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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무신집권기 반란사 두문자 : 보 조 교 망 전 사 만 최 연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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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집권기 반란사

 

 

무신집권기 반란사 : 보조교 망전사 만최연

보 : 김당의 난(1173 의종 복위 문신의 난)

조 : 위총의 난(1174 서경유수의 난)

교 : 종승려의 난(귀법사 흥왕사)

망 : 이 망소이의 난

전 : 주 관노의 난(1182)

사 : 김미 효심의 난(1193 농민 신라 부흥)

만 : 적의 난(1198 신분해방)

최 : 광수의 난(1217 고구려 부흥)

연 : 이년의 난(1237 백제 부흥)

 

1. 김당의 난

김보당의 난은 계사년(1173)에 일어났으므로 계사난이라고도 한다. 김보당은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173년(명종 3) 8월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동북면병마사로 있으면서 앞서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정중부·이의방(李義方) 등을 토벌하고 전왕(前王) 의종(毅宗)을 세우고자 하여 병마녹사(兵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 등과 모의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장순석·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고, 내시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아 동시에 군사를 발하게 하니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도 이에 합세하였다. 장순석 등은 거제(巨濟)에 이르러 유배되었던 의종을 받들고, 경주로 나와 웅거했으나 2개월도 못되어 진압되고 말았다. 반란이 발발하자 정중부는 장군 이의민(李義旼)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南路)로 향하게 하는 한편 서해도에도 군사를 보냈는데, 9월에 이르러 먼저 지병마사 한언국이 붙들려 죽고, 또 병마사 김보당과 녹사 이경직은 붙잡혀 개경에 보내져 이의방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이의민 등은 경주에 이르러 경주인들이 잡아둔 장순석 등 수백인과 전 왕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함으로써 이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 난은 1170년 이후 무신정권하에서 문신계(文臣系)에 의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반무신란(反武臣亂)이었다. 즉, 이 난의 주동자는 김보당 등 문신계열이었으며, 그 목적은 무신정권을 전복시키고 전 왕 의종을 받들어 구귀족정치(舊貴族政治)로 환원하려는 복고적인 정치적 반란으로, 전형적인 반무신란의 성격을 가진다. 김보당이 거병(擧兵)을 모의할 때 내시 진의광(陳義光)과 배윤재가 이를 알았다. 또 김보당이 죽을 때 “문신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거짓말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앞서 1170년에 화를 면하였던 문신들까지도 학살당하였다. 그 뒤 무신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정권을 잡아 무신정권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2. 위총의 난(1174 서경유수의 난)

조위총(趙位寵)은 12세기 고려의 무신집권기 초기에 활동했던 관리였다. 그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 그리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이력이나 가계는 알 수 없다. 서경유수(西京留守)를 맡고 있었던 1174년(명종 4)에 휘하의 병력 및 북계 여러 성의 세력을 모아 개경을 쳐 무신집권자들을 제거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1176년(명종 6)까지 서경과 북계 일대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이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를 ‘조위총의 난’이라 부른다.

 

대체 조위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그의 열전에는 단지 ‘조위총은 사서(史書)에서 그 가계(家系)를 잃어버렸다. 의종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서경유수가 되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고려사』 편찬 당시에 관부에 남겨진 기록에는 그의 선대에 관한 내용이 남겨져 있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서경군을 공격하러 출병했다가 사로잡힌 관군의 지휘관 최균(崔均)은 조위총의 부하들에게 “너희 역적들의 장군인[賊帥] 조위총은 군졸[行伍]에서 일어나 지위가 팔좌(八座)에 이르렀다.”라고 꾸짖었다. 이를 통해 대개 조위총은 하위 군졸 내지 무관으로 시작하여 서경유수까지 승진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무신들의 경우 무신집권기 이전부터 이러한 경로로 벼슬길에 올라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군권을 담당한 병부의 최고위급 관리인 병부상서이자 서경의 책임자인 서경유수라는 요직에까지 오른 것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는 큰 출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의종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았던 무신이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무신정변과 당시 집권자들에 대해서 조위총이 어떤 입장을 보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서경은 고려의 요충지였다. 국초부터 중시되었던 서경은 1135년(인종 13)에 터졌던 ‘묘청의 난’ 이후로 쇠퇴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앞으로 살펴볼 서경군의 위세를 보면, 그 뒤로 한 세대가 흐르며 다시 상당한 세력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을 맡고 있던 조위총과 개경의 무신집권자들이 정변 이후 몇 년 동안 특별한 갈등을 빚은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며 유폐되어 있던 전왕 의종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이 조위총이 병력을 일으키는 데에 실제로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가 진심으로 이에 분노했던 것인지, 아니면 좋은 명분으로 삼았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조위총이 당시 ‘이의방이 왕을 시해하고 장사하지 않은 죄를 성토’하며 이를 대외적인 명분으로 삼았던 것은 명확했다. 그런데 조위총이 북계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이러한 명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북계의 여러 성들에 사자를 파견하여 합세를 독려하며, “풍문으로 듣자하니 개경[上京]의 중방(重房)에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근래 북계의 여러 성에는 대체로 심성이 거칠고 사나운[桀驁] 이들이 많다고 하니 마땅히 가서 공격하여 토벌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군대가 이미 크게 일어났으니 어찌 앉아서 스스로 죽임을 당하겠는가. 마땅히 각자 군사와 말을 규합하여 속히 서경으로 오라.”라고 하였다. 조위총의 심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연주(延州)를 제외한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조위총에게 호응한 것은, 북방 지역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 말이 크게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회유로 혹은 압박으로 합류시킨 지역은 대체로 지금의 황해도 북부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까지 걸친 넓은 범위였다. 조정에서는 10월에 윤인첨(尹鱗瞻)을 원수(元帥)로 삼아 토벌군을 편성하여 서경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조위총의 병력은 이미 깊숙이 내려와 있었다. 관군이 절령역(岊嶺驛)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가 심하게 치니, 서경군이 고개 위에서 습격을 감행하였다. 관군은 크게 혼란에 빠져 흩어졌고, 원수 윤인첨마저 포위를 당하여 죽을 뻔하였다. 절령은 개경 방어를 위한 요충지였다. 서경군이 이 절령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개경을 항해 남하하였던 것이다. 수도 개경을 둘러싸고 양군의 전면전이 임박하였다.

 

폐위된 전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대의명분. 중앙에서 내려보낸 관군을 격파하고 최고의 방어 요충지를 돌파한 서경군의 기세. 상황은 조위총에게 크게 유리해보였다. 조위총은 군을 이끌고 개경 서쪽의 권유로(權有路)까지 진격하여 주둔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집권자였던 이의방도 하급 군관에서 출발하여 정변을 주도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이의방은 개경에 있으며 혹시 적에게 동조할 수 있을 서경 출신 관리들을 학살하여 목을 저잣거리에 내걸고,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하였다. 예상보다 너무 전격적인 공세였기 때문일까. 기병을 앞세워 돌격한 이의방군의 기세에 서경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서경성까지 퇴각을 하고 말았다. 이의방은 승기를 타고 서경성 외곽에 주둔하여 압박하였으나, 겨울의 모진 추위에 시달리다가 결국 패하고 한 달 만에 귀환하였다. 일진일퇴였으나, 대세적으로 보아 조위총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패배였다. 그의 아들마저 이 과정에서 전사하였고, 서경군의 기세도 크게 꺾였다. 조정은 서북 지역에 대한 회유를 통해 여러 성을 귀순시켰다. 처음부터 조위총에게 협력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맞선 연주(延州)의 존재도 배후에서 계속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양군은 서로 팽팽히 대치하였다. 어수선한 틈을 타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서경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당시 정중부의 아들이 무려 3만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한 사례는 당시 무신집권자들의 서경 공략에 대한 의지를,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선 것은 서경의 항전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해를 넘겨 1175년(명종 5)이 되면서 상황이 점점 더 조위총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북계 각지에서 양측 세력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위총은 구원을 요청하는 연주(漣州)에 병력을 급히 보냈으나 관군에 패하여 1,700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 이곳은 결국 6월에 대포를 앞세우며 공격해온 두경승(杜景升)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용강현(龍岡縣)의 주민들은 어느 편에 붙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관군에 귀순하였다. 서북 지역의 여러 성들이 차례로 무너지며 항복하였고, 서경에 대한 포위가 견고해졌다. 서경은 이제 굶주려 사람의 시신을 먹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관군의 회유책에 서경성을 탈출해 귀순하는 자도 많아졌다. 여전히 서경성에서 출격하여 관군과 부딪쳐 보기도 하였고, 9월에는 절령병마사(岊嶺兵馬使)인 대장군(大將軍) 강점(康漸)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장의 흐름은 완연히 서경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조위총은 이 상황에서 최후의 한 수를 시도했다. 조선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조위총에 대한 평가를 크게 나뉘게 만든 한 수를. 바로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 금(金)을 끌어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개경 공략이 실패하고 서북 지역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며 서경마저 포위당한 시점에서 조위총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거의 없었다. 조위총이 택한 것은 금에 지원을 요청하는 길이었다. 『고려사』에는 당시 조위총이 금에 보낸 문서들의 대략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조위총은 세 번 사신단을 파견했다. 먼저 그는 정중부 등이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많은 관료들을 죽인 것을 알려 자신의 거병이 대의에 부합하는 것임을 호소하였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점점 금에 요청하는 의존도는 높아졌다. 6월에서는 북계 40여 성을 가지고 금에 복속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다가 관군에게 차단당하였다. 그러자 다시 사신을 보내 금에 복속하겠다는 뜻과 군사를 파견하여 고려를 쳐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금에서는 이 사신을 잡아 고려로 보내며, 조위총의 요청을 거부하였다고 알렸다. 아마도 9월의 일로 추정된다. 조위총의 요청은 금에게 달콤한 유혹이었을 수 있다. 실제로 금은 고려의 변경이 소란해지자 군대를 파견하여 정세를 탐지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때 금군은 조위총군을 견제하러 왔다고 말하였으나, 상황을 파악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전체적인 전황으로도 조위총이 불리한 상태였으나, 금이 선뜻 그의 손을 잡기에는 명분상으로 다소 곤란한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이미 명종의 왕위 계승을 인정해준 금에서 이를 부정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실제로 금의 군주 세종(世宗)도 이를 이유로 내세웠다. 살해된 의종을 제대로 장례조차 치르지 않았다는 거병 초기의 명분은 1175년(명종 5) 5월에 조정이 의종의 국상을 치름으로써 약해진 상태였다. 금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된 1176년(명종 6) 3월, 조위총은 서북지역에 은밀히 사자들을 보내 군사를 모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사로잡혀 실패로 돌아갔다. 일부 지역에서 여전히 조위총에게 호응하였고, 조위총이 직접 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관군에게 일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타오른 불꽃이었다. 그해 6월, 윤인첨과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은 서경성에 총공격을 퍼부어 함락시켰다. 조위총은 사로잡혀 목이 베였고, 그 머리는 함에 담겨 개경으로 보내져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이렇게 하여 3년에 걸친 조위총의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이를 ‘난’으로 볼 것인지 대의에 입각한 거병으로 볼 것인지, 혹은 대의에서 시작하여 난으로 끝났다고 볼 것인지, 이보다는 중앙 조정에 대한 북방 지역민들의 불만이 근본적인 동기인지, 조선 초의 『고려사』 편찬 이래로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판단의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일련의 사건들 중 어느 점에 주목할 것인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졌던 것이다. 특히 금에 북계를 바치고 귀순하려 했던 모습이 큰 논란의 대상이 된다. 조위총이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한 뒤에도 그 잔여 세력이 거듭 봉기하였고, 이후로 각지에서 무신정권에 반발하는 ‘민란’들이 들불처럼 번졌다는 점이 긴 여운을 남긴다.

 

3. 종승려의 난(귀법사 흥왕사)

고려의 불교는 왕실 및 문신귀족들의 보호와 지원 밑에서 융성하였다. 그러다가 무신정권이 성립되면서 이들이 무력해지고 무신집권자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무신정권에 반발해 승려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 개성에서 일어난 것이 가장 많았고 또한 규모도 컸다. 이러한 난은 이의방(李義方) 집권시기부터 최충헌(崔忠獻) 집권시기까지 계속되었다.

 

1174년(명종 4) 귀법사(歸法寺)의 중 1백여 명이 당시 횡포가 심하던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개성북문을 침범하였다. 이에 이의방은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중들을 쳐, 수십명을 죽이고 나머지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귀법사를 비롯해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홍화사(弘化寺) 등 사찰의 중 2천여 명이 개성 동문에 모이게 되었다. 성문이 닫혀 있자, 성 밖의 인가에 불을 질러 숭인문(崇仁門)을 연소(延燒)시킨 뒤 성안으로 들어가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하였다. 이의방은 부병(府兵)을 징집해 중 1백여 명을 죽이고 성문을 지키게 하여 중의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부병을 중광사·홍호사·귀법사·용흥사(龍興寺)·묘지사(妙智寺)·복흥사(福興寺)에 보내어 절을 불지르고 재화와 기명(器皿)을 빼앗았다. 그러나 돌아오던 도중 다시 중들의 요격을 받아, 부병 중 죽은 자가 많았다. 이렇게 하여 귀법사 등의 승려들이 이의방을 제거하려는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해 12월정중부(鄭仲夫)의 아들 균(筠)의 계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중 종참(宗旵) 등이 선의문(宣義門 : 西門)에서 이의방을 죽였으니, 무신정권 초기의 사원세력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1178년(명종 8)흥왕사(興王寺)의 중이 반란을 꾀하다가, 산원(散員) 고자장(高子章)과 함께 잡혀 살해된 일이 있었다. 1217년(고종 4)에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종군하던 승도들이 잦은 공역(工役)에 시달린 데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즉, 1216년 몽고에 쫓긴 거란이 고려에 침입하자 승군도 참전했는데, 그 가운데 개성의 흥왕사·홍원사(弘圓寺)·경복사(景福寺)·왕륜사(王輪寺)와 시흥의 안양사(安養寺), 광주(廣州)의 수리사(修理寺)의 승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1217년 승군들은 최충헌을 죽이려고 거짓으로 적에게 쫓긴 것처럼 꾸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충헌에게 아부해 자주 요역을 일으켜 사원을 피폐하게 한 낭장(郎將) 김덕명(金德明)의 집을 부수고, 다음에 최충헌의 집을 치기로 하였다. 이때 최충헌이 가병(家兵)을 보내어 승군을 공격하니, 이때 살해된 승려는 무려 8백여 명이 되었다.

 

이러한 승려의 반란은 그들을 옹호하였던 왕실과 문신귀족 중심의 구지배체제를 복구하려고 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반란은 오히려 정치적 반란의 성격을 지닌 반동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따라서 진보적인 요소를 지닌 민란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217년 승도들의 반란 원인이 가혹한 공역에 시달린 불만에 있었다는 것은 민란의 동기와 같은 것이 있다. 사실상 고려시대의 사원 안에서도 일반 승도들은 승군으로 전투에 징발되고, 또 갖은 잡역에 혹사되어 위정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개경 승도의 난 중 1217년(고종 4)의 반란은 일종의 민란이라 할 수도 있다.

 

4. 이 망소이의 난

공주 명학소(鳴鶴所)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174년(명종 4)에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 등 서북계(西北界) 지방의 민란을 ‘서적(西賊)’이라 하고, 남부지방의 민란을 ‘남적(南賊)’이라 하는데, 망이·망소이의 난은 남적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신집권기에 무신 상호간의 권력다툼으로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항, 즉 민란이 빈발하였다.

 

1176년(명종 6) 정월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해 공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는 우선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郎將) 박강수(朴剛壽)를 보내 선유(宣諭)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이 응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에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3천명의 군사를 주어 난을 진압하도록 했지만, 난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다시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고, 난민을 위무(慰撫)하게 하는 등 회유책을 썼다. 이때에도 망이 등은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산현(禮山縣)을 공략해 감무(監務)를 살해하고 충주(忠州)까지 점령하였다. 정부는 다시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남적처치병마사(南賊處置兵馬使)로 삼아 대대적인 토벌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주효해 1177년 정월에는 망이·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함으로써 난이 일단 진정되는 듯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향리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에 망이·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해 가야사(伽耶寺: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德山에 있음)를 침구했고, 3월에는 홍경원(弘慶院: 천안 稷山에 있었음)을 불태우고 개경까지 진격할 것임을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망이 등이 홍경원의 주지를 시켜서 개경 정부에 전달한 글에 의하면,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이유는 난이 진정된 이후 정부에서 다시 군대를 보내 그들의 가족들을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주(牙州: 지금의 牙山)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淸州牧)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남적에 대해 강경책을 펼쳐, 같은 해 5월에 충순현에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 결과 난민들은 큰 타격을 입어 6월에는 망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청해왔고, 7월 망이·망소이 등이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淸州獄)에 갇힘으로써 1년 반 동안의 반란이 완전히 진정되었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특수행정구역인 소(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반 농민반란과 구별된다. 망이·망소이 등이 봉기한 원래 목적은 신량역천(身良役賤)에 해당하는 소민(所民) 신분에서 탈피해 국가의 직접적이고 과도한 수취를 모면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명학소 민만으로 이 같은 대규모의 봉기가 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난의 발발 초기에 공주 관아를 습격할 때부터 이미 주위의 일반 농민들도 적극 호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망이·망소이의 난은 향·소·부곡민(鄕所部曲民)의 신분해방운동과 농민반란의 두 가지 성격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고려사회 신분질서를 타파하려는 신분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선구적인 의미가 인정되며, 실제로 이후 향·소·부곡 등 특수행정구역의 소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5. 주 관노의 난(1182)

전주 관노의 난은 그 주도자가 죽동(竹同)이었기 때문에 죽동의 난이라고도 불리는데, 관노뿐 아니라 전주의 주현군 소속인 정용군⋅보승군과 농민 등 여러 세력이 합세해 지방관과 향리의 수탈에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켰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 경과를 살펴보면, 1182년(명종 12년) 전주사록 진대유(陳大有)와 상호장 이택민(李澤民) 등은 관선(官船)을 제조하면서 너무 가혹하게 사람들을 부렸다. 이에 정용군⋅보승군의 기두(旗頭)인 죽동 등이 관노 및 불평자들과 함께 봉기해 진대유를 내쫓고 관리들을 교체하였다. 이후 전라도 안찰사 박유보(朴惟甫)가 진대유를 처벌하고 봉기군을 설득했지만,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40일간 항쟁하였다. 그 뒤 정부의 이간책에 따라 일품군(一品軍)의 대정(隊正)이 승려들과 함께 죽동 등 주동자 10여 명을 죽이면서 반란이 진압되었다. 정부는 잔당 30여 명을 수색해 죽이고 전주성을 허물어 사건을 종결지었다.

 

전주 관노의 난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신 집권기 최초로 공노비들이 봉기의 주체가 되었다. 사료에 나타난 관노들은 관청에 소속되어 잡역을 담당한 공역노비였다. 고려 시대 최하층 신분인 노비는 소유 주체에 따라 국가와 관청 소유의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로 나뉜다. 사노비는 주로 양인이 가난하여 스스로 몸을 팔거나 권세가에 의해 불법적으로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공노비는 전쟁 포로나 이적 행위자, 정변⋅반란을 꾀하다 실패한 자와 이들의 가족⋅사노비가 몰수되어 노비가 된 경우가 많았다. 공노비는 관청에서 잡역을 담당하고 그 대가로 급료를 받아 생활하는 공역노비와 따로 농사를 지으며 규정에 따라 공납을 부담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공역노비와 외거노비는 혼인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점과 60세가 되면 역에서 면제되는 점은 같았지만, 외거노비가 토지를 경작하며 일반 소작농과 비슷한 생활을 한 반면 공역노비는 관청의 직접적 수탈과 차별을 받아야 했다. 봉기에 참가한 관노들은 전주 지방의 공역노비로, 관선을 제조하는 역에 동원되어 신체적 억압과 박해를 심하게 당했을 것이다. 봉기 세력이 진대유를 내쫓고 이택민 등의 집에 불을 지른 점, 고효승(高孝升)을 협박해 주의 관리들을 교체한 점, 그리고 안찰사 박유보에게 진대유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서만 호소한 점 등으로 볼 때, 이들이 봉기한 가장 큰 원인은 관리와 향리들에 의한 가혹한 노역과 이로 인한 신체적 억압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지방관과 토호의 가혹한 부역에 대한 지방민들의 항거였다. 우선 봉기의 주도 세력인 정용군⋅보승군의 기두인 죽동과 6명은 군인이었다. 고려는 병농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이들은 직업 군인이 아니라 지방 농민들로 군역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려의 지방군은 5도의 주현군과 양계의 주진군으로 나뉘는데, 주현군은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자신이 속한 중앙의 6위에 소속되어 현역의 임무를 지는 정용군⋅보승군과,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등 각종 노역을 담당하는 일품군⋅이품군⋅삼품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정용군⋅보승군은 전투 부대였지만 중앙과 지방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사료에 등장하는 죽동 등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다음으로 봉기에 참여한 ‘불평자’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사료에서처럼 관선을 제조하는 등의 노역에는 주로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요역(徭役)으로 징발되었다. 요역 징발은 농번기를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경우에 따라 규정을 무시하고 농번기가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요역은 일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 외에도 부정기적인 경우가 많아 농업 등의 생업을 어렵게 했다. 또한 책임자들이 밤낮으로 일을 시키거나 가혹하게 대하는 일도 많았으며, 필요한 식량과 의복까지 스스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자 고통이었다.

한편 각 군현에 할당된 사람을 징발하고 동원하는 일은 수령과 향리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국가 차원의 공사라도 규모가 작은 경우 해당 군현의 수령이나 향리층이 감독하기도 하였다. 전주의 하급 관리 진대유와 향리 이택민이 이 경우로, 이들은 농번기인 3월이 되어도 배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오히려 가혹하게 독려해 농사일에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에 농민들로 이루어진 정용군⋅보승군과 요역에 징발된 농민들의 원성을 샀던 것이다. 이에 지방민들은 더 이상 중앙의 수탈에 대해 참지 않았다. 이들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지역사회 내부에서 서로 연결된 인간적 관계를 바탕으로 함께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셋째, 무신 집권기에 지방민과 하층민의 사회의식이 크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봉기가 일어난 1182년 3월은 무신 정권이 들어선 지 12년 정도 된 시기로, 1179년(명종 9년)에 정중부(鄭仲夫, 1106~1179)를 제거한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의 집권 말기였다. 즉 무신 집권자들 사이의 잦은 권력 다툼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으며, 12세기부터 누적된 수취 체제의 모순과 지방관의 수탈로 인해 전국적인 농민 유랑과 농민 봉기가 폭발적으로 발생하였다. 1174년(명종 4년) 서북 지방에서 조위총(趙位寵, ?~1176)의 봉기가 발생했고, 남부 지방에서도 1176년(명종 6년) 공주 명학소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발생해 1년 반 동안 충청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전주 관노의 난이 일어났던 1182년에는 관성(옥천)과 부성(서산)에서도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무신 집권기에는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민과 하층민의 사회의식이 성장하여, 이들이 사회 모순과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더 이상 참지 않고 봉기를 일으켜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지방의 관노들이 처음으로 봉기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무신 집권기를 거치며 하층민의 사회의식이 크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정부의 거짓 회유책에 의한 내부 반란으로 진압되었다. 무신 집권 초기에 집권자들은 봉기가 일어나면 우선 거짓 회유책으로 내부 분열을 유발한 후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강경 진압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예로 1176년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격상시켜 봉기를 일단 잠재운 후 손청(孫淸) 등 주변 세력을 진압하고 봉기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강경 진압하였다. 전주 관노의 난도 처음에 안찰사가 진대유를 압송해 반란민들을 회유하려 했으며, 중앙 정부에서는 사자를 보내 봉기의 이유를 물으며 이들을 달래면서 그 사이 내부에서 배신자를 포섭해 봉기를 진압하였다. 앞서 본 것과 같이 전주 관노의 난은 이해관계가 조금씩 다른 여러 세력이 연합해 일으켰기 때문에 40여 일 가량 지속되면서 내부 분열이 발생하였다. 특히 배신자가 토호 세력으로 추정되는 대정과 승려였다는 점은 이들이 대다수 농민이나 노비들과 다른 입장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한계점을 보여 준다.

 

정부는 반란이 진압된 후 이에 가담했던 자들을 색출하여 죽이고 전주성을 무너뜨렸다. 봉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만 있었을 뿐 봉기 지역의 백성을 달래거나 봉기가 일어난 근본 원인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이렇듯 전주 관노의 난은 결국 내부 반란자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공노비들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신분적 차별과 신체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존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과 연합해 일으킨 최초의 봉기라는 점과, 지방관과 향리의 횡포에 반발해 주현군⋅관노⋅승려⋅농민 등 다양한 지방 세력이 연합해 항거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6. 김미 효심의 난(1193 농민 신라 부흥)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의 귀족지배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해,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정치는 일단 종식되었다. 무신정권은 약 1백년간(1170∼1270) 존속하지만 무신 집권 초기의 정국은 매우 혼란하고 불안정해,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은 이 틈을 타서 전국적으로 큰 민란을 일으켰다. 민란은 무신정권의 전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나, 그 규모나 양상이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은 무신정권 초기의 약 3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삼남(三南) 각지의 민란이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 시기에 삼남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민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민란의 하나였다.

 

김사미의 출신성분을 알 수가 없으나, 경상도 청도의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출신으로서 농민반란군의 지휘자가 된 그는 1193년 청도군 내의 운문(雲門)에 본거를 두고 부근의 농민, 특히 유망농민(流亡農民)을 규합해 강력한 반란군을 조직하여 당시의 정부인 무인정권에 반대하는 큰 민란으로 치닫게 하였다. 이 무렵에 경상도·전라도·양광도에서는 기근으로 민심이 매우 소란하였고, 1190년부터는 동경(東京 : 慶州)에서 일어난 민란을 비롯해서 이른바 ‘남적(南賊)’의 폭동이 남부지역에서 널리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렇게 확산된 남적에 의한 민란의 일환이었다. 그 동기에 있어서는 다른 여러 민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억압자인 무인정권에 반대해 농민과 천민이 그들의 압제와 수탈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하고, 또한 그것을 모색하는 매우 소박한 것이었다.

 

김사미가 지휘하는 농민반란군은 초전(草田 : 지금의 경상남도 울산)을 근거로 한 효심(孝心)의 농민반란군들과 정보도 교환하고 작전도 상의해 연합전선의 태세를 갖춘 일면도 있었던 것 같다. 남적 특히 김사미와 효심이 지휘하는 농민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정부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로 하여금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노식(盧植) 등을 인솔하여 현지에 출정하게 하였다. 당시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이의민(李義旼)이며, 장군 이지순은 그의 아들이었다. 정부의 토벌군은 농민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해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고려사』 이의민전에 의하면 토벌작전의 실패는 이지순이 김사미·효심 등과 서로 통모(通謀)해서 작전의 기밀을 누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란군에게 의복·식량·신발·버선 등 군수물자를 원조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벌군 사령관 전존걸은 이지순의 통모행위를 알고 있었으나, “법에 따라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의 아비가 나를 죽일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다. 이지순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그 배후에는 이의민이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스스로 새 왕조를 창립하려던 망상과 경주인(慶州人)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라의 부흥운동이 서로 얽히고설키어 조성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술책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의민은 신왕조 개창이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김사미·효심 등 남적의 지도자들을 이용하였고, 또 경주인들과 가맥이 상통하는 남적세력의 일부는 비록 사비(寺婢)의 소생이기는 하나, 경주 출신이며 경주이씨의 일족인 이의민을 이용해 신라의 부흥을 실현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고려왕조에 반대하는 당면의 처지는 공통되었으므로 서로를 이용하려는 수단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잡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김사미의 난은 농민과 천민의 해방을 바라는 소박한 계급적인 문제와는 차원을 달리해, 그 배후에는 경주인의 신라부흥운동을 비롯, 당시의 지역감정문제 및 경주이씨의 족적(族的) 유대의식 등 상당히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난은 발생한 그 해 11월에 상장군 최인(崔仁)이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장군 고용지(高湧之)가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임명되어 토벌에 가세한 결과 겨우 진압되어 이듬해 2월에 김사미는 투항하여 참수되었다. 이의민은 김사미 등의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그들과 통모하려던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손을 떼고 말았다.

 

7. 적의 난(1198 신분해방)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만적(萬積) 등이 일으킨 노비 반란을 말한다.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소수의 권신(權臣)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에 기생하여 노비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무신란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현저해져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무신집권기에 천민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무너져갔다. 그리고 당시 농민들의 봉기 또한 빈발함으로써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향·소·부곡민이나 천민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76년(명종 6)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천시되었던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이나, 1182년(명종 12)전주에서 일어난 관노(官奴)들의 봉기가 그것이었다. 1196년(명종 26)에는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에 반발해 상장군 길인(吉仁)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노비들도 이에 참여한 사례가 있었다.

 

1198년 5월에 사동(私僮: 私奴) 만적·미조이(味助伊)·연복(延福)·성복(成福)·소삼(小三)·효삼(孝三) 등 6명이 개경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예들을 불러모아 “무신란 이후에 고관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동하면서 반란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갑인일(甲寅日)에 흥국사(興國寺)에서 모여 궁중으로 몰려가 난을 일으키고, 환관과 궁노들의 호응을 받아 먼저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기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사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 밖에 모이지 않았으므로 4일 후에 다시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종 순정(順貞)이 주인에게 고발함으로써 반란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고, 만적 등 1백여 명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집권기에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1200년(신종 3)에도 진주에서 또다시 공·사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나 합주(陜州)의 민란에 가세한 일이 있었다. 또한 밀성(密城)에서 관노 50여 명이 운문(雲門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의 민란에 합세하는 등 천민들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천민반란은 당시의 농민반란과 마찬가지로 무인정권의 강경한 진압에 의해 모두 실패하였지만, 고려 전기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소임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8. 광수의 난(1217 고구려 부흥)

최광수는 고려 후기 서경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군졸이다. 1217년(고종 4) 거란유종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서경에서 구고려부흥병마사·금오위섭상장군이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최광수의 고구려부흥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지역 사회의 대표적인 저항으로 이해된다.

 

1217년(고종 4)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략 때, 최광수에 의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최광수가 거란유종과의 전쟁에 나가지 않고 서경으로 되돌아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최유공과 같은 지방관의 사졸들에 대한 수탈이 일차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반기를 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지금까지 누적되었던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명종 대의 김보당 조위총 등과 같은 자들이 서경 권역을 근거지로 저항을 일으켰지만 곧 실패하였다. 그에 따라 무신정권은 대대적으로 지방관을 파견하고, 서경의 공해전을 재편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재지 세력 내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몰락한 자들의 불만도 누적되었을 것이다. 특히, 최충헌 정권의 전횡, 지방관의 폐단, 거란유종의 침입에 따른 가혹한 역(役)의 동원 등은 지역 사회의 불만이 고조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최광수를 따랐던 군사들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서경을 큰 마찰 없이 장악할 수 있었던 점에서 일정 규모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장차 큰일을 일으키려고 여러 신사(神祠)에 기도하였다.”라는 자료에서 서경 권역의 지역적 집단성을 이용하려는 측면도 엿보인다. 이는 곧 서경 권역의 현실성과 역사성이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고, 최광수 등이 고구려부흥운동을 표방할 수 있는 토대였을 것으로도 판단된다. 이런 점은 다분히 앞서 동경 권역의 신라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최광수의 재지 세력으로서의 역량과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그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부흥운동은 여타 재지 세력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한계가 있었으며, 재지 세력 내의 배타성으로 인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9. 이년의 난(1237 백제 부흥)

이연년은 본관은 원율(原栗: 전라남도 담양). 1237년 원율·담양(潭陽)의 이연년 형제는 산림(山林)의 무리들을 끌어모아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를 자칭하고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 등지의 주·군(州郡)을 점령하여 위세를 떨쳤다. 이연년 형제가 중심이 된 민의 저항은 몽골의 3차 침입(고종 22∼26, 1235∼1239) 이후 고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시기에 일어났던 점에서 강화천도(江華遷都) 이후 내륙 지역의 피해와 질고(疾苦)가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원율은 나주목(羅州牧)의 속현(屬縣)이었고, 담양 또한 나주목의 속현으로서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났던 시기는 1236년(고종 23) 이후 최씨정권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조판하던 시기였다. 이 조판 사업에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었는데, 최씨정권의 경제력의 바탕을 이루었던 전국 각지의 농장이 기저가 되었다. 최씨정권의 농장 분포는 임피(臨陂)·진도(珍島)·강진(康津)·보성(寶城)·화순(和順)·승주(昇州)·남해(南海)·하동(河東)·진주(晋州)·단성(丹城) 등 전라·경상도 지역에 분포하였는데, 이로 보아 원율·담양도 최씨정권의 농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1182년(명종 12) 전주의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의 저항 배경이 관선(官船) 제조의 폐단에서 비롯되었듯이, 이연년 등의 저항도 『팔만대장경』 조판사업과 강도정부의 대민수탈의 폐단에 기인되어 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원율·담양 등 여러 고을의 무뢰배(無賴輩)들을 불러 모아”, “적이 김경손(金慶孫)이 나주로 들어 왔다는 말을 듣고 주성(州城)을 포위하는 데 적이 수풀처럼 빽빽이 모였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도 여기에 참여한 계층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연년이 스스로를 ‘백적도원수’라고 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의 오기(誤記)로 이해된다. 이연년 형제를 필두로 한 대정부 저항은 앞서 최충헌정권 초기 경주의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 1217년(고종 4) 최광수(崔光秀)의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과 더불어 무신정권의 가혹한 불법행위에 맞서 새로운 질서구축을 기치로 삼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237년 나주성에 진주한 전라도지휘사 김경손을 포위하여 싸우다가 이연년이 살해됨으로써 난이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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