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 사 유 홍 도 관 경 선 사 재
사 : 사림등용(훈구파 견제)
유 : 유향소 설치
홍 : 홍문관(옥당, 집현전 기능 대행)
도 : 도첩체 폐지(1492)
관 : 관수관급제(1470)
경 : 경국대전 완성
선 : 동문선
사 : 사창제 폐지
재 : 재가 금지법
1. 성종( 1469~1494)
성종은 조선전기 제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69~1494년이며, 1469년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가 대신들과 의논해 즉위시켰다. 『경국대전』 완성·반포, 『대전속록』 완성 등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고, 토지의 세습·겸병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했다.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하여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관학 진흥과 편찬사업을 통한 문운 진흥도 중요한 업적이다. 능호는 선릉으로 광주에 있었으나 옮겨 현재는 서울 강남구에 있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다. 천품(天禀)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에도 능해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성종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성종이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1469년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가 한명회 · 신숙주 등 대신들과 의논해 형 월산군의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성종을 왕위에 올렸다. 즉위할 무렵 나이는 13세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그 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고, 1476년(성종 7)에 비로소 친정을 하였다. 즉위하던 해 명나라 헌제(憲帝)의 고명을 받았고, 세조 찬위의 전철을 우려하여 이시애의 난 평정 이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성이 내외에 자자한 구성군 이준을 유배시켰다. 1474년에 덕종을 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하였다.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의 딸 숙의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계비가 된 윤씨는 원자를 낳고 왕의 총애가 두터워지자 여러 다른 빈을 투기할 뿐 아니라 왕에게까지 불손하였다. 이에 1479년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1482년에는 사사(賜死)했는데, 이는 뒤에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 교지 · 조례 ·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 어세겸 등에 명해 (대전속록)을 완성,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 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여주의 영릉을 참배, 왕래하는 연로(沿路) 군현의 조세를 반감해주었다. 수령과 변장의 임명 때에는 친히 인견(引見)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을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국초 이래의 규정을 완화하였다.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조신(朝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했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 길재)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근왕세력(勤王勢力)으로 김종직 일파의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에서 사불양재(祀佛禳災)해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보내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연을 통해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를 충실히 하여 학문 연구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다. 이 밖에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두모포(龍山豆毛浦)에 독서당을 설치,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제술(讀書製述)에 전념하게 하였다.
편찬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 · 동문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게 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 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다.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2만 4000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묘호(廟號)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의 난숙에 따라 퇴폐의 풍이 싹트고 왕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뇌물도 성행하였다. 더욱이 규방(閨房)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 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일으키게까지 하였다.
2. 사림등용(훈구파 견제)
사림은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3. 유향소 설치
유향소는 조선 초기에 악질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들이 조직한 자치기구이다. 고려 말 향리 신분으로 군공을 세워 관직을 얻거나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앙관계에 진출했다가 다시 향촌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품관이라 하였다. 이들이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들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이 유향소이다. 품관들이 수령을 능멸하는 등 폐단이 있자 중앙집권책의 일환인 수령권이 강조되면서 태종 때에 혁파되었다가 세종 때 다시 부활하였다. 이후 부침을 거듭하다가 향청으로 정립되어 향촌질서 확립과 향풍진작 기능을 수행했다.
수령의 불법행위, 향리들의 폐단 등은 향촌사회의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종전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수령에 대한 고소 금지와 「유향소작폐금방절목(留鄕所作弊禁防節目)」을 반포하였다. 1428년(세종 10) 다시 유향소를 부활시켰다. 이 때 반포한 「유향소부설마련절목(留鄕所復設磨鍊節目)」에는 부(府) 이상 5인, 군(郡) 4인, 현(縣) 3인의 유향품관을 각 경재소가 선정해 그들이 유향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향소는 활리(猾吏) · 간민(姦民)을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일만 전담하도록 하였다. 1435년에는 경재소제도를 정비해 현직 관원이 아버지의 내외향(內外鄕), 어머니의 내외향, 처의 내외향, 할아버지의 외향, 증조부의 외향 등 8향의 유향소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향소에 대한 이런 제도적 견제로 말미암아 유향품관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 관권과 타협하고 순종해 갔다. 이러한 경향은 또한 양자의 상호보호적 불법행위를 초래해 향촌 질서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조 말 경 유향소는 재차 혁파를 당할 운명에 놓인다. 이전처럼 수령을 능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수령과 한편이 되어 백성을 괴롭히기 때문이었다. 유향소가 다시 폐지된 후 간리(姦吏)들의 농간이 심해 향풍이 어지러워지자 1482년(성종 13) 2월에 이조에서 유향소 설치를 아뢰자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유향소는 활리 · 간민을 규제하고 중앙집권체제의 보조적 기구로서의 소임보다는 향사례 · 향음주례를 실시하는 기구로서의 기능이 중시되었다. 또한 향촌 내의 불효 · 부제(不悌: 형제 간에 자애와 공손이 없음) · 불목(不睦: 일가 사이에 화목하지 않음) · 불인(不婣: 서로 반목해 혼인하지 않음) · 불임휼(不任恤: 재난을 구제하는 임무를 수행하지 않음)한 자 등 향촌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을 통제해 향촌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림파(士林派)는 중앙 정계로 진출하면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유향소를 경재소와 밀접하게 관련시켜 놓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림파 지지세력이 강한 영남의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훈구파 재상들이 대부분의 유향소를 경재소를 통해 장악하였다. 이에 반발해 사림파의 생원 진사들은 따로 사마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향소에 적임자가 없어 훼방하고 싸워 민폐가 크고 풍속이 불미스러우니 혁파하자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그 성격이 서서히 변질되어 갔고 명칭도 향청으로 불렸다. 유향품관은 비록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나 좌수 별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향안에 등재된 인물만으로 국한하는 등 폐쇄적인 성격을 보였다. 그러나 초기의 향촌 질서 확립 및 향풍 진작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향소품관은 처음에는 부 이상 5인, 군 4인, 현 3인이었다가 성종 때는 부 4인, 군 3인, 현 2인이었다. 후기에 와서 현은 1인을 늘려 3인이었으며, 좌수 1인, 별감 2인의 3인을 삼향소(三鄕所)라고 하였다. 유향소 · 삼향소는 모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청사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청사는 처음에는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아(貳衙)라 불렀는데, 19세기는 대개 관아 구내에 위치하였다. 이는 초기에 수령을 규제할 힘을 지녔던 유향소가 후기에는 수령보좌역의 기능밖에 하지 못한 것을 보여 준다. 무오사화 때 희생된 권오복의 기록에 의하면, 예천의 향사당은 서쪽 경치 좋은 곳에 있었으며, 좌우서(左右序) 포주(庖廚)주1를 합쳐 20칸이었다. 부로(父老)들이 출자하고 군수도 협력해 지은 기와집이라고 하였다.
4. 홍문관(옥당, 집현전 기능 대행)
홍문관은 국왕의 자문 역할과 문서 작성, 학술 연구 등을 맡은 기구였다.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와 함께 언론 삼사(三司)로 불리며 왕의 잘못을 간쟁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기구는 고대 중국부터 존재했는데, 조선 세종대에 들어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국왕 자문과 도서 관리 등 학술 기능을 부여하였다. 성현 세조대 폐지된 집현전은 성종대에 홍문관의 이름으로 부활하며 국왕 자문과 학술 연구를 도맡게 되었다. 홍문관 관원은 전원이 문과 급제자이자,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당대의 뛰어난 인재들만을 선발하였고, 조선시대 내내 핵심 권력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홍문관은 학술 연구 기구이자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는 기구였다. 국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기구는 신라시대의 통문박사(通文博士)나 고구려와 백제의 박사(博士) 등을 통해, 고대부터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홍문관과 유사한 기구의 연원은 중국 당으로부터 확인된다. 당에서는 홍문관을 설치하고 학사(學士)와 직학사(直學士) 제도를 두어 고금(古今)의 제도와 의례에 관해 논의하게 하였다. 고려도 당송(唐宋)의 제도를 도입하여, 홍문관을 설치하고 학사와 직학사를 운영하였다.
고려의 홍문관은 치폐를 거듭하여, 조선에 직접 계승되지는 않았다. 조선은 관각(館閣) 제도가 존재하여 수문전(修文殿), 보문각(寶文閣), 집현전(集賢殿) 등의 제도가 있었는데 세종대에 들어와 집현전에서 국왕의 자문에 응하고 궁중 도서를 관리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집현전에서는 여러 학사를 양성하고, 고제(古制)를 연구하며 세종대의 학술 수준을 높이 끌어올렸다. 하지만 성현 세조가 집권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의 복위 운동에 가담하며 1456년(성현 세조 2) 관서가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도서 관리 기능만 잔존한 채로 예문관에서 그 기능을 전수받았다. 이때 집현전이 수행하던 경연 운영과 국왕 자문의 역할은 사라졌다.
홍문관은 1463년(성현 세조 9)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이때는 단지 도서를 보관하는 역할만 수행했다. 성현 세조는 경연을 통한 학술정치보다 측근을 통한 정치를 하였기에 홍문관의 기능은 한정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현 세조 사후에 홍문관의 역할에 변화가 나타났다. 성종대에 이르러 본래 집현전에서 수행했던 다양한 학술 업무와 국왕 자문의 기능을 맡을 기구의 필요성으로, 1478년(성종 9) 홍문관의 역할이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홍문관은 관서의 위상을 높여가기 시작했고, 홍문관 관원들은 관서의 위상에 기대어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수행하였다. 결국 홍문관은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언론의 역할까지도 담당하며 언론 삼사(三司)의 한 축으로 성장하였고, 국왕 자문과 문한 기능, 경연, 사관(史官) 등 각종 중요 역할을 부여받으며 국가의 핵심 기구로 변모해 갔다. 연산군대에 잠시 홍문관이 폐지되고 진독청(進讀廳)이 설치되었지만, 중종반정으로 성종의 제도가 부활하며 홍문관은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1777년(정조 1)에는 규장각(奎章閣)이 건립되며 홍문관의 도서 일부가 규장각으로 이전되었으나, 홍문관의 위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경연청(經筵廳)으로 변질되었다가 이듬해 관서가 복구되었고, 결국 1907년(융희 1)에야 규장각에 병합되며 폐지되는 수순을 밟았다.
5. 도첩체 폐지(1492)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해 왔다. 이에 따라 개인의 자유로운 출가를 금지하였다. 다만 꼭 승려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일정한 금액을 납부하게 한 후에 도첩을 발행해 주어 출가를 공인해 주었다. 이러한 도첩제는 1392년(태조 1)부터 곧바로 실시되었는데, 도첩의 액수는 양반의 경우 포(布) 100필, 그 외의 양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이었다.
이후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출가자는 부모가 그 사유를 반드시 관청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도첩을 발급하도록 제도를 강화하였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역시 비용 납부를 준수하게끔 하였고 이미 승려가 된 사람에 대해서도 정책적으로 환속을 유도하였으나, 큰 실효성은 없었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대에는 포를 30필로 감하는 대신 선종이나 교종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도첩을 발행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에는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였으나 민간에서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출가를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이후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대에는 승려에게 호패(號牌)를 채우는 방법이 도입되었다가 명종(明宗, 재위 1545~1567) 대에는 다시금 도첩제가 시행되는 등 시행과 폐지를 거듭하였다.
도첩제의 시행 배경은 비단 불교 억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승려가 되면 군역을 지지 않았고 각종 세금 납부에서도 제외되기 때문에 승려의 증가는 군인 수의 감소와 재정 수지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도첩제의 시행으로 출가를 막으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출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6. 관수관급제(1470)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비롯한 조선 건국 세력은 고려 말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부족한 국가 재정 및 관원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여 관품(官品)에 따라 관료에게 토지 수조권을 분급하였다. 수조권 분급이란 관직 복무에 대한 대가로 경기도의 토지에 한하여 일정 면적의 토지에 대한 국가의 조세 징수권을 관료 개인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다. 이후 과전의 세습이 심화되고 새로 관리가 되는 사람에게 줄 과전이 부족해지자 1466년(세조 12) 직전법(職田法)이 도입되었다. 직전법은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도록 하고,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수조지를 상속하던 규정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토지 수조권 분급의 원칙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토지 수조권을 국가가 아닌 관료 개인이 가질 경우, 해당 토지의 농민들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할 때보다 더 큰 부담을 지게 되었다. 즉, 국가에 세금을 납부할 경우에는 농사의 작황에 따라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었으나 관료 개인에게 납부할 경우는 이러한 감면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아울러 국가에 세금을 낼 때에는 없었던 여러 명목의 부가적인 비용도 발생하였다. 또한 곡식을 관료가 지정하는 곳까지 운반해 주어야 하는 부담도 뒤따랐다.
이러한 농민들의 부담으로 인해 1470년(성종 1) 도입된 것이 관수관급제였다. 관수관급이란 말 그대로 국가에서 거두고 국가에서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즉 해당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세금을 국가에 내느냐 관원 개인에게 내느냐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국가가 세금을 거둔 이후 토지 수조권을 가진 관원들에게 해당 토지의 면적에 해당하는 만큼의 전조(田租)를 내어 준 것이다. 만일 흉년을 만난 해라면 국가가 세금을 감면하여 거두고, 그만큼만 각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조치로 분급받은 토지에 대한 관원들의 지배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반면 국가의 토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력은 더 강화되었으며, 16세기 중반 이후 토지 분급 제도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계기(과전법 폐지 녹봉제 시행)가 되었다.
7. 경국대전 완성
조선 시대의 법령은 기본적으로 국왕이 내린 명령을 성문화(成文化)한 것이다. 따라서 법전의 편찬은 새로운 법을 창제하는 일이 아니라 기왕에 내려진 국왕의 명령인 수교(受敎)·수판(受判)이나 이것을 법조문화한 조례(條例)들을 정리하고 취사선택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집록(輯錄)’하는 작업이었다. 한편, 조선 시대의 법전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전(典)’과 ‘록(錄)’의 두 단계로 구분되었다. ‘전’은 영구히 보존하고 준수해야 할 항구적이고 근본적인 법규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제육전(經濟六典)』·『경국대전(經國大典)』·『속대전(續大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록’은 일시적이며 지엽적으로 시행되는 규정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속등록(續謄錄)』·『대전속록(大典續錄)』·『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이 이에 해당한다.
1455년(세조 1) 세조(世祖)는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들에게 기존의 법조문들을 정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1458년(세조 4) 세조는 상정관들이 정리하여 보고한 법조문의 내용을 직접 검토한 다음, 이듬해에 최항(崔恒) 등에게 본격적인 법전 찬수(撰修)를 지시하였다. 이때 세조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부문부터 먼저 편찬하도록 했는데, 그 결과 1460년(세조 6)에 「호전(戶典)」, 1461년에 「형전(刑典)」 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호전」 편찬이 완성되었을 때 새 법전의 이름을 ‘경국대전’으로 확정하였다. 1467년(세조 13) 세조는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박원형(朴元亨) 등에게 『경국대전』의 나머지 4전(典)을 감수·교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 이들이 감수·교정한 내용을 승지들에게 검토하게 한 후 자신이 다시 직접 조항별로 심의하였고, 또 종친·대신들과의 논의 과정을 거쳐서 같은 해 12월에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 법전은 이듬해(1468년) 9월 세조의 서거로 인해 반포·시행하지 못하였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睿宗)은 1469년(예종 1)에 최항·김국광(金國光) 등에게 세조대 편찬된 『경국대전』을 개정·보완하도록 했으나, 예종이 같은 해 11월 서거하면서 이 역시 반행되지 못했다. 성종은 즉위 후 신숙주·한명회·정창손(鄭昌孫) 등에게 『경국대전』의 철저한 교정 및 보완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1470년(성종 1) 11월에 『경국대전』이 완성되었고 이듬해(1471년) 1월부터 이를 준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辛卯大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누락된 조문들이 많다는 지적이 나옴에 따라, 1471년~1473년에 『신묘대전』에서 누락된 조문 130여 건과 향후 시행할 조문들을 증보·개정하여 1474년 1월 새로운 『경국대전』을 반포했는데, 이것이 『갑오대전(甲午大典)』이다. 그리고 이때 『경국대전』에 실리지 않은 72개 조목을 정리한 『속록(續錄)』도 함께 반포되었다. 『갑오대전』이 편찬된 후에도 대전의 수정·보완 및 이후 새로 제정된 법조문의 추가 정리 작업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1485년(성종 16)에 이르러 최종 확정된 『경국대전』이 다시 반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전하는 『을사대전(乙巳大全)』이다. 이후 『경국대전』은 1511년(중종 6)에 한 차례 중간(重刊)되었는데 『신미대전(辛未大典)』, 법조문의 내용은 『을사대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한편, 1555년(명종 10)에는 『경국대전』의 법조문 중에서 이해하기 어렵거나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 주석(註釋)을 붙인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가 편찬되었다.
『경국대전』은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전 체재에 따라 6개의 전(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전의 첫머리에는 육조(六曹)에 소속되어 있는 속아문(屬衙門)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으며, 이어서 각 조에서 담당하는 업무의 내용들이 항목별로 기술되어 있다. 각 전의 주요 내용들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이전(吏典)」은 총 29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명부(內命婦)·외명부(外命婦)의 조직과 품계, 중앙과 지방의 관서(官署) 조직과 관직(官職)·관품(官品) 체계, 문신(文臣) 관료의 임용과 인사(人事) 행정에 관련된 규정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밖에 사망 문관에 대한 추증(追增)·시호(諡號), 휴가, 관원 간의 상피(相避), 항리(鄕吏) 등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호전(戶典)」은 총 30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의 재정 운영과 관련된 각종 제도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전근대 국가 경제의 근간인 호적(戶籍)과 토지 제도, 조세 제도에 관한 내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와 관련된 창고(倉庫)·조운(漕運)·회계(會計) 등에 관한 내용도 실려 있다. 또, 관리의 녹봉, 권농(勸農), 어염(魚鹽)·양잠 등의 기타 산업, 토지·가옥의 매매 등에 관한 내용도 「호전」에 수록되어 있다. 「예전(禮典)」은 총 6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 제도와 과거제(科擧制)에 관한 내용, 오복제(五服制)에 근거한 친족 제도, 국가와 왕실의 각종 의례(儀禮), 대명(代明) 및 대일(對日)·대여진(對女眞) 외교 의례 등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또 중앙과 지방 관서에서 사용하는 각종 공문서의 서식(書式)도 수록되어 있다. 「병전(兵典)」은 총 5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무반(武班) 관서들의 조직과 직무, 진관체제(鎭管體制)에 기초한 지방 군사 조직, 무과(武科)에 관한 각종 규정, 무반 관료에 대한 인사 행정, 군역(軍役) 제도, 번상(番床) 규정, 역마(役馬) 제도, 성보(城堡)·군기(軍器)·병선(兵船)·봉수(烽燧)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형전(刑典)」은 총 2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종 소송 및 재판의 절차, 여러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형률(刑律)은 『대명률(大明律)』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 노비(奴婢) 제도에 관한 각종 규정들도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노비 소송에 관한 내용이 부록으로 추가되었다. 「공전(工典)」은 총 14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로와 교량(橋梁)에 관한 규정, 궁궐·관청·도성(都城)·역참(驛站) 등 각종 건물의 관리와 보수에 관한 규정, 수레와 선박에 관한 내용, 각종 나무의 재배·관리에 관한 규정, 도량형(度量衡)에 관한 규정, 서울과 지방의 각종 공장(工匠)들에 관한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8. 사창제 폐지
사창은 의창(義倉), 상평창(常平倉)과 함께 곡식이 부족한 백성들에게 재생산 혹은 구호를 목적으로 곡물을 대여해 주는 구호 제도이다. 그러나 사창은 받아들일 때에 이식(이자)을 받는다는 점에서 다른 구호 제도와 차이를 보인다. 사창 제도는 중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주희(朱熹, 1130~1200)가 남송(南宋) 대에 지방 행정 단위인 사(社)에서 이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에 해당하는 면(面)을 단위로 창고를 세우고 해당 지역민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비슷한 기능을 담당했던 상평제(常平制)가 현(縣)을 단위로 실시되었던 것과 비교해 적용 범위가 비교적 적은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창은 관에서 운영하기도 했지만 민간이 운영 주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사창제는 물가의 조절에 힘썼던 상평제와 달리 진휼(賑恤)에 중점을 두고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초기부터 곡식이 부족한 봄이나 흉년이 심하게 든 해에 곡식을 빌려 주는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의창(義倉)이다. 의창은 관의 곡식을 무이자로 민간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잦은 흉년에 의창으로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국가가 아닌 지방을 중심으로 자치적인 성격을 지닌 사창을 설치하였다. 사창 제도는 1444년(세종 26) 처음 논의되었으며 1451년(문종 1) 시험적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설치되었고 점차 확대되었다. 이후 1461년(세조 7) 사창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창제를 통해 원곡과 거두는 이식이 점차 고리대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자 1470년(성종 1) 혁파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기근이 이어졌던 17세기 중엽 사창제의 부활이 다시 논의되었다. 1684년(숙종 10) 이단하(李端夏, 1625~1689)가 「사창절목(社倉節目)」을 제정하여 사창을 다시 제도적으로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창제는 공식적으로 부활되지 못했고 간헐적으로 지방에서 시행되다가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마침내 다시 부활되었다.
9. 재가 금지법
과부 재가 금지법은 1477년(성종 8) 7월부터 실시되었다. 고려시대까지는 계급을 막론하고 과부의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죄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양왕 때부터 산기(散騎) 이상인 자의 처로서 봉작 받은 과부의 재혼이 금지되었다. 또한, 6품 이상의 처는 남편이 죽은 뒤 3년 안에 재혼하는 것을 금하고, 수절하면 정려와 포상을 하여 과부의 수절을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국풍으로 숭상하고 이를 강력히 실천하려는 추세에 따라 여자의 삼종의 도가 강조되었다. 이로써 재가가 윤리적으로 비난되어 짐승과 다름없다고 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육전)에 이미 양반 부녀가 부모형제 · 백숙부모 · 조카 등을 제외한 친척을 방문하거나 절에 가는 것을 실행(失行)으로 규정짓기 시작하였다.
1404년(태종 4)부터는 재가나 삼가한 과부를 실행한 여자와 마찬가지로 녹안(錄案)하게 되었다. 1436년(세종 18)부터는 재가 · 삼가녀의 자손은 사헌부 사간헌 육조의 관원으로 등용하지 않는 금고법(禁錮法)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삼가가 문제시되었다. 드디어 1477년 7월 과부재가의 법적 규제에 관해 많은 논란을 거친 끝에 재가한 사족 부녀의 자손은 관리로서 등용하지 않는다는 금고법을 입법, 시행하게 되었다. 이는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조(京官職條)에 규정되었으며, 형전 금제조(禁制條)에는 녹안하는 규정을 두었다. 이 법은 재가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형사 처벌하는 직접적인 개가 금지는 아니었다. 즉, 금고법과 녹안에 의한 간접 금지였으나 직접 금지의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실제 당시까지만 해도 명문의 족보에는 재가나 삼가한 딸과 남편의 이름은 물론 그 자손도 등재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련의 입법 조치가 즉시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양반계급에서는 재가하지 않는 것이 확고한 법으로서, 또 윤리로서 지켜졌다. 법률상 재가의 자유가 선언된 것은 1894년(고종 31) 6월 28일의 이른바 갑오 개혁법에 의해서였다. 이것은 혁명적인 선언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재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과 윤리는 1950년대까지도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과부재가금지법은 서자차별법 · 관습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규정짓는 하나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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