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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고조선의 역사 두문자 : 관 제 연 진 준 세 위 박 위 왕 준 한 108 우 멸

by noksan2023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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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명칭 구분
고조선의 역사

 

고조선 : 관 제 연 진 준 세 위 박 위 왕 준 한 108 우 멸

 

BC 2333  고조선 건국

BC 700 <자>에 중국 나라와 교역

BC 400 고조선이 연을 공격하려도 그만 둠

BC 300 나라 장수 개의 공격으로 서방 영토 2000리 상실, 부왕의 뒤를 이어 아들 왕이 왕위

BC 195 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고 준왕이 신임하여 사라는 관직 부여

BC 194 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으로 등극, 왕은 물길로 남쪽으로 내려가 진국에서 왕을 칭함

BC 193 철기문화 한반도 본격 보급 + 임둔 진번 복속 + 한과 진 사이의 중계무역

BC 108 한 무제가 고조선 침략하여 고조선 망(거왕)

BC 107 한4군 설치 + 이후 고조선의 법이 60여 조로 증가

AD 313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낙랑군 축출, 한4군 한반도에서 소멸

 

1. BC 2333  고조선 건국 

군장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정치적 사회는 요령 지방과 한반도의 북부에서 먼저 나타났는데,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문화가 앞선 곳이었다. 초기에는 읍락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회를 이끌어 간 지배자는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라 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아울러 지배하였다. 그리고 점차 복잡해져 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나라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은 종교와 정치를 함께 지배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과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2. BC 700 <자>에 중국 나라와 교역

『관자』에서, 경중갑 편(輕重甲篇)과 규도편(揆度篇)에서 춘추시대의 제(齊)와 조선 간의 교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관자』는 서기전 7세기 제의 재상인 관중(管仲)의 저술이라지만, 실제 주된 내용은 전국시대(서기전 402∼서기전 221)의 제나라인들의 저술로서, 이를 관중의 이름에 가탁한 것이다. 따라서 『관중』에서 언급한 제와 조선과의 교역에 관한 언급은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의 어떤 전승에 의거했을 수도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의거해 조선이 언제부터 제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를, 바꾸어 말하자면 조선이란 실체가 언제 역사상에 등장했는지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3. BC 400 고조선이 연을 공격하려도 그만 둠 : 대부 예가 만류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 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동쪽[기자조선]을 침략하여 땅을 빼앗으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언 하자 곧 그만두었다.

 

연나라가 제·조·위·중산국 등 다른 네 나라와 함께 왕(王)을 칭한 것은 BC 323년이었다. 왕을 칭했다는 것은 이미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연나라가 왕을 칭하자 조선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면서 연나라가 동쪽땅, 즉 조선땅을 노리자, 조선이 도리어 주(周) 왕실을 지킨다는 구실로 연나라 타도를 외쳤다는 뜻이다.

“(조선이 연을 공격하려 하자) 대부 예(禮)가 ‘절대불가하다’고 간하자 (왕은) 공격을 멈췄고, 대부 예를 연나라에 보내 이야기하니 연나라도 (조선에 대한 공격을) 그쳤다.”

조선왕이 연나라 타도를 외치자 대부(大夫) 예(禮)가 강력하게 만류했다는 얘기다. 조선왕은 공격의 뜻을 철회한 뒤 대부 예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연나라는 조선 후가 왕을 칭한 것에 격분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유세가들이 세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던 전국시대 중기. 조선의 유세가 예는 화려한 언변으로 연나라왕을 녹여 연의 조선침공을 막았을 것이다.

 

4. BC 300 나라 장수 개의 공격 : 서방 영토 2000리 상실,  왕이 왕위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조선후가 예를 시켜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이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 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곧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후에 (조선의)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 그 땅(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攻其西方), 땅 2000여 리를 취하였다.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얻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 조선왕 비(否)가 즉위했다.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 참석하지는(알현하지는) 않았다(不肯朝會).”

이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는 마침내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략, 2000리나 되는 땅을 차지했다. 연나라 강역도를 보면 연나라는 한반도 청천강(만번한을 청천강으로 본 것)까지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조선의 세력은 악화됐다. BC 221년 급기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조선은 크게 두려워해서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진시황을 직접 찾아가 알현하지는 않았다.

 

5. BC 195 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하고 준왕이 신임하여 사라는 관직 부여

위만은 기씨조선(箕氏朝鮮: 箕子朝鮮)의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서기전 206년에 중국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 노관(盧綰)을 연(燕)에 봉했으나 노관이 모반해 흉노(匈奴)로 달아나자 연은 일시 혼란스러웠다. 이틈에 AD 195년 위만은 연의 망명자 1,000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 한과 고조선의 중간 지역이었던 천산산맥 동쪽에서 청천강 일대에 이르는 공백지대로 망명해 왔다. 이후 준왕의 신임을 얻어 박사(博士)에 임명되고 100리 땅을 받아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

 

6. BC 194 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등극, 왕 남쪽 진국에서 왕을 칭함

위만은 점차 유망민(流亡民)들과 결탁하여 자기세력을 기른 다음, 한이 침공해 오자 수도 방어를 구실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준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 하였다. 위만의 입국 연대는 노관이 흉노로 망명한 해(서기전 195)와 비슷하나 그의 거병과 찬탈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에는 이를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 서기전 194∼서기전 180)라고 하였다. 대체로 이 사이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위만과 노관과의 관계에 대해『사기』와『한서(漢書)』의 조선전에 의하면 위만은 노관의 부장(副將)으로 나타나며, 국적은 연인(燕人)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위만이 동으로 올 때 조선옷을 입고 북상투를 틀었으며, 국호를 계속 조선이라 한 점을 들어 위만을 본래 패수(浿水) 이북 요동지방에 토착한 조선인 계통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연인이라는 기사 자체가 한초(漢初)의 조작으로 위만을 토착 고조선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위만 출자설(出自說)에 대한 논쟁은 위만조선 지배층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로 논점이 확대되어 현재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위만이 왕위를 찬탈했을 무렵은 중국 한나라의 국가적 체계가 확고하지 못했고, 계속적인 흉노의 침입 때문에 조선에 대한 정책은 소극적이었다. 이에 요동태수(遼東太守)는 위만에게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될 것, 요동 새외(塞外)의 만이(蠻夷)가 한나라의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할 것, 만이의 제군장(諸君長)이 천자(天子)를 입견(入見)하려고 할 때 막지 말 것 등을 맹약하게 하고, 그 대가로 위만은 한나라의 병력과 물자를 원조 받았다.

 

7. BC 193 철기문화 한반도 본격 보급 + 임둔 진번 복속 + 한과 진  중계무역

고조선의 지배자가 된 위만은 외국으로의 출정뿐만 아니라 나라 안을 다스리는 정비에도 힘을 써 왕위 세습권이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토착민의 회유에도 상당히 성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만 집권 초의 한나라도 건국 초기로 국가적인 체제가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전부터 계속하여 침입하던 흉노에 대비하기가 급급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은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변동은 인접한 요동군에 대하여 불안을 준 듯하여 요동 태수는 위만으로 하여금 한의 외신(外臣)이 될 것과 요동 새외(塞外)의 적이(狄夷)가 한의 변경을 침범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적이의 제 군장(君長)이 한의 천자를 입현하려고 할 때 막지 말 것 등을 맹약하게 하고, 한제(漢帝)의 재가를 얻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위만은 한으로부터 병력과 물자의 원조를 얻어 세력을 신장하였다. 특히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임둔 등을 아울러 복속하여 영토가 수천리에 달하는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고, 주위의 여러 씨족사회를 통합하여 갈등을 줄이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했다. 진무 등이 남월과 조선이 병력을 장비하여 중국을 엿보고 있으니 이들을 치자고 주청한 사실로 보아 위만은 주위의 여러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기회가 오면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여 패권을 잡아보려는 계획을 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진무 등의 주장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지만, 당시의 위만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위만의 강성은 그 자체의 실력도 있었지만 이때 북아시아에 강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던 흉노 제국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위만의 아들 이름은 확실치 않으나 그의 손자는 우거왕이었다고 그 이름이 전한다.

 

8. BC 108 한 무제가 고조선 침략하여 고조선 망(거왕)

『사기』 조선열전은 서기전 109년부터 1년여 이어진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을 자세히 전한다. 우거왕 대에 이르러 조선으로 한나라의 망명인들이 많이 유입되었고, 조선은 한나라에 입조하지 않으면서,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입조를 막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나라는 섭하(涉何)를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조선은 끝내 한나라의 조를 받지 않았다. 돌아가던 섭하는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을 죽였고, 그 공으로 요동 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공격하고 그를 죽였다. 이에 다시 한이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시켜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좌장군과 누선장군의 선공은 모두 실패하였고, 초기 전황은 한나라에게 크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한은 위산(衛山)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사적 권위를 근거로 우거를 설득하고자 하였다. 협박을 받은 우거는 항복 의사를 표현하였고, 사죄를 전하러 태자를 한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이 항복 진행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경계를 넘자, 한나라가 조선 태자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고, 태자는 이들이 자신을 속인다고 판단하여 귀환한 것이다. 타협은 실패하였고, 우거는 항전을 결정하였다. 이에 조선 내부에서는 대신들이 사적으로 누선장군에게 항복 의사를 표하는 등 내부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이 와중에 한나라의 누선장군과 좌장군 간에 알력 다툼이 있었고, 몇 달이 되어도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한나라는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에게 편의종사권을 주고 전장에 파견하였고, 누선장군은 체포되었다. 좌장군이 이끄는 한군이 공격을 다시 시작하자, 조선상 노인 등이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우거가 죽은 뒤에도 대신 성사(成巳)는 끝까지 한나라에 항거하며 왕험성을 지켰으나,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崔)를 시켜 성사를 죽였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멸망하였다.

 

9. BC 107 한4군 설치 + 이후 고조선의 법이 60여 조로 증가

한의 고조선 공략에 따라 나타난 결과는 한의 직접통제를 전제로 한 漢四郡의 설치였다. 종래 한사군 관련 연구는 대부분 위치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 그 성격과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심도있게 검토되지 못하였다. 이는 위만조선의 붕괴를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여타의 모든 정치체의 소멸로 이해하는 선입관과, 이를 대신하여 설치된 樂浪郡으로 대표되는 한군현의 실체가 보다 과장된 데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붕괴는 중국세력과의 갈등해소 방식에 대한 위만조선 지도부의 의견차이에 따른 정권재편이라는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비록 기존의 정치형태가 중국의 직접 지배형태인 군현체제로 재편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존 토착세력에 의해 유지되었고, 또한 토착세력의 반발에 의해 낙랑군을 제외한 나머지 3군은 곧 폐지되거나 중국 내로 이동함으로써 결국 축출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한편 고조선의 중심지문제와 관련된 논의의 연장으로서 이들 한군현의 위치문제에 관해서도 요동설과 한반도설 등 많은 의견이 제기되었다.

 

한은 위만조선을 멸한 후 그 영역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던 지역에 임둔군 진번군(臨屯郡·眞番郡)을 설치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이에 대해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는 한 무제가 元封 3년(기원전 108)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군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한서(漢書)≫ 무제본기(武帝本紀)에는 4군의 명칭이 낙랑·임둔·현도·진번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른바 한사군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나 있는 셈이다. 한편≪한서≫지리지에는 낙랑·현도의 2군만 나타나 있고,≪한서≫ 오행지(五行志)에서는 원봉 6년조에 “전에 두 장군(將軍)이 조선을 평정하여 3군(郡)을 두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당대 자료에 나타나 있는 군현 개설내용이 서로 상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은≪사기≫의 다른 기록에 한군현 관련 명칭이나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위만조선 공략과정과 투항한 위만조선 지배층의 전후 처리내용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이같은 기록상의 차이는 과연 한군현이 후속사료에 나타나는 것처럼 실제로 설치되었고 직접 통제방식에 의한 편제가 이루어졌는가에 의문을 갖게 한다. 다시 말하면≪한서≫등에 나타난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기보다는 후대에 중국적 천하지배(天下支配) 관념을 바탕으로 위만조선의 지역명칭을 그대로 한군현으로 연결시켜 재구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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