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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최충헌 두문자 : 진 흥 봉 수 이 교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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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최충헌 : 진 흥 봉 수 이 교

 

진 : 

흥 : 녕부

봉 : 사 10조

수 : 선사 결사(지눌)

이 : 규보(동국이상국집)

교 : 장도감

 

1. 최충헌

최충헌은 고려시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을 역임한 관리이자 무신집권자이다. 1149년(의종 3)에 태어나 1219년(고종 6)에 사망했다. 이의민과 그 일당 및 잔당을 대량 학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60년 최씨정권을 세운 인물이다. 실권을 장악한 후 4명의 왕을 갈아치웠으며, 친동생을 비롯한 수많은 반대세력의 저항과 민란을 평정하며 71세의 천수를 누리기까지 실권자의 자리에 앉아 국정을 전횡했다. 이규보를 등용하여 무신정권으로 쇠퇴했던 문운의 진흥을 꾀한 치적은 있다.

 

최충헌은 1149년(의종 3)에 개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장군을 지낸 최원호(崔元浩)였고, 어머니는 역시 상장군을 지낸 유정선(柳挺先)의 딸이었다. 조부 정현(貞現)과 증조부 주행(周幸) 역시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최충헌이 처음 임명된 관직은 양온령(良醞令), 즉 왕실이나 관청에 술을 제조해서 공급하는 양온서의 8품직이었다. 한동안 하위관직을 전전하였는데, 무신정변(武臣政變)이 일어난 뒤에는 공을 세워 이름을 드날리고자 스스로 다짐하였음에도 서리직에 머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무관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중앙정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174년(명종 4)에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어 공을 세우면서부터였다. 이때 그는 원수 기탁성(奇卓誠)에 발탁되어 선봉에서 공을 세운 후 개선하여 거듭 승진하여 장군직에 올랐다. 이후로도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의민(李義旼)의 집권기에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의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다가 권신의 뜻에 거슬려 탄핵을 받았다고 하며, 이를 계기로 여러 해 동안 앞길이 막혔다고 한다. 아마도 경주(慶州) 출신으로서 이 지역에 깊은 연고를 가지고 있던 집정자 이의민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심에 가득찼던 최충헌은 40대 후반이 되도록 그 뜻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최충헌이 48세가 되던 해인 1196년(명종 26),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사건의 발단은 엉뚱한 곳에서 마련되었다. 그의 동생 최충수(崔忠粹)가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를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李至榮)이 빼앗아 가버리는 일이 있었다. 성격이 사나웠던 최충수는 곧바로 이지영의 집을 찾아가 비둘기를 돌려달라며 거칠게 대들었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왔다. 최충수는 곧바로 형을 찾아가 이의민과 그의 세 아들을 제거할 뜻을 표했고, 곤란해 하던 최충헌도 결국 이에 동의하였다. 당시는 이의민이 집권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으로, 그와 아들들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져 인심을 잃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그의 두 아들 이지영, 이지광(李至光)이 더욱 심하여 세상에서는 그들을 쌍도자(雙刀子)라고 부르며 미워할 정도였다. 거사일은 그해 4월 9일이었다. 이날은 국왕이 개경 인근의 사찰인 보제사(普濟寺)로 행차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의민은 행차를 따르지 않고, 경남 합천(陜川)의 미타산(彌陀山)에 마련된 자신의 별장으로 갔다.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최충헌 형제는 외조카인 박진재(朴晉材), 일족인 노석숭(盧碩崇) 등과 함께 그곳에서 이의민의 목을 베었다. 최충헌 일행은 곧바로 개경으로 돌아와 이의민의 잔당을 제거하고 국왕에게 이를 승인받았다. 그리고는 잠재적으로 그에게 반항할 위험이 있는 인물이었던 권절평(權節平), 권준(權準) 부자, 손석(孫碩), 손홍윤(孫洪胤) 부자, 길인(吉仁), 이경유(李景儒), 권윤(權允), 유삼백(柳森栢), 최혁윤(崔赫尹), 주광미(周光美), 김유신(金愈信), 권연(權衍) 등 수십 명의 대신과 국왕 측근의 인물들까지 살해하거나 섬으로 유배보내었다.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국왕의 왕명을 전달하는 좌승선(정3품),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는 지어사대사(종4품) 등의 관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는 이듬해에서야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다른 무신집정자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최고위 관직과 최고위의 공신위에 올랐던 것과 달리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2. 진강

무신정권기에 부(府)를 처음으로 세운 것은 최충헌의 집권에서 비롯되었다. 희종 2년(1206)에 왕은 “문하시중 진강후(晋康侯) (최)충헌은 선군(先君)이 정무를 보던 때와 과인이 왕통을 계승한 초기부터 지금까지 정성을 다하여 보좌하여 큰 공업이 있으므로 부를 세워 상전(賞典)을 높일 것이다”라는 조서와 함께 최충헌을 진강후에 봉하고 부를 세워 흥녕부(興寧(府))이라 하여 소속 관원을 두게 함과 아울러 흥덕궁(興德宮)을 이에 소속시켰다. 이후 흥령부는 강종 원년(1212)에 진강부(晋康府)라 고쳤다. 한편 최충헌을 이은 최우도 역시 立府하였는데 처음 고종 8년(1221)에 왕이 최우를 진양후에 봉하였으나, 그는 이를 고사하고 받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고종 21년에 또한 왕이 최우의 강화천도의 공을 논하고 부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詔書를 맞을 예물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사양하다가 마침내 晋陽侯에 봉하여지고 부를 세워 晋陽府라 하였다.

 

고려에는 公·侯·伯·子·男의 5작제가 있었는데, 爵은 주로 종실(왕족)에게 주어졌다.≪高麗史≫列傳 宗室條 첫머리에는 고려는 종실의 親을 보하여 尊者를 公이라 하고, 그 다음을 侯라 하고, 䟽者를 伯이라 하고, 幼者를 司徒·司空이라 하고, 이를 총칭하여 諸王이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한편≪高麗史≫百官志 諸妃主府條에 의하면, 왕의 諸妃(貴妃·淑妃 등)와 諸主(院主·宅主 등)에 책봉되면 殿을 세우고 부를 두어 소속관원을 갖추었는데, 左右詹事·小詹事·注簿·錄事 각각 1인과 令史·書令史·書藝 각각 1인, 그리고 記官 2인을 두었다. 또 諸王子도 부를 두고 소속관원을 갖추었는데, 典籤·錄事·書藝 각각 1인씩을 두었다. 그밖에 왕비의 아버지와 공주의 남편도 부를 세워 전첨과 녹사를 두었다. 이렇듯 고려에서는 왕의 妃主·왕자·왕비·공주는 부를 세우고 소속관원을 갖추었으며, 종신에게는 爵이 봉하여졌다. 이러한 立府와 封爵은 重臣의 경우에도 베풀어졌던 것으로, 李資謙이 朝鮮國公에 봉하여지고 崇德府를 세웠으며, 앞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최충헌이 진강후에 봉하여지고 흥령부(후에 진강부)를 세웠고, 최우가 진양후에 봉하여지고 진양부를 세운 것은 그 예이다. 그리고 姜邯贊이 天水郡開國侯에 봉하여지고 李子淵이 慶源郡開國公, 金富軾이 開國侯, 金方慶이 上洛郡開國公에 봉하여졌으나 부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자겸·최충헌·최우의 경우와 같이 이들도 봉작됨과 함께 부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 러한 최충헌의 진강부 등은 공적인 기관임과 아울러 개인을 위한 기관으로서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의 하나로 취급할 수 있다.이 진강부나 진양부는 최씨정권의 지배기구로서는 강력한 존재가 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高麗史≫에 “최충헌이 정권을 오로지 함으로부터 府와 僚佐를 두고 사사로이 政案을 취하여 注擬하고 제수하였다”라고 하여 최충헌이 부를 중심으로 인사행정을 오로지하는 등 그것이 강력한 권력기구임을 시사하여 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공적인 법제기관이므로 개인적으로 그 기능을 함부로 남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적인 법제기관이므로 그 소속의 인원을 함부로 증감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 법제상의 인원으로서는 별로 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법제상의 인원은 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왕의 妃主의 부가 左右詹事 이하 모두 10인이고 제왕자의 부가 전첨 이하 3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중신의 부는 왕비의 부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많아야 10인 이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최씨정권의 사적 권력기구로 막강한 교정도감·정방·도방 등이 있었으므로 사적 권력행사에 있어서 구태여 법제상 공기구인 부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는 합법제적 기구로서 상징적 명예의 기구로 삼았을 것이다.

 

 

최충헌 봉사10조
최충헌 봉사10조

 

 

3. 사 10조

봉사십조(封事十條) 1196년(명종 26)에 무인 집정자 최충헌이 정변의 정당성 및 정책 방향을 담아 국왕에게 올린 시무책이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토지, 조세, 관직자, 향리 등과 관련하여 10개 항의 폐정 개혁안을 제시한 것으로, 정변의 정당화 및 향후 정책 방향을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무신 정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봉사십조는 1196년(명종 26),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무인 집정자 최충헌이 국왕 명종에게 올린 일종의 시무책(時務策)으로서, 정변의 정당화 및 향후 정책 방향을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무신정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비롯한 무신란 이후의 초기 정권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무력에 의한 정권 유지에 의지함으로써 정변에 대한 정당성 확보에 실패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정변에 대한 정당성이란 과거의 적폐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점을 분명히 하고 그 개선 방안을 정책으로 제시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개혁이 국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최충헌의 문제의식이 봉사십조에 나타나 있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여 정변에 대한 명분을 확보하고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강력한 탄압을 불사함으로써 독재적 권력 형성에 성공하였다. 도합 10개조로 된 이 봉사(封事)의 내용은 ① 국왕의 정전(正殿) 사용, ② 함부로 설치된 관직의 정리, ③ 탈점주3된 토지의 환수, ④ 불법적 조세 과징의 억제, ⑤ 안찰사의 진상 중지, ⑥ 승려의 정치 관여 금지, ⑦ 향리에 대한 적정한 관리, ⑧ 관직의 사치 풍조 억제와 검소한 기풍 진작, ⑨ 비보사찰 외의 남설된 원찰 정리, ⑩ 대간의 활성화에 의한 언로 소통 등을 건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무책의 제시에 의하여 최충헌은 자신의 정변이 고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과거의 정치적 폐단을 혁신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에 의하여 최충헌은 정변의 정당화 반대 세력의 효과적 억제  권력 안정을 위한 제도적 장치 설정의 명분을 축적함으로써 집권 초기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 방향의 제시가 근본적으로 자기 권력의 안정화를 추구하는 수단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그 권위의 보위자로서의 최충헌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대간의 활성화도 최충헌이 관료들에 대한 적절한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눌 : 정혜쌍수 돈오점수
지눌 : 정혜쌍수 돈오점수


 

4. 선사 결사(지눌)

수선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불교적인 신앙결사의 단체명인 동시에 사찰의 명칭이다. 무신정변 이후 불교계와 불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비판의식이 대두되었고 학문불교이자 체제불교적 성격이 강한 교종을 대신해 선종이 두각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각 지방의 신앙단체로서 결사가 유행했는데 선종에서는 수선사가, 천태종에서는 백련사가 탄생했다. 지눌 수선사 결사를 통해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의 법을 주창했고 다시 화엄사상과 결합하여 화엄과 선이 하나임을 밝혔다. 수선사의 불교는 오늘날까지도 큰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선사의 후원세력을 살펴보면,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그 성격이 변하였다. 결사 초기인 지눌 당시에는 왕실과는 약간의 관계를 가졌지만 무신집권자와는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1207년(희종 3) 최선이 찬술한 「대승선종조계산수선사중창기(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創記)」에는 수선사의 창립과 이전 과정에 관여한 승려와 후원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후원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금성(錦城: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안일호장 진직승(陳直升)과 그의 처 진의금(珍衣金) 부부였다. 그들은 백금 10근을 시주해 조영(造營)의 비용을 삼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이어 남방 주 · 부(州府)의 부자들은 재물을 베풀고, 빈자들은 노동력을 다하여 범우(梵宇)를 이룩하였다는 표현이 보인다. 이로 보아 수선사의 중창은 실로 인근의 지방인들, 특히 향리층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서 가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창기를 기록할 때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한 사람은 최우였으나, 그가 직접 수선사와 관련을 맺은 것 같지는 않다. 최우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제2세 진각국사(眞覺國師)혜심(慧諶) 때였다. 혜심 때에는 강종을 비롯한 왕실, 최우를 비롯한 무신세력, 최홍윤을 비롯한 유학자 관료 등이 새로 입사함으로써 수선사는 중앙의 정치세력과 연결되었으며, 그에 따라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다. 1250년(고종 37)에 세워진 혜심비(慧諶碑)의 음기(陰記: 비갈의 등 뒤에 새긴 글씨)에 기록된 공후(公侯) 6명, 재추(宰樞) 24명, 상서(尙書) · 경(卿) · 감(監) 수준의 관료 32명, 참상(參上) 수준의 관료 39명, 그 밖의 거사(居士) · 녹사(錄事) · 검교(檢校) 9명, 왕실과 최충헌 집안의 부녀 8명 등의 명단을 보면 그 밀착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최우는 자신의 두 아들 만종과 만전(萬全)을 혜심에게 출가시켰고, 또한 축성유향보(祝聖油香寶) · 국대부인송씨기일보(國大夫人宋氏忌日寶) · 동생매씨기일보(同生妹氏忌日寶) 등의 명목으로 전답과 염전 등의 막대한 토지를 수선사에 시납하였다. 혜심은 수차에 걸친 최우의 도성에로의 초청을 끝까지 거절하였음을 볼 때, 중앙 정치세력과의 지나친 밀착을 자제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수선사와 중앙 정치세력과의 관계는 제3세 몽여, 제4세 혼원, 제5세 천영 등을 거치면서 더욱 밀착되어갔다. 1245년(고종 32)에 최우의 원찰로서 강도(江都: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선원사가 창건되고, 그 법주(法主)로 혼원 · 천영 등 수선사의 사주가 될 인물들이 담당하게 되면서 수선사와 당시의 집권자인 최씨정권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최씨정권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전 불교계를 좌우하면서 자신의 정권에 적대적인 화엄종과 법상종 중심의 교종 세력을 배제하고, 수선사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재편하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수선사를 주도했던 인물이 수선사 제2세인 혜심이었다. 수선사가 불교 교단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은 1219년(고종 6) 최우가 최충헌을 계승한 이후였다. 최우가 수선사를 부각시킨 것은, 수선사가 일반민들이 믿고 있었던 정토신앙(淨土信仰)까지 수용함으로써 기존의 다른 종파에 비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는 제6세 충지 때에는 후원세력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충지와 교유한 인물들을 보면,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새로이 권문세족으로 등장하는 국왕의 측근세력이나 재추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지눌의 수선사 결사는 불교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정(定, Samādhi)과 혜(慧, Prajnā)를 함께 닦자는 실천운동이었다. 이 정혜쌍수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이다. 돈오는 인간의 본심을 깨달아 보면 제불(諸佛)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돈오라고 하며, 비록 돈오하여도 습기는 갑자기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점수라는 종교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이러한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의 법을 성적등지문이라고 하였으며, 이 밖에 다시 화엄사상을 도입해 원돈신해문을 세워서 화엄(華嚴)과 선(禪)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 두 문은 아직도 지해(知解)와 어로(語路)의 자취를 벗어난 것이 못되므로 이러한 지해의 장애를 완전히 떨쳐버리려면, 끝으로 선문(禪門)의 활구를 참구(參究)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눌의 선에서 간화경절문은 바로 이러한 간화의 출신 활로를 가리키고 있다. 이 경절문은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경계는 일체의 지해와 분별을 떠나 정과 혜에도 구속되지 않는 것으로써 지눌의 선이 지향하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성적등지 · 원돈신해 · 경절의 3문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지눌의 선의 실천체계는 대단히 독창적인 것이다. 선문에서는 지해라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데 지눌은 그것을 원용하고 있으며, 그것도 혜능(慧能)의 적자(嫡子)가 아닌 하택신회(荷澤神會) · 규봉종밀(圭峯宗密)의 것을 도입하였다. 게다가 화엄에서도 현수(賢首) · 청량(淸凉) 계통이 아니라 방계인 이통현의 것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대혜종과(大慧宗果)의 간화선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선사상을 펼치고 있는데, 이것 또한 간화적인 선법(禪法)을 크게 발전시킨 것이다.

 

이로써 수선사의 지눌사상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완성된 철학체계를 마련함으로써 고려 불교사의 기본적 과제인 선교통합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 지눌의 뒤에는 제2세 혜심이 나와 지눌의 선사상을 계승해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선양함으로써 고려 불교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눌과 혜심에 이어 제6세 충지 단계의 수선사 불교는 지눌 이전, 즉 고려 중기의 선의 전통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충지의 「혜소국사제문(慧炤國師祭文)」과 「정혜입원축법수소(定慧入院祝法壽疏)」에 의하면, 정혜사의 창건자로서 혜소국사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의 선풍이 몽여 · 혼원을 거쳐 자신에게 전승되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예종대 혜소국사의 선은 고답적이며 귀족적인 경향을 가지고 개인적인 수업 형태를 중시하는 것으로, 그러한 선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는 충지의 불교는 지눌의 것과 비교할 때 확실히 변질된 것이다. 충지 이후의 수선사 활동은 잘 알 수 없지만, 수선사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16국사(실제로는 15국사와 1화상)를 배출하면서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지니고 있었다. 16국사에 대해서는 신빙할만한 기록이 없어 생애를 알 수 없는 인물도 있다. 또한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세대와 생애를 알 수 있는 국사는 1세 보조, 2세 진각, 3세 청진, 4세 진명, 5세 원오, 6세 원감, 10세 혜감, 13세 각진 등이다. 이들 사주 외에 나옹혜근과 그의 제자인 환암혼수, 태고보우의 문인인 상총과 석굉(釋宏) 등이 고려 말에 수선사의 후신인 송광사 사주를 역임하였다. 이들 4명은 지눌의 직계 법손이 아닌 수선사 계통과는 다른 인물들이다. 수선사 사주들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들의 출신 신분이 이전의 승려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즉 지눌을 비롯한 수선사 역대 사주들의 출신가문을 살펴보면, 지눌이 서흥 정씨(瑞興鄭氏), 혜심은 화순 최씨(和順崔氏), 진명국사 혼원은 수안 이씨(遂安李氏), 천영은 남원 양씨(南原梁氏), 원각국사 충지는 장흥 이씨(長興李氏), 각진국사 복구는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사주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지방의 향리지식층으로서 유업(儒業)을 닦았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혜심 · 충지 같은 경우는 불문에 들어오기 이전에 과거(사마시)에 급제하여 태학에 들어가거나 관리가 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이규보 : 동국이상국집
이규보 : 동국이상국집

 

 

5. 규보(동국이상국집)

이규보는 고려시대 동지공거,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168년(의종 22)에 태어나 1241년(고종 28)에 사망했다. 문재에 뛰어났으나 형식적인 과거시험 글을 멸시하여 국자시에 낙방하다가 네 번째 응시에서 수석합격을 했다. 급제 후에도 관직을 받지 못하고 사회 혼란 속에서 『동명왕편』을 지었다. 무신집권자인 최충헌을 국가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짓고서야 관직에 진출했고, 이후 최씨 정권에서 문필가로서 무인정권을 보좌하며 승승장구했다. 무인정권에 봉사한 입신출세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민의 피폐, 그리고 남부지방에서 10여 년 동안 일어난 농민폭동 등은 이규보의 사회 · 국가의식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동명왕편> ·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등이었다. 그리고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이 있다. 혜문 · 총수좌(聰首座) · 전이지(全履之) · 박환고(朴還古) · 윤세유 등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71세 이후에는 하천단 이수 및 승통 수기 등과 사귀었고, 최씨의 문객인 김창 · 이인식(李仁植) · 박훤과도 교제가 잦았다.

 

6. 장도감

교장도감은 고려시대 속장경(續藏經) 판각사무를 관장하던 관서를 말한다. 송나라에 다녀온 의천(義天)의 요청으로 선종이 1086년(선종 3) 흥왕사(興王寺)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속장경의 간행을 시작한 연월이나 이 도감의 조직·규모 등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본에 의하면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이 1092년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며 이어 1099년까지의 간기가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장도감의 속장경 간행사업은 의천이 불서수집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1091년부터 의천이 입적한 1101년(숙종 6)까지로 보고 있다. 의천은 교장도감에서 송나라·요나라·일본 등으로부터 구해온 정장(正藏)에 대한 소(疏)·초(鈔) 등의 주석서를 간행하였다. 당시 수집한 주석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1,010부 4,857권에 이르고 있다. 다만, 모두가 간행되었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 간행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존하는 교장도감 간행본으로는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40권 본을 비롯하여 20여종이 전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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