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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인종 두문자 : 인 자 유 묘 사 경 향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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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종
고려인종 : 이자겸의 난

 

인종 : 인 자 유 묘 사 경 향

 

인 : 종(1122~1146)

자 : 이겸의 난(1126)

유 : 신지교 반포

묘 : 청의 난(1135)

사 : 삼국기(김부식 1145)

경 : 사6학 정비(무학재 폐지)

향 : 교 정비 확대

 

 

1. 종(1122~1146)

인종은 고려전기 제1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122~1146년이며, 예종의 장자로 이자겸 등에 의해 15세에 왕위에 올랐다. 국자감의 학제를 정비하고, 각 주현에 향약을 설립해 지방교육을 진작시켰으며, 서적소 설치를 통해 유학의 부흥에 힘썼다. 이자겸, 척준경 등의 모반을 진압했다.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에 공감하여 한때 서경천도의 뜻을 품었다. 서경천도가 무산되면서 묘청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로 삼아 평정했다. 난 진압 후 김부식 등에게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했다.

 

 

2. 이겸의 난(1126)

이자겸의 난은 1126년(인종 4)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겸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일으킨 반란이다.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인종이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자겸은 왕궁을 침범하여 왕을 유폐시키고 정치를 독단하였다. 인종은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이자겸을 유배보냄으로써 인주이씨의 발호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정치기강은 더욱 문란해져 귀족층의 분열과 대립이 표면화되고 귀족사회 자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자겸의 난은 척준경과 그의 군사적 배경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이 · 척(李拓)의 난이라고도 한다. 예종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을 인종이 자신의 측근세력을 종용하여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이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는 왕궁을 침범하여 국왕파 신료들을 제거한 다음 왕을 유폐시키며 정치를 독단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척준경을 이자겸과 갈라서게 해야 된다는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유배되었으며 인주이씨의 발호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신지교 반포

척준경의 제거 이후 인종은 서경에서 “작년 2월 亂臣賊子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음모가 발각됐으므로 짐은 부득이 다 법으로 다스렸다. 이로부터 잘못을 반성하고 몸을 책하니 덕에 부끄럼이 많다. 이제 日官의 논의로 西都에 행차하여 지난날 허물을 깊이 반성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므로 중외에 포고한다”는「惟新之敎」15개 조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① 方澤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어 四郊의 기운을 맞을 것.

② 사신을 지방에 보내어 자사·현령의 잘잘못을 조사하여 그를 포상하거나 좌 천하게 할 것.

③ 수레나 복장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도록 힘쓸 것.

④ 쓸데없는 관원과 급하지 않은 사무를 제거할 것.

⑤ 농사일을 힘쓰게 하여 백성의 식량을 풍족하게 할 것.

⑥ 侍從官이 모두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고, 천거된 사람이 올바른 인물이 아니면 그를 벌할 것.

⑦ 국고의 식량 저축에 힘써서 백성을 구제할 일에 대비할 것.

⑧ 백성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에 제도를 세워 일정한 조세와 공물 이외는 함부로 걷지 못하게 할 것.

⑨ 군사를 보살피어 일정한 시기에 훈련을 실시하는 것 이외에는 복무하지 않도록 할 것.

⑩ 백성을 보살피어 지방에 정착하여 살게 하며 도망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

⑪ 濟危鋪와 大悲院에는 저축을 풍족히 하여 질병에 걸린 자를 구제할 것,

⑫ 국고의 묵은 식량을 억지로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서 무리하게 그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며, 또 묵고 썩은 곡식을 백성에게 찧으라고 강요하지 말 것.

⑬ 선비를 선발하는데 詩·賦·論을 쓰게 할 것.

⑭ 모든 고을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확충할 것.

⑮ 산림이나 못에서 생산되는 이득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며 침해하지 말 것.

인종의 이와 관련된 배경 설명과 15개 조의「유신지교」를 “왕권의 회복이나 정치 기강의 확립과 함께 기층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민생 구휼정책을 주로 시행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는 “고려사회에 노정된 정치·사회적 문제를 깊이 통찰한 끝에 국정 전반에 걸쳐 일대 정치 쇄신을 이루고자 천명한 국가적 의지의 표현이었다”거나 또는 “서경에서의 이런 조치는 당시 국운의 융창, 基業 연장의 의도에서 서경에 巡駐할 때는 구폐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령으로 재출발함으로써 기업을 새롭게 하고 인심을 쇄신시킨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 등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실천의 효과를 짝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종의 형식적 고전적 虛禮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부정적인 평가와 아울러 “그 내용이 두 차례의 정치적 격변을 거친 이후에도 관리의 기강 확립과 백성의 생활안정 및 풍속의 교정 등에 관한 것이어서 앞으로의 정국운영과 관련된 내용은 찾을 수 없다”하여 이로써 인종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4. 청의 난(1135)

1126년 이자겸의 난 이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문벌 귀족 사회가 크게 흔들렸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인종은 윤언이, 정지상 등 소수의 개혁 세력을 등용하여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정지상이 서경 출신 승려 묘청을 추천하자 인종은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과 문신 정지상 등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또한 이들은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쓰며, 금을 정벌하자."라고 하였다, 

 

인종은 이들의 말에 따라 서경을 자주 방문하였고, 서경의 명당인 임원역(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에 대화궁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특히,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도 항복할 것이며, 많은 나라가 조공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화궁 근처 여러 곳에 벼락이 치고, 인종의 서경 행차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기도 하였다. 

 

이에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마침내 인종은 서경 행차를 단념하고, 서경 천도 계획도 그만두게 하였다.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1135). 이들은 서북면 내의 모든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나라 이름을 '대위', 연호를 '천개', 군대의 호칭도 '천견충의군'이라고 하였다. 

 

이에 정부는 김부식을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먼저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던 백수한, 정지상, 김안 등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앴다. 그리고 좌·우·중 3군을 거느리고 진격하며 반란 토벌의 격문을 여러 성에 보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들이 정부군에 호응, 협력하였고, 정세는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김부식은 여러 차례 반란군의 항복을 권유하였다. 서경 반란군은 정부의 회유 교섭을 거절하였다. 

 

정부군은 서경성 바로 밑에까지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고전하였다. 반란군은 1년 넘게 항전을 계속했으나,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마침내 1136년 정부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여 서경성을 함락함으로써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묘청의 난은 당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문벌 귀족에 대한 반발이자,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신채호는 이 난을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5. 삼국기(김부식 1145)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이다.『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삼국시대 연구의 기본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국보 『삼국사기』는 1573년(선조 6) 경주부(慶州府)에서 인출(印出)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에 처음 새긴 원판(原板)과 조선 태조 때에 개각(改刻)한 것, 중종 때 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판(板)이 종류별로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完帙本)이자 인출상태와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1573년 당시 유통경로와 더불어 사용한 종이와 장정(裝幀) 양식 등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학술 동향은 물론 목판인쇄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관찬)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이 책은 옥산서원 청분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 9책 50권이며, 종이의 질은 한지이다. 가로 22.4㎝, 세로 31.5㎝ 크기로 장마다 9행 18자로 짜여져 있다.

이 책은 자체와 판식이 완연히 다른 3종의 판이 혼합되어 있다. 고려시대부터『삼국유사』와 함께 경주부에 전해오던 것을 조선 태조 3년(1394)에 마멸된 것만을 골라 다시 새겼고, 중종 7년(1512)에 와서는 고판 가운데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만을 보완해서 새겼다.

『삼국사기』는 사료가 가장 미약한 부분인 삼국시대를 다루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이다. 또한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한 한국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연의『삼국유사』와 더불어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6. 사6학 정비(무학재 폐지)

 

7. 교 정비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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