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기 : 정 경 이 최 중 도 중 도 교
정 : 정중부
경 : 경대승
이 : 이의민
최 : 최충헌 최우
중 : 중방
도 : 도방
중 : 중방
도 : 도방
교 : 교정도감
1. 정중부
정중부는 고려시대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모자로 무신이다. 1106년(예종 1)에 태어나 1179년(명종 9)에 사망했다. 주의 군사였다가 개성에서 공학금군에 편입되면서 무관의 길을 걸었다. 문벌 귀족의 나라 고려에서 무관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자 이고·이의방 등 무인들과 함께 대소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과 태자를 유배지로 보낸 뒤 명종을 옹립하여 무신정권을 수립했다. 김보당의 의종 복위운동과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고 쿠데타 동조세력인 이의방 도당까지 제거한 후 탐학을 일삼는 무신독재 정치를 일삼다가 1179년 경대승에게 살해당했다.
정중부의 가계와 출신에 대해서는 그가 해주(海州)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신장이 7척이 넘고 수염이 아름다워 무인다운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에서 그를 군적에 올려 개경에 보냈는데, 재상 최홍재(崔弘宰)가 군사를 선발하던 중 그를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발탁하여 공학군(控鶴軍)에 충당시켰다. 이후 인종 대에는 견룡대정(牽龍隊正)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정중부는 무신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인종[고려](仁宗)과 의종을 모두 곁에서 모셨으며, 의종대에는 무신의 최고위직인 정3품의 상장군 반열에 올랐다. 당시 고려에 1·2품에 해당하는 무신의 관품은 없었으니, 무신의 정점에 선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 정치는 문신들이 주도하고 있던 때로, 무신들은 자신보다 관품이 낮은 문신들에게 마저 모욕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정중부 역시 젊은 시절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인 신진 관료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그의 수염을 태워버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무신, 장교들뿐만 아니라 하급군인들 역시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각종 노역에 동원되면서 불만의 뜻을 키워가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에 국왕 의종이 정치에 뜻을 잃고 하루가 멀다 하고 문신들과 어울려 개경 인근을 순회하면서 연회와 향락에 빠진 생활을 반복하자, 이를 호위하면서 고생해야 했던 무신들과 군인들의 불만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1170년(의종 24)에 이르면 무신들이 본격적으로 정변을 모의하는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것은 이고(李高), 이의방 등 젊은 하급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이들은 정변을 앞에서 지휘할 명망 있는 무신을 찾고자 하였고, 정중부는 이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결국 그해 8월 30일,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계기로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켰고, 이로서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 정변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9월 1일, 이고와 이의방 등이 개경으로 진입하여 문신들을 살육하는 동안 정중부는 의종과 함께 보현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국왕을 시해하고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을 주장하는 혈기 넘치는 장교들을 설득하며 진정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巨濟縣)로 유폐시키고 명종을 옹립함으로써 정변은 일단락되었다. 정변 직후의 인사발령에서 정중부는 종2품의 문관직인 참지정사로 승진하였고, 곧이어 가장 큰 공을 인정받아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책정되었다.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무신들의 정변을 흔히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무신 정권에서 정중부는 곧바로 1인자로 나설 수 없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가장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던 젊은 장교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의방, 이고, 채원(蔡元) 등이 그들이었다. 정변 당시 정8품의 산원(散員) 벼슬에 있던 이들은 정변 직후 여러 등급을 뛰어넘어 곧바로 종3품의 대장군직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3인은 무신들 내부에서도 그들의 과격함에 찬동하지 않았던 고위급 무관들인 대장군 한순(韓順), 장군 한공(韓恭), 신대여(申大輿), 사직재(史直哉), 차중규(車仲規) 등을 숙청해버렸다. 그리고는 곧이어 3인 사이에서도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먼저 이고가 움직였다. 그는 몰래 불량배들과 평소부터 친분이 있던 승려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었다. 이의방과 채원은 먼저 손을 써서 이고를 제거하였다. 곧이어 채원 역시도 조정 신하들을 모두 죽일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제거되었다. 이로써 정권은 이의방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의방 혼자서는 확고한 권력의 기반을 갖추었다고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때 정중부는 권력투쟁의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우려하여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원로 무신으로서, 정변의 공으로 보나 무신들 사이에서의 인망으로 보나 정중부는 당시 무신들 가운데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의방은 그를 찾아가 부자관계를 맺을 것을 청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와중 개경의 무신정권에 대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이 의종 복위의 기치를 들고 동계(東界)에서 일어났다. 이를 김보당의 난(金甫當-亂)이라 부른다. 그는 한언국(韓彦國), 장순석(張純錫) 등을 규합하여 거제도에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경주(慶州)로 모시고, 자신은 서북면으로 이동하여 개경으로 남하를 준비했다. 그러나 김보당의 기대와는 달리 개경의 문신들이 호응하지 않았던 탓에 반란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체포된 김보당은 국문을 당하면서 “문신들로서 누가 함께 모의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의방은 이를 빌미로 수많은 문신을 학살하였다. 계사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사서에서는 계사의 난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경인년(1170년)에 일어난 무신정변과 함께 ‘경계(庚癸)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무신들의 쿠데타와 이에 대한 역 쿠데타를 하나로 묶은 표현이라 다소 어색함이 있으나, ‘난(亂)’이라는 상황에 비중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경주로 나왔던 의종은 이의방이 파견한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뒤이어 1174년(명종 4)에는 조위총(趙位寵)이 서경(西京)에서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김보당의 난과는 달리 서북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등에 업은 조위총의 반란은 이후 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이의방 정권은 윤관(尹瓘)의 손자인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鄭筠)과 기탁성(奇卓誠)을 부원수로, 그밖에 최균(崔均), 진준(陳俊), 경진(慶珍), 두경승(杜景升) 등 당대 최고위의 무신들을 총동원하여 토벌군을 편성하는 한편, 개경에 남아있던 서경 출신의 문관들을 주살하여 이들이 호응할 것을 차단하였다. 반란의 진압이 한창이던 무렵,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면서 더욱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고 있었고, 이 탓에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자 조위총의 난 토벌군에 종군했던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려 종참(宗旵)을 회유하여 이의방을 살해하게 하였다. 뒤이어 그의 형인 이준의(李俊儀)와 동생 이린(李隣) 및 그의 측근들도 모두 체포하여 살해하였다. 이로써 이의방 정권은 막을 내리고, 명실상부하게 정중부가 집권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이의방을 제거한 직후인 1174년(명종 4) 12월, 정중부는 재상의 자리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69세였다. 그와 함께 정변 당시 온건한 입장을 보였던 양숙(梁肅), 경진, 기탁성, 이광정(李光挺) 등이 재상직에 올랐고, 또한 정중부의 사위이자 최측근이었던 송유인(宋有仁)도 추밀원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175년(명종 5)에 이르러 정중부는 고려 관료사회에서 정년에 해당하는 70세에 이르렀다. 그러나 낭중 장충의(張忠義)의 제안에 따라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아 은퇴하지 않고 그대로 중방(重房)에서 국사를 좌우하였다. 그러나 정중부 정권은 개경 안팎에서 많은 위기와 도전에 봉착해있었다. 서북면에서 일어났던 조위총의 난은 이후로도 1년 반이나 더 이어지다가 1176년(명종 6) 6월 서경이 함락됨으로써 일단 진압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 해 정월부터 공주(公州)의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개경에서는 2월에 대장군 정황재(丁黃載) 등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 진압군은 반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난이 채 진정되기도 전인 9월에는 예산(禮山) 일대에서 손청(孫淸)이, 그리고 익산(益州)에서는 미륵산적(彌勒山賊)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아울러 남적(南賊)이라 부르며 위기감을 느끼면서 대장군 정세유(鄭世裕)를 사령관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북상을 거듭하며 예산, 직산(稷山)을 거쳐 여주(驪州) 일대까지 진격하는 등 지금의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때 이들 반란군은 “차라리 칼날 아래 죽을지언정 항복하여 포로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군사를 몰고 왕경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라는 서신을 보낼 정도로 강한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반란은 1년 반이나 지속되다가 진압되고 말았지만, 중앙의 무신들에게 위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개경에서도 내분과 하극상이 줄이어 일어났다. 우선 이의방의 잔당들이 그의 원수를 갚겠다며 정중부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누설되는 바람에 모두 먼 섬으로 유배당하였다. 또한 하급 군사들은 다음과 같은 익명의 방을 붙이며 정중부와 정균 등을 처단할 뜻을 천명하였다. “시중 정중부와 그의 아들 승선 정균, 그 사위 복야 송유인이 권력을 잡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기에 남적이 일어난 것이다. 군사를 동원해 반란군을 토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무리부터 제거해야 한다.” 내외의 위기에 더하여 정중부와 그 일가의 탐욕스러움이 당시 무신과 관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시중의 지위에 오르자 땅을 크게 늘렸으며, 그의 아들 정균은 옛 태후의 별궁이 화재로 소실된 후 거처하지 않자 자신의 사저로 삼아 거창하게 집을 짓는 공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송유인은 의종이 건설한 이궁 가운데 하나인 수덕궁(壽德宮)을 달라고 요구해 자신의 처소로 삼았는데 부귀와 사치가 왕실 못지않았다고 한다. 1178년(명종 8) 11월, 정중부는 시중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의 나이가 정년을 지나 이미 73세이 이르렀으니 그럴만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뒤를 이어 그의 사위인 송유인이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송유인은 곧이어 문신 가운데 두터운 인망을 얻고 있던 문극겸(文克謙)을 탄핵하는 등 정권을 농단하는 처사를 계속하였다. 이는 결국 잃었던 인심을 정권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1179년(명종 9) 9월, 정중부 정권이 일거에 몰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균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스스로 공주에게 장가를 들려 하였다. 이 계획은 다른 무신들과 고위관료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20대의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은 거사를 일으켜 우선 정균을 처치하고, 정중부의 측근인 이경백(李景伯), 문공려(文公呂) 등을 살해한 뒤 송유인과 그의 아들 송군수(宋群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중부를 모두 제거했던 것이다. 이로써 약 5년에 걸친 정중부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경대승
경대승은 고려 의종[고려](毅宗) 8년(1154년)부터 명종[고려](明宗) 13년(1183년)까지 생존한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무신정권의 세 번째 집권자이다. 그는 명종 9년(1179년) 26세의 나이로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약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집권하면서, 앞뒤 시기의 무신집정자들과는 차별되는 행보를 보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이의방(李義方), 정중부, 이의민(李義旼)을 비롯하여 최씨무신정권의 집권자들, 그리고 마지막 집권자였던 김준(金俊), 임연(林衍)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려사』 반역열전에 올라있는 것과 달리 경대승은 일반 열전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여기서는 그의 출신과 정치적 성장 및 집권의 과정, 그리고 집권기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경대승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광종[고려](光宗) 13년(962년)에 세워진 용두사지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에 이것을 세우는 데에 공이 있는 인물로 경주흥(慶柱洪)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의 가계는 고려 초기 이래로 청주 지역의 향리 집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대승의 집안은 늦어도 그의 아버지인 경진(慶珍) 대에 이르러 무반 가문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경진은 정중부가 집권한 직후의 인사이동에서 종2품의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승진하였다. 경대승의 열전에 따르면 경진은 정2품의 중서시랑평장사까지 올랐다고 한다. 물론 이는 추증일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종2품까지 승진한 것은 기록으로 입증된다. 경진의 출세로 그의 집안은 당대의 유력가들과 통혼관계를 맺었다. 경진은 경대승의 동생을 무신정변 당일의 주역 중 하나였던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사위로 들여보냈으며, 자신도 훗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까지 오르는 김준(金俊)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이러한 가문 배경을 바탕으로 경대승은 어린 나이인 15살 때 음서로 정9품의 무관직인 교위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의종 22년(1168년)으로, 그로부터 2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무신정변 당시 겨우 17세였던 경대승이 정변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면서 그 역시 무신으로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경대승은 명종 4년(1174)에 행수(行首)를 거쳐 명종 8년(1178년)에는 정4품의 장군직에 올라 있었다. 관직에 오른 지 불과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례적일 정도로 가파른 승진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대승은 일찍부터 정중부가 발호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으나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라 은인자중하며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청주에서 사단이 발생했다. 청주에 계속 살고 있던 사람들과 청주 출신으로 개경에 적을 두고 살다가 낙향한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갈등은 대규모 충돌로 이어져 사망자만도 100여 명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당시 경대승은 대장군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청주의 사심관으로 있으면서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정권에 대한 경대승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당시 정중부 정권은 점점 인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鄭筠)이 국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주와 혼인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던 점, 그의 사위였던 송유인(宋有仁)이 문·무관들 모두에게 신임을 얻고 있던 문극겸(文克謙)과 한문준(韓文俊)을 시기하여 좌천시킨 일 등이 연달아 터지면서 조정 관료들이 정중부 세력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경대승은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명종 9년(1179년) 9월의 어느 밤, 장경회(藏經會) 내내 숙위를 섰던 병사들은 모두 피곤해서 잠이 들어 있었다. 견룡군 소속의 허승(許升)은 궁궐에 들어와 있던 정균을 살해하였다. 그는 남보다 용력이 뛰어나 평소부터 정균이 가까이에 두던 인물이었다. 허승의 휘파람소리를 신호탄으로 화의문(和義門) 밖에 매복하고 있던, 경대승이 이끈 30여 명의 결사대는 왕궁으로 진입하였다. 우선 대장군 이경백(李景伯)과 지유 문공려(文公呂)를 제거하고 눈에 띄는 자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 난리에 국왕은 크게 놀랐으나 경대승이 거사의 뜻을 알리고 안심을 시키자 이들에게 손수 술을 내려주며 동조의 뜻을 표하였다. 경대승은 국왕을 설득하여 금군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 부자를 체포할 것을 종용하였다. 왕의 허락이 떨어졌고, 금군은 민가에 숨어 있던 정중부와 송유인, 송군수(宋群秀) 등을 모두 붙잡아 목을 베고 저자거리에 효시하였다. 거사가 성공으로 돌아가자 조정의 신료들이 궁궐로 나아가 축하 인사를 전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은 “왕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어찌 축하를 받겠습니까”라고 하며 안색을 고쳤다고 한다. 무신정변 이후 폐위되었던 전왕 의종을 이의민이 살해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신정변과 이로 인해 성립된 무신정권, 나아가 의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명종의 왕위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또한 정변 직후 명종이 공석인 승선의 자리에 오광척(吳光陟)을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자 그는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이니 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오광척이 글은 조금 알지만 역시 무신이니 정균과 같을까 우려됩니다”라고 하며 반대의 뜻을 표하였다. 즉 경대승은 거사와 동시에 이전의 무신정권과는 다른, 복고적인 성격을 스스로 표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중부 일파는 제거되었지만 무신정권 아래에서 권세를 잡은 무반들은 경대승의 거사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정 시중(侍中)께서 앞장서 대의를 부르짖고 문신들을 억눌러 여러 해 쌓인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줌으로써, 무반의 위세를 펼친 공이 막대한데 이제 경대승이 하루아침에 네 명의 대신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할 것인가”라며 반발하였다. 짧은 거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기는 하였으나 본래 든든한 기반을 가지지는 못했던 경대승은 매우 불안해하였다. 그는 결사대 백 수십여 명을 모아 자기 집에 두고 훈련시키면서 이를 도방(都房)이라 불렀으며, 조정에 나갈 때에나 사저에 머물 때에나 언제나 이들의 호위를 받았다.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두고 번갈아 숙직하게 했으며, 어떤 때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면서 유대 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몇 사람씩을 거리에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면서 유언비어를 들으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하였다. 실제로 그의 짧은 집권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역 사건이 일어나 많은 무신들이 연루되어 제거되었다. 여기에는 경대승을 도와 거사를 성공시킨 허승이나 김광립(金光立)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대승은 국가의 중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조정에 나아가 간섭하고 결정을 내렸으며, 국왕 역시도 속으로는 그를 꺼리면서도 수시로 진수성찬과 의복 및 보화를 내려주었으며 그가 요청하는 것은 그대로 다 들어주었다. 재상 이하의 관리들도 모두 그의 집으로 찾아가거나 글을 올려 가며 그의 눈에 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은 끝내 신변의 위협을 떨치지 못한 나머지 조정의 공식적인 직책은 맡지 않은 채 사저에 머물렀다고 한다. 결국 경대승은 불안감 속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명종 13년(1183년) 7월 어느 날, 경대승은 갑자기 꿈에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꾸고 나서 병을 얻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 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경대승은 거사를 성공시킨 직후에도 이의민을 겨냥하여 ‘왕을 시해한 자’라고 하며 그를 제거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의민은 경주의 천민 출신으로 8척의 키에 탁월한 완력으로 경군에 선발되었다가 무신정변 때에 많은 사람을 죽여 출세한 인물이었다. 경대승의 거사 당시 이의민은 크게 겁을 먹고 군사들을 자기 집에 모아 대비하고 있었다. 곧이어 병마사로서 북쪽 변경에 나가있을 때에는 경대승이 처형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접하고서,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고 했으나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누가 먼저 손을 써서 이렇게 한 것인가”라고 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대승이 더욱 앙심을 품게 되자 이의민은 불안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고향인 경주로 낙향해버렸다. 경대승 사망 직후, 그가 이끌었던 도방은 금세 해체되고 말았다. 원래 도방을 이끌었던 김자격(金子格)이 먼저 손을 써서 이들이 난을 일으키고자 모여 다닌다고 무고했던 것이다. 결국 모진 고문 끝에 도방의 무리들은 죽거나 멀리 귀양가게 되었다. 이로써 경대승의 세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경대승이 뜻밖에 일찍 사망한 후, 명종은 이의민이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겁을 먹고서는, 사자를 보내 그를 달래어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결국 이의민은 경대승의 뒤를 이어 무신집정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를 살면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두 라이벌의 운명이 엇갈렸던 것이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경대승의 죽음에 부쳐 그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복고할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또 의종을 시해한 자를 치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어렵고 크기 때문에 은인자중하여 드러내지 않았다. 정중부, 송유인 등을 죽이자 왕이 속으로는 꺼리면서도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보여서 모든 주청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붙었으나 학식이나 용기, 지략이 있는 자가 아니면 문득 거절하니 무관들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여기서는 경대승에게 복고의 뜻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시대에 복고란 무신정변 이전의 상황으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무신정변 이후 10년 동안 고려의 정치와 사회를 무신들의 무분별한 권력투쟁과 탐욕스러움으로, 그리고 그에 맞선 지방민들의 반란으로 점철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불법으로 축재한 토지를 모두 돌려놓으며 스스로 복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또한 화엄회(華嚴會)를 열어 무신정변과 김보당(金甫當)의 난 때에 희생된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문신들이 그를 중하게 여기며 의지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대의 평가가 후대에 『고려사』를 편찬할 때까지 이어져 그의 전기를 반역전이 아닌 일반 열전에 싣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경대승은 뒷받침해줄 정치 세력의 부재, 무신들의 집단적인 반발과 위협 등으로 집권력을 강하게 행사하지 못한 채 요절함으로써 결국 짧은 집권기간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3. 이의민
이의민은 고려후기 상장군,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96년(명종 26)에 사망했다. 용력이 뛰어나 경군에 선발되었고 의종의 총애로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에 행동파 무신으로 가담했고, 1173년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 때에는 의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1174년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상장군에 올랐다. 정중부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경대승이 1183년에 사망하자 무신집정의 자리에 올라 12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4. 최씨정권(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최충헌은 고려시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을 역임한 관리이자 무신집권자이다. 1149년(의종 3)에 태어나 1219년(고종 6)에 사망했다. 이의민과 그 일당 및 잔당을 대량 학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60년 최씨정권을 세운 인물이다. 실권을 장악한 후 4명의 왕을 갈아치웠으며, 친동생을 비롯한 수많은 반대세력의 저항과 민란을 평정하며 71세의 천수를 누리기까지 실권자의 자리에 앉아 국정을 전횡했다. 이규보를 등용하여 무신정권으로 쇠퇴했던 문운의 진흥을 꾀한 치적은 있다.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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