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종 : 덕 천 압 도
덕 : 덕종(1031~1034)
천 : 천리장성 축조
압 : 압록강
도 : 도련포
1. 덕종(1031~1034)
고려의 9대 국왕 덕종은 1016년(현종 7)에 태어나 1034년(덕종 3)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031년(덕종 즉위년)부터 1034년(덕종 3년)까지였다. 이름은 흠(欽)이고 자는 원량(元良)이다. 현종(顯宗)과 원성태후 김씨(元成太后 金氏)사이의 장남이다. 후비로는 현종의 딸 경성왕후(敬成王后)와 효사왕후(孝思王后), 그리고 왕가도(王可道)의 딸 경목현비(敬穆賢妃) 등이 있었다.
덕종은 1020년(현종 11)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지고 1022년(현종 13)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7세였다. 몇 년 뒤인 1031년(현종 22) 5월에 현종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중광전(重廣殿)에서 즉위하였다. 그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덕종은 어려서부터 성숙했으며, 성격이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기왓장을 밟기만 하면 깨어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왕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덕종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명령을 황제의 명령이라는 의미로 ‘제(制)’라고 하였으며,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에서 하늘의 뜻에 부응한다는 의미를 갖는 ‘응천절(應天節)’로 개칭했다.
덕종대에 행해진 제도 가운데는 덕종 즉위해인 1031년 윤10월에 과거의 예비시험 성격인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처음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 때 시험과목은 문장을 아름답게 엮고,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부(賦)와 오언이나 칠언의 구절을 여섯 구나 열 구 이상 늘어놓는 6운시(六韻詩)나 10운시(十韻詩)였다. 덕종 즉위년 국자감시를 통해 정공지(鄭功志) 등 60명의 인재를 선발하였다. 1032년(덕종 원년)에는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로 삼아 태조에서부터 목종(穆宗)에 이르는 7대의 사적을 36권으로 구성한 7대실록을 완성하였으며, 1034년(덕종 3년)에는 양반 및 군인과 함께 한인(閑人)에게도 토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한인이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뉘는데, 일반적으로는 직역부담층으로 파악하고 있다.
2. 천리장성 축조
덕종이 즉위한 시기는 거란과의 3차례 전쟁이 끝난 뒤이기는 했지만, 당시 고려는 거란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거란은 1015년(현종 6)에 압록강을 건너 그 동쪽 지역을 점령해 성을 쌓았는데, 그 지역을 고려에 반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려는 언제라도 거란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쌓여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거란이 설치한 최전방 기지였다. 1029년(현종 20)에는 거란 동경(지금의 요양 지역)의 대연림(大延琳)이 흥요국(興遼國)을 세우자 형부상서 곽원(郭元)은 압록강 이동 지역을 공격해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는 이 때 그 곳을 되찾지는 못했다.
이후 거란 성종(聖宗)이 사망하면서 다시 이 문제가 불거졌다. 고려는 거란 성종의 장례식에 김행공(金行恭) 등을 보내 참석하게 하였는데, 이 때 고려는 압록강에 설치한 성과 다리를 헐고 거란이 억류한 고려 사신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상갓집에 가서 자신의 영토를 돌려 달라고 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그리 환영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이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로서는 다급한 일이었던 것이다.
고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거란은 거절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 내에서는 2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평화관계를 맺어 백성을 편안히 쉬게 하자는 유화적인 입장과 거란에 사신 파견을 더 이상 하지 말고 연호도 사용하지 말자는 강경한 입장이 제기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후자의 견해를 택했다. 그로 인해 고려는 새로이 즉위한 거란 흥종(興宗)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였다. 그 대신 사망한 거란 성종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다. 즉 고려가 거란 흥종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흥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고려는 거란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외교를 단절하는 등의 강경대응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1032년(덕종 원년) 1월에 거란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고, 삭주(朔州)와 영인진(寧仁鎭) 등에 성을 쌓거나, 같은 해 2월에는 1010년(현종 원년)에 거란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김거(金居)와 수견(守堅) 등에게 포상을 내리거나, 전사한 이들에게 관직을 더해주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성을 쌓는 행위는 거란의 침략을 대응하기 위한 의도였으며, 김거 등에게 포상을 주거나, 전사자들에게 대한 대우 조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
1033년(덕종 2년) 8월에는 북쪽 경계 지역에 관성(關城),을 설치하기도 했다. 덕종은 유소(柳韶)에게 명을 내려 성을 쌓았는데, 거란 군사가 공격해 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거란은 자신들을 막기 위해 쌓는 관성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1034년 3월에 유소 등에게 관성 개척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주었다. 당시 유소가 설치한 관성은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흥화·정주·영해·영덕·영삭·운주·안수·청새·평로·영원·정융·맹주·삭주 등을 거쳐, 요덕·정변·화주 등 3성에 닿고 동쪽 바다에 이르렀다. 성은 돌로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천리장성 : 압록강~도련포)이었다고 한다.
1033년(덕종 2년) 10월에 거란은 정주(靜州)를 침입하였다. 대규모 침략은 아니었지만, 고려와 거란의 충돌이 지속되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거란은 총력을 기울여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1019년(현종 10)에 강감찬(姜邯贊)의 고려 군사에 귀주에서 거란병이 대패한 이후에 거란은 고려의 군사력을 겁내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거란이 송에 원병을 요청한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송나라의 기록인 『송명신언행록』에는 “거란이 (송에) 사신을 보내와 고려를 정벌하는데 병사를 빌리려 하였다”는 사실이 전한다. 거란이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송에 원병을 요청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송이 거란의 요청을 거부하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지 못했다. 이는 고려의 군사력에 대한 거란이 부담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말해주는 기록이다.
3. 압록강~도련포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부터 3년 뒤인 1022년(현종 13)에 현종(顯宗)이 다시금 거란 황제의 책봉을 받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거란의 고려침입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1029년(현종 20) 발해(渤海)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으로서 거란의 장군이던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건국하고 고려에 원조를 요구하면서, 압록강에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흥요국은 결국 고려의 원조를 얻지 못하고 이듬해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는데, 고려에서 돕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평화를 얻은 지 10년도 안 되어 거란과 재차 전쟁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흥요국의 원조 요청을 거절했기에 고려는 흥요국의 보복을 염두에 두어야 했고, 이를 빌미로 거란군이 고려에 재차 침입해 올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었다. 현종은 당시 압록강 전선을 책임지던 서북면판병마사(西北面判兵馬事) 유소(柳韶)가 상을 당해 물러나려 하자, 그를 급히 불러들여 변방으로 보내 대비케 하였다. 이 해에 유소에 의해 보주성을 감싸도록 흥화진 양쪽에 위원진(威遠鎭)과 정융진(定戎鎭)이 설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030년(현종 21)에는 압록강 근처 인주(麟州)에 성을 쌓아 방어체계를 강화하였다.
비록 흥요국이 멸망하고 고려가 거란을 축하하며 양국 간 관계는 회복되었으나, 거란군이 압록강 이동에 주둔하고 있는 이상 고려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왕가도(王可道)가 말했듯이 압록강 연안에 설치된 다리와 성의 존재는 곧 거란이 언제든지 기회가 된다면 고려를 병탄하려는 뜻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1031년(덕종 즉위) 고려에서 덕종이 즉위한 해에 거란에서는 성종(聖宗)이 죽고 흥종(興宗)이 16세로 즉위하였는데, 섭정이 된 흥종의 생모가 성종의 부마이자 황후의 남동생인 소필적(蕭匹敵)을 역모 혐의로 죽이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웠다. 당시 고려에서는 이를 기회로 보고 보주성을 공략하자는 견해, 거란과 통교를 끊되 출병하지는 말고 방어를 강화하자는 견해, 그대로 거란과의 통교를 유지하자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결국 덕종은 거란의 새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하정사(賀正使) 파견을 중단하여 외교적으로 압박하되 출병하지 않는 방향을 선택하였다. 당연히 거란의 보복을 대비하여야 했기에, 1032년(덕종 1) 거란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삭주(朔州) 등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인 1033년(덕종 2)에는 인주와 위원진 사이에 정주(靜州)를 두고 축성하여 새로운 전선기지로 삼았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거란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거란과 고려 간 외교관계가 경색되는 가운데, 양국의 최전선인 압록강 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033년(덕종 2) 유소의 주도 아래 처음으로 관방(關防) 곧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 그 범위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어귀의 인주로부터 위원진, 흥화진, 정주, 정융진 등을 거쳤고, 동쪽으로는 송령(松嶺)에 닿았으나 현재 송령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공사를 시작한 지 겨우 3개월 뒤에 관성(關城)을 개척할 때 공로가 있었던 여진인들에게 포상을 내린 것으로 보아, 공사기간은 비교적 짧았고 대체로 그동안 보주성을 바라보도록 축성해 온 성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 천리장성은 거란의 침입을 겪었던 고려에서 거란과의 전면전은 최대한 피하는 한편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방어선을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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