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목왕 : 목 고 응 정 현 정 기
목 : 충목왕
고 : 고리대금 금지
응 : 응방 혁파
정 : 정치도감(이제현 주도)
정 : 정방혁파
삼 : 기삼만 반발
1. 충목왕
충목왕은 고려후기 제2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344~1348년이다. 어려서 볼모로 원나라에 가 있다가 황음무도를 일삼던 충혜왕이 폐위되자 8세에 왕위를 계승했다.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며 폐정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휼하는 데 힘썼다. 보흥고·덕녕고·응방 등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기관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권신들이 빼앗았던 녹과전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 폐정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민전을 측량하게 했고, 진휼도감을 두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재위 4년 만에 사망했다.
제29대 고려 국왕이었던 충목왕(忠穆王)은 고려에 대한 원(元)의 내정간섭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즉위 이전 충렬왕(忠烈王)부터 충혜왕(忠惠王)에 이르는 고려 국왕들은 원의 정세 변화와 더불어 심각한 부침을 겪었다. 원에서 누가 권력을 장악하였는가에 따라 국왕의 폐위나 복위가 결정되는 상황이 고려왕실에서는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왔다. 심지어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 시기에는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지지하는 세력이 그를 고려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획책하였으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려를 원의 지방행정기구로 만들자는 입성론(立省論)까지 제기하여 고려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처럼 내우외환이 거듭되는 가운데 충목왕은 8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고려의 국정을 바로잡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떠안게 되었다.
즉위 직후 충목왕은 어머니 덕녕공주와 더불어 충혜왕이 남긴 유산을 청산하는 데 힘썼다. 물론 8세의 그가 주도적으로 정치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시 조정의 중신들과 협력하며 개혁을 추진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는 교서를 내려 국내의 신료들로 하여금 국정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휼할 수 있는 방안을 제출하도록 한 뒤, 한범(韓范)·장송(張松)·정천기(鄭天起)와 같은 선대의 폐행들을 축출하여 기존 정치와의 단절을 꾀하였다. 당시 그가 추구하였던 개혁정치의 요체는 이제현(李齊賢)의 글에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이제현은 장문의 글을 통하여 보흥고(寶興庫)·덕녕고(德寧庫)와 같은 충혜왕의 사적 이익에 봉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기구들의 청산, 정방(政房)의 폐지, 녹과전(祿科田)의 정상화 등 정치적·경제적 차원의 대대적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충목왕은 그의 의견을 십분 반영하여 이후의 개혁정치를 전개하였다.
순차적으로 충목왕은 보흥고·덕녕고·응방(鷹坊) 등 백성 수탈의 중심축이었던 기관들을 폐지하고 그곳에서 차지하였던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정방을 혁파하여 인사를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에 분담시켰으며, 부당하게 권세가들에게 빼앗긴 녹과전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부터 여러 대에 걸친 측근정치로 무너져 내렸던 고려의 국정이 비로소 활력을 띠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랜 시간 산적된 폐해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345년(충목왕 원년) 12월, 우정승(右政丞)으로서 충목왕 즉위 후의 정국을 주도해오던 왕후(王煦)가 파면됨에 따라 의욕적으로 추진되던 개혁정치는 주춤하기 시작한다. 당시 왕후는 정방과 과전을 폐지하는 일에 앞장섰다가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듯 뿌리 깊게 부패한 고려를 쇄신하기란 녹록치 않았다.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하던 개혁정치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설치를 계기로 획기적 국면에 접어들었다. 정치도감은 충목왕 3년인 1347년 원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설치되었던 개혁기관으로서 왕후·김영돈(金永旽)·안축(安軸)의 주도 하에 운영되었으며 원 황제의 지지에 힘입어 급진적 활동을 펼쳤다. 정치·경제·사회의 세 분야에서 총 12가지 항목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당시 정치도감 관원들은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거나 몸소 지방관이 되어 외방 관리들의 횡포 및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자의적 수탈을 방지하였고 토지를 점탈하거나 양인을 노비로 만든 권세가들을 처단하였다. 원 황제의 지지를 기회로 삼아 충목왕 즉위 직후의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정치도감 활동의 주요 골자였다.
정치도감은 3개월에 걸쳐 과감하게 권세가들을 처단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감성은 곧 정치도감에 독이 되었다. 기황후의 일족 기삼만(奇三萬)이 정치도감에서 장형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기삼만의 죽음은 충목왕에게 있어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원과의 마찰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기에 충목왕은 정치도감 관원인 서호(徐浩)와 전녹생(田祿生)을 가두어 그 책임을 물어야만 했고, 원 역시 사신을 파견하여 진상을 규명하였다. 이로부터 정치도감 활동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원 황제가 다시 정치도감을 두었으나 한 차례 고초를 겪었던 정치도감 관원들은 이전처럼 의욕적으로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결국 1348년(충목왕 4) 12월, 충목왕이 1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이윽고 정치도감 활동 또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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