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와의 첫만남 연표 : 취 강 저 1차 강 3차 황 팔 5차 충 6차 철 개
1217 김취려 거란(대요수국) 격퇴
1219 강동의 역(여몽연합 : 형제관계)
1225 저고여 피살
1231 몽고 1차 침입(박서 귀주성 전투 다루가치 파견)
1232 최우의 강화천도(2차 침입 김윤후 처인부곡(용인) 살리타 사살)
초조대장경 소실, 속장경소실, 부인사대장경소실
1235 3차 침입 : 황룡사 9층 목탑 소실, 팔만대장경 조판 시작
1253 5차 침입 : 충주성 전투(김윤후 방호별감)
1254 6차 침입 : 충주 다인철소 전투
1258 태자 원종 몽골 입조
1270 개경환도(원종 삼별초 항쟁 1270~1273)
1. 1217 김취려 거란(대요수국) 격퇴
김취려(金就礪, 1172~1234)는 12세기 말~13세기 초 고려의 무신집권기에 살았던 무신이다. 이 시기에 벌어졌던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김취려는 1172년(명종 2)에 태어났다.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할아버지 김언량(金彦良)은 금오위섭낭장(金吾衛攝郞將)을 지냈고, 아버지 김부(金富)는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까지 올랐다. 외할아버지 송세명(宋世明)은 검교장군 행낭장(檢校將軍 行郞將)이었다. 무신 집안에서 태어난 김취려는 15세가 된 1186년(명종 16)에 아버지의 음서로 군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태자부견룡(太子府牽龍)을 거쳐 견룡행수(牽龍行首)·지유(指諭) 등으로 승진하였다. 젊은 날의 김취려는 큰 문제없이 무신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이나, 뚜렷한 행적도 나타나지는 않는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벼슬길을 걸었던, 당시 관료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젊은이였던 것 같다. 이후 장군(將軍)까지 승진한 김취려는 동북계(東北界)를 지키며 대장군(大將軍)까지 올라갔으며, 강종(康宗) 시기에 변방의 백성들에게 위엄과 자애를 보이며 잘 다스렸다고 한다. 김취려가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은 당시 고려를 쳐들어온 거란군을 격퇴하면서였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이 시기 그의 활약에 대해 제법 긴 분량으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60세가 넘게 살았던 그의 인생 중 불과 5년 정도였지만, 그 5년 동안 그가 세운 공적은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했다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216년(고종 3) 8월, 거란군 수만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범하였다. 당시 사료에서는 이들을 거란유종(契丹遺種)이라고 불렀다. 당시는 몽골이 북방 초원에서 세력을 키우며 금(金)을 압박하던 시기였다. 이에 오래 전 금나라에게 멸망당한 요(遼)의 후예인 거란족들이 독자 세력으로 뭉쳤는데, 이들이 몽골의 공격을 받고 피신하며 고려 쪽으로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처자식을 이끌고 한반도 서북 지역 각지를 횡행하며 노략질을 벌였다. 이들은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고, 급기야 자신들이 다시 나라를 세웠으니 항복하라는 편지를 고려 조정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에 고려는 군을 편성하여 토벌에 나섰고, 김취려는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참전하였다. 출진한 고려군은 거란군과 전투를 개시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고려군은 때로 승전을 거두기도 했으나 병력과 물자가 부족했다. 김취려는 고려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적의 포위망을 뚫고 매복을 격파하며 군의 사기를 올렸다. 총지휘관이었던 상장군(上將軍) 노원순(盧元純)은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자고 하였으나, 김취려는 사기가 오른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였다. 9월, 묵장(墨匠)의 벌판에서 양군은 전력으로 맞붙었다. 이 때 김취려는 적진을 가로지르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였고, 고려의 병사들도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일당백의 투지로 싸웠다. 결국 거란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고, 물자와 병장기를 버리고 청새진(淸塞鎭)을 지나 도망쳤다. 김취려는 용맹하게 싸워 큰 승리를 이끌어냈으나, 이 전투에서 큰아들이 전사하는 슬픔을 겪었다.
잠시 물러간 것처럼 보였던 거란군은 바로 다시 쳐들어왔다. 더 큰 전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고려군은 거란군과 싸우며 동쪽의 묘향산 쪽으로 이동했다가 연주(延州)로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거란군의 후속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군 주둔지에서 좌측으로 떨어진 창주(昌州) 방면으로 다시 쳐들어왔던 것이다. 고려군은 급히 이들이 남하하는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 내려왔다. 이 때 고려군의 군수품을 노리고 거란군이 후군을 기습하였으나, 김취려가 용맹히 싸워 격퇴하고 무사히 진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김취려에게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거란군이 속속 남하하며 각지로 퍼지자, 조정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개경에서 병력을 다시 차출하였고, 서경(西京)의 병력도 주변까지 내려온 거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고려의 주력군이 아직 박주(博州) 인근에 매여 있는 동안 거란군은 서경쪽으로 흩어져 내려갔다. 이들은 서경 인근에서 각지를 도륙하며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제 수도인 개경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집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은 정숙첨(鄭叔瞻)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이를 대비하게 하였다. 김취려는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임명되어 계속 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고려군은 대대적으로 군을 조직하여 대응에 나섰지만, 전체적인 움직임은 좋지 않았다. 최충헌은 개경에서 수만의 병력을 곁에 두고 전쟁놀이를 즐기며 있었고, 총지휘를 맡은 정숙첨은 거란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말에 개경 인근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적군이 근처까지 출몰하자 개경 시내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 와중에 최충헌을 노린 암살 시도가 벌어지고, 징집한 지방 병력이 난을 일으키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듬해 3월, 급기야 안주(安州)에서는 술판을 벌이고 방비를 느슨히 하던 고려군 본진이 기습을 당해 대패하는 최악의 상황이 터졌다. 김취려는 돌격하는 적을 맞아 싸웠으나, 홀로 싸우다가 창과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었고, 군량미와 무기 등을 모두 적에게 빼앗겼다. 거란군은 이제 개경 인근까지 진격해 왔다. 5월, 최충헌은 김취려를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삼았다. 거란군은 철원(鐵原)과 원주(原州), 춘천(春川) 일대까지 함락시켰다. 고전하던 고려군이 활로를 찾게 된 것은 역시 김취려의 활약 덕분이었다. 7월, 고려군은 거란군을 추격하여 황려현(黃驪縣) 법천사(法泉寺) 일대에 도착했다. 김취려가 세운 전략에 따라 움직인 고려군은 박달현(朴達峴)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거란군은 강원도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이곳에서 거란군은 함주(咸州)를 지나 여진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김취려는 경계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고 대치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김취려는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귀환을 청하는 장수들에게 그는 집에 돌아가느니 이곳에서 귀신이 되겠다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칙서를 내려 그를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10월의 일이었다.
김취려는 개경으로 돌아와 몇 달 동안 병을 치료해야 했다. 그 사이 고려군은 다시 거란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세력을 회복한 거란군은 철령(鐵嶺) 이북을 거의 제압하고 황해도 일대까지 횡행하였다. 이듬해인 1218년(고종 5) 7월, 겨우 병이 나은 김취려는 다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어 전선으로 향했다. 조충(趙沖)과 김취려가 이끄는 고려군은 수만 거란 기병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파하고 진격했다. 퇴로가 끊길 것을 우려한 거란군은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 농성에 돌입했다. 그리고 12월, 판세가 크게 변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합진(哈眞, 카치운)이 이끄는 몽골군이 동진국(東眞國)의 병사와 함께 거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온 것이다. 이들은 강동성으로 진격하며 고려 조정에 이를 알리고, 군량미를 요구했다. 몽골과 고려의 본격적인 첫 접촉이었다. 김취려는 이 때 자청하여 몽골군과의 교섭에 나섰다. 모두 두려워하며 기피했던 일이었지만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합진은 위세를 부려 기선을 제압하려 했으나, 김취려는 이에 당당하게 맞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취려의 모습과 태도에 합진이 감탄하여 그를 형으로 모시고 존경하였다. 합진은 “내가 일찍이 여섯 나라를 정벌하면서 귀인을 많이 보았지만, 형의 용모를 보니 어쩌면 그리도 기이하오? 내가 형을 중히 여긴 까닭에 휘하의 군사를 보길 또한 한 집안처럼 하게 되었소.”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고려군은 몽골군과 연합하여 최후의 공세를 시작하였다. 연합군은 성 주변에 너비와 깊이가 10척인 구덩이를 둘러 파서 적의 도주를 차단하고 포위하였다. 이를 본 거란군은 좌절했다. 대장 감사왕자(𠿑捨王子)는 목을 매 자살하고, 군사와 부녀자 등 5만여 명이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연합군은 수뇌부 100여 인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살려주었다. 드디어 거란군과의 기나긴 전쟁이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1219년(고종 6) 1월의 일이었다. 이후 고려는 다시 몽골과 갈등을 빚다가 더욱 기나긴 전쟁에 돌입하게 되지만, 그 내용은 김취려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김취려는 그 해 하반기에 의주(義州)에서 벌어진 한순(韓恂)과 다지(多智)의 난을 토벌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또 산속에 숨어 있던 거란군의 잔당들을 토벌하는 데에도 활약하였다. 큰 전공을 세운 김취려의 지위는 점점 높아졌다. 추밀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使 兵部尙書 判三司事)를 거쳐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 判戶部事)를 역임하였고,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를 지나 시중(侍中)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고려의 재상이 되었던 것이다. 김취려는 1234년(고종 21)에 병이 들어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는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자식으로는 3남 1녀가 있었으며, 후손 중에 손자인 김양감(金良鑑)과 증손자 김문연(金文衍) 등이 유명하다.전쟁터에서 누구보다 큰 활약을 펼쳤던 김취려는 단순히 용맹하기만 한 무장은 아니었다. 병사들을 엄하게 지휘하며 스스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술이 생기면 술잔 하나로 제일 말단 병졸들과 나누어 마시며 마음을 얻었다. 그런 김취려를 위해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한다. 기발한 계책을 내어 공을 세우면서도 이를 내세우지 않았고, 때로는 윗사람에게 이를 양보하는 겸양을 보이기도 하였다. 재상이 된 뒤에는 아랫사람들을 잘 이끌어 사람들이 감히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은 김취려에 대하여 옛 명장의 풍모를 갖추고 대인과 군자의 마음씀씀이를 지녔다고 평하였다. 갑작스러운 국제 정세의 변화와 거란의 침입은 고려에게 큰 위기가 되었다. 무신정권은 이에 대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고려의 수도 개경마저 위협을 당하였다. 이 때 김취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고려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무신집권자와 그 측근들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흐린 안개 속을 필사적으로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활약했던 김취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2. 1219 강동의 역(여몽연합 : 형제관계)
13세기 초 몽골의 흥기로 금나라의 세력이 위축되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아온 거란인은 각지에서 난을 일으켰다. 1216년 그 세력 중의 하나인 대요수국(大遼收國)의 걸노(乞奴)·금산(金山)·금시(金始) 등은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새로운 생활근거지를 위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 지방에 침입해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군사를 보내 이들을 치게 했는데, 특히 대장군 김취려(金就礪)는 영변 지방과 묘향산에서 무찔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하를 계속해 황주·연백 등지를 거쳐 개성 근처까지 이르렀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철원·춘천·원주·제천 등지를 휩쓸고 다시 강릉을 거쳐 북쪽 여진 땅으로 도망쳤다. 그 뒤 다시 여진과 합세, 남하해 철령(鐵嶺) 이북의 여러 성을 유린하다가 1218년평안도 지방을 휩쓸고 황해도 지방까지 출몰하였다.
고려에서는 조충(趙冲)을 서북면원수, 김취려를 병마사로 임명해 이들을 치게 하였다. 그러자 적은 강동성으로 들어가 저항하였다. 때마침 1만의 몽골군과 2만의 동진(東眞: 大眞)군이 거란적을 토벌한다고 성언(聲言)하면서 함경도 지방을 거쳐 성천(成川)·강동 등지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몽골의 원수 합진(哈眞)은 태조(太祖: 成吉思汗)의 명을 받아 동진을 쳐 신종(臣從)케 한 다음, 지금의 간도 지방으로부터 함흥평야를 거쳐 정평의 장성(長城)을 넘고 화주(和州: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맹주(孟州: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덕주(德州: 지금의 평안남도 덕천)·순주(順州: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 등 4성을 공격한 뒤 강동성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폭설로 군량의 보급로가 끊기고 거란적이 굳게 성을 지키자, 합진은 조충에게 충분한 군량미의 보급과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몽골의 저의를 의심하였으나, 눈앞의 거란적을 토벌하기 위해 그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군판관 김양경(金良鏡: 후에 仁鏡)에게 정병(精兵) 1천을 거느리고 쌀 1천석을 호송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 합진은 강동성의 공격을 위해 다시 고려군의 증파를 요구해왔다. 이에 병마사 김취려는 지병마사 한광연(韓光衍)과 함께 십장군(十將軍)의 군사와 신기(神騎)·대각(大角)·내상(內廂)의 정병을 거느리고 몽고군에 합세했으며, 뒤에 서북면원수 조충도 가세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의 정병을 비롯해 몽고·동진의 연합군이 거란적이 웅거한 강동성을 총공격하게 되었다. 당시의 전략은 우선 적이 도망쳐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성 아래에 너비와 깊이 각 10척의 못을 팠으며, 성의 남문에서 동남문까지는 동진의 완안자연(完顔子淵)이 맡고, 동문 이북은 김취려가 맡았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궁지에 몰린 거란인 40여 명은 성을 넘어 몽골군에 항복하고 괴수 함사왕자(喊舍王子)는 목매어 자살하였다. 그 뒤를 따라 관인·군졸·부녀자들이 항복했는데, 수가 5만여 인에 달하였다. 이때 합진과 조충이 함께 적이 항복하는 상황을 순시해, 거란 왕자의 처자와 승상·평장 이하 주요 인물 1백여 인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용서해 군사의 보호를 받게 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1219년에 연합군에 의해 강동성의 거란적은 완전히 소탕되어 3년 동안 고려에 침입해 소란을 피우던 거란의 난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강화 직후 합진은 거란인의 부녀와 동남(童男) 7백 명만을 고려에 남기고 소수는 전공의 대가로 조충과 김취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두 내몽고의 파림(巴林)에 이주시켰다. 이에 조충과 김취려는 거란인 포로를 고려의 백성으로 삼아 각 도의 주현에 나누어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모여 살게 했는데, 이를 시속(時俗)에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강동성 전투를 계기로 고려는 비로소 몽골과 접촉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맹약으로 고려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몽골의 간섭을 받는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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