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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예종 두문자 : 예 동 감 구 혜 복 무 청 보 양 대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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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성기 예종
고려 전성기 예종

 

예종 : 예 동 감 구 혜 복 무 청 보 양 대

 

예 : 종(1105~1122)

동 : 북9성

감 : 무파견(지방관 파견)

구 : 제도감(1109 빈민구제)

혜 : 민국(약국)

복 : 원궁(궁궐 내 최초 도교사원)

무 : 예재(국학 7재)

청 : 연각(도서관)

보 : 문각(도서관)

양 : 현고(장학기금)

대 : 송에서 성악 수입

 

 

고려 16대 예종
고려 16대 예종

 

1. 종(1105~1122)

예종은 고려전기 제1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05~1122년이며, 숙종의 맏아들이다.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여진 정벌에 힘썼다. 윤관·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함흥평야 일대에 9성을 설치했다가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의 금나라,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서는 대체로 중립외교를 펼쳤다. 국학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를 설치하고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두었으며 명유를 뽑아 학관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여 유학을 크게 일으켰다. 송의 궁중에서 아악으로 쓰던 대성악을 들여왔다.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해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 맹세하는 축원문)를 간직했다가,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고려시대 별무반의 기병)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썼다. 1107년에 윤관 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함흥평야 일대에 9성(城)을 설치하였다.[함흥평야에서 두만강 북쪽 일대에 이르기까지 9성을 설치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 그러나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 9성 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책동으로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1109년 국학에 학과별 전문 강좌인 칠재를 설치해 관학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에는 혜민국을 설치해 빈민들의 시약(施藥: 무료로 약을 지어주는 일)을 담당하게 했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를 설치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해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원병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서(經書)를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일으켰으며, 송나라로부터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아악이라는 궁중음악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라는 글로써 화친(和親)하기를 청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19년 국학에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때 유사(有司)에게 명해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명과 무학 17명으로 하며, 명유(名儒)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더니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일어났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 김락을 추도해 이두문으로 된 향가 형식의 <도이장가>를 지었다. 1122년 4월에 죽자, 태자 왕해(王楷: 인종)가 즉위하였다.

 

2. 북9성

11세기 후반 여진의 완안부(完顔部)가 세력을 확장하여 그간 고려의 영향권 안에 있던 여진 부족까지 복속시키려 하자 고려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여 윤관(尹瓘)을 중심으로 하여 17만 대군으로 대대적인 여진 정벌 전쟁에 나선다.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고 새로 개척한 영역에 9개의 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 성과와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생존기반을 잃은 여진이 무력으로, 또 외교적으로 끊임없이 9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여 고려는 고심 끝에 9성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던 것이다. 야심찬 북방 개척의 시도는 결국 인적, 물적 손실만을 남기고 고려는 두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려는 새로운 국제 정세를 맞이하게 된다.

 

고려 건국 이래 여진과 고려는 대체로 사이가 좋았다. 고려에 복속하였던 여진 부족은 고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을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여진의 완안부가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훗날 금의 목종(穆宗)으로 추증되는 완안부의 추장 영가(盈歌)가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통일하고 지금의 간도 지방을 차지한 뒤, 남하하여 갈라전(曷懶甸) 지역까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영가가 살아 있을 때에는 고려와 큰 마찰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그동안 고려에 내부(來附)하여 살던 갈라전 지역의 여진들이 완안부의 움직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완안부의 세력이 확장될수록 여진 부족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고려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1104년(숙종 9)에 영가의 조카인 오아속(烏雅束)이 여진족을 이끌게 되면서 안팎으로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여진 내부에서는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 등이 오아속에 반기를 들어 갈등이 발생하였다. 오아속이 공형지조(公兄之助)에게 명하여 부내로를 공격하게 하면서 그 군대가 국경 근처 정주(定州) 관문 밖에 주둔하였다. 여진의 동태를 주시하던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를 고려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임간(林幹)을 파견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임간이 공을 세우는 데만 급급하여 신중하지 못한 작전을 펼쳐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여진에게 크게 참패하고 만다. 이후 임간을 대신하여 윤관이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출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윤관의 여진 정벌의 시작이다.

윤관은 적 30여 명을 베며 비교적 선전하는 듯하였으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고려 군대 반 이상이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여 피해가 막심하였던 것이다. 결국 윤관은 태도를 낮추어 강화를 맺고 돌아오게 된다. 숙종은 두 차례에 걸친 패배에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다.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여진을 정벌하게 된다면 그 지역에 절을 지어 바치겠다는 숙종의 기도에서 그의 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절치부심한 윤관은 패전의 원인이 고려군은 보병 중심이고 여진은 기병 중심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숙종에게 별무반(別武班) 창설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2월에 별무반을 설치하였으나, 아쉽게도 숙종은 여진 정벌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1105년(숙종 10) 10월에 사망하였다. 이제 여진 정벌의 과업은 예종의 몫이 된 것이다.

1107년(예종 2) 윤10월, 예종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여진 정벌을 결정하고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예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여 윤관과 오연총에게 부월을 하사하였다. 여진 정벌이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이다. 이때 동원된 고려 출정군은 총 17만의 규모였으며 별무반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고려군은 속전속결로 행군하며 여진족을 소탕하였다. 135촌을 격파하여 약 5,000명을 죽였으며 사로잡은 포로도 많았다. 사료에 기록된 모습은 그야말로 파죽지세, 전쟁은 대승이었다.

 

윤관은 출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국경을 설정하여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1107년 12월부터 웅주(雄州), 영주(英州), 복주(福州), 길주(吉州)에 성을 축조하였고 이듬해 함주(咸州)와 공험진(公嶮鎭)에 추가로 축성하였다. 윤관은 6성 축성을 완료하고 공험진에 비를 세워 국경을 다시 규정하였다. 또한 왕에게 하례하는 표문을 올리고, 임언(林彦)에게 영주 관청의 벽에 전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고려의 갈라전 지역 장악과 축성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고려 조정에서 본래 기획한 것은 이 6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08년(예종 3)에 윤관은 원래 계획보다 더 깊이 적진에 들어가 평융진(平戎鎭)과 의주(宜州), 통태진(通泰鎭)에도 축성함으로써 단계적으로 9성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개척한 지역을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9성에 남도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농사짓고 살게 하였다. 이때 옮긴 백성의 규모가 무려 75,000여 호에 달했다고 한다. 영주성 안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동보제사(鎭東普濟寺)를 창건하였는데, 이는 여진 정벌에 성공하면 절을 짓겠다던 선왕 숙종의 서약을 실천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의 숙원이었던 여진 문제를 일단락 짓고 윤관과 오연총 등은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하는 여진의 군사적 반격은 성을 쌓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고려의 9성 축조와 사민 정책은 여진인들이 오랜 기간 정착해서 살아가던 생활의 터전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거주와 생존이 걸린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항이 치열하고 거셀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려가 이러한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병마부사(兵馬副使) 박경작(朴景綽)이 윤관에게 “무공은 이미 떨쳤으니 마땅히 군대를 거두어 만전을 도모해야 하는데, 다시 오랑캐의 경계에 깊이 들어가 성지(城地)를 줄지어 짓는 것은, 지금은 비록 쉽게 이룰 수 있겠지만 후에는 아마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다만 윤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행하였던 것이다. 선왕과 현왕의 의지가 담긴 여진 정벌을 실천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던 것일까. 그러나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군과의 군사적 격돌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심화되었다. 고려는 이에 대응하여 숭녕진성(崇寧鎭城), 진양진성(鎭陽鎭城), 선화진성(宣化鎭城)을 추가로 축조하여 방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보통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개척한 지역을 9성으로 통칭하지만, 실제로는 총 12개의 성이 사료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조정이 여진과 화친을 결정하고 철수한 성은 다시 9개의 성으로, 여기에 보이지 않는 의주성, 평융진성, 공험진성은 중간에 여진의 공격으로 다시 빼앗기거나 전략적 가치의 하락 등으로 폐지되어 상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진이 거세게 저항하자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윤관과 오연총이 다시 출정하였으나 전세(戰勢)는 별로 좋지 않았다. 또한 개척한 땅이 크고 넓으며 9성 간 거리가 멀고 지세가 험준하여 관리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고려 내부에서도 계속되는 전쟁 물자 조달과 기근, 전염병 등 어려움이 겹쳐 일어나 백성들이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괴롭기는 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1109년(예종 4)에 여진이 9성을 반환해 준다면 예전과 같이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겠다며 화친을 청해왔다. 곧 예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9성 반환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조정은 9성 반환을 찬성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김인존이 말하기를, “땅이라는 것은 본디 민(民)을 기르는 것인데 지금 성을 다투다가 사람을 죽이니 그 땅을 돌려주고 민을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그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거란과 틈이 벌어질 것입니다. … 이로써 생각해보면 나라에서 9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거란이 반드시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만약 동쪽으로는 여진에 대비해야 하고, 북쪽으로는 거란에 대비해야 한다면, 즉 신은 9성이 삼한의 복(福)이 아니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9성 개척에 부정적이었던 거란의 입장은 고려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부담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진 정벌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예종도 9성 유지와 관련한 안팎의 여러 어려움과 이미 반환론으로 기울어진 조정의 분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결국 논의 끝에 고려는 9성에서 철수하고 개척한 영토를 여진에게 돌려주기로 하였다. 야심차게 여진 정벌에 나서 9성을 쌓은 지 겨우 2년 만의 일이었다.

 

3. 무파견(지방관 파견)

예종대(睿宗代)의 지방제도 정비의 특징은 속현(屬縣)에 대한 감무(監務) 파견이다. 현종 9년 당시에는 縣令官이 많아야 29현 정도였으므로, 335현에서 이들 29현을 뺀 306현은 외관을 두지 않은 속현이었던 셈이다. 이는 곧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 철저하게 침투하지 못했다는 방증이 된다. 고려 국가가 속현을 줄이려는 노력을 계속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감무 파견은 이런 상황을 전제로 시행되었다. 감무는 예종 때를 시작으로 하여 인종·명종·공양왕 때까지 계속해서 파견되었다. 예종 때 감무를 파견했던 이유는 넓게 보면 중앙 집권화의 진전 내지 제도 정비의 일환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당시 국가의 입장에서 유민안집(流民安集)과 더불어 소(所)의 장악 및 수조권자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감무가 파견된다고 해서 바로 고려 지방제도의 중요 특성인 領屬關係가 해체되지 않는다. 고려정부는 현령관과 감무를 엄격히 구분하여 현령관을 파견하였을 때에는 영현으로 승격시켰으나, 감무를 파견하였을 때에는 여전히 속군현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예종 때 지방제도 정비의 또 다른 특징은 안찰사(按察使)의 파견이다. 안찰사는 정종(靖宗)때 이미 파견되었고, 문종 때에 浿西道와 西海道에도 파견되었지만, 전국적인 안찰사 파견은 역시 예종 때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종이 즉위할 당시 가장 크게 대두된 사회문제는 당시 제도의 수령들이 대부분 사리를 중시하여 대체가 손상되고 있고, 생민의 유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외관들의 治民을 파악하여 이들의 黜陟을 분명히 하여 유민 안집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주부군현의 외관체제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하여 이들에 대한 관리·감찰이 필요했다. 당시 안찰사를 파견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령 제도 按廉使와 別監의 직임이 ‘察吏治’와 ‘間民苦’였다는 것은 고려의 지방 파견관의 직능이 조선사회와는 판이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안찰사는 기존의 외관 체제를 유지하는 선상에서 외관의 관리, 감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안찰사가 주목 중심의 도를 단위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영속관계를 기초로 한 고려 군현제의 특성에 기인한다.

 

감무(監務)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속군현(屬郡縣)에 파견된 지방 관직이다. 유민의 안집과 권농, 조세 수취, 향리를 감독하는 등 부임한 군현의 지방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감무는 1106년(예종 1)부터 시작하여 인종 대, 명종 대에 걸쳐 대규모로 파견되었다. 1359년(공민왕 8)에 안집별감(安集別監)이라 고쳤다가 1388년(창왕 즉위년)에 다시 현령 · 감무로 바꾸었다. 공양왕 때에는 조선 건국 세력이 군현제를 정비하는 작업의 하나로 감무를 새로 설치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감으로 개칭하였다.

 

4. 제도감(1109 빈민구제)

구제도감 고려시대 질병환자의 치료 및 병사자의 매장을 관장하던 임시관서이다.  1109년(예종 4) 4월 개경의 백성들이 질병에 걸리자 이들을 치료하고,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와 뼈를 거두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이처럼 구제도감은 전염병자 등을 구제하기 위한 의료기구였으나, 1348년(충목왕 4) 2월 진제도감, 1381년(우왕 7) 진제색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354년(공민왕 3) 6월에 진제색이 기민을 구휼하였다.

 

5. 민국(약국)

혜민국은 고려 중기에 백성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1112년(예종 7)에 설치하여 판관(判官) 4인을 두었는데, 본업(本業) 및 산직(散職)으로 교차하고 을과(乙科)에 급제한 사람이 권무(權務)하였다. 이 혜민국은 충선왕 때 사의서(司醫署)의 소관으로 하였으나 1325년(충숙왕 12) 10월의 교문(敎文) 가운데에 “혜민국·제위보·동서대비원은 모두 폐기……”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직만 존속되고 있었던 것 같다. 1391년(공양왕 3)에 혜민국을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개칭하여 일반 진료에 종사하게 하였다. 1392년 7월의 태조신반관제(太祖新頒官制)에서 혜민고국(惠民庫局)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와 같이 판관 4인을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 1월에 혜민서(惠民署)로 개칭하였다.

 

6. 원궁(궁궐 내 최초 도교사원)

복원궁은 옛 개경(현재 개성)의 북쪽 태화문(太和門)에 있었던 고려전기 제16대 예종 연간에 건립된 도관. 도교사원이다. 건립 연대는 대관(大觀)과 정화(政和)의 두 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으나 정설은 없다. 1120년(예종 15) 6월에 복원궁에서의 친초(親醮)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립의 경위는 고려 후기의 문인 임춘의 「일재기(逸齋記)」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재기」에는 숙종 예종조의 인물인 이중약을 칭송하는 글로서 예종이 이중약의 건의에 따라 복원궁을 건립한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이중약은 어려서부터 도교에 심취하여 수도를 계속하였고, 의술에도 밝아서 숙종의 임종 무렵에 병을 고치기 위해 송도로 불려갔으나 도착 전에 숙종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종의 만류로 궁중에 머문 그는 예종이 도교에 심취하는 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뒤 휘종 치하의 송나라에 가서 도교를 배우고 귀국하여 도관 설치를 상소, 복원궁을 세우고 거기에서 도교의 이치를 강론하였는데, 은하수의 뭇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한다.

 

복원궁의 모습은 1123년(인종 1)에 북송 사신의 수행원으로 따라왔던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복원궁은 송도의 북쪽 태화문(太和門) 안에 있으며 정면의 전방(前榜)에는 ‘부석지문(敷錫之門)’, 차방(次榜)에는 ‘복원지관(福源之觀)’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전각 안에는 삼청상(三淸像)이 그려져 있고 그 중 혼원황제(混元皇帝), 즉 노자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감색(紺色)으로 되어 있어 송휘종이 그린 노자의 상과 일치했다고 한다. 복원궁에는 재궁(齋宮)이 있어 도사 10여명이 낮에 거처하여 여러 가지 도교의 제례의식을 집행하고, 저녁에는 사실(私室)로 돌아가곤 하였다.

 

도사에 대해서는 『송사(宋史)』 고려전과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록이 나타나는데, 『송사』에는 대관 연간에 도관을 세우고 우류(羽流) 10여 인을 보내 주었다고 하였다. 『고려도경』에는 대관 경인년(1110)에 우류 2인을 고려에 보내 주었고 예종의 도교신앙이 독실하여 정화 연간에 복원관을 세워 도사 10여 인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복원궁의 창건 동기는 예종의 독실한 도교신앙에서 비롯되었고, 도사를 훈련시켜 복원궁의 운영을 준비시킨 것은 송휘종이 보낸 중국 도사들인 셈이다. 그런데 고려의 도사들은 속인들과 다른 복색도 하지 않았고 계율도 엄격히 지키지 않아 지탄을 받기도 하였는데, 도사와 속인 간의 구별이 처음부터 애매모호했던 점과 한국에서 도교 교단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서로 관계가 있다. 복원궁에서 행해진 재초는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태일(太一) · 수성(壽星) · 탄일초(誕日醮) 등에 불과하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초가 행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제례의식의 진행은 도사들이 담당했으나 축문에 해당되는 재사(齋詞)나 청사(靑詞)는 문신들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정포의 「복원궁행탄일초례문(福源宮行誕日醮禮文)」이 남아 전해 오고 있다. 태일신앙이 특히 강조되었는데 복원궁의 천황당은 태일의 신위를 안치하여 전적으로 그 초례만을 거행했던 곳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태일은 별 이름으로서 그것이 신격화되어 풍우 · 한발 · 기근 · 질병 등을 다스린다고 여겨 왔다. 태일을 받듬으로써 재앙을 없애고 수복강녕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7. 예재(국학 7재)

7재의 설치는 치학양현(置學養賢)한다는 예종의 교육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는 1107년(예종 2)에도 국학교육의 개선을 위해 1차 시도를 했으나 대신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실패하였다. 그 뒤 예종 4년에 비로소 7재의 교육개혁안을 제도적으로 확정, 최민용(崔敏庸) 등 70명의 유학생과 한백순(韓白純) 등 8명의 무학생을 수용함으로써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7재의 교육체제는 단순한 교육개혁의 의미를 넘어 당시의 전통적인 정치이념에 대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즉, 성종 이래의 전용문사(專用文事 : 오직 문사에만 힘씀)의 정치이념은 국자감의 교육목적을 오로지 문인관료(文人官僚)의 양성에 두었다. 그러나 예종 때의 정치의식은 북방민족과의 계속된 투쟁 및 긴장상태로 전용문사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1116년(예종 11) 8월의 조서에 보이는 바와 같이, ‘문무지추 불가편폐(文武之追 不可偏廢)’로 전환되고 있다. 7재 중 무학재의 설립은 이러한 역사성을 배경으로 무인관료군의 양성을 의도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7재의 교육성격은 1116년 4월의 제(制)에 “문무 양학은 국가교화의 근원이므로 일찍이 명(命)을 내려 제생(諸生)을 양육하게 하여 장래 장수(將帥)와 재상(宰相)의 등용에 대비하고자 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무인관료군으로서의 장수와 문인관료군으로서의 재상을 양성한다는 이원적 목표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8. 연각(도서관) 보문각(도서관)

청연각 보문각 고려 예종 때 설치되었던 비각(秘閣)을 말한다. 문신들과 더불어 6경(六經)을 강론하고 문예와 예악으로써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일종의 궁중 도서관이다. 위치는 궁궐 북쪽에 위치한 자화전(慈和殿)의 서쪽이었다. 소장 도서는 경(經)을 중심한 사(史)·자(子)·집(集) 등으로서 송(宋)나라의 서화류도 소장되어 있었다. 관원으로는 학사(學士 : 종3품) 1인, 직학사(直學士 : 종4품) 1인, 직각(直閣 : 종6품) 1인, 교감(校勘) 4인이었다. 당시 임명된 각신으로는 학사에 홍관(洪灌), 직학사에 정극공(鄭克恭), 직각에 윤해(尹諧) 등의 명사가 있었다. 그 위치가 궐내에 있었던 탓으로 학사의 직숙(直宿) 출입이 매우 어려워서 홍루(紅樓) 아래에 남랑(南廊)을 수리하여 학사의 회강당(會講堂)을 만들고 이를 ‘정의당(精講義堂)’이라 이름하였다. 그 좌우에 휴식소를 만들고 여기에 장서를 이동하여 ‘보문각(寶文閣)’이라 고쳐 불렀으며, 청연각학사를 충원하고 시직제(侍直制)를 증원하여 금자(金紫)를 하사하였다. 따라서 청연각 1116년(예종 11) 8월에 설치되었다가 겨우 3개월 만인 그 해 11월에 보문각으로 옮긴 셈이다. 당시에 청연각학사는 보문각으로 옮겼고, 또한 역대왕이 하사한 조서(詔書)류가 있었으니 청연각에 있었던 경사자집의 전적은 보문각에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9. 현고(장학기금)

양현고는 고려시대 국학(國學)의 장학재단이다. 1119년(예종 14)에 처음 설치되었다. 예종은 당시 사학(私學)의 융성으로 위축된 관학을 진흥하기 위하여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學舍)를 설립하고 유학생(儒學生)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을 입학시켜 이들의 교육과 국학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하여 국학 안에 양현고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2인의 판관(判官)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으나, 1243년(고종 30)에는 4인을 두어 2인은 양현고에 속한 토지가 있는 곳으로 파견, 세를 거두어 운반하도록 하고 2인은 양현고에 남아 있으면서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뒤 고려 말에 와서 국학이 쇠퇴하고 양현고의 재원도 고갈되자 안향(安珦)은 섬학전(贍學錢)을 만들어 양현고에 귀속시켜 교육진흥을 꾀하였다. 또한, 1308년(충렬왕 34)에 은 50근을 양현고에 하사하기도 하였다.

 

10. 송에서 성악 수입

대성악은 고려전기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우리나라 아악의 기점이 되는 음악을 말한다. 일명 대성악(大晟樂)이라고도 한다. 고려 예종 9년(1114) 사신 안직숭(安稷崇)이 송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송나라의 휘종(徽宗)이 준 신악기(新樂器)와 곡보(曲譜)를 가지고 왔다. 예종이 이를 고맙게 여겨 1116년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를 다시 하례사(賀禮使)로 보냈더니, 휘종이 또다시 송나라의 아악인 대성악과 그 음악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등가악기(登歌樂器)와 헌가악기(軒架樂器) 등의 아악기를 대량으로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안직숭이 가져온 것은 철방향(鐵方響) 5, 석방향(石方響) 5, 비파 4, 오현(五絃) 2, 쌍현(雙絃) 4, 쟁 4, 공후 4, 피리 20, 적(笛) 20, 지(篪) 20, 소(簫) 14, 포생(匏笙) 10, 훈(壎) 40, 대고 1, 장구 20, 박판(拍板) 20, 곡보 10, 지결도(指訣圖) 10점 등이었다. 또한, 왕자지와 문공미가 가져온 것 중 등가악기는 편종(編鐘)에 정성(正聲) 16과 중성(中聲) 12, 편경(編磬)에 정성 16과 중성 12, 금(琴)에 1현·3현·5현·7현·9현 각 2, 슬(瑟) 2, 지에 정성·중성 각 2, 적(篴)에 정성·중성 각 2, 소에 정성·중성 각 2, 소생(巢笙)에 정성·중성 각 2, 화생(和笙)에 정성·중성 각 2, 훈에 정성·중성 각 2, 박부(搏拊) 2, 축(柷) 1, 어(敔) 1점 등이었다. 헌가악기는 편종 9, 편경 9, 금에 1현 5, 3현 13, 5현 13, 7현 16, 9현 16, 슬 42, 지에 정성·중성 각 24, 적에 정성·중성 각 24, 소에 정성·중성 각 21, 소생에 정성·중성 각 21, 우생(竽笙)에 정성·중성 각 15, 훈에 정성·중성 각 14, 진고(晉鼓) 1, 오고(五鼓) 2, 입고(立鼓) 2, 비고(鼙鼓) 1, 응고(應鼓) 1, 축 1, 어 1점 등이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쳐 수입된 송나라의 신악기와 아악·아악기 등은 예종 9년 10월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서 송나라의 신악을 아뢴 일을 비롯하여 원구(圜丘:天子가 동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사직(社稷) 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악기가 점점 손상되는 데다, 송나라 음악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체질에 맞지 않으므로 송나라의 아악은 점차 침체, 쇠퇴하는 현상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또한, 고려의 유신들에 의해 멋대로 고쳐졌고,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의 아공[樂工]들에게 제대로 연습되지 못하였다. 한때 승지 서온(徐溫)이 송나라에 들어가 연주법을 익히고 돌아와서 아공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1370년(공민왕 19)에는 성회득(成淮得)이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아악기를 송나라의 대성악기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대성악은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1389년(공양왕 1) 악학(樂學)을 설립하고 1391년 아악서(雅樂署)를 설립했지만, 1392년 고려가 멸망하게 되어 악학과 아악서는 조선시대로 전승되었고, 아악의 부흥은 세종 때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성균관의 석전제(釋奠祭:음력 2월과 8월에 공자를 제사지내는 의식) 때 연주하는 대성악은 조선시대 세종 때 박연(朴堧)·유사눌(柳思訥)·정인지(鄭麟趾)·정양(鄭讓) 등이 ≪주례 周禮≫·≪통전 通典≫·≪악서 樂書≫ 등의 중국 원전을 참작하여 많이 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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