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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정종 두문자 : 정 팔 모 천 완

by noksan2023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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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종
고려 정종

 

정종 : 정 팔 모 천 완

 

정 : 종(1034~1046)

팔 : 관회 정례화(외국사신 초대)

모 : 천자수법(1039)

천 : 리장성

완 : 성(1044)

 

 

고려 10대 정종 가계도(근친혼 없음)
고려 10대 정종 가계도(근친혼 없음)


1. 종(1034~1046)

정종은 고려전기 제1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34~1046년이며, 동복형인 덕종의 서거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년에 팔관회를 열어 송나라 등 외국 상인들에게도 예식을 관람시키는 상례를 만들었다. 변경의 방위를 위해 힘썼으며, 동서대비원을 수리해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었다. 1037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고 책봉을 받았지만 이후 북방 경비에 주력해 1044년 덕종의 유업인 천리장성을 완성했다. 노비종모법과 장자상속법을 제정했다. 병이 위독하자 아우 왕휘(뒤의 문종)로 하여금 국정을 맡게 했다.

 

고려 10대 국왕인 정종(靖宗)은 현종(顯宗)과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덕종(德宗)의 친동생이며, 문종(文宗)의 이복형으로 1018년(현종 9) 8월 태어났고 이름은 형(亨)이다. 1022년(현종 13)에 내사령 평양군(內史令平壤君)에 봉해졌고, 1027년(현종 18)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 겸 내사령(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兼內史令)에 임명되었다. 정종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 강단이 있어서 사소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다. 1034년(덕종 3)에 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은 형 덕종(德宗)이 죽으면서 그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자, 같은 해 9월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거란과 우호관계를 다시 회복했지만, 정종은 군사적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040년(정종 6) 6월에 정종은 비록 사방이 무사하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각 지방에 사신을 보내 날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활쏘기와 말타기를 교습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1041년(정종 7) 8월에는 서북면병마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바다에 연해 있는 서북로 주진에 『김해병서(金海兵書)』를 각기 1본씩 주었다. 10월에는 서면병마도감사 박원작(朴元綽)이 제작해 바친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를 시험해보고 성능이 탁월하자 이를 동쪽과 서쪽의 변방에 위치한 진(鎭)에 비치하게 하였다. 또한 정종은 성을 쌓아 외적에 대한 방비를 하였다. 1039년(정종 5) 9월에는 정변진(靜邊鎭) 과 같은 해 11월에는 숙주(肅州)에 성을 쌓았고, 1041년(정종 7) 9월에는 영원진(寧遠)과 평로진(平虜鎭)에, 같은 해 12월에는 동로의 환가현(豢猳縣)에 성을 쌓았다. 1044년(정종 10) 10월에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그리고 원흥진(元興鎭)의 성들을 쌓아 11월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때 성을 쌓는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포상을 해, 모범으로 삼게 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종이 국방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내용들이다 국무에 전념하던 정종은 1046년(정종 12) 4월 병에 걸렸다.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든 관리들이 정종의 회복을 바라며 절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는 사실을 보면, 매우 심각했던 듯하다. 병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고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종은 5월에 이복 동생 휘(徽, 문종)를 불러 국정을 맡기고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능은 주릉(周陵)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팔관회 : 고려를 세계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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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회 정례화(외국사신 초대)

1022년(현종 13) 내사령 평양군(內史令平壤君)에 봉해졌고, 1027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兼內史令)이 되었다. 1034년 9월 동복형인 덕종의 유명(遺命)으로 왕에 즉위하였다. 즉위년 12월 팔관회를 열어 송나라 등 외국 상인들에게도 예식을 관람시키는 상례를 만들었다. 1035년 서북로(西北路)에 장성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현재의 평안북도 창성(昌城)에 성을 쌓아 창주(昌州)라 이름하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1036년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지급한 뒤 변경의 방비를 굳게 하였다. 또한, 동서대비원을 수리해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었다.

 

3. 천자수법(1039)

1039년에는 노비종모법(천자수모법 : 노비는 엄마 족보를 따른다)을 제정하였다. 또한, 1045년 악공(樂工)과 잡류(雜類)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듬해에는 장자상속법을 제정하였다. 1045년 비사성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해 문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임진강에 부교(浮橋)를 놓았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왕형(王詗) · 왕방 · 왕경 · 왕개(王暟)이다. 병이 위독하자 아우 왕휘(뒤의 문종)로 하여금 국정을 맡게 하였다. 성격이 너그럽고 어질고 효우(孝友)한데다 학식과 도량이 크고 넓으며 영특하고 과감하였다. 거란과 다시 화친해 나라가 태평했으며 유명으로 능침을 검소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주릉이며, 시호는 용혜(容惠)이다.

 

4. 리장성 

1037년 압록강 일원에서 거란의 침입을 받아, 이듬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하고 책봉을 받았다. 이후 북방 경비에 주력해 1044년 덕종의 유업인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이는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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