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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조선건국과정 두문자 : 우 철 위 폐 과 역 조 한 경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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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멸망사 : 우왕

 

 

조선건국과정 : 우 철 위 폐 과 역 조 한 경

 

우 : 왕집권(1374)

철 : 령위 통보

위 : 화도 회군(1388)

폐 : 가입진(1389)

과 : 전법(1391)

역 : 성혁명(1392)

조 : 선 국호 사용(1393)

한 : 양 천도(1394)

경 : 복궁 건립(1395)

 

 

1. 왕집권(1374)

우왕은 고려후기 제3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374~1388년이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에 즉위했다. 즉위 초부터 북원 및 명나라 사이에 복잡한 외교문제가 계속 발생했고 왜구의 침탈이 심각했으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유희를 일삼았다. 명이 철령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오자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했으나 이성계 세력의 위화도회군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최영의 실각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이성계 제거 모의 혐의로 다시 강릉으로 이배된 후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재위 1374∼1388. 우왕은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의 시비(侍婢)인 반야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시비의 소생인 그가 아들임을 밝혔다. 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해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뒤 그는 신돈이 주살되자 궁중에 들어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철령위
철령위

 

 

2. 령위 통보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러자 크게 분개한 우왕은 이성계)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성계에 의해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 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이치(移置)되었다. 다시 1389년 11월 김저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 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위화도 회군(1388)
위화도 회군(1388)

 

3. 화도 회군(1388)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8도의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여러 비(妃)들을 한양산성(漢陽山城)으로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禹玄寶)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우왕과 최영은 서해도(西海道)로 가 요동정벌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해 4월에는 우왕이 봉주(鳳州)에 있으면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임명하고, 창성부원군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서경부원수 이무(李茂),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양광도부원수 이승원(李承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崔鄲),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빈(王賓) 등을 소속시켰다.

 

또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안주도상원수 지용기(池勇奇), 안주도부원수 황보림(皇甫琳),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두란(李豆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金天莊) 등을 소속시켜 좌·우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다. 곧이어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평양을 출발해 다음 달에 위화도에 둔진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 등은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인 끝에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으로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해 강화도로 방출하였다. 이로써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조선건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다만 회군 당시부터 이미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의지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4. 가입진(1389)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폐가입진이라 해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 건국을 합리화시키려 하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5. 전법(1391)

고려 말 권력자들의 불법적인 토지 점유는 국가 재정의 큰 곤란을 야기하였다. 이리하여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 및 조선 건국 세력은 곧 토지 개혁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 정립된 것이 과전법이었다. 수조권이란 토지에 대한 조세 징수권으로서, 1391년(공양왕 3)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다. 과전은 전⋅현직 관료를 막론하고 18과(科)로 나누어 15~150결(結)을 지급하였는데, 본인 당대에만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과전이 세습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아울러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石)까지 수취가 가능하게끔 하였으며, 경기도에 속한 토지에서만 분급하여 불법적으로 과전이 팽창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렇게 성립된 과전법은 조선 왕조 개창의 물질적 토대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수조지 분급을 전보다 축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전법은 다시 개혁 논의를 맞게 되었다.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가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수신전 휼양전 등의 명목으로 사실상 세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이에 따라 건국 이후 줄곧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는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과전을 지급받지 못하는 관원의 수가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분급하는 직전법, 세금의 수취를 국가가 대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등의 시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거듭되는 흉년과 임진왜란을 겪으며 국가 재정이 황폐해지자, 결국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토지 수조권 자체가 폐지되고, 관리에게는 녹봉(祿俸)만을 지급하게 되었다.

 

6.  성혁명(1392)

1392년 7월 17일(양력 8월 5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 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가 시작되었다. 1393년 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쳤다.

 

처음부터 공양왕에게는 왕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이며,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양왕은 왕위에 추대되자 “나는 평생 의식과 노비가 모두 풍족했거늘, 이제 와서 짐이 이렇게 무거우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사돈인 강시(姜蓍)는 “여러 장수와 재상이 전하를 옹립한 것은 다만 자기의 화를 면하기를 도모한 것이지 왕씨(王氏)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삼가고 믿지 마시어 스스로 보전할 방도를 생각하십시오.”라고 충고하였다. 그의 바람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고, 공양왕은 재위 32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를 폐위한다는 왕대비의 명을 받은 공양왕은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습니까.”라고 하며 원주로 물러나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공양군(恭讓君)에 봉해지고 간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망한 왕조의 마지막 왕의 운명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1394년(태조 3) 발생한 왕씨 모반사건으로, 공양왕의 세 부자는 간성에서 다시 삼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만에 태조는 왕씨 일족을 제거하라는 신료들의 청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공양왕과 그의 두 아들을 처형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후 정식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로써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은 숨을 거두게 되었다. 고려사의 찬자는 그의 성품을 묘사하여 “인자하고 부드러웠으나 행동은 우유부단하였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고려는 기울어져 가는 왕조였지만, 이를 지탱해내려는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이성계 일파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공양왕은 이들을 후원하며 처절할 정도의 몸부림을 쳤지만, 결정적 순간에 과단성 있는 대처를 하지는 못하였으며, 그 결과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왕릉은 공식적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민간에서는 그가 처형당했던 강원도 삼척의 공양왕릉을 진짜 공양왕의 무덤이라고 전하고 있다. 죽어서 묻힌 곳이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점은 공양왕의 애달픈 생애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7. 선 국호 사용(1393)

조선왕조가 수립되는 과정은 정치적으로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우왕 14년(1388) 위화도회군과 그에 따른 우왕의 폐위 및 최영의 축출이다. 둘째는 다음해「廢假立眞」을 이유로 한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이다. 셋째는 공양왕 4년(1392) 드디어 尹彛·李初誣告사건을 빌어 마지막 반대세력을 숙청한 다음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즉위한 것이다. 우왕의 폐위로부터 불과 4년만에 창왕과 공양왕을 거쳐 이성계의 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즉위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라는 국호도 그대로 두고 儀章과 법제도 전과 같이 유지함으로써 민심의 격동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자 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다음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및 대소신료와 閑良·耆老의 명의로 知密直司事 趙胖을 보내어 門下侍中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한 사유를 조심스럽게 명의 禮部에 먼저 알렸다. 그리고 다음달에는 대동소이한 내용을 정식의 表文으로 작성하여, 權知高麗國事 이성계의 명의로 前 密直使 趙琳을 명 태조에게 보내어 즉위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명의 즉위승인을 받는 일은 국제적으로 명과의 우호관계를 도모하고 국내적으로는 왕권을 확립하며 신왕조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데 절대적으로 긴요하였다.

 먼저 조반이 가지고 간 문서를 받은 명 예부는 이를 즉시 명 태조에게 보고하였다. 명 태조는 이성계가 일을 꾸민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확연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선의 우려와는 달리 왕조교체를 다음과 같이 선선히 기정사실로 인정하여 주었다. 삼한의 신민이 이미 이씨를 높였는데 백성들에게는 兵禍가 일어나지 않으며 사람들마다 하늘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곧 帝命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封疆을 조심하여 지키도록 하고 거짓을 일삼지 않는다면 복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0월 경오). 명 태조로부터 즉위승인을 받은 조선 태조가 時坐所로 돌아와 백관의 축하를 받았음은 물론이며, 태조는 곧 바로 門下侍郎贊成事 鄭道傳을 謝恩使로 명의 남경에 파견하였다. 한편 조반보다 한 달 늦게 권지고려국사 이성계 명의의 표문을 가지고 명에 갔던 조림에게, 명 태조는 심상치 않게 잦은 왕위교체의 이유를 짐작하지만 이에 간여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조림이 가지고 온 명 예부의 咨文에서 명 태조는 조선의「聲敎自由」를 다시 한번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 바꿀 국호가 무엇인지 조속히 알려달라고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만들어준 東夷이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너희 예부에서는 회답하는 문서에 聲敎를 자유로이 할 것이며 과연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 동이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변방에서 釁端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使節이 서로 왕래하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그 나라의 복이 될 것이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국호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빨리 보고하도록 하라(≪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1월 갑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로운 양국관계의 출발에 크게 고무된 조선 태조는 그대로 두었던「고려」라는 국호를 고치기로 결심하고 기로와 백관을 도당에 모아 새로운 국호를 의논하였다. 그 결과「朝鮮」과 태조가 출생한 永興의 옛이름인「和寧」의 두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藝文館學士 韓尙質을 보내어 명 태조에게 두 국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주기를 요청함으로써 더욱 겸양의 태도를 나타내었다. 명 태조는 “동이의 국호에 조선이란 이름이 아름답고 또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이어받고,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고「조선」이란 국호를 지정하여 주었다. 조선에서 국호의 선택까지 명에 의뢰한 것은 지나친 사대외교이며 자주성의 상실이라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은 이후 험악해진 양국관계나 왕조교체에 따른 난제를 풀어가기 위하여 우선 명과의 외교적 마찰을 최대한으로 회피할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므로 실리를 위한 명분의 양보를 보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은 門下侍郎贊成事 崔永址를 명에 보내어 사은하게 하는 동시에 政堂文學 李恬으로 하여금 명이 수립된 직후 공민왕이 명 태조로부터 받았던 金印을 반환하게 하였다. 그러나 최영지가 安州에 이르렀을 무렵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 도중에 있던 정도전 일행과 만나게 되었다. 정도전은 최영지가 사신으로 명에 파견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고 잠시 머물러 있게 한 다음 개경으로 돌아와, 태조에게 최영지가 서북면에서 오랫동안 군사를 거느려 중국에 잘 알려져 있으므로 가벼이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건의하였다. 태조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영지를 도중에 소환하고 이염에게 사은사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다.

 최영지가 서북면에서 오랫동안 군사를 거느렸던 사실이 왜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건이라고 정도전은 판단하였을까. 이는 최영지가 고려말 이래 서북면 일대에서 벌인 군사활동의 범위가 어쩌면 압록강을 넘어 비록 소규모일지라도 명군과도 몇 차례 충돌한 사실이 있거나, 적어도 명 태조가 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여진유인에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정도전은 최영지의 이러한 과거의 군사활동을 염두에 두고, 자칫하면 명에 사신으로 잘못 갔다가 희생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 使行의 귀로에서 처음으로 요동정벌의 가능성을 토로함으로써 명 태조로부터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기 시작하였으며, 귀국하자마자 바로 判三司事에 임명되고 義興三軍府事를 겸임하여 군제개혁과 군비강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조선이 우호적인 양국관계의 정립을 위해 국호조차도 명 태조에게 선택하여 주기를 요청하는 사대외교의 뒷면에, 자주적으로 조선의 국운을 개척하려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8. 양 천도(1394)

조선 건국 후 약 4년 동안의 논의를 통해 태조의 적극적인 주도로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 ‘예로부터 왕조(王朝)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라고 주장한 태조는 개경에서의 취약한 기반을 극복하고 민심을 잡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풍수도참에 부응하여 자신의 건국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반면 태조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여타의 공신세력들은 기본적으로 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이런 대립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1392년(태조 1) 8월 13일 태조는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라고 명령한다. 건국 직후였던 만큼 태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염(李恬)을 한양으로 보내서 궁실(宮室)을 수리하게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한양 천도가 번복되는데, 궁궐과 성곽도 갖추지 못하고 천도할 경우 민가(民家)를 빼앗는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개국 직후 대규모 토목공사 실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입장에서 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1월에 태 묻을 곳을 찾기 위하여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던 권중화가 돌아와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를 바쳤다. 이를 계기로 계룡산이 새 도읍의 후보지로 대두되었고, 풍수지리가 주요한 판단근거가 되었다. 2월이 되자 태조는 계룡산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거둥하였다. 새 도읍의 산수(山水)의 형세(形勢)를 관찰하고 성석린(成石璘)·김주(金湊)·이염에게는 조운과 도로의 측면을 살피게 하고 이화(李和)와 남은(南誾)에게 성곽을 축조할 곳을 살피게 하였다. 종묘·사직·궁전·시장을 조성할 장소를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땅을 측량해 보기도 하였다. 계룡산 일대를 다 둘러본 뒤에는 떠나면서 김주와 박영충(朴永忠)·최칠석(崔七夕)을 남겨서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고 3월 24일에는 계룡산 새 도읍을 중심으로 기내(畿內)의 행정구역도 설정함으로써 천도가 확정적으로 추진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12월에 하륜(河崙)의 상언으로 이 또한 중지되고 천도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륜은 호순신의 지리서를 근거로 계룡산이 도읍에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고려 왕조의 산릉(山陵)의 길흉과 대조한 결과 호순신 지리서의 효험이 인정된다고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계룡산 천도가 철회되었다. 이에 태조는 하륜에게 서운관(書雲觀)의 비록문서(秘錄文書)를 모두 주어서 검토하게 하고 천도할 후보지를 고르게 하였다. 결국 계룡산 천도 시도는 시작과 중단 모두 풍수지리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다만 건국 이후 두 번의 천도 시도가 전부 태조의 일방적인 결정을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면, 계룡산 천도 중지 이후로는 비로소 천도에 대한 조정에서의 논의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하륜에게 비록문서를 검토하게 한 얼마 뒤인 1394년(태조 3) 2월 14일, 태조는 권중화·이무방(李茂芳)·정도전·성석린(成石璘)·민제(閔霽)·남은·정총(鄭摠)·권근(權近)·이직(李稷)·이근(李懃) 등 10인에게 명하여, 하륜과 함께 우리나라 역대 여러 현인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게 하였다. 천도지 선정을 위한 풍수지리나 도참설 검토를 하륜만의 일이 아닌 조정의 대신들이 참여하는 일로 만든 것이다.

 

곧바로 『비록촬요(秘錄撮要)』이라는 이름의 책을 완성하였고, 이직과 하륜으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다. 태조는 이들 대신과 하륜까지 11명으로 하여금 서운관 관원과 함께 완성된 책을 가지고 가서 무악 지역을 살펴보게 하였다. 대신들은 무악은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다고 반대하였고, 하륜은 풍수지리와 도참을 근거로 무악이 적합함을 강조하였다. 『비록촬요(秘錄撮要)』라는 매개체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신들과 하륜의 판단은 기준 자체가 달랐다. 결국 태조는 직접 가서 보고 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로 결정한 후 서운관원 유한우(劉旱雨)와 이양달(李陽達) 등이 무악이 도읍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불일사(佛日寺)와 선고개[鐥岾]를 추천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는 선고개와 불일사를 각각 답사하였으나 천도에 적합하지 않았고, 남은은 이들이 풍수지리를 앞세워 후보지 선정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꾸짖었다. 그리고 이런 혼동을 없애고자 풍수지리에 대한 학설상 차이와 비록의 옳고 그름을 교정할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두게 된다. 이 도감의 구체적인 활동은 파악이 어렵지만 독단적인 결정방식이 아닌 다자의 논의에 의해 결과를 내려고 했다는 취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마철과 농번기를 지나 1394년(태조 3) 8월 8일에 태조는 도평의사사와 대간·형조의 관원 각각 한 사람씩과 친군위를 데리고 무악의 천도지로 출발하였고 8월 11일에 무악에 이르러 지세를 살폈다. 윤신달(尹莘達)과 유한우 등 서운관원들은 모두 무악이 지리법 상으로 도읍에 적합하지 않으며 개성에 지금대로 도읍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태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고려 말에 서운관이 주도적으로 개성의 지덕이 모두 쇠하였다고 주장했던 것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 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악이 도읍 후보지로서 반대에 부딪히자, 답사는 무악만이 아니라 검토 가능한 후보지를 전부 둘러보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왕사(王師) 자초[무학대사](自超(無學大師))를 불러들였고, 대신들에게 도읍할 만한 후보지를 글로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석린은 부소(扶蘇)의 명당이 고려왕조만을 위한 것일 수 없으니 개성에 그대로 있자는 입장을 제시하였고 정총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하륜은 이전과 다름없이 지리와 도참의 측면에서 무악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고, 이직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정도전은 “국가가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서 풍수의 설에 의한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오히려 새 수도의 건설보다는 민생 안정이 더 시급하니 천도는 천천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재상들의 의견이 대체로 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이었고, 이미 살펴본 무악과 현 수도인 개성 이외의 다른 지역을 언급하지도 않았기에 태조를 불쾌하게 하였다.

 

태조는 한양 답사를 강행하여 13일에 옛 궁궐터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서 동행한 신하들 중 무악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하륜을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이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라고 하여 근본적으로 천도에 동의하지 않으나 굳이 천도를 해야 한다면 한양이 가장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16일에는 한양을 둘러볼 때 양원식(楊元植)이 제안한 적성 광실원(廣實院) 동쪽, 17일에 백악의 신경(新京), 18일에 도라산터를 경유하여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도 후보지를 추가적으로 둘러보았지만 한양은 커녕 무악만큼의 평가를 받은 곳도 없었다.

 

드디어 8월 24일에 도평의사사에서 건의를 하는 형식을 빌어 한양을 새 수도로 결정하였다. 곧바로 9월 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심덕부(沈德符)·김주·이염·이직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여 임무를 맡겼다. 9월 9일에는 이들과 권중화·정도전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11월 2일에는 태조가 직접 내려와 종묘와 사직의 터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12월 3일에 정도전에게 제문을 짓게 해서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고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다. 12월 4일에 최원(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고 권근을 궁궐 지을 터에 보내서 오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지내고, 태조가 직접 지켜보는 속에서 종묘의 터를 닦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9월 29일에 마침내 종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준공 직후인 윤9월 13일에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고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였고, 10월에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여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 전각의 이름은 강녕전(康寧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근정전(勤政殿)·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근정문(勤政門)·정문(正門)으로 정해졌다. 이 이름들은 ≪시경≫과 ≪서경≫ 등 유교 경전에서 인용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이념적 기준이 어떠한 가를 내외에 분명히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를 넘겨 1396년(태조 5) 1월부터 도성을 쌓는 일이 시작되어 2월까지 공사를 한 후, 8월에 다시 인부를 징발하여 9월까지 공사를 더 해서 성 쌓는 일을 마무리 하였다. 그 사이인 4월 19일에는 한성부의 5부 아래에 52개의 방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붙여서 수도의 행정구역과 체제를 정비했다. 도성의 완성과 함께 숙청문(肅淸門)·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의 4대문과 홍화문(弘化門)·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의 4소문도 만들어 졌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9. 복궁 건립(1395)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느껴보자.

경복궁의 명칭 :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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