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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북벌론 두문자 : 북 복명서 소거만대존 김시길완임별 나변신 호동학위

by noksan2023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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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북벌론
효종의 북벌론

 

북벌론 : 복 소 김 나 호

 

복 : 수설치

명 : 에 대한 의리

서 : 인  정권유지수단

소 : 중화

거 : 청론

만 : 동묘

대 : 보단

존 : 주휘편

김 : 상헌

시 : 송

길 : 송

임 : 경업

별 : 남인의 훈련대(1669)

나 : 선정벌(청나라의 러시아 전쟁 출병요청)

변 : 1차 변급

신 : 2차 신유

호 : 락논쟁

동 : 인물성론 vs 인물성이론

학 : 북론(청 문물 배우자)

위 : 정척사

 

1. 북벌론

북벌론(北伐論)은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를 정벌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중화 질서의 재건을 모색한 조선 후기의 정치 담론이다.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자 큰 충격에 빠졌지만, 명나라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명나라의 회복에 적극 동참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특히 효종은 국가적 차원에서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공세적 성격의 군비 확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벌론은 명나라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17세기 말 이후로는 주로 재야 인물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1637년(인조 15) 청나라가 조선을 정복하고 뒤이어 중원을 차지하게 되자, 두 세기 넘게 유지되었던 명나라 중심의 중화 질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경우 중화 질서의 정치적 안정성을 경험하였고 중화의 가치를 명에 버금가게 구비하였다고 자부해 온 전통도 오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시기에 명의 군사적인 도움을 받은 사실에 대한 보은의 감정까지 더하여져 명의 멸망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하늘과 땅이 뒤집힌’ 참담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은 당위적 질서와 현실이 괴리되는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치적, 사상적 모색을 추구하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청에게 군사적으로는 정복되었지만 직접 통치되지는 않았다는 틈을 이용해서 청 중심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정치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화이관에 입각한 명 중심의 중화 질서를 관념상으로는 포기하지 않는 이중적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자세는 청의 중원 장악이 단시일 내에 종료될 것이며 명이 다시 회복되어 중화 질서도 복구되리라는 기대가 전제된 것이었다. 남명 정권의 존재는 이러한 기대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머지않아 닥칠 당위적 질서의 복구에 조선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고, 명의 회복에 무력으로 동참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2. 복수설치, 명에 의리, 서인 정권유지

 

중화사상 소중화에 입각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만주족 오랑캐(청나라)에게 당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 임지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나라를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서인 세력은 폐모살제의 죄와 칭제 문제를 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켜 집권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미책을 통해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칭제건원하고 조선에 대해 명나라와의 국교 단절과 신속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국왕이 후금의 칸에게 항복의 예를 행하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 조야에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3. 소중화, 거청론, 만동묘, 대보단, 존주휘편

소중화라 함은 조선이 중화 문명(中華文明)에 비등한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거나 명(明)의 멸망 후 중화 문명을 계승했다는 인식 등을 표현한 용어를 말한다. 중화란 용어는 기본적으로 중화와 오랑캐[夷狄]를 구분하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중국의 고대부터 존재해 왔다. 중화는 보통 지역적 개념과 종족⋅혈통적 개념, 문화적 개념의 세 가지 관점에 따라 설명되어 왔다. 이 중 중화를 설명할 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문화적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소중화란 용어는 본래 조선에서 먼저 언급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한반도 국가의 문화 수준을 높게 평가하면서 중화 문명에 비슷하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따라서 소중화의 의미에는 기본적으로 중화와 비슷한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발전된 국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명 중심의 중화 질서를 인정하면서 국제 관계를 정리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등을 경험하고 명청 교체기를 지켜보면서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했다. 당시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명의 회복을 기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중화 질서를 따르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은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이 오랑캐였던 청(淸)을 대신해서 중화의 적통(嫡統)을 계승했다는 의식을 스스로 가지게 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유일한 중화 문명의 보유국임을 강조하는 것을 ‘조선 중화 의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송시열(宋時烈)은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재조지은과 1644년 이자성의 반란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황제의 절의를 기리고자 하는 뜻을 남겼다. 1703년(숙종 29)에 송시열의 문하생들은 스승의 유지(遺志)를 받들고자 스승이 말년에 체류한 충청도 청천면 화양동에 의종 황제를 모신 사우를 짓고 그 이름을 만동묘(萬東廟)라 했다. 첫 제사는 명이 망한 1644년 갑신년으로부터 60년이 지나 일주갑(一週甲)이 다시 돌아온 1704년 정월에 맞춰 거행되었다. 만동묘를 관할하는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은 조정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주변 백성들을 침탈하는 소굴이 되기도 했다. 만동묘는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865년(고종 2)에 화양동서원과 함께 철폐되었으나, 대원군이 하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74년(고종 21)에 복구되었다.

 

대보단은 1704년(숙종 30) 명(明)이 멸망한 지 1주갑(周甲, 60년)을 맞아,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명 신종(神宗, 만력제)을 제사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 외국에서 중국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기존의 여러 의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정방형 단(壇)의 형태로 결정되었다. 영조 연간에는 제사의 대상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숭정제)과 태조(太祖, 홍무제)를 추가하였다. 아울러 대보단을 증축하고 제사 관련 건물들을 추가로 건립하였다. 이후 제사의 횟수, 참여 인원도 늘어났다. 대보단 제사는 1894년까지 이어졌으며, 조선 국왕들은 직접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존주휘편은 20권 7책. 사본(寫本)으로 조선왕조는 개창기부터 명나라에 대하여 사대정책을 견지하여 왔는데, 인조연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함으로써 대외정책의 기본골격이 흔들리게 되었다. 명·청의 교체는 화이론적(華夷論的 : 중국의 문화나 민족을 높이고 타민족의 그것을 낮게 평가하던 논리) 관념에 젖어 있던 사림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상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효종연간에 북벌론적 사유로 전환되기도 하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서는 화이관념을 부식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수립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대책의 하나로 1800년(정조 24) 봄에 명나라 의종(毅宗)의 위령제를 지내고, 역대의 지사와 병자호란 때 척화순절한 사람들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을 추념하여 병조참의 이의준(李義駿) 등에게 이 책의 편찬을 명하였다.

 

4. 김상헌, 송시열, 송준길, 이완, 임경업

북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장차의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위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을 정비 개편하였으며,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지방군으로 전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속오군 역시 증강되고 훈련이 강화되었다. 군비 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 송준길, 김집, 이완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5. 남인의 훈련별대(1669)

남인은 북벌을 명분으로 한 도체찰부(都體察府)의 복설(復設)로 권력 장악을 적극화시켰다. 숙종 즉위초 남인인 尹鑴가 당시 중국에서 吳三桂의 난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城下의 盟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도체찰부의 복설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윤휴의 주장은 서인에 의하여 권력장악을 위한 의도라고 비난되었다. 실제 도체찰사는 영의정이 겸하도록 되어 있어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인 허적(許積)이 도체찰사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서인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듬해인 숙종 원년(1675) 정월에 도체찰부가 복설되어 영의정 허적이 도체찰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체찰사에는 이의 복치를 강력히 주장했던 윤휴 대신 서인 비주류의 종척인 수어사 김석주를 임명함으로써 정치권력을 분산시키려고 기도하였다. 이러한 권력 분산의 현상은 중앙군영에 대한 통제권에도 엿볼 수 있다. 즉 남인은 현종때의 2차 예송에서 승리한 후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그 영향아래 두었으나, 수도외곽 방위군영인 수어청과 총융청은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남인은 도체찰부의 설치를 계기로 도성 밖의 군사력인 수어청과 총융청까지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開城의 大興山城을 축조하여 북방비어의 出陣處로 삼는 동시에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군관을 동원하여 그 곳의 屯軍을 훈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서인의 중진들은 물론 서인 비주류인 김석주 등도 크게 반발하여 한때 도체찰부가 폐지된 일까지 있었다. 이는 한 마디로 서·남인간의 군권 경쟁이 치열했음을 말해 준다. 이 사이 부체찰사 김석주는 수어사에서 어영대장으로 옮기면서 남인이 대흥산성을 근거로 역모를 도모하였다고 고변하고 숙종 6년 庚申大黜陟을 주도하여 남인세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김석주는 이후 대흥산성의 管理使가 되어 사후 처리를 전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화도에 墩臺를 쌓아 방어시설을 강화하고≪璿源錄≫의 편찬을 주관하여 이를 강화도에 비치하였다. 이와 같이 김석주가 강화도의 邊備를 강화한 것은 남인의 대흥산성 축조와 때를 같이 했으며 여기에다≪선원록≫을 비치한 것은 남인세력에 대한 견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서·남인의 군권을 둘러싼 권력 장악의 소용돌이에 숙종이 직접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경신대출척 이후로 생각된다. 숙종은 13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 정치적 판단력을 갖추게 된 것은 이 이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후 숙종은 여러 차례 換局의 정치 정국을 이끌면서 왕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국의 추이에 따라 창설된 군영이 숙종 8년에 설치된 금위영인 것이다. 물론 금위영 설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이는 당시 서인주류와 손잡고 숙종의 후원을 얻은 병조판서 김석주였다. 그는 종래의 정초청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훈련도감의 長番兵을 감축한다는 명목 아래 遞番交代로 편성된 금위영을 탄생시켜 이른바 후기 중앙의 5군영체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금위영의 주력은 훈련별대였으나 그 임무와 지휘체제는 정초청의 것을 물려받아 병조판서가 대장을 겸하고 대궐 밖의 숙위를 주임무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6. 나선정벌(1차 변급 2차 신유)

나선정벌이라 함은  청나라와 조선의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에 만주의 영고탑(寧古塔)과 흑룡강(黑龍江)에서 벌였던 전투를 말한다. 나선(羅禪)은 러시아인을 한자어로 음역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해양 진출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던 16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해양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워지자 우랄 산맥을 넘어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50여 년 만에 유라시아 동쪽 오호츠크⋅캄차카 등지에 도착했는데, 이러한 경이적인 정복 속도는 당시에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할 토착 세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척박한 땅이었고, 러시아인들은 부족한 식량과 물자를 흑룡강 유역에서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 알바진을 점령하였고, 이듬해에 우수리 강 하구에 성을 쌓아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청나라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652년 청군은 러시아인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러시아인이 군사 활동을 재개하자 2차례에 걸쳐 조선에 조총 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1654년 3월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은 변급(邊岌)이 이끄는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기고수(旗鼓手) 50여 명을 파병하였다.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군은 청나라 군사와 합류하였으며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나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러시아군의 흑룡강 지역 활동은 계속되었고, 청나라는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1658년 3월 재차 조선 조총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효종은 이에 신류(申瀏) 장군이 이끄는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60여 명을 파견하였다. 조청 연합군은 6월 초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와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로 러시아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효종의 북벌 정책으로 강한 군사력을 지니게 된 조선은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데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군은 정작 누구와 싸워서 이겼는지 알지 못했고, 청나라 요청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전투였다는 점 때문에 강한 군사력으로 크게 승리한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선 정벌은 역사에서 크게 기억되지 못했다.

 

7. 호락논쟁(인물성동론 vs 인물성이론)

17세기 말에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에서는 심성론에 관한 관심을 다시 기울이면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인물성동론인물성이론의 논쟁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이 학파 내부에서 이러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호락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초 이이 학파 노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권상하의 문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계기가 되어 호락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원진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하고 이간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스승인 권상하가 인물성이론을 지지함으로써 충청도 지방의 노론은 인물성이론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노론인 김창흡 · 박필주 · 이재 등은 이간이 주장한 인물성동론에 동조하였다. 충청 지역의 인물성이론(이를 호론이라고 함)서울 · 경기 지역의 인물성동론(이를 낙론이라고 함)의 논쟁은 이후 100여 년 동안이나 전개되었는데 이를 호락 논쟁이라고 한다. 충청 지역의 호론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여 성인과 범인, 사람과 짐승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신분 제도와 지주 전호제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낙론은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성장하고 있던 일반민의 실체를 현실로 인정하고 노비 · 서얼의 문제에서도 개혁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후에 호론은 위정 척사 사상으로, 낙론은 북학 사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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