穆論)은 다른 저작인 『세대편년절요』와 다를 뿐 아니라, 주자(朱子)의 소목론과도 차이를 보여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이것으로 볼 때 비록 형식은 주자가 창시한 강목체를 따르고 있었으나 저자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독특하게 서술한 점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문헌기록을 통해 그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 나라의 역사서 가운데 최초의 강목체 사서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한국사 두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민왕 두문자 : 공 기 쌍 홍 흥 신 성 자 (0) | 2023.08.14 |
---|---|
충목왕 두문자 : 목 고 응 정 현 정 기 (0) | 2023.08.14 |
충렬왕 두문자 : 열 제 둔 정 문 동 탐 경 섬 성 유 제 평 (0) | 2023.08.14 |
충선왕 두문자 : 선 사 만 각 수 (0) | 2023.08.14 |
몽고와의 첫만남 연표 : 취 강 저 1차 강 3차 황 팔 5차 충 6차 철 개 (0) | 2023.08.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