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 : 의 문 무
의 : 의종(1146~1170)
문 : 문벌귀족사회 붕괴
무 : 무신정변 발발(정중부의 난 1170)
1. 의종(1146~1170)
의종은 고려전기 제1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46~1170년이며 인종의 맏아들이다. 1170년 서경에서 신령을 반포하여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유교적 정치이념보다는 불교·음양설·선풍 등을 중요시하여 문신세력들의 심한 제약 속에 구체적인 성과를 낳지 못했다.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갈등은 정치·사회적 혼란을 초래했고 종국에는 무신정변을 발생시켰다. 1170년 정중부 등의 정변으로 폐위되어 거제현에 유배되었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이의민에 의해 살해되었다.
1134년(인종 12)에 태자(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1170년에 서경에 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정하는 것은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함이며, 이에 옛 성인들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을 받들어 현재의 민폐를 구제할 수 있는 일을 채택해 반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교 · 음양설 · 선풍(仙風)을 중요시하였을 뿐 유교적 정치이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의종이 실제 정치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유교지식인이었던 문신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거둥했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왕위에서 물러나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갔다. 이와 동시에 아우인 익양공 왕호(翼陽公 王晧)가 즉위하니, 곧 명종이다. 그 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의 거병으로 계림(鷄林: 현재 경상북도 경주)에서 복위되기를 기다렸으나 거병이 실패하자 이의민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2. 문벌귀족의 붕괴 무신정변
즉위 초부터 개경(開京)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文臣勢力)들에게 심한 제약을 받았고, 왕위를 엿보는 반역음모로 인해 항상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재위 중 거둥이 잦았던 것도 놀이를 좋아하는 천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의 절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주된 이유로 생각된다. 그리고 천성이 나약하고 섬세하긴 했으나 무능하지는 않았다. 격구(말을 타고 채로 공을 치던 경기)와 음률(音律)에 능했으며 시문(詩文)에도 탁월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격과 재능은 어려운 시기의 군주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은 분명해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148년에 현릉(태조의 능) · 창릉(세조의 능) 등을 참배했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중창하고 1158년에는 백주(白州: 현재 황해도 연백지역)에 별궁(別宮)을 창건해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한 것에서도 의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 인정(人情)과 태평(太平) 등에 관한 생각과 글을 남겼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왕조의 중흥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실제 정치면에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오히려 왕권능멸의 풍조와 신변의 위협이라는 시달림을 받았다. 따라서 부처나 여러 신(神)들에게 의존하거나 각처를 옮겨 다니며 놀이로써 시름을 잊었고 문신들에게는 자기과시를 하였다. 결국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 · 갈등은 정치 ·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고 종국에는 무신정변(1170)을 발생시켰다.
한국사에서 ‘문벌’은 ‘문벌귀족(門閥貴族)’, ‘경화문벌(京華門閥)’ 등과 같이 전문용어로 쓰일 경우가 많다. ‘문벌귀족’은 고려 전기에 과거제를 실시한 이후 대대로 입사(入仕)하여 벼슬을 할 수 있는 집안을 의미하는데, 이 때의 ‘귀족(貴族)’은 혈연 공동체를 뜻한다. 관료제가 정착되기 이전인 고려 전기에는 호족(豪族)을 비롯한 혈연 공동체가 중시되었고, 음서제(蔭敍制) 등을 통해 신분이나 직위 상속이 이루어졌다. 이들 지배 세력은 무신 정권 이후 ‘권문세가(權門勢家)’로 바뀌었다.
3. 무신정변 발발(정중부의 난 1170)
고려 의종[고려](毅宗) 24년(1170)에 발생한 무신정변은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힐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비록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결과는 100년에 달하는 무신들의 집권이라는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자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고려시대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었고,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많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1170년(의종 24)의 이 정변을 ‘정중부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변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실제 이를 주도한 것은 정중부보다도 이의방과 이고 등 하급군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중부를 비롯해서 이소응, 양숙, 진준 등 이미 장군직에 오른 고위 무신들은 군인들이 국왕을 시해하려 하거나 문신들의 집을 헐어버리려 할 때 이를 만류하는 등 사태의 전개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반면에 정변을 가장 전면에서 이끌며 가장 과격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의 하위 장교들이었다. 이들의 지휘를 받으며 제일선에서 살육과 파괴를 자행한 자들은 무명의 군졸들이었다. 쌓여있던 불만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표출되었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한 군사가 병부낭중 진윤승(陳允升)의 집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왕의 유지(諭旨)에 먼저 대궐로 나오는 사람을 승선에 임명한다 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윤승이 나가니 군사들이 그를 죽이고 큰 돌을 안겨 주었다. 이전에 수성(壽星)이 나타났다 하여 진관사(眞觀寺) 남쪽에 사당을 창건할 때 진윤승이 공사를 감독하였는데, 모든 군사들이 돌을 운반할 때 반드시 저울로 달아서 받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한 것이다.”
새로운 국왕이 옹립되면서 정변은 일단락되었지만, 사태를 수습하는 일은 고스란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 되었다. 명종은 즉위하던 날 곧바로 인사발령을 단행했다. 정변 당시 정3품의 상장군 내지 종3품의 대장군이었던 정중부, 양숙, 이소응 등은 모두 종2품의 참지정사나 정3품의 좌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 기존에 무신들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위직을 뛰어넘는 인사였다. 그런데 더욱 파격적이었던 것은 이고, 이의방, 채원 등에 대한 인사였다. 기존에 정8품의 산원(散員)에 불과했던 이들은 몇 계단을 뛰어넘어 곧바로 대장군(종3품), 장군(정4품)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고는 위위경을, 이의방은 전중감을 겸임하게 되었다. 모두 문관직으로, 정변 이전이었다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뒤이어 10월 초에는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또한 공신 책봉이 이루어졌다. 정중부, 이의방과 이고를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책정하여 공신각에 그들의 초상화를 걸게 하였고, 양숙과 채원을 2등공신으로 삼았다.
논공행상을 마지막으로 정변은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무신들의 세상이 되었다. 1170년(명종 즉위년)부터 왕정복고가 단행되는 1270년(원종 11)까지 꼭 100년 동안을 역사에서는 무신정권시대라고 부른다. 그 사이 고려 국왕은 명종에서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고려](高宗)을 거쳐 원종[고려](元宗)으로 이어졌고, 무신 집정자도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을 거쳐 최씨 정권 시대의 최충헌(崔忠獻), 최우(崔瑀), 최항[중기](崔沆), 최의(崔竩)를 지나, 마지막으로 김준(金俊), 임연(林衍), 그리고 임유무(林惟茂)에 이르렀다. 한국사 속에서 유례없는 무신들의 집권기를 열었던 것이 바로 무신정변이었다.
무신란(武臣亂)은 1170년(의종 24)에 문신 위주의 폐정에 반발하여 일어난 무신들의 정변이다. 견룡군 무관이었던 이의방, 이고 등이 군부의 수장 정중부를 정변의 주병자로 내세워 일으킨 정변이다. 정변의 성공으로 이후 100년 간 특정의 무신 집정자가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는 무신 정권 시대가 연출됨으로써 고려시대 전기, 후기를 나누는 고려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다.
무신란은 1170년(의종 24) 8월에 일어났다. 의종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계기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날 의종은 무신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무신들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정변은 보현원에 이르러 이고와 이의방이 순검군을 집합시켜 의종을 수행한 문신들을 살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평소 토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불만이 누적되었던 일반 군인층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무신들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되었다. 그러나 봉기의 주동자들이 치밀한 사전 계획을 가지고 정변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또 무신란은 고위 무신들이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국왕의 시위부대인 견룡군 소속 중급 장교들이 모의하여 일으킨 난이었고, 여기에 고위 무신이 참여한 것이다. 무신란에는 신분이 미천한 무신들과 함께 일반 군인들이 대거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이 주목된다. 중 · 하급의 무신과 일반 군인의 참여에 의하여 난은 원래 예상된 것보다 훨씬 과격하게 확산되어 다수의 문신들이 제거되고 국왕이 폐위되는 상황으로 진전된 것이다.
고려시대는 문과 무를 나누어 국정을 운영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던 시기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문반의 귀족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문무 간의 불균형이 심화되는 모순 때문에 무신란이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무신란은 문신 중심의 지배 체제를 재점검하는 기회가 되었다. 정치세력의 전면적 교체와 함께 문반 귀족 중심 사회에서 축적된 사회적 모순이 무신 정권 시대에 다양하게 표출됨으로써 무신란 이후 정치적 불안정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신란이 가져온 고려 사회에 대한 충격과 변화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란을 고려 역사에서 전 · 후기의 분수령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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