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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현종 두문자 : 현 지 2 3 초 칠 부 주 면 주 감 향

by noksan2023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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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

 

현종 : 현 지 이 삼 초 칠 부 주 면 주 감 향

 

현 : 종(1009~1018)

지 : 방 관제 완성(5도 양계 4도호부 8목 안찰사 경기설치)

2 : 거란 2차 침입(1010 양규의 흥화진 전투)

3 : 거란 3차 침입(1018 강감찬의 귀주대첩)

초 : 조대장경

칠 : 대실록 소실(태조~목종)

부 : 팔관회 연등회 

주 : 현공거법

면 : 군급고법

주 : 창수렴법

감 : 목양마법

향 : 리정원제

 

1. 종(1009~1018)

현종은 고려전기 제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09~1031년이며,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숭교사와 신혈사에 있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여,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거란의 2차, 3차 침입을 물리치고 강력한 북진정책을 실천하여 북방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했다. 부처의 힘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제작한 6천여 권의 대장경은 큰 문화적 업적이다.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요 10조>등을 통해 제시했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대에 일 단계 정비되고, 현종대에 비로소 기틀을 다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북진정책의 실천으로 북방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현종대에 구체화되었고,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대내적으로 호족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책과 군현제의 완성이다. 1018년(현종 9) 5도 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골격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해 각 군현의 호장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태조 이래 북방외교의 현안문제였던 대거란(對契丹) 관계가 비로소 해결을 보게 된다. 현종의 대거란정책은 거란의 제2차 침입(1010년, 현종 1)과 제3차 침입(1018년, 현종 9)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제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에서 비롯되어 강조가 패배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결국 거란은 현종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철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거부,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제3차 침입을 하였다. 이때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싸움에 연패했고, 퇴각하다 강감찬에게 귀주에서 패해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거란과 강화해 이후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된 뒤로, 13세기 중엽 몽골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약 2세기간 대외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비록 거란과의 충돌로 인한 외환이 있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덕종 · 정종조의 안정기를 오게 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특히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하여 착수, 제작한 6천여 권의 대장경은 현종 때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2. 방 관제 완성(5도 양계 4 도호부 8목 안찰사 경기설치)

현종의 재위 기간에는 다방면에 걸쳐 체제 정비가 이루어졌다. 우선 거란과의 오랜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 상황을 개선하려는 조치들이 있었다. 1012년(현종 3)에는 장인(匠人)의 수를 줄여 농사를 짓게 하도록 하였고, 1028년(현종 19)에는 뽕나무를 심고 말을 기르는 격식을 제정하였다. 또 1025년(현종 16)에는 공사를 줄여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세금 제도를 개선하여 토지의 보유 면적에 따라 조절하도록 했고, 물가가 폭등하면 국가가 나서서 이를 조정하였다. 또한 의창(義倉) 제도도 정비하여 좀 더 실효성이 있도록 하였다.

 

지방제도 역시 이 시기에 재정비되었다. 1012년(현종 3)에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없애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고쳤고, 12목(牧)의 절도사를 폐지하고 5 도호(都護)와 70도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 이어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안무사를 폐지하고 4 도호 8목 등으로 재편하였다. 지방에 대한 재편과 함께 그 행정을 맡은 향리와 사심관(事審官)에 대해서도 정비하였다. 지역별로 향리들의 숫자를 규정하고, 호칭도 주·현(州·縣)의 향리와 향·부곡 등 특수구역의 향리에 대해 다르게 하여 그 지위를 나누었다. 한편 사심관의 선발 규정을 강화하여, 아버지나 형제가 호장을 맡고 있으면 사심관이 될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그 선발에는 그 지역 출신의 기인(其人)과 백성의 여론이 반영되도록 하였다. 한편 현종대에는 지방의 향공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규정에 대해서도 보완이 이루어졌다. 지역의 규모에 따라 올려 보낼 수 있는 향공의 수가 정해지고, 본고시인 예부시(禮部試)에 앞서 이들을 국자감(國子監)에서 미리 한 번 시험 보는 제도도 마련되었다.

 

그 혼란스러웠던 거란의 침입 와중에 내치에서도 매우 괄목할 만한 치적들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이 무렵까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억눌러 황제의 권한을 강화시킨 다음 체계적인 군현제를 확립한 것이다. 이를 위해 각 군현 호장(戶長) 등을 비롯한 향리들의 정원(定員)을 규정하고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그 자제들에게 과거(科擧) 응시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1022년에는 지방 향리 세력에 대한 호칭을 전면 개정하면서 황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거란 2차 침입 현종 피란길
거란 2차 침입 현종 피란길

 

 

3. 거란 2차, 3차 침입

현종 2년, 요 성종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 것이다.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명분으로 침공했다. 그러나 실상은 북송과의 통교를 저지시키기 위한 침입이었다. 결국 현종은 자신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대침공을 받아야만 했다. 2차 침입 때는 요 성종이 무려 4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실권자였던 강조 300,000명의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했다. 초반엔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통주 대전에서 요 성종의 군대에 대패한 강조는 거란군에 붙잡혀 처형당했고, 현종은 호남 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현종은 피난 도중 지방 호족들한테서 갖은 행패와 수모를 당했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 성종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했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현종은 몽진을 결정했다. 그러나 정작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현종과 두 왕후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 등 신하들과 금군 50여 명이 전부였다. 사실상 지채문 혼자서 지켜낸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문신들과 장수들마저 태반이 현종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

심지어 이때 항전을 주장한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파견을 갔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3차 침입 때 전군을 지휘하는 위치까지 오른 것을 보면 어딘가에 파견 가서 방어선을 지휘한 것 아니냐는 설이 지배적이다. 물론 강감찬 정도 되는 거물이 진짜로 현종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충신 강감찬의 포지션은 지채문이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 되었건현재는 혼자서 현종을 지켜낸 지채문보다 강감찬이 후세에 더 알려진 것은 몽진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급박한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지채문은 나중에 크게 출세하긴 하지만 당시만큼은 장군이 아닌 중랑장 정도의 계급이었고, 후에 후손들이 멸문을 당했기 때문에 지채문의 존재감이 크게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의 몽진은 고난의 연속이다.

 

특히 몽진 도중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과 신변의 위협을 받기 일쑤였다. 임진왜란 때 똑같이 몽진하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선조가 나서서 설득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해서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 죽이자 해결되었다. 임금의 몽진에 고려와 조선의 백성들의 태도가 이처럼 다른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였던 조선과 달리 현종 당시 고려는 지방 분권에다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었기 때문이다. 한국사 교과서를 보더라도 통일 신라 말기에 호족들이 득세했다는 구절과 함께 조선 태종이 실시했던 사병 철폐를 생각해 보면 알기 쉽다. 그만큼 호족들과 지방 귀족들의 득세가 심했고 조선의 국왕이 신하들을 여러 차례 누른 것은 그만큼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이었다. 다만 이때의 상황을 신라 말이나 고려 말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신라 말이나 고려 말은 이미 수십 년간 중앙정부가 막장이 되면서 토호들이 스스로 나라나 다름없는 세력을 쌓고 수천 명의 군대를 보유했을 만큼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는데, 목종 재위 말기가 혼란했다지만 그 지경까지 갔다고 볼 만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목종을 폐위한 병력도 원래는 중앙군이었기도 하고. 현종을 위협했다는 아전도 호위 금군이 겨우 50명에 불과했으니 자기 가병만 가지고 임금을 위협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기습하여 거란군에게 섬멸적인 대 타격을 가하였다. 적병 10,000명을 격살한 귀주 별장 김숙흥의 대전과를 필두로 양규의 의주 지방 무노대 전투에서는 적 사살 2,000명, 포로 3,000명, 이수 석령의 추격전에서 적 사살 2,500명, 탈환인 1,000명, 여리참 전투에서 사살 1,000명, 탈환 1,000명, 마지막 혈전인 애전 전투에서 사살 1,0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 전과를 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단순히 거란군의 섬멸뿐만이 아니라 많은 고려인 포로의 구출을 함께 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그들의 거의 모든 전과에는 항상 포로 구출이 들어있다. 특히 양규와 김숙흥이 구출한 포로는 물경 30,000명에 달한다.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 전투에서 성종의 친위군을 상대로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은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양규에게 엄청난 전공인데 과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양규는 그야말로 고려가 나중에 제3차 침공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군사 징집이나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의 분전 덕분에 대거란 외교에서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더불어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성종 야율융서에게 굴욕감을 주었다. 특히 요나라는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의 게릴라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후방이 포위되는 위기까지 맞았다.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그냥 물러날 수 없으니 입조를 수락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허겁지겁 물러났다. 더군다나 양규를 무시해 버리면 보급로가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도망갔던 고려 귀족들이나 문신들, 무신들, 병사들이 갑자기 역공을 가할 수도 있었다. 고려의 주전파들이 도망을 갔다고는 하나 현종은 여전히 무사했다. 거기에 양규가 아직 배후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고려의 신민 모두가 들고일어날 것은 불 보듯 자명했기에 한반도 지리를 잘 모르던 요 성종과 거란군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에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판국이었다.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는 정예군과 싸우다가 전멸하고 말았지만 거란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다. 게다가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으나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이 흥화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습격했다. 정성의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현종은 호종했던 지채문의 활약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으며, 현종을 호종한 지채문과 채충순은 공신이 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관료들은 다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들 역시 몇 차례에 걸친 전면전으로 인하여 피로가 매우 누적된 상태였고, 양규, 김숙흥 등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들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공진은 전라도 남쪽에도 고려 땅이 수천리는 더 있어 현종이 얼마든지 더 멀리 도망갈 수 있다며 요 성종을 속여 결국 거란군이 물러나게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양규는 그가 행한 대활약에 걸맞은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썼을 만큼 예우했는데 원래 천자의 조서는 임금이 대략 내용만 지시하고 실제 글을 쓰는 신하(한림학사)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양규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현종이 직접 글을 썼다. 현종은 이외에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행할 때나 공신을 치하할 때 직접 문서를 작성했는데, <현화사 비문>이나 당시 기록으로도 현종은 자애롭고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규의 업적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니 《고려사》에서도 직접 현종이 작성했다고 강조했다. 이 조서의 내용은 죽을 때까지 양규에게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으며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校書郞)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수신전의 기원이 되는 '구분전'이다.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을 장군으로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는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었다. 뒷날 고려 최전성기의 명군이었던 문종(제11대)은 두 영웅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이후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임금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사실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고려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고려의 힘은 점차 강대해졌고, 허수아비 젊은 왕이었던 현종의 능력은 점차 성장하며 한 나라의 강인한 군주로서 노련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종과 고려의 앞에는 마지막 시련이 남아있었다.

 

3차 침입 때의 현종은 본격적으로 황권을 튼튼히 하면서 거란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다만 현종 본인도 의도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강감찬을 사령관으로 하여 주력군을 모두 북쪽으로 보내서 거란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적장 소배압은 고려군의 공격을 감수하면서 그대로 진격하여 개경 100여 리 밖까지 접근해 온 것이었다. 당시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런 작전을 펼친 이유는 고려군 주력이 전부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북방에 배치된 고려군 주력을 따돌리고 2차 칩입 때처럼 개경을 공격해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소배압의 의도였던 것.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냅다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는 거란군이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방 고려군의 총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이곳저곳에 배치해 둔 별동대를 계속 보내 요군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찔러대기 시작하였다. 자주(慈州) 내구산 전투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 부대를 잡아 격파했고, 평양 근처 마탄진에서는 시랑 조원(趙元)도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혔다. 기록에 따르면 마탄진 전투에서 거란군 10,000여 명을 참획(斬獲, 베거나 사로잡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의 현종은 2차 여요 전쟁 당시 개경이 홀라당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방어를 위한 작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이었다. 송악산 산성 또한 2차 침공 이후에 거란의 재침을 대비해 만든 요새였다. 그 외엔 마치 핵폭탄이라도 맞은 듯 쌀 한 톨 집 한 채 없는 폐허, 그리고 쉴 새 없이 사방에서 찔러대는 고려군의 견제 병력들뿐이었다. 청야전술에 군량 보충이 막히고, 젊은 임금이 수도에서 결사 항전하니 군대와 백성들의 사기가 올랐다. 거란군으로서는 그야말로 난관에 봉착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배압은 꾀를 내어 수하 장수인 야율호덕을 시켜 개경의 통덕문으로 가서 개경을 수비하고 있었던 고려군에게 "이제 우리 철수합니다."하고 뻥을 쳤다. 물론 그렇게 뻥을 쳐서 안심시킨 후에 몰래 척후병 300명을 보내 개경에 잠입시켰다. 즉, 개경의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한 뒤 척후병을 잠입시켜 성문을 몰래 열어서 쳐들어가려는 작전을 짠 것이다. 하지만 거란군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이 회심의 작전마저 고려군에게 간파되어 버렸고, 개경의 성문을 열기 위해 잠입시킨 척후병 300명은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교역(황해도 금천군)에서 고려군 100명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번에는 국왕이 몽진하지 않고, 수도 개경에 남아서 항전을 택한다고 하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용기백배하여 같이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나라의 수장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하니 백성들이 급하게 민병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소배압의 요나라 정예군은 사기가 저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란군 자신들은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현종과 고려 백성들의 항전 의지였고, 굳게 닫힌 개성 성문과 성벽뿐이었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개경에는 송악산의 산신이 밤에 수만 그루의 소나무로 변해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개경의 병력이 많은 줄 알고 퇴각해 버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현종은 금교역 전투에서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켜 전술적 승리를 거둔 끝에 적들의 사기를 꺾었고, 결과적으로는 여요전쟁여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의 귀주 대전은 이미 이긴 전쟁에서 적들을 몰살시켜 앞으로의 전쟁 가능성을 없애버린 포위섬멸전이었다. 물론 포위섬멸전이었지만 당대 최강의 기병 군단을 보유한 거란군을 상대로 벌인 대회전이었고, 전투의 변수가 고려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면 충분히 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상태였다.

 

4. 조대장경

초조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관판 대장경(官版大藏經: 971∼983)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간행한 한역(漢譯) 대장경이다. 송나라 태조에 의해서 간행한 대장경이 991년 고려에 전래되자, 고려는 커다란 자극을 받고 대장경 간행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993년(성종 12)부터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1011년에는 현종이 남쪽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거란군이 송악에서 물러나지 않으므로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로 서원한 뒤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즉 거란족이 침입하자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국민정신을 통합하여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신앙심으로 대장경판을 조성한 것이다.

 

판각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11년에 시작하여 1087년까지 77년이 걸려 새겼다는 설이 있고, 1019년에서 1087년까지 69년 동안과 1011년에서 1051년까지 41년이 걸려 완성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나름대로 근거는 있으나 <대각국사문집>에 실린 「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에 의하면 현종 재위(1009∼1031) 기간인 1011년에서 1029년경까지 북송의 관판 대장경과 같은 분량(『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수록분인 1076종 5048권)의 판각은 모두 마쳤음을 알 수 있고, 송 신역본(新譯本)은 그 뒤에 추가로 판각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장경은 권말에 간행기록이 전혀 없고, 권자본의 형식이며 한 면에 23항(行:줄) 14씩 배열되어 있고 장수 표시가 ‘장(丈)’으로 되어 있고 가끔 ’폭(幅)‘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에는 정교하고 뛰어난 판화가 수록되어 있다.

 

5. 대실록 소실(태조~목종)

칠대실록(七代實錄)』은 고려 전기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에 걸친 역사 기록이다. 원래 실록이 있었으나 현종 대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다시 편찬하였는데, 이를 『칠대사적(七代事跡)』이라 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면서 황주량(黃周亮)에 의해 주도되어 황주량의 저서처럼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가 있어 태조 이래의 사실을 기록하고 이를 실록이라 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경성이 함락되고 궁궐이 불타면서 보존된 서적과 기록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1013년(현종 4) 9월 현종 때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역사를 다시 편찬하게 하였다. 당시의 편찬 조직을 보면 이부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 최항이 감수국사, 예부상서(禮部尙書) 김심언이 수국사가 되었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주저와 내사사인 윤징고, 시어사 황주량, 우습유 최충 등이 모두 수찬관이 되었다. 그러나 실록 재편찬 작업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1018년(현종 9) 거란의 침략과 편수관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수국사 김심언은 1018년, 수찬관 윤징고가 1021년(현종 12), 감수국사 최항과 수찬관 주저가 1024년(현종 15년)에 각각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1023년(현종 14) 12월 이공이 새로이 감수국사에 임명되었으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곧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그 실질적인 편찬은 최충보다 과거 합격의 선배인 황주량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사>에는 『칠대사적』이 황주량에 의해 편찬된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즉, 『고려사』에는 “황주량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여러 사람을 방문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기까지의 『칠대사적』 총 36권의 책을 편찬하여 바쳤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여러 사정으로 미흡한 면이 있어 이를 실록이라 하지 못하고 『칠대사적』이라 하였다.

 

6. 팔관회 연등회 

 

7. 현공거법

 

8. 군급고법

 

9. 창수렴법

 

10. 목양마법

 

11. 리정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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