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 공 의 의 집 한 과 효 갑 사 금 토
공 : 공법(연분 9등법 + 전분 6등법)
의 : 의창제 실시
의 : 의정부 서사제
집 : 집현전 정비(상참 차대 윤대)
한 : 한글창제(1443/1446)
과 : 과학기술발달(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 칠정산)
효 : 효행록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태산요록 신주무원록
갑 : 갑인자
사 : 불교사원혁파(36개만 남김) + 내불당 설치
금 : 금부삼복법(노비사형금지 태배금지법 부민고소금지법 원악향리 처벌법)
토 : 토관제도 실시
1. 세종(1418~1450)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며, 1418년 6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이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졌다. 훈민정음 창제는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여주시에 있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 때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 · 효령(孝寧) · 충녕 등 세 대군이 있었고, 양녕대군에게도 두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 폐립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라고 해 택현(擇賢)의 명분을 주어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 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세종을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 · 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 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공법(전분 6등급 연분 9등급)
공법이란 조선 초기에 개혁된 새로운 전세제도를 말한다. 조선 초의 전세제도는 과전법(科田法)의 조세 규정이 그 줄기가 되었다. 즉 조는 공전(公田)·사전(私田)을 막론하고 10분의 1조인 30두이며, 관원이 풍년과 흉년에 따라 수확의 손실을 실제 답험해 조를 거두는 손실답험법(損實踏驗法)이었다. 당시의 양전제(量田制)는 삼등전품제(三等田品制)라고 하나 대부분 하등전(下等田)으로 양전제의 모순을 척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법은 손실답험의 폐단을 지양하며,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고, 객관적 기준에 의거하는 전세제도로의 개혁을 꾀한 것이다. 세종 초부터 공법 논의가 일어나고, 1430년(세종 12) 그 구체적 논의로서 전국적으로 위로는 고관부터 아래로는 농민까지 17만 인에게 문의(여론정치)한 바 있었다. 1436년에는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 1444년 공법 실시를 위한 최종안이 채택되었다.
공법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전적(田積)이 종래의 3등전에서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으로 마련되며, 양전척(量田尺)도 종래의 수등이척지척(隨等異尺指尺)에서 새로운 수등이척주척(隨等異尺周尺)으로 개정되었다. ② 세액(稅額)은 20분의 1세(稅)인 최고 20두 최하 4두로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의한 정액세(定額稅)로 개정되었으며, ③ 감면의 제는 토지대장에 정전(正田)과 속전(續田)으로 구분해 정전 안의 진황전(陳荒田)은 면세하지 않으며, 재상전(災傷田)은 감면하되 상접(相接)한 전지 10결(뒤에 5결로 됨.) 이상이라야 하였다. 공법은 새로운 기준에 의한 양전(量田)과 함께 시행되었다. 1444년 하삼도 6현(六縣)에서 먼저 시행되었고, 1450년 전라도, 1461년(세조 7) 경기도, 이듬해 충청도, 그 다음 해 경상도, 1471년(성종 2) 황해도, 1475년 강원도, 1486년 평안도, 1489년 영안도의 순서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공법 시행 이후 양전·연분등제(年分等第)·급재(給災)·진전수세(陳田收稅)는 관리의 자의적 집행에 맡겨져 운영되었다. 16세기에는 하하연분(下下年分)인 4두로 고착(영정법)되어 전세 수납은 전세 부담자의 사회적 세력의 강약에 따라 그 부담이 좌우되었다.
3. 의창제 실시
의창은 고려 및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구휼기관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의창은 986년(성종 5)에 국초부터 있던 흑창을 확대하여 설치한 것이고 지방 군현의 의창은 현종 때 마련되었다. 식량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진제와 가을에 갚을 것을 전제로 하는 진대가 있었다. 진대도 이식 없이 원곡만 돌려주도록 했다. 고려 중기에 국가재정난으로 유명무실해졌다가 고려 말에 부활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태종 후반기에 운영되기 시작했고 세종 때 크게 정비되었다. 중종 이후 흉년 때에 의창이 아닌 군자곡을 나눠주면서 의창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도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자영소농의 생활 안정책으로 구휼제도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1392년(태조 1) 9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의창운영규정을 마련하여 구휼제도 정비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건국 초기의 재정 운영의 어려움 속에서 의창곡의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의창곡을 확보하여 구휼기관으로서의 의창이 확립된 시기는 태종 후반기 이후였다. 특히 1423년(세종 5) 군자곡(軍資穀)을 한꺼번에 의창에 옮겨서 100만석 이상의 의창곡을 확보하면서 구휼기관으로서의 의창의 기틀이 확립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의창곡의 분급은 고려시기와 마찬가지로 무상으로 분급하는 진제와 이식 없이 빌려주는 진대[환상]의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는데, 후자가 훨씬 많았다. 진대는 농번기에 농민들의 식량과 곡식 종자로 빌려 주었는데, 이것 역시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와 같았다.
조선 초기 극심한 흉년에는 수백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국가의 구휼로 연명하였고, 반 이상의 농민이 국가에서 빌려준 곡식 종자로 농사를 지은 적도 있을 정도로 조선 초기 의창제도는 본래 기능을 하였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 의창제도 운영의 가장 큰 문제는 의창제도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분급한 의창곡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의창곡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의창곡 보충책이 제시되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1448년(세종 30) 군자곡을 대규모로 의창곡으로 보충하는 방법이 시행되었지만 이것 역시 세조 초기에 이르러서는 의창곡이 감소하여 보충한 효과가 사라졌다.
한편 세조 때에는 의창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평창제나 사창제(社倉制)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세조대 의창곡으로 사창의 원본(元本)을 마련하여 사창제를 시행하였다가 실패한 후 의창곡은 더욱 감소되었다. 이후 의창은 거의 독립성을 잃고 군자창에 속하는 진대기구로 축소되었고, 명칭도 별창(別倉)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 성종 이후 의창[별창] 운영의 특징은 이전 시기와 달리 의창곡을 수령 마음대로 분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분급한 곡식을 거두어 들일 때 잉여곡을 수납하여 지방재정에 충당하였다. 이후 의창[별창] 곡은 계속 감소되었지만 국가에서 더 이상 특별한 보충책을 실시하지 않으면서 중종 이후에는 의창[별창]이 사라진 군현들도 나타났게 되면서 의창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흉년에는 의창이 아니라 군자곡을 분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4. 의정부 서사제
조선 최고의 국정 기관으로는 의정부와 6조가 있었다. 6조에서 행정 실무와 관련된 현안을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는 이를 내부적으로 검토하여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국왕과 의정부대신, 6조 중 담당 판서 등이 모여 현안에 대한 논의를 거친 후 국왕의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를 의정부에서 다시 실무의 방향을 정리하여 6조에 내려 보내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업무 처리 방식이 바로 의정부 서사제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대신들이 현안을 미리 검토하여 국왕에게 직접 보고할 것을 선별하였기 때문에 국왕 개인에게 과도한 업무가 집중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재상의 권한이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왕권을 제약할 수 있는 제도적 약점도 있었다. 이에 따라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이나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와 같은 왕들은 현안을 6조에서 바로 국왕에게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6조 직계제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면서 조선의 기본적인 행정 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왕과 의정부, 6조의 상호 관계에 따라 의정부 서사제와 6조 직계제가 번갈아 사용되었다. 또한 6조 직계제 시행하에서도 의정부대신들은 국정 현안의 검토에 상시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변사의 역할이 강화되었고, 국정 현안에 대한 검토도 비변사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의정부가 수행하던 역할이 비변사로 이관되었고 의정부 서사제도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5. 집현전 정비(상참 차대 윤대)
집현전은 조선 전기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이다. 조선 건국 이후 유교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주의적 의례 및 제도의 확립과 대명 사대관계의 정착은 어려운 과제였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이 절실하여 세종이 1420년 궁궐 안에 집현전을 설치했다. 집현전은 학문연구기관으로서 도서의 수집·보관·이용 기능, 학문 활동의 기능,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 등을 가지고 있었다. 다수의 우수한 학자를 배출하여 설치 목적에 부응했다.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집현전이 혁파되었으나 성종 때 집현전의 후신으로 홍문관이 설치되었다.
집현전 제도는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서 한(漢)나라 이래 있어 왔다. 그러나 제도가 정비된 시기는 당나라 현종 때로서, 학사(學士)를 두고 시강(侍講 : 강의) · 장서(藏書 : 책의 보관) · 사서(寫書) · 수서(修書) · 지제고(知制誥 : 왕의 교서 등을 지음)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에도 오래 전에 이 제도가 도입되어 이미 삼국시대에 유사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집현전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이다. 연영전을 집현전으로 개칭하고 대학사(大學士) · 학사(學士)를 두어 시강 기관(侍講機關)으로 삼았지만, 충렬왕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정종 때 집현전이 설치되었으나, 얼마 뒤 보문각으로 개칭했고, 이것마저 곧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건국 이래로 표방해온 유교주의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주의적 의례 · 제도의 확립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는 과제였고, 대명사대관계(對明事大關係) 또한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므로 두 과제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풍(文風)의 진작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궁궐 안에 설치하게 되었다. 설치 당시의 직제는 영전사(領殿事, 정1품) · 대제학(大提學, 정2품) · 제학(提學, 종2품) 각 2인, 부제학(副提學, 정3품) · 직제학(直提學, 종3품) · 직전(直殿, 정4품) · 응교(應敎, 종4품) · 교리(校理, 정5품) · 부교리(副校理, 종5품) · 수찬(修撰, 정6품) · 부수찬(副修撰, 종6품) · 박사(博士, 정7품) · 저작(著作, 정8품) · 정자(正字, 정9품)를 두었다. 이 중 제학 이상은 겸직으로서 명예직이었고, 부제학 이하가 전임관, 즉 전임학사(專任學士)였다. 따라서, 집현전의 실무 책임자는 부제학으로서 행수(行首)라고도 하였다. 집현전의 전임관, 즉 학사의 수는 설치 당시에는 10인이었다. 그러다가 1422년에는 15인, 1426년에는 16인, 1435년초에는 22인, 그 해 7월에는 32인으로 점차 늘었으나, 1436년에 20인으로 축소되어 고정되었다. 자격은 문사(文士)여야 했고, 그 중에서도 재행(才行)이 있는 연소한 자를 적임자로 삼았다. 한편, 약간 명의 서리(書吏)를 배속해 행정 말단의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집현전은 설치 동기가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에 있었고, 세종도 그와 같은 원칙으로 육성했기에 학구적인 특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대에는 일단 집현전 학사에 임명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그 안에서 차례로 승진해 직제학 또는 부제학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에 육조나 승정원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의 연구직인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해 많은 도서를 구입하거나 인쇄해 집현전에 모아 보관하였다. 또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에서 벗어나 산사(山寺) 등지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연구하게 하는 사가독서의 특전도 주었다. 그 밖에 여러가지 특권을 주어 불편하거나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해 많이 배출되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 제도적으로는 도서의 수장(收藏: 수집과 보관)과 이용의 기능, 학문 활동의 기능,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 등을 가지고 있었다.
상참이란 고려·조선 시대 매일 아침(매일 회의) 국왕을 배알하던 약식(略式)의 조회(朝會)를 말한다. 윤대는 동반(東班) 6품 이상, 서반(西班) 4품 이상의 관원이 그 소속 아문(衙門)의 차례에 따라 매월 윤번(월례 회의)으로 들어가 임금을 면대하는 것. 윤대 인원은 각 아문을 합하여 5인을 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다. 차대는 부서별 회의로 주례 회의라 할 수 있다. 이 상참, 차대, 윤대를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집현전이었다.
6. 한글창제(1443/1446)
한글은 조선시대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1443년)하여 반포(세상에 널리 알림 1446.10.9.)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이다. 어려운 한자를 빌려 문자로 사용할 경우 민족의 정서는 물론이고 정확한 정보 기록과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 일반 민중은 말 이외에 의사를 기록하고 전달할 방법이 없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글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뜬 자음과, 천지인의 모양을 본뜬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적인 음운학 연구를 토대로 누구나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든 문자로,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문자이다.
세종은 일반 민중이 글자 없이 생활하면서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들 민중은 관청에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억울한 재판을 받아도 바로잡아 주기를 요구할 도리가 없었으며, 편지를 쓰려고 해도 그 어려운 한문을 배울 수가 없었다. 또한, 농사일에 관한 간단한 기록도 할 방법이 없었다. 세종은 백성들의 이러한 딱한 사정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던 성군으로, 주체성 강한 혁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문은 남의 글이므로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더라도 매우 어색하여 뜻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그 밖의 다른 나라 글자들은 도저히 빌려 쓸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당시의 상황은 새 글자를 만들어 낼 만한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고려 말기 몽고에게 당한 곤욕으로, 그리고 원나라와 명나라의 갈음 시기에 즈음하여, 나라 안에서는 자아 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주위의 민족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글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는 한자를 빌려 썼는데, 그것으로 우리말을 적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정인지의 표현을 빌리면, 한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었던 이두글[吏讀文]은 “막혀 잘 통하지 않고, 비단 품위가 없고 체계가 없어 상고할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말을 적는 데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제대로 전달하지를 못한다(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훈민정음 해례) ”고 하였다. 이처럼 일반 백성의 글자 생활은 극도로 빈곤 상태에 있었다.
셋째, 세종의 개인적인 역량은 새 글자를 만드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여 성군으로서의 도리를 깊이 체득하였고, 외국 세력에 대하여 우리를 지키려는 주체성이 강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민본 정신이 투철했던데다 혁신적인 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과감한 성격을 겸비하고 있었다.
넷째, 집현전에는 세종의 이러한 정책을 도울 만한 많은 학자들이 모여 있었다.
다섯째,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중국말의 통역을 길러야 했는데, 그들을 과학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중국말의 소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 운학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운학의 체계는 새 글자를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 세종은 ‘훈민정음’이라는 새 글자를 만들어 냈는데(세종실록과 훈민정음해례의 끝에 실린 정인지의 꼬리글에 따름), 이러한 독창적인 글자를 만든 일은 세계 역사에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다.
7. 과학기술발달(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 칠정산)
측우기는 세종 때 발명되어 사용한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우량(비의 양) 측정기구이다. 1440년(세종 22)을 전후하여 발명되어 1442년부터 20세기 초 일제 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시작될 때까지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우량 관측기구로 사용되었다. 현대의 우량계에 해당한다. 금속제 원통형 그릇에 빗물을 받아 표준화된 눈금의 자로 그 깊이를 측정했다. 같은 규격의 기구와 자를 서울의 천문관서와 지방의 관아에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우량을 관측하고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어 기록을 보유했다. 첨성대, 금속활자, 한글 등과 함께 한국사의 빛나는 과학적 성취로 평가된다.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이다. 명칭 자체도 스스로 쳐서[자격(自擊)]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루(漏)]라는 뜻이다. 자격루는 1433년(세종 15)에 장영실蔣英實) 등이 완성하였고, 그 이듬해인 1434년(세종 16) 7월 1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격루는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작동시켰기 때문에 보루각루(報漏閣漏)라고 불렸으며, 궁궐 내에 있어서 금루(禁漏)로도 칭해졌다. 그러나 장영실이 만든 것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자격루는 1536년(중종 31)에 세종 대의 것을 개량한 것이다. 파수호(播水壺, 물을 담아 다음 항아리로 흘려보내는 항아리) 3개, 수수호(受水壺, 물을 받아서 부표와 잣대를 띄우는 항아리) 2개의 물통만 남아있어 원래의 완벽한 모습은 아니다. 수수호에는 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중종 대 제작에 참여한 인물의 이름 등이 새겨진 명문이 있다. 파수호에는 ‘가정병신 6월 일 조(嘉靖丙申六月 日造)’라는 명문을 통해 1536년의 제작 연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에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는 잣대와 부전(浮箭, 浮子, 수수호 안에 띄우는 살대)이 소장되어 있다. 중종 대 만들어진 자격루는 창경궁 보루각에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으로 옮겨 전시되었다. 2018년에는 보존처리 작업에 들어갔으며, 2020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앙부일구는 1434년에 제작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세종대왕이 이순지에게 제작을 명하여 백성들이 다니는 대로변에 설치한 대중시계이다. 해 그림자를 만드는 영침, 해 그림자를 받아 시각과 절기를 읽는 반구형의 수영면이 주요 구성품이다. 수영면이 반구형으로 오목한데, 그 모양이 ‘하늘을 우러르는[仰] 가마솥[釜] 같다’고 해서 ‘앙부’라고 불렀다. 천구상의 태양 운행을 완벽하게 재현한 기구로, 해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기선과 시각선의 눈금을 읽으면 별도 계산 없이 시각과 절기를 지평환에서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간편한 기구이다.
《칠정산내편》은 1442년(세종24) 이순지와 김담이 왕명으로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국 역법서로 《세종장헌대왕실록》 제156권~제158권에 실려 있다. 칠정(七政)이란 일월오성(日月五星)을 말하며 여기에서 오성은 즉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다섯 행성으로 《칠정산내편》은 이들 천체의 운행을 추산하는 법을 다루었다. 《칠정산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과 명나라의 《대통력법통궤》를 바탕으로 편찬되었으나, 오직 조선만이 중국에서 반사되는 역서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책력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일출입 시각에 맞추어 천문현상을 계산하게 되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시간 측정의 기준은 천체 운행의 규칙성에 담겨 있다. 천상(天象)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자연의 순환과 반복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수립하게 되었고, 마침내 역법(曆法)과 계시(計時)를 위한 학문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스스로를 천부(天賦)의 권력자로 여겼던 동아시아의 제왕들에게 정사(政事)는 곧 하늘을 받드는 일이었고, 따라서 제왕으로서 하늘을 살펴 백성에게 때를 알려 주는 관상수시(觀象授時)의 책무는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서 유래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다. 조선은 비록 중국과의 관계에서 표면적으로는 조공(朝貢)의 예를 갖추었으므로 천자(天子)의 나라는 아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유교(儒敎)의 왕도(王道)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이를 실현할 자주적인 체제를 갖추는 데 노력을 다한 나라였다. 특히 세종(世宗)은 국체(國體)의 완정(完整)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중국 못지않은 관상수시의 제도를 갖추었으니, 간의대(簡儀臺)의 관천 의기(觀天儀器)와 이 땅의 첫 본국력(本國曆)인 《칠정산내편》이 곧 그것이다.
《칠정산내편》은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두에 취합된 역원(曆元)과 제율(諸率) 등의 기본 상수(常數)에 이은 제1장 역일(曆日), 제2장 태양(太陽), 제3장 태음(太陰), 제4장 중성(中星), 제5장 교식(交食), 제6장 오성(五星), 제7장 사여(四餘), 그리고 부록으로 한양(漢陽) 일출입 시각 입성(立成)으로 구분되며, 교식은 다시 일식(日食)과 월식(月食)으로 나뉜다.
제1장 〈역일〉에서는 연중 24기(氣)와 매월 삭망의 일시분초, 오행(五行)의 용사일(用事日) 등 역서(曆書)의 필수 항목 추보법과, 해와 달의 중심차(中心差)인 영축차(盈縮差)와 지질차(遲疾差) 등과 같이 제2장 이후의 추보에 필요한 값을 산정하는 법을 다룬다.
제2장 〈태양〉에서는 28수(宿)의 적도수도(赤道宿度)와 황도수도(黃道宿度), 적도도(赤道度)와 황도도(黃道度) 사이의 변환, 매일 행도(行度) 등을 거쳐 태양의 위치와 12차(次) 입차시각을 산정하는 법을 다룬다.
제3장 〈태음〉에서는 달의 운행궤도인 백도(白道)의 황도정교(黃道正交)와 적도정교, 적도적도(赤道積度)의 백도정적(白道定積)으로의 변환, 달의 매일 행정도(行定度) 등을 거쳐 달의 경위도와 교궁(交宮)시각을 구하는 법을 다룬다.
제4장 〈중성〉에서는 혼명(昏明)과 야각(夜刻)에 남중하는 별자리, 곧 중성(中星)의 수도(宿度)를 구하는 법을 다룬다.
제5장 〈교식〉에서는 일식과 월식의 식심(食甚), 휴복(虧復) 시각과 식분(食分), 교식의 방향 등을 예측하는 데 필요한 모든 과정을 소개한다.
제6장 〈오성〉에서는 목성, 토성, 화성, 금성, 수성의 운행 위치와 교궁시각 산정을 위한 제반 과정을 다룬다.
제7장 〈사여성〉에서는 가상의 천체인 자기(紫氣), 월패(月孛), 나후(羅睺), 계도(計都)의 운행 위치와 교궁시각을 구하는 법을 다룬다.
8. 효행록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태산요록 신주무원록
효행록은 1책. 목판본. 고려 말에 초판이 나왔으며 1428년(세종 10)설순(偰循) 등이 개정하여 중간하였다.
초간본에는 이제현(李齊賢)의 서(序)가 있고, 후에 권근(權近)이 주해(註解)와 발문(跋文)을 달았다. 권보가 노경에 들게 되자, 아들 준이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24효도(二十四孝圖)를 그리게 한 뒤 그것을 이제현에게 주면서 찬(贊)을 지어 달라 부탁하여 아버지를 위안하였다. 이에 권보도 38효행을 골라 이제현으로부터 찬을 지어받았는데, 전 24찬은 12구(句), 후 38찬은 8구로 되어 있다. 이 책은 효행설화에 대한 최초의 집대성으로, 아이들에게 노래로 불러 외우도록 하여 효도를 고취하는 자료로 삼았다.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 등에 있다.
『농사직설』은 조선 세종대에 우리나라의 풍토에 알맞은 농법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세종은 정초(鄭招, ?∼1434년), 변효문(卞孝文, 1396년∼?) 등에게 명하여 기존 농법 중에서 우리 땅에 적절하고 중요한 방법만을 모아 책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곡식 종자의 선택과 저장, 논밭갈이, 벼·기장·조·수수·콩·팥·보리·밀 등 곡식의 재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농사직설』은 조선 전기의 농업경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에서 백성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편찬한 서적이다. 국가에서 백성을 대상으로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강령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의 사례를 모아 놓은 서적이다.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 각 110인씩 총 330명의 행실을 기록하였고, 관련된 일화를 목판화로 그려 넣었다.
『향약집성방』은 1433년(세종 15)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兪孝通), 전의정(典醫正) 노중례(盧重禮), 전의부정(典醫副正) 박윤덕(朴允德) 등이 1년 넘게 작업하여 편찬한 의서이다. 1399년(정종 1) 간행된 『향약제생집성방』을 기본으로 하면서 향약의 방문들을 추가 수집하고, 분류∙첨가하여 침구법(針灸法,), 향약본초(鄕藥本草), 포제법(炮製法) 등 85권 30책으로 구성하였다. 같은 해 8월 전라도·강원도에서 나누어 간행하였다. 그 뒤 1478년(성종 9)에 복간하고, 1633년(인조 11)에 훈련도감 소활자로 다시 인쇄했다. 『향약집성방』은 국산 약재와 중국산 약재의 품종, 명칭, 약성 등을 비교 연구하였고, 같은 품종인데 지역에 따라 약성이나 이름이 다른 경우,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다른 품종인 경우 등을 바로잡았다. 또한 향약의 분포 및 생산 실태를 기록하여 약재 수급에 편리하도록 했다.
1445년(세종 27)에 집현전 학자들은 3년에 걸친 편찬 작업 끝에 365권의 『의방유취(醫方類聚)』를 완성하였다. 이는 당시까지 전해 오던 여러 의서를 모아 의학 이론을 정리, 수집하여 만든 문헌이다. 간행 단계에서 266권으로 축소되었지만 약 2백 종에 가까운 의서(醫書)와 의학 관련 서적이 인용되었고 중국의 당, 송, 원, 명대 초기까지의 의서와 우리나라 고려, 조선 초기까지의 의학의 성과를 담고 있다. 소략하지만 인도(천축국)의 수련법까지 소개되어 있다. 현재 국내에 전해지는 판본은 한독의약박물관(충청북도 음성)에 유일하게 1책(권201)만 있다. 한편, 일본 궁내청(宮內廳) 서릉부(書陵部)에는 1477(성종 8)년에 간행된 초간본 30질 중 한 질이 남아있다. 이 판본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총 266권 264책 중에서 일부가 산실되어 252권이 남아있다.
태산요록은 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권 1책. 활자본. 저자가 1434년(세종 16) 3월에 판전의감사로 있을 때 편술한 후 주자(鑄字)로 간행하였다.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있는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권은 주로 태산교양(胎産敎養)의 법을 논하고, 하권은 주로 유아의 보호법을 기술하였는데,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상권에는 태산문(胎産門)에 관한 것으로 태교론(胎敎論)·양태근신법(養胎謹愼法)·태살피기산전장호(胎殺避忌産前將護)·십이월산도(十二月産圖)·임신난산유오(姙娠難産有五)·산보제방(産寶諸方)·장호산부(將護産婦)·산후피기(産後避忌) 등 20항목을 열거하였다. 하권에는 영아장호문(嬰兒將護門)에 관한 것으로, 거아법(擧兒法)·단제법(斷臍法)·초생세아법(初生洗兒法)·장포의법(藏胞衣法)·택유모법(擇乳母法)·유아법(乳兒法)·유모기신법(乳母忌愼法)·소아시포법(小兒始哺法)·통변법(通便法)·소아식기(小兒食忌)·소아행지(小兒行遲) 등의 27항목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인용서목 중에는 당나라의 『천금방(千金方)』, 송나라의 『성혜방(聖惠方)』·『성제총록(聖濟總錄)』·『직지방(直指方)』·『비급대전(備急大全)』·『득효방(得效方)』 등을 비롯하여, 산부인과의 전문서로서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태산구급방(胎産救急方)』·『왕악산서(王岳産書)』·『산서(産書)』·『산서집록(産書集錄)』을 들고, 소아과의 전문서로서 『활유구의(活幼口議)』·『전씨소아방(錢氏小兒方)』 등을 들었다.
이상과 같이 당·송의 고전방서와 함께 태산 및 소아의 전문서들을 참작하여 산부의 임신, 분만, 산전·산후에 필요한 사항과 초생아 및 유아들의 양호와 치료에 관한 필요한 사항들을 정연하고 알기 쉽게 서술하였다. 특히 이 책은 조선 중기까지 산서로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태산에 있어 실용에 편리하도록 엮어진 요목이다.
신주무원록은 1442년(세종 24)에는 모든 검시의 법을 『무원록』의 규정에 따르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인명치사(人命致死)에 관한 사건이 있을 때에는 그 사체가 있는 곳에서 검증을 행한 뒤에 검시장식에 따라 사체검안서(死體檢案書)를 만들어 재판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법의학적 지식을 형사재판에 이용한 것은 우리 나라의 형사재판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이다. 그런데 이 책은 1308년에 편술한 왕여의 원간본에 의한 것이 아니고, 1384년에 임천(臨川) 양각산수(羊角山叟)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이 책을 재판에 응용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삼검제도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① 초검(初檢):살인사건이 발생한 때에는 사체가 있는 곳의 지방관이 먼저 제1차의 시체검험, 즉 초검을 실시한 뒤에 검안서를 『무원록』 시장식의 규례에 따라 만들어 상부관에 제출한다. ② 복검(覆檢):초검관은 인근 지방관에게 제2차의 검험, 즉 복검을 위촉하는데, 초검관이 그 검험의 사정을 복검관에게 누설하지 못하도록 별칙이 규정되어 있으므로, 복검관은 독자적 검안서를 만들어 상부관에 제출한다. 상부관은 제출된 초검 · 복검관의 의견이 일치될 때에는 이것으로 그 사건을 결정짓도록 하나, 만일에 두 검관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거나 또는 그 검험에 의혹이 있을 때에는 다시 3검(三檢)을 명하게 된다. ③ 3검 · 4검:3검은 중앙에서는 형조에서 낭관(郎官)을 보내고,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차원(差員)을 정하여 다시 검험을 실시한 뒤에 초검 · 복검관들의 검안서를 참작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리게 되나, 사건에 따라서는 4검 내지 5사(五査) · 6사를 거치는 수가 있으며, 또는 국왕에게 직소(直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재판의 절차에 있어 3검 · 4검을 명할 때에는 초복 · 복검관의 검안서 및 기타의 서류들을 첨부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권은 시장식(屍帳式) · 시장례(屍帳例) 등 17항목, 하권은 검복총설(檢覆總說) · 험법(驗法) 등 43항목으로 되어 있다. 각권에는 주로 시체검안에 관한 법규와 원나라의 검험 판례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하권에는 시상변별(屍傷辨別)주13에 관한 사인들이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이 책은 그 뒤 중국 및 일본에 유포되기도 하였다.
9. 갑인자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식자판 조립법)
10. 불교사원혁파(36개만 남김) + 내불당 설치
불교사원 혁파는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수만개의 절을 36개로 통폐합하였다. 또한 내불당은 왕실의 불교신앙을 위하여 창건하였다. 조선의 태조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4매와 두골(頭骨)·패엽경(貝葉經)·가사(袈裟) 등을 흥천사(興天寺) 석탑에 안치하였는데, 1418년(세종즉위년) 세종이 내불당을 창건하고 이들을 옮겨 봉안하였다. 1419년에는 최흥효(崔興孝) 등에게 명하여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이곳에 옮기고 대비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단종 때 집현전과 사헌부의 학자들이 상소하여 내불당을 철폐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조 때에는 내불당을 크게 일으키고 법회를 열었다. 1456년(세조 2)에 법석(法席)을 열었고, 1459년 사월초파일에는 간경회(看經會)를 베풀었으며, 1464년에는 계양대군(桂陽大君)의 쾌유를 비는 특별법회를 열었다. 1470년(성종 1)에는 내불당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는 유생들의 강력한 건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83년에는 예조에 명하여 역대로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이 절에 대하여 특별경계와 순시를 강화하도록 하였으며, 1507년(중종 2)에도 이 절의 보호를 명하였다. 내불당은 억불숭유정책으로 일관한 조선시대 불교의 특이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사찰로서, 왕 자신의 믿음이 불교가 아닌 경우에는 선왕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으로 보호되어 조선 중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선조 이후에는 내불당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1. 금부삼복법(노비사형금지 태배금지법 부민고소금지법 원악향리 처벌법)
금부삼복법이란 중범죄에 한하여 삼심제를 진행해야 한다는 법을 말한다. 노비사형금지는 노비를 사사로이 처벌하지 말라는 금지법이고 태배금지법은 무고한 태형이나 고문은 삼가라는 법이다. 부민고소금지법은 지방민이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버이와 같은 지방관을 고발하면 안된다는 법으로 고발시 목숨을 걸어라는 법이다. 원악향리 처벌법은 부정한 향리를 처벌하는 법을 가리킨다.
12. 토관제도
토관(土官)은 고려말기에 원나라에서 되찾은 영토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토착 세력에게 내린 특수 관직이다. 조선 초창기에는 평양, 화령 즉 영흥, 제주에만 있었으며, 동·서반(東·西班)의 구분 등 내부 정리에 힘썼다.
세종 때에 이르러 영토 확장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토관은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조직 체계도 정비되어 과거부터 전해오던 제도를 탈피하고 조선에 맞게 확립되었다. 토관 설치의 목적도 새 개척지에 주민을 좀 더 빨리 거주시키는 것 등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토관은 여러 측면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 『경국대전』 편찬과 함께 운영 체계도 완비되면서 중앙 관직과의 관계도 정리되었다. 『속대전』 단계에서는 서반은 보이지 않고 동반만 보이고 있다. 토관은 고려 말, 원나라로부터 수복한 지방을 통치하기 위하여 처음 설치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평양과 영흥, 그리고 제주도에 설치하였으며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 본격적인 북방 개척이 실시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 여러 군현에 설치되었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대에는 과거 수도였던 경주와 전주에도 잠깐 설치된 적이 있으나 곧 폐지되었고, 북방에 설치된 토관들도 조선 후기에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토관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유력자들을 임명하였는데, 문반과 무반의 구분이 있었다. 문반의 경우는 해당 지역의 관찰사, 무반은 병마절도사의 추천을 통해 임용되었다. 이들은 국가의 정식 관원에 비해서는 다소 낮은 대우를 받았는데, 토관 출신으로 중앙 관직을 하사받을 경우는 품계를 1등급 낮추도록 하였다. 또 토관직은 정5품이 최상위직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녹봉을 받지 않았고, 대신 3~10결 규모의 토지 수조권만 하사받았다. 토관의 업무는 현재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무반의 경우는 군사적인 방어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며, 문반의 경우는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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