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저서 : 심 영 제 조경 경육 경문 고 불 진
심 : 심문천답록
양 : 금남잡영
남 : 금남잡제
조경 : 조선 경국전(최초 법전 + 사찬)
경육 : 경제육전(최소 성문법)
경문 : 경제문감(조선전기 정치조직 초안)
고 : 고려국사(편년체 제상중심)
불 : 불씨잡전(숭유억불)
진 : 진법(독자적 전술 정리 = 요동정벌론)
1. 심문천답록
심문천답록은 1375년 문신 · 학자 정도전이 불교의 인과응보에 대한 유교적 비판과 변호의 내용을 문답식으로 서술한 종교서로 유교서이다. 1375년(우왕 1) 나주의 회진(會津)에 유배가 있을 때 지었다. 1394년(태조 3)권근(權近)이 상세한 주석과 서(序)를 달아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는데, 『삼봉집』에는 이 합본이 실려 있다.
마음은 이렇게 운을 뗀다.
“을묘년(1375) 늦겨울 14일, 하늘은 맑고 달은 밝으며, 모든 동물의 수선거림이 잦아든 저녁, 한 물건이 상청(上淸)에 올라 옥제(玉帝)의 뜰에서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상제의 명령으로 사람에게 가장 신령스런 물건이 되었는데, 이처럼 영묘한 물건이 눈과 귀의 감각적 욕구와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신체적 행동과 언제나 갈등을 겪는다. 원칙적으로 마음의 의지는 기(氣)의 신체적 감각적 활동을 통제하고 이끌어야 하지만, 마음은 약하고 기는 강해서 이 싸움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성경(誠敬)으로 갑옷을 삼고, 의용(義勇)으로 창을 삼아”
펼치는 이 전투에서 하늘의 명령을 지켜낸 자는 선한 자이고 빼앗긴 자는 악한 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보응(報應)에 있다.
“배반한 자는 오래 살고, 복종한 자는 요절하며, 따르는 자는 빈궁하고, 거역하는 자는 부귀를 누린다.”
하늘의 상제께서 하민(下民)을 주재하시는데 어떻게 이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처사를 내릴 수 있느냐. 이것이 질문의 요지이다. 이에 대해 하늘의 답은 유가적 세계관을 축으로 전개된다. 즉, 하늘은 인간의 마음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德)을 부여해 만물의 으뜸으로 삼았다. 그 덕으로 하여 일용간(日用間)에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 주었는데, 무슨 딴소리를 하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의 이(理)뿐만 아니라, 기(氣)도 함께 나누어 받았다. 마음이 하늘의 뜻을 거슬러 배반하면 그 여독은 하늘의 조화와 안정적 운행을 다친다. 그렇다면 마음인 네가 나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인 내가 너를 원망해야 할 일이라고 짐짓 되받아친다. 불교적 인식에서와는 달리 유가의 근원자인 하늘은 길흉화복에 대한 직접적인 보응의 주체가 아니라고 했다. 하늘은 따로 정한 때가 있으니 마음은 “다만 올바름을 지켜, 나의 정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맺고 있다.
2. 금남잡영, 금남잡제
『금남잡영(錦南雜詠)』과 『금남잡제(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3. 조선 경국전(최초 법전 + 사찬)
조선경국전은 1394년 판삼사사 정도전이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 정책을 규정하여 왕에게 지어 올린 법제서를 말한다. 정도전이 1394년(태조 3) 3월에 저술을 완료하였으며, 그해 5월에 태조에게 바쳤다. 상하 2권이다. 6전(六典)에 따라 조선왕조를 다스리는[經國]의 기준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다. 주나라 제도인 『주례(周禮)』의 6전체제를 모범으로 삼았으나,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하였다. 6전 앞에는 치국(治國)의 대략의 요지로서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정국본(定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를 서론으로 실었다.
서론에서는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라 인(仁)으로써 왕위를 지켜 나갈 것,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계승이라는 것, 왕위 계승은 장자(長者)나 현자(賢者)로 해야 한다는 것, 교서는 문신의 힘을 빌려 높은 수준으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였다.
서론 다음에는 본론으로 치전(治典: 吏典)·부전(賦典: 戶典)·예전(禮典)·정전(政典: 兵典)·헌전(憲典: 刑典)·공전(工典) 등 6전으로 되어 있다. 각 전은 총서에 이어 주요 소관업무를 소목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치전에서는 군신(君臣)의 직능과 관리 선발방법을 항목별로 제시하였다. 특히 재상(宰相)이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관리 선발이 고시제도에 의거해 능력 본위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부전에서는 국가의 수입과 지출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하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해 군현제도와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국가 수입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국민의 토지 소유를 균등하게 할 것, 병작반수(竝作半收)를 금할 것, 부세(賦稅)를 가벼이 할 것이 강조되고 있다. 국가의 지출 항목으로는 상공(上供: 왕실 경비)·국용(國用: 공공행사비)·군자(軍資)·의창(義倉)·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을 들었다. 되도록 지출을 억제해 국가의 예비경비를 많이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전에서는 조회·제사·교육·외교, 기타 관혼상제 등에 관한 의례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예는 질서로 정의되고, 그 질서는 상하 차등을 전제로 하되 상하가 서로 협력하는 조화관계가 중시되었다. 교육과 관련해 서민 이상 신분의 교육 참여 기회를 넓히고, 고시제도를 강화해 능력 본위로 인재를 뽑을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언로를 개방해 상하의 통정(通情)을 원만하게 할 것과 사대외교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관혼상제의 의례는 종전의 토속적이며 불교적인 의례를 버리고, 유교적 의례로 대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물질적 낭비의 폐단을 경계하고 있다. 정전은 병전에 해당한다. 병전을 정전이라 한 것은 병제가 사람을 바르게 하는 도덕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병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병농일치,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체제, 무기 개량과 훈련 개선, 둔전(屯田)의 중요성 등이 강조되었다. 병제를 운영하는 원칙으로서 백성과 군사를 아끼고 나라를 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전제하였다.
헌전에서는 형벌 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형벌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보조수단이지 정치의 근본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형벌과 법은 도덕정치를 구현하는 예방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공전에서는 국가의 각종 물품 제조나 토목공사 등을 운영, 집행하는 원칙을 다루고 있다. 사치를 금지하고 재정 낭비를 경계할 것, 백성을 지나치게 부려 피로하게 하지 말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법전에서 제시된 통치규범은 『주례』의 6전체제를 모델로 하되, 여기에 중국 역대의 제도를 절충하고, 그것을 다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한 것이다. 『주례』에서는 재상·과거·병농일치 제도의 이상을 빌려 왔다. 한나라·당나라의 제도에서는 중앙집권 및 부국강병과 관련되는 부병(府兵)·군현·부세·서리(胥吏)선발제도의 장점을 흡수하였다. 또한, 헌전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였다. 이 법전은 개인이 저술했지만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정리,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뒤에 『경제육전(經濟六典)』·『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을 거쳐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는 모체가 되었다.
4. 경제육전(최소 성문법)
‘경제원육전(經濟元六典)’ 또는 ‘원육전(元六典)’이라고도 한다. 1397년(태조 6) 12월 26일 공포, 시행되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부속기관으로서 법령의 정비와 법전 편찬업무를 관장하던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에서 영의정 조준(趙浚)의 책임 아래 편찬된 것이다. 1388년(우왕 14)부터 1397년(태조 6)까지의 법령과 장차 시행할 법령을 수집해 분류, 편집하였다.
오늘날 전해오지 않으므로 체재와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직접, 간접으로 인용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육전(六典)과 각 전마다 여러 강목(綱目)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국 초에 갑자기 편찬된 것이어서 법조문이 추상화·일반화되어 있지 않고 이미 공포된 원문의 형태 그대로 실었다. 따라서 조문의 문장에 이두와 방언이 섞여 있고, 시행 연월일이 붙어 있는 소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413년(태종 13) 2월에 수정한 뒤에는 원래의 것을 ‘이두원육전(吏讀元六典)’ 또는 ‘방언육전(方言六典)’이라고 불렀다.
1407년 8월 18일 속육전수찬소(續六典修撰所)를 설치해 하륜(河崙)과 이직(李稷)이 『경제육전』을 검토, 수정하여 1412년 4월『경제육전원집상절(經濟六典元集詳節)』 3권을 완성하였다. 그 뒤 다시 법조문 가운데 중복된 것은 빼고 번잡한 것은 간결하게 고쳤다. 또 문장 중의 이두를 빼고 방언은 문어(文語)로 바꾸어 『경제육전속전』이라 이름을 붙이고 1413년 2월 30일에 공포, 시행하였다. 이를 ‘원육전(元六典)’ 또는 ‘원전(元典)’이라고도 부른다.
『원육전』이 시행된 뒤로도 관리들은 알기 쉽고 익숙한 『경제육전』을 여전히 사용하였다. 이에 1431년(세종 13) 5월 강원도에 있는 『경제육전』의 인쇄 판자를 보수해 다시 인쇄하여 배포, 시행하고 『원육전』을 모두 회수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경제육전』과 『원육전』의 내용은 거의 같은 것이어서 실제로 큰 지장은 없었다.
이들 『경제육전』은 조선 창업군주의 법치주의 이념이 담긴 조종성헌(祖宗成憲: 왕실의 선조 대부터 지켜져 내려온 법)으로서 금석과 같은 절대적 가치가 부여되었으며, 뒤에 『경국대전』의 편찬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5. 경제문감(조선전기 정치조직 초안)
경제문감이라 함은 조선전기 문신 · 학자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중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하여 1395년에 편찬한 정치서를 말한다. ≪조선경국전≫이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따라 조선시대의 통치 조직과 통치 이념의 종합적인 체계를 제시한 것이라면, 그 중에서 특히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권근(權近)이 주해를 붙이고, 정총(鄭摠)이 서문을 썼으며, ≪삼봉집 三峰集≫에 수록되어 있다. 상권에서는 재상제도(宰相制度)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서술하고, 이어 재상의 직책과 진퇴의 자세를 기술하고 있다.
즉, 재상제도가 이상적으로 구현된 시대는 당우삼대(唐虞三代)로서 이 시대에는 현명한 재상이 실권을 쥐고 제왕을 보필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했다고 보고 있다.
한당시대(漢唐時代)에는 초기에 재상권이 강화되었다가 후기에 약화되어 군주의 전제권이 강화되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권에서는 대간·위병(衛兵)·감사·수령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있다. 대간은 대관(臺官 : 御史臺)과 간관(諫官)을 합칭한 것으로, 먼저 대관은 군주의 이목으로서 정치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관료로서, 그 지위와 직책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대관제도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서술하였다.
또한, 간관은 군주와 신하의 실정(失政)을 말이나 글로써 비판하는 직책이라는 중요성에 비추어, 그 지위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만 권한은 재상을 능가해서는 안 되며, 정권이 대간에게 있으면 나라가 어지럽다고 하여 대간 기능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위병에서는 문무가 두 어깨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우리 나라와 중국 역대의 위병제를 설명하고, 그 장단점을 절충하여 조선 초기 위병제가 성립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감사와 수령제도는 한 당시대를 모범으로 할 것이 제시되고 있다.
즉, 수령은 백성의 부모로서 백성과 국가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봉사해야 하는데, 수령의 임무로서 토지의 개간, 호구의 증식, 학교의 진흥, 예속(禮俗)의 형성, 옥송(獄訟)의 공평, 도둑의 근절, 차역(差役)의 균등, 부렴(賦斂 : 조세를 부과하여 거뒤들임.)의 절약을 들고 있다.
감사는 수령의 비행을 감독, 규찰하고 수령의 치적을 평가하여 승진과 파면을 결정하는 임무를 가지므로 그 품질을 높일 것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감사와 수령에 대한 통할권을 재상이 가져 재상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도전은 1397년 ≪경제문감별집≫을 써서 군주의 직책과 그 변천 과정을 논하고 있는데, 두 책을 연관지어 이해하여야 한다.
6. 고려국사(편년체 제상중심)
고려국사라 함은 조선전기 문신 · 학자 정도전 · 정총 등이 왕명을 받아 1395년에 편찬한 역사서를 말한다. 총 37권의 편년체 사서이나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이 건국된 뒤 3개월만인 1392년(태조 1) 10월 조준(趙浚)·정도전·정총·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이 왕명을 받아 1395년에 편찬하였다. 그러나 1414년(태종 14) 5월 고려 말기의 기사 가운데 태조에 대한 기록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개찬되었다.
현존하지 않으나 당시 정총이 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가 『동문선』에 남아 있고, 정도전이 이를 왕에게 바칠 때 쓴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과 태조가 정도전·정총을 포상하는 글이 『태조실록』에 실려 있어, 편찬체재 및 편찬에서 중시한 점, 편찬원칙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정도전과 정총이 쓴 사론이 『고려사절요』에 전하고 있어 그들의 사학사상을 알 수 있다.
「고려국사서」에 나타난 편찬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원종 이전의 사실로 참의(僭擬)한 것은 개서하였다.
② 조회나 제사는 상례적인 행사지만, 거르거나 왕이 직접 참여한 경우는 기록하였다.
③ 재상의 임명을 기록하였다.
④ 과거로 선비를 뽑은 것을 기록하였다.
⑤ 대간의 복합(伏閤)은 그 내용이 전하지 않아도 반드시 기록하였다.
⑥ 상국의 사신이 왕래한 사실은 반드시 기록하였다.
⑦ 재이와 홍수 및 가뭄을 기록하였다.
⑧ 왕의 사냥과 연회를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편찬원칙에서 찬자들의 유교적이며 사대적인 성향을 찾을 수 있고, 후대의 군주들에게 정치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책에 실렸던 사론은 『고려사절요』에 ‘사신왈(史臣曰)’로 인용되어 57편이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역대 왕에 대한 평가인 찬(贊)은 정도전의 『경제문감』에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많아 이 부분은 정도전이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57편의 사론 중에는 정도전과 함께 『고려국사』 편찬의 중심인물이었던 정총의 찬도 있었을 것이다.이들 사론에는 고려왕조를 비판하는 처지, 무신정권을 비판하는 문신중심적 처지, 불교를 배척하는 처지, 유교윤리와 사대외교를 옹호하는 처지를 취하고 있어, 조선 초기 성리학적 사대부들의 사상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군주의 어진 정치와 덕스러운 정치가 강조되었고, 재상과 대간의 직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왕도정치와 재상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 이 책의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고려실록』,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고려 말기 사관(史官)들이 써놓은 사초(史草) 등이었다. 그러나 『고려실록』은 충실하게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국사」는 내용이 소략하고 인물평가가 공평하지 못하며, 내용을 잘못 기술한 곳이 있고, 역사기술에 과거에 썼던 칭호를 개서한 점, 조선 건국을 사대부 중심으로 서술한 점 등이 문제가 되어, 1414년 개수되기 시작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되다가, 1451년(문종 1) 서술체재가 완전히 다른 『고려사』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책의 개편 이유를 조선 초기 왕권과 신권(臣權)의 갈등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하고도 있다.
7. 불씨잡전(숭유억불)
불씨잡변이라 함은 조선전기 문신 정도전이 저술한 불교 교설에 대한 평론서를 말한다. 정도전은 『불씨잡변』의 저술을 마친 뒤, 권근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난 같은 해 8월에 왕자의 난으로 죽음을 당하여 『불씨잡변』은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그 유고(遺稿)가 족손(族孫) 한혁(韓奕)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한혁이 같은 해 급제자인 양양 부사(襄陽府使) 윤기견에게 이를 보였는데, 그가 벽불(闢佛)의 명저임을 감탄해 간행하였다. 초간 때에는 단행본으로 나왔다가 1487년(성종 18)에 <삼봉집>이 증간되면서 『삼봉집』에 합편되었다.
『불씨잡변』은 『삼봉집』 제9권에 수록된 정도전의 저술서로, 서문은 권근과 신숙주가 지었고, 발문은 정도전의 증손 정문형이 지었다. 『불씨잡변』의 논설 조목은 도합 20편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불씨윤회지변(佛氏輪廻之辨),
② 불씨인과지변(佛氏因果之辨),
③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
④ 불씨작용시성지변(佛氏作用是性之辨),
⑤ 불씨심적지변(佛氏心跡之辨),
⑥ 불씨매어도기지변(佛氏昧於道器之辨),
⑦ 불씨훼기인륜지변(佛氏毁棄人倫之辨),
⑧ 불씨자비지변(佛氏慈悲之辨),
⑨ 불씨진가지변(佛氏眞假之辨),
⑩ 불씨지옥지변(佛氏地獄之辨).
⑪ 불씨화복지변(佛氏禍福之辨),
⑫ 불씨걸식지변(佛氏乞食之辨),
⑬ 불씨선교지변(佛氏禪敎之辨),
⑭ 유석동이지변(儒釋同異之辨),
⑮ 불씨입중국(佛氏入中國),
⑯ 사불득화(事佛得禍),
⑰ 사천도이담불과(舍天道而談佛果),
⑱ 사불지근연대우촉(事佛至謹年代尤促),
⑲ 벽이단지변(闢異端之辨)
의 19편(雜辨 15편, 前代事實 4편) 등이 수록되었고, 권말에 정도전 자신이 다시 부설을 첨가하였다. 이 가운데 잡변(15편)은 주로 불교의 인과설 · 윤회설 · 화복설 등 세속의 신앙과 결부된 불교의 교설을 비판한 것과 인간의 마음[心]과 본성(本性)에 대한 불교적 관점의 오류를 비판한 내용이다. 전대 사실(4편)은 불교 전래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적 경험을 들어 불교가 국가에 유해한 종교임을 논술한 것이다.
불교 교설에 대한 비판에서 『불씨잡변』은 성리학의 두 중심 개념인 이(理)와 기(氣)의 개념이 많이 응용되었다. 즉, 인간과 만물의 존재가 있게 되는 보편적 원리의 핵심엔 이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고 그렇게 해서 존재하게 된 인간과 만물이 각기 차별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근거의 중심에는 기의 개념이 자리잡음으로써 불교의 윤회설 · 인과설 등이 비판되고 있다.
이러한 이기관(理氣觀)에 입각한 존재에 관한 이론이 즉자적(卽自的)으로 도덕 규범에 관한 이론으로 전개되면서, 인간의 마음의 주재자로서의 이(理)가 상정되었다. 그리고 이 이가 곧 본성이라고 주장하여 인간의 마음과 본성[心性]에 관한 불교적 교설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요컨대 『불씨잡변』에 따르면, 불교의 교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릇되게 하고, 이 때문에 사람의 정의(情意)를 사리 사욕에 골몰하게 하여 의리와 공의(公義)를 망각, 사회적 질서 또는 인륜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8. 진법(독자적 전술 정리 = 요동정벌론)
진법이라 함은 조선전기 문신 정도전이 역대의 병서를 참작 · 보충하여 시의에 맞게 순차와 편목을 정하여 저술한 군서를 말한다. 1권 1책. 활자본.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군대의 훈련과 국방에 대비하도록 역대의 병서를 참작, 보충하여 시의에 맞도록 순차와 편목을 정하여 만든 책이다. 지금 원본이 전하지 않으므로 간행경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헌에 의하면 태조가 초기에 ≪치진절목 置陣節目≫이라는 좋은 책을 펴낸 사실이 있는데 동일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1791년(정조 15) 왕이 내각에 명하여 개간한 ≪삼봉집 三峯集≫ 권13에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는 머리에서부터 총술(總述)·정진(正陣)·결진십오지도(結陣什伍之圖)·오행출진가(五行出陣歌)·기휘가(旗麾歌)·각경가(角警歌)·기정총찬(奇正總讚)·금고기휘총찬(金鼓旗麾總讚)·논장수(論將帥)·무사졸오혜(撫士卒五惠)·용군팔수(用軍八數) 등 각 1편, 삼암(三闇)·삼명(三明) 등 16편이 있다. 그리고 끝에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팔진삼십육변도(八陣三十六變圖)·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논장수>에서는 현장·지장·용장으로 장수의 재목을 구분, 설명하였고, <무사졸오혜>에서는 사졸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엄격함보다 인간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서 잘 먹이고 잘 입힐 것, 노고를 덜어줄 것, 병과 상처를 치료해줄 것, 불구자를 어여삐 여길 것, 죽은 자를 애도할 것의 다섯 가지 방법을 열거하고 시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용군팔수>에서는 재물·공업·기계·시험·교육·훈련·정찰·정밀의 여덟 가지 방법을 열거하고 시행에 철저를 기할 것을 강조하였다. 끝에 첨가된 진형도(陣形圖)는 문종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명편한 ≪진법≫에 그대로 옮겨져서 전하여 오고 있으나, 그 중 <학자지남도>·<팔진삼십육변도>·<태을칠십이국도>·<오행진출기도> 등은 그 도본이나 결진방법이 일부 손실되어 전하지 않고 있다.
고대의 전법도 ≪주역≫에 근거를 두고 길흉과 승패를 판단하였기 때문에 진법 또한 음양오행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도 사실이지만, 그 시기에는 그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되었고, 또 실전에 있어서도 높은 승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도가 그러하였으나, 이 책에 기록된 진도는 더 세분되고 더 진보된 것으로 보이지만, 근거를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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