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최고기구 : 중 도 중 도 교
중 : 중방
도 : 도방
중 : 중방
도 : 도방
교 : 교정도감
정 : 정방
서 : 서방
1. 중방
고려시대 이군육위(二軍六衛)의 지휘관인 상장군·대장군으로 구성된 회의기관이다. 중방의 설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이군육위의 군사제도가 완성된 현종 무렵으로 추측된다. 전체 구성원은 16인인데, 반주(班主)라고 불리는 응양군(鷹揚軍)의 상장군이 중방회의의 장을 담당했으며, 궁궐·도성의 수비와 치안 등 이군육위의 임무와 관련된 주요 안건을 다루었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이고(李高)·이의방(李義方) 등이 정변을 일으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문신이 권력을 독차지한 고려 전기 때와는 달리 중방은 막강한 정치권력 기관이 되었다. 즉 집권한 무신들이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고위관직을 차지한 뒤 중방에 모여 국가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공동으로 처리해 그 기능과 권한이 확대, 강화되었던 것이다. 궁성수비와 일반치안을 위한 병력 배치, 형옥치죄권(刑獄治罪權) 행사, 도량형 도구의 검사·통일, 관직의 증감 및 관리의 임면(任免) 등이 그것이다. 이는 정중부·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으로 이어지는 초기 무신정권시대에 집권무신의 정치·경제·군사적인 기반이 확고하지 못해 중방을 통한 정치가 이뤄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집정부(執政府)를 형성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데서 연유한다.
무신 집권기 100년 동안 고려의 정치는 무신들이 주도하였다. 정중부 등 특히 강력한 권력을 장악한 무신집정(武臣執政)이 가장 위에 있었으나, 여러 고위 무신들의 협력과 동조가 필요하였다. 고위 무신들도 중방을 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중방에 모인 무신들은 국정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일을 처리하였다. 특히 반란 진압이나 적발된 역모 계획에 대한 처리, 반(反) 무신정권 인사에 대한 숙청 등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가령 1174년(명종 4)에 서경(西京)에서 조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제거를 공언했던 ‘조위총의 난’ 당시, 그는 ‘상경(上京)의 중방이 북계(北界)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문을 거론하였다. 중방에서 북계 지역의 동태에 의심을 품고 선제공격을 하려 하니, 그대로 당할 수는 없어서 거병하였다는 주장이었다. 즉 당시 중방이 군사 작전을 위한 회의체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178년(명종 8)에는 반란 계획에 대하여 고발이 들어오자 주모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중방에서 잡아 처형한 기록이 보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이기에, 자신들의 안위에 대해 특히 예민하고 강경하게 반응하였다. 한편, 무신들은 고려의 정치 체제 자체를 무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특히 무신들이 부임할 수 있는 관직을 늘리려 했던 모습이 눈에 띈다. 이들은 1183년(명종 13)에 문반(文班)의 관직을 줄이자는 청을 올렸다. 또 자신들이 겸직할 수 있는 문관 조직의 범위도 확대하여, 결국 국왕의 측근인 내시·다방(茶房)까지도 겸직하였다. 심지어 사관(史官)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자리를 무신들이 겸하는 데에도 무신들이 중방에 한 호소가 작용하였다. 중방에서 무신들의 이익 도모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무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도가 지나치면 다른 무신들의 견제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가령 무신정변 때 공을 세워 위세를 부리던 고위 무신 조원정(曺元正)과 그의 두 아들이 횡포를 부리고 탐욕을 부리자, 중방에서 이들을 처벌하도록 조치했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조치는 중방에서 순기능을 발휘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좀 더 보인다. 1178년(명종 8)에는 대장군 장박인(張博仁)과 김숙(金淑)으로 하여금 개경의 도로 상황을 조사하여 개인의 집이 관로(官路)를 침범했는지를 확인하고 문제가 있으면 복구하도록 하였다. 1181년(명종 11) 7월에는 재추(宰樞), 즉 재상들과 대간(臺諫), 중방이 함께 모여 시장에 유통되는 곡식의 상태와 규격에 대해 조사하고, 문제가 있으면 처벌하는 조치를 내렸다.
2. 도방
도방은 일종의 사병집단제로서 원래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뒤에는 숙위대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도방의 구성원들은 침식과 행동을 공동으로 하면서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처음에는 단순히 경대승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등장했으나, 뒤에는 비밀탐지, 반대세력의 숙청을 비롯해 주가(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약탈 · 살상 등을 자행하여 그 폐단이 컸다. 1183년 경대승이 병사하자, 도방은 일시 해체되고 그 무리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대부분은 고문에 못 견뎌 중도에서 거의 죽고 생존자는 4, 5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뒤, 최충헌이 집권하자 다시 설치되어 그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최충헌은 불의의 변이 생길까 두려워 문무관 · 한량 · 군졸을 막론하고 힘이 센 자가 있으면 이를 불러들여 6번(番)으로 나누어 날마다 교대로 자기 집을 숙직하게 하고 그 이름을 도방이라 하였다. 그가 출입할 때는 6번이 모두 함께 호위하게 해 그 위세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이때의 6번도방은 다음 최우 때 이르러 한층 더 강화되었다. 최우는 집권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집권 후에는 그의 사병과 6번도방을 병합 · 개편해 내외도방으로 확장, 강화하였다. 이 내외도방의 편성은 최우의 사병으로 내도방을 조직하고, 최충헌의 도방을 계승해 외도방을 조직한 것 같다. 그리하여 내도방은 최우와 그 사저(私邸)주3의 호위를 맡게 하고, 외도방은 그 친척과 외부의 호위를 맡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내외도방은 각각 6번으로 편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우 때의 도방은 분번해 교대로 숙위하는 것 외에 반도의 토벌 및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에의 취역, 비상시의 비상경비 등에도 종사하였다. 이렇게 도방은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으로 중요한 일을 맡았기 때문에 그 훈련과 장비도 굉장하였다. 1229년(고종 16)최우가 가병(家兵)을 사열할 때 도방의 안마(鞍馬) · 의복 · 궁검 · 병갑 등이 아름답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고 <고려사절요>는 전하고 있다. 그 임무도 사적인 것 외에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 비상시의 경비 등 공적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조직되자, 공적 임무는 삼별초가 맡게 되고, 도방은 오직 사적 임무인 숙위만을 맡게 되었다. 명칭에 있어서도 공적인 군사활동을 할 때는 가병 또는 사병이라 불렸다. 그러나 사적인 위병일 때는 원래의 사칭(私稱)인 도방이라 불렸으나, 이것도 삼별초가 조직된 뒤 가병이니 사병이니 하는 말은 없어지고 오직 도방으로만 불리게 되었다. 최항 때 이르러서는 분번제(分番制)가 더욱 확대되어 36번이 되었다. 그 병력은 전대(前代)의 것을 계승하고, 거기에 다시 그가 집권 전부터 거느려 오던 사병을 합해 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36번도방의 편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1257년 최항이 죽자 최양백이 이를 비밀에 붙이고 선인열과 더불어 최항의 유언대로 최의를 받들기로 하여, 문객 대장군 최영과 채정, 그리고 유능에게 연락해 야별초 신의군 및 서방3번 · 도방36번을 회합시켜 주야로 경비하게 하고 나서 상(喪)을 발표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체로 최항의 집권시대에 편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36번도방은 최의에 의해 계승되었다. 1258년(고종 45) 최의가 대사성 유경, 별장 김인준, 도령낭장 임연 등에게 피살되어 최씨정권이 몰락되자 한때 왕권에 예속되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김준과 임연, 다시 그의 아들 임유무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한 도방도 이들을 위한 사적 호위기관으로 그 구실을 다하였다. 1269년(원종 10) 임연은 삼별초와 6번도방을 거느리고 안경공 창의 집에 가서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그를 받들어 왕에 즉위하게 한 일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임연이 도방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도방도 최씨정권 후기와 마찬가지로 호위의 역할 외에 정치적, 군사적 무력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종이 홍문계(洪文系)를 시켜 송송례와 삼별초를 움직여 임유무와 그 일당을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은 100여 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의 세력기반의 하나였던 도방도 아울러 폐지되었다.
3. 교정도감
1170년(의종 24), 고려에서 무신정변(武臣政變) 즉 무신들이 일으킨 난이 터졌다. 정중부(鄭仲夫) 등 국왕을 호위하던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고려는 후삼국 시대라는 긴 전란기에 세워져 수많은 전쟁을 거쳐 통일을 이룬 나라였다. 군사력을 갖춘 지방의 유력자들, 당시에 ‘성주(城主)·장군(將軍)’ 등으로 지칭되었던 이른바 ‘호족(豪族)’들은 이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한 고려 조정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야 했다. 왕실과 조정의 입장에서는 이제 평화적인 문치(文治)를 통해 국가를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질수록, 행정을 담당하는 문신(文臣)들의 역할과 위상이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높은 벼슬에 오른 관리들이 서로의 자녀들을 혼인시켜 인맥을 형성하고, 이들의 자손들이 음서(蔭敍)와 과거(科擧)를 통해 대대로 관리가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왕실과 혼인을 맺은 집안들이 명문으로 대두하였다. 이른바 ‘문벌(文閥)’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 중기로 접어들면서 이들 문벌이 고려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벌에 속한 인물들이라고 해서 모두 탐욕에 찬 악인들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들 중에는 명망 높은 정치인들도 많았다. 하지만 인종(仁宗) 대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벌어지듯, 권력을 둘러싸고 추악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종의 아들인 의종(毅宗)의 시대로 접어들어, 고려 정계는 점차 나태와 태만에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사회경제적으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조정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 의종은 측근 문신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시를 지으며 노는 향락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서 소외된 무신들은 점차 불만이 쌓여갔고,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고려 정계의 권력 지형은 완전히 뒤엎어졌다. 이제 무신들, 특히 핵심적인 권력을 쥔 무신 집권자가 왕을 허수아비처럼 옆에 두고 정치를 농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들 내부에서도 권력을 둘러싸고 피 튀기는 갈등이 벌어졌다.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 정중부, 이의민(李義旼), 경대승(慶大升) 등 여러 무신들이 서로를 제거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가 스러졌다. 그리고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이의민 세력을 제거하고 정점에 올랐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질 이른바 ‘최씨 정권’의 시작이었다.
최씨 정권은 이후 4대에 걸쳐 약 60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적인 설명이고, 최충헌 본인은 여러 차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의 대상이 되었다. 함께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쥐었던 동생 최충수(崔忠粹), 외조카인 박진재(朴晋材)도 최충헌과 알력을 빚다가 제거되었다. 비록 미리 적발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1198년(신종 1)에는 그의 집 노비인 만적(萬積)이 이른바 ‘만적(萬積)의 난’을 꾸미면서 자신의 주인인 최충헌을 죽이려 하였다. 1203년(신종 6)에는 노비들의 군사 연습이, 1204년(신종 7)에는 최충헌에 대한 암살 모의가 적발되었다. 1209년(희종 5), 또 한 차례의 암살 모의가 드러났다. 교정도감이 설치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므로, 이에 대해 사료에 담긴 내용을 살펴보자.
그 해 4월, 우복야(右僕射) 한기(韓琦)와 장군(將軍) 김남보(金南寶) 등 9명이 사형을 당하고 그 세력은 유배를 당하였다. 한기의 세 아들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 한기에 대한 다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정2품 문신인 우복야였으므로 정계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처형을 당한 것은 최충헌에 대한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역참 중 하나인 청교역(靑郊驛)의 역리(驛吏) 세 명이 공첩(公牒)을 위조하여 여러 절에 보내 승도(僧徒)들을 불러 모은 일이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섬기는 승려들이 무슨 난에 가담하겠는가 싶을 수 있지만, 실제로 몇 해 뒤인 1217년(고종 4)에는 여러 절의 승려들이 개경에서 최충헌을 죽이려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오래 전 숙종(肅宗) 시대의 ‘여진(女眞) 정벌’ 때에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면서 승려들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짓고 부대로 편성한 일도 있었다. 고려 시대에 승려들은 유사시에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다른 절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귀법사(歸法寺)에서는 공첩을 받고 이를 최충헌에게 알렸다. 이에 최충헌은 금(金)의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인 영은관(迎恩館)에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설치하고, 개경의 성문을 닫은 뒤 그 일당을 수색하였다. 그 조사 결과 이 일에 한기 등이 연루되었다고 보고되었다. 그 결과 위와 같은 처형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관련 자료의 전부이므로 이 일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이 ‘교정별감’이 설치되었다는 첫 번째 사료이다. 이름이 다르므로 ‘교정별감’은 그 이전에 이미 설치된 ‘교정도감’의 지부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은 기구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중요한 것은 최충헌이 자신에 대한 역모를 조사하고 처리하기 위해 이미 존재하던 국가 기구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별도의 조직을 설치하였다는 점이다.
교정도감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무릇 시행하려는 것은 반드시 교정도감에서 나오게 하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열전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교정도감이 ‘여러 가지 일[庶事]’을 담당하였다고 묘사되었다. 즉 교정도감은 최충헌이 여러 분야에 대해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데에 쓰인 핵심 기구였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교정도감은 오랜 기간 동안 존재했지만 그 운영에 대한 규정이나 사례들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몇몇 사례를 통해 그 기능을 추정해야 하는데, 위의 묘사가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우선 사료에 남아있는 교정도감의 활동상을 살펴보자.1227년(고종 14) 2월, 최우는 교정도감으로 하여금 궁궐 내의 여섯 관청에 지시하여 과거 급제자 중 아직 관직을 받지 못했지만 재주와 덕행이 있는 사람들을 천거해 올리도록 하였다. 무신집권기의 인사행정은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기보다는 권력자와의 연줄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에 급제하고서도 관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최우는 이러한 사람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모으곤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와 같은 당대의 문사(文士)도 이런 경우였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서방(書房)에 머물며 최우의 문객이 되었다. 위의 경우에는 자신의 문객으로 삼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조정의 관직을 부여하기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전자라면 사적인 목적으로 국가 기관을 이용한 것이며, 후자라고 해도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정방(政房)이 있으니 비정상적인 일이다. 1228년(고종 15)에는 교정도감이 승려와 지방관 간의 갈등에 개입한 모습이 보인다. 한 승려가 자혜원(慈惠院)을 짓기 위해 강음현(江陰縣)에서 나무를 베었다. 하지만 강음현의 지방관인 감무(監務) 박봉시(朴奉時)가 이를 금지하고 이미 벤 나무는 관청으로 거두어들였다. 이 승려는 연줄이 많았는지, 포기하지 않고 당시의 권력자를 통해 박봉시에게 계속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탁을 받은 최우가 교정도감으로 하여금 공문서를 보내 승려의 말을 들어주라고 지시한 모습이 보인다. 정당하게 집행된 지방관의 업무에 대해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압력을 행사하려 하였고, 이것이 교정도감을 거쳐 하달되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250년(고종 37)에는 최우에 이어 그 아들인 최항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최항은 교정도감의 수장인 교정별감(敎定別監)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 지위 명의로 공문서를 발송하여 청주(淸州)와 안동(安東) 등 여러 지역에서 올려야 할 공물들 및 잡다한 명목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각지에 파견되었던 교정수획원(敎定收獲員)들을 불러올렸다. 이름으로 보아 교정도감 소속이었을 교정수획원들은 각지에서 수탈을 일삼아 많은 민원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이 거두어들인 공물과 잡세는 중앙 정부가 거두는 조세였을 수도 있으나, 교정도감의 재원으로 쓰일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최항이 교정도감 조직을 이용하여 백성들로부터 공물과 세금을 거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교정도감은 원래 설치되었던 목적에 가깝게 운용되기도 하였다. 1257년(고종 44)에는 몽골에 투항하려 한 별장(別將) 이성의(李成義)와 유거(劉巨)에 대한 첩보가 교정소((敎定所), 즉 교정도감에 보고된 일도 있었다. 이들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그 조사와 처형을 전반적으로 관리한 곳은 분명 교정도감일 것이다. 한편 1264년(원종 5)에 국왕 원종(元宗)이 당시의 무신집권자인 김준(金俊)을 교정별감으로 임명하면서 ‘국가의 비위를 규찰하도록 하였다’라고 한 점도 이러한 기능과 관련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찰 기능은 최충헌이 처음 이 기구를 세웠을 때의 목적에 가깝다. 또 역모를 꾸민 자들을 처분한 뒤에 이들의 재산을 나눠주는 일에도 교정별감이 개입했던 모습이 고문서인 「수선사내로선전소식(修禪社乃老宣傳消息)」에 담겨 전해진다. 교정도감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를 고려 조정의 관료 제도 최상층에 자리 잡고 제도적으로 국가 기구를 총괄하는 기관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이보다는 군사력에 기반한 무신집권자가 활용한 여러 기관 중 하나일 뿐으로 여기기도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교정도감이 최충헌을 비롯한 해당 시기의 무신집권자의 뜻을 구현하는 기능을 지녔으며, 이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사료에 남아있는 그 모습은 대개 무신집권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후대에 전해주고 있다.
핵심정리
1. 중방
- 고려 중앙군 '2군 6위' 의 정/부 지휘관인 상장군/대장군의 합좌기구입니다.
- 무신정권에서 국가 중추 기구로 발전하게 됩니다.
2. 도방
-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한 뒤, 자신의 사병 집단으로 설치합니다.
- 이후 최충헌 집권기에 재설치되어,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됩니다.
3. 정방
- 무신집권기에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하고,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 이에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 원 간섭기부터는 국가 기관으로 변모하였으며 충렬왕-공민왕 대 등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합니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 이후, 완전히 폐지됩니다.
4. 서방
- 서방 역시 최우가 자신의 집에 설치한, 문인 숙위(일직 당직) 기구 입니다.
- 사실상 문관 등용의 업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 최우정권에서 특징적인 것은 무신집권기이나, 문신도 등용했다는 것입니다.
5. 응방
- 고려/조선 시기 매의 사냥과 사육을 위해 두었던 관청입니다.
- 몽골이 고려 복속 후, 조공품으로 요구하는 해동청(사냥매)를 잡고 길러서 몽골에 보내기 위해 설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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