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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우왕 두문자 : 우 화 직 홍 진 황 관 (쓰)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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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우왕

 

 

우왕 : 우 화 직 홍 진 황 관 (쓰)

 

우 : 왕(1374~1388)

화 : 통도감설치(1377 최무선)

직 : 지심체요절(1377 청주 흥덕사)

홍 : 산(1376 최영 부여전투)

진 : 포(1380 최무선 금강 화포 최초등장)

황 : 산(1380 이성계 남원)

관 : 음포(1383 정지 남해)

쓰 : 시마 정벌

위 : 1388 화도 회군(소농왜질)

 

 

최영장군의 홍산대첩
최영장군의 홍산대첩

 

1. 왕(1374~1388)

우왕은 고려후기 제3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374~1388년이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에 즉위했다. 즉위 초부터 북원 및 명나라 사이에 복잡한 외교문제가 계속 발생했고 왜구의 침탈이 심각했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유희를 일삼았다. 명이 철령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오자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했으나 이성계 세력의 위화도회군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최영의 실각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이성계 제거 모의 혐의로 다시 강릉으로 이배된 후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우왕은 백문보 · 전녹생 · 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 · 왕안덕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 복잡한 외교 문제가 계속 발생하였다.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러자 크게 분개한 우왕은 이성계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성계에 의해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 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이치(移置)되었다. 다시 1389년 11월 김저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 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폐가입진이라 해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 건국을 합리화시키려 하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 통도감설치(1377 최무선)

1377년(우왕 3)에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일찍이 그는 중국 강남의 상인 이원(李元)을 자신의 집에 모셔두고 집요하게 설득하여 수십 일에 걸쳐 염초자취술(焰硝煮取術: 화약의 제조법)을 배웠다. 이후 그가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의 제조에 성공한 뒤 그 효력을 시험하고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하여 비로소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된 것이다. 그 뒤 화약을 제조하고 각종 화기, 즉 대장군(大將軍)·삼장군(三將軍)·이장군(二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疾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제작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이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침구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는데, 1380년의 진포(鎭浦: 금강어귀)싸움과 1383년의 진도(珍島)싸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1388년(창왕 1)에 폐지되어 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되었다.

 

3. 지심체요절(1377 청주 흥덕사)

『직지심체요절』의 원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백운화상(1299∼1374)은 1374년에 취암사에서 입적하였는데 1372년에 제자인 법린과 함께 이 책을 저술하였다.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에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다시 1년 뒤인 1378년에 취암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이 되었다. 현재 금속활자본은 하권 1책만이 프랑스에 전하며, 목판본은 상하권 모두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불갑사 등에 전하고 있다. 유일한 금속활자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의 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한국에서 수집한 다른 장서와 함께 본국으로 가지고 간 뒤 파리의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에게 넘겨졌다가 앙리 베베르의 유언에 따라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1972년에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를 통해 책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책에 기입된 구결은 여말선초의 특징을 보이는데, 책이 간행된 시기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때에 기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도서관의 목판본에는 구결이 기입되어 있지 않다.

 

하권은 모두 39장인데 이 중 제1장이 낙장이어서 현재는 38장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첫째 장인 제2장의 앞면에 한자 약체로 구결이 기입되어 있는데 2장의 뒷면부터는 구결이 보이지 않고 구두점만 찍혀 있다. 이후 12장 앞면, 19장 뒷면, 29장 뒷면, 30장 앞면부터 36장 앞면까지 구결이 달려 있다. 한편 38장 뒷면에는 주서(朱書)로 구결이 달려 있다. 구결은 해당 한자의 우측 하단에 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책에는 해당 한자의 우측 가운데에 달아 놓은 것이 많은 점이 특이하다. 여말선초 구결의 특징을 잘 보여 주나 전권에 고르게 달리지 않았고 분량도 비교적 적은 편이어서 그 동안 차자표기 연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4. 산(1376 최영 부여전투)

홍산대첩 1376년(우왕 2) 7월 최영(崔塋)이 홍산(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을 말한다. 이 싸움은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남해대첩과 함께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 중 하나이다고려때 왜구 침범은 충정왕 때부터 시작되어 공민왕과 우왕 때 가장 창궐했는데, 특히 우왕 14년 동안 378회에 걸쳐 쳐들어와 최고를 기록하였다.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에 이르렀는데, 이 때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다. 왜구는 다시 연산현(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와 이를 맞아 싸우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출정을 자청하였다. 이 때 우왕은 그가 나이 들어 말렸으나, 최영은 종사와 왕실을 위해 굳이 출정하기를 거듭 요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최영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에 이르니 왜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에 웅거하고 있었다.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 길만이 통할 수 있었는데,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자 최영이 앞장서서 예기(銳氣)로 돌격해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때 침입한 왜구의 수가 얼마인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공주와 개태사가 약탈당한 것으로 봐서 대규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왜구들은 늘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白髮)의 최만호(崔萬戶)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최영을 두려워하였다. 이후 왜구의 기세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 전공을 세운 최영에게는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내려지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차등 있게 벼슬이 제수되었다.

 

5. 포(1380 최무선 금강 화포 최초등장)

금강 내륙수로의 하류지역에 해당하며, 어느 한 특정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은 아니었고, 임천(林川) 고다진(古多津)에서 서천포(舒川浦)에 이르는 지역을 통칭한 것이다. 따라서, 금강 하류지역에 위치하였던 나루는 모두 진포를 건너는 곳이었다. 이곳은 고려 말 최무선(崔茂宣)이 화기(火器)를 써서 500여척의 왜구의 배를 무찌른 곳으로 지금의 금강하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이 위치하였으며, 수군만호(水軍萬戶)가 한 사람 배치되었던 군사적 요지였다. 조운제도(漕運制度)가 발달하였던 시기에는 조세운반의 주요수로 및 창고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나 조선 말기에는 교역의 중심지로 바뀌기도 하였다. 그 뒤 호남선의 개통과 더불어 발달한 육상교통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내륙수로로서의 운송기능은 상실되었다.

 

 

황산대첩
황산대첩


6. 산(1380 이성계 남원)

황산대첩 1380년(우왕 6) 9월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黃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를 말한다.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인 화포를 처음 사용해 묶어놓은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어 격렬했던 왜구의 만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沃州: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했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주 등지로 진출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내역(沙斤乃驛: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에 집결, 반격하였다. 이때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배극렴(裵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勇奇)·오언(吳彦)·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도흥(都興)·하을지(河乙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 5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9월 왜구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 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고려사』열전 변안열(邊安烈)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왜구 부대의 규모나 이성계의 군공이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7. 음포(1383 정지 남해)

관음포대첩은 1383년(우왕 9) 남해현(南海縣) 북방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로 몰려와 재산과 인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왜구는 배를 이용해 해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수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관음포전투도 수군으로 왜구를 대파한 싸움이었다.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는 여러 차례 수군을 이용해 왜구를 무찌른 용장이었다. 그는 1383년(우왕 9)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의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향하였다. 이때 스스로 노를 저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였다. 섬진강 어귀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징집해 군열을 다시 정비했는데 이미 왜구는 관음포에 도달하였다. 그는 지리산 신사(神祠)에서 승전을 기원한 뒤 전투에 임하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순풍이 불어 그의 전선은 나는 듯이 헤쳐나가 순식간에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왜구는 대선(大船)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하여 전진해 왔다. 그는 먼저 선봉함선을 무찌르고, 화포를 이용해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니, 왜구는 전의를 잃고 퇴각하였다. 싸움에 이긴 뒤 정지는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했으나 오늘 같이 통쾌한 것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통쾌하게 이긴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는 17척의 대선과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때 왜선에는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8. 시마 정벌

왜구는 일본에서 유래한 해적이 일방적으로 고려와 명을 침략한 것이지만, 고려(조선)와 명 사이에 심각한 외교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명은 고려에게 왜구를 엄금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혹시라도 고려(조선)이 일본과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군사적 위협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명의 의심과 협박을 잠재우기 위해 왜구를 정벌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도 주변국인 고려(조선)와 명의 의심을 잠재우고, 남북조의 혼란기에 일본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을 필요성에서 왜구 문제가 해결될 필요성이 있었다. 고려말인 1389년(창왕 1)과 조선초인 1418년(세종 즉위년)에 단행된 쓰시마 정벌은 동아시아 3국의 이해가 맞아 이루어진 군사적 행동이었다. 왜구를 토벌하는데 고려에 협조한 측은 북조인 막부-쇼군측이었는데, 이들은 왜구 토벌에 협조함으로써 국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국왕’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으며 남조에 대하여 우세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고려말의 첫 쓰시마 정벌은 1389년 2월에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인 박위를 파견하여 병선 1백여 척을 이끌고 공격한 것이다. 이때 적선 3백여 척을 불사르고 잡혀갔던 고려인 1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첫번째 정벌은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고려는 이 정벌로 왜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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